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을 사러
동네서점에 갔다가 헛걸음
일본추리소설이 국외소설 전체에 맞먹는다는 걸
알았네 문맹이 낄 자리가 없다는 걸
대신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손에 들었네 다시 나왔으니 다시
보낸 편지인가 시를 쓰던 젊은 시절에
손에 들었을 텐데 수신자는 내가 아니었지
친애하는 카푸스 씨
에게 릴케가 보낸 답장이지
그게 시작이지
그걸 내가 훔쳐 읽는 건가
문맹을 읽으려고 했었다고
핑계는 마련해 두었어
인생이 당신을 잊지는 않는다는 걸
잊지 말라고 릴케는 쓰네
인생이 당신을 손안에 떠받치고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쓰네
그런데
친애하는 카푸스 씨
에게 20년에 걸쳐 보낸 편지의
마지막 편지를 쓸 때도 나보다 젊다니!
릴케여 누구의 시인도 아닌 시인이여
내게는 젊지 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필요하다오
그런데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계산을 치르고 영수증도 이미 버렸지
하는 수 없이
나는 20년 젊은 척하기로 한다
세월의 문맹이 되기로 한다
편지의 수신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므로
누구의 시인도 아닌 시인의 수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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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내게 온 편지가 아님에도)수신자인척?하며
책을 읽을때마다 생각날것 같은 시~
지금은 D인척하며 D에게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ㅎㅎ

로쟈 2018-05-13 20:32   좋아요 0 | URL
본의 아니게 훔쳐보게 되네요.~

모맘 2018-05-16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맹,담담한 산문시를 읽은 느낌입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 많습니다^^

모맘 2018-05-16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릴케 도착~새책 표지가 넘 예뻐서 가진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빛의 눈이 쏙쏙~

로쟈 2018-05-20 14:07   좋아요 0 | URL
^^
 

영국에는 외로움 장관이 있다는군
외로움이 국가적 문제라서
외로움이 장관의 담담업무
장관도 남다른 경력자일까
외로움에 관해서라면 전문가이고
적임자일까 외로움이라면 맡겨도 좋을
맡겨봐도 좋을
적임자라면 저 굳건한 나무들은 어떤가
영국 왕실의 근위대처럼
한치의 요동도 없이 엄살도 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심지어
교대도 하지 읺고 묵묵히
외로움을 견디지
나는 저 나무들이 한눈파는 걸
보지 못했고 잡담하는 걸
보지 못했고 한탄하는 걸
보지 못했어 술 마시는 걸
보지 못했어 담배도
안 핀다고 들었어
(폭풍에 뿌리째 뽑힌 적은 있어)
아 청문회를 통과하기 어렵겠군
과묵해서 게다가
장관의 임무는 견디는 게 아니지
줄이는 거지 경감하고 해소하는 거지
장관은 외로운 사람들을 만나야 할 테지
손을 잡아주기도 하나
사진도 찍어야 할 테고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 외로움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
아 결정적으로 영국인!
영국 장관이니 말이야
내가 왜 영국 장관의 경력을
자격을 문제삼는 거야
그건 영국인들이 알아서 하는 거라구
근데 너 지금 혼자서
대화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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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1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있는지 검색.
외로움이란 녀석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저 장관의 외로움이 걱정되는~
외로움, 만만하지 않은 강적이기에.

로쟈 2018-05-13 17:32   좋아요 0 | URL
인증샷까지 올렸는데.~
 

무된장국에 밥을 말아먹으며
배춧국 생각이 절실하다 무된장국은
정직하여 오직 무
만 들어 있다 정직은
힘에서 나오는 것
계속 숟가락질해도 무는
줄지 않는다 배추였다면!
(이 세상밖이라면 어디라도?)
그래도 먹을 수밖에 없네 이미
밥을 말아서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더 자주 먹던 배춧국 배추된장국
배추를 사랑하고 싶어지네
무밭에서의 풋풋한 사랑도 있었건만
이젠 무된장국을 타박하네
무도 시절이 있는 법
그런 생각으로 숟가락을 뜨네
이제 겨우 다 먹었네
그래도 한솥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수로 입가심하며 인생은
살 만하다고 느끼네
어디로든 나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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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으면 안 보이는 나라
우주에 암흑물질이 있는 것처럼
눈 감으면 보인다 안 보이는 나라
안 보이는 나라에 비가 내리는 소리
저건 보이지 않는 비
보이지 않는 나뭇잎을 건드리는 소리
소리는 보이는 나라와 안 보이는
나라를 바삐 오가고
나는 빗방울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라고
안 보이는 나라는 떠벌린다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이민국은 말한다
빛을 아낄 뿐이라고
태양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안 보이는 나라에 누가 사는가
모두가!
하지만 그건 안 보이는 나라의 일부
안 보이는 나라의 모델하우스
안 보이는 나라는 모두의 베드타운일 뿐
물밑거래는 알지 못한다
매년 일부가 안 보이는 나라로 이민을 떠난다
일부는 추방당한다
앉은 자리에서 누운 자리에서
이민국의 면접을 치른다
안 보이는 나라의 관리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 보이는 나라는
보이지 않게 모든 일을 처리한다
보이지 않는 서류가 차곡차곡 쌓인다
안 보이는 나라는 시력만 세금으로 챙긴다
안 보이는 나라는 정연하다
안 보이는 나라는 평등하다
안 보이는 나라는 대체로 무난하다
눈 뜨면 아직은 보이는 나라
아침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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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바다 2018-05-1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보이는 나라...
언제쯤 볼 수는 있을까요?

로쟈 2018-05-13 11:34   좋아요 0 | URL
눈만 감으면 맛보기로는 볼 수 있죠.^^

로제트50 2018-05-1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좋네요~~^^

로쟈 2018-05-13 14:35   좋아요 0 | URL
네.~

모맘 2018-05-1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곡의 연옥에서 천국을 건너가는 강앞인데 자꾸만 굵은 빗소리가
끌어당겼습니다 좀더 있어야되나?
그래도 지옥은 아니지 않는가!

로쟈 2018-05-13 17:33   좋아요 0 | URL
제 경험으로는 천국도 아니던데요. 단테의 천국.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누구를
은행나무 도열한 가로수길을 걸어서
안과에 왔다 지난 주말은 휴일이었지
어제보다 더 충혈된 눈으로 일어나니
한 대 맞은 사람 같다더군
나는 맞고 다니는 사람
시를 쓴다면서 맞고 다니나봐
누구한테
부은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도 부어 보이지 너도
그래서 조용하구나
눈이 부은 사람들과 부을 사람들이
모여 앉았지 만난 일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친구를 떠올린다
오늘은 멜빌과 마르크스의 전기가 온다
나는 죽은 친구들과 친하지
그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생각을 얘기하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나는 그들의 생몰연대를 알지
가족사항을 알고 연애와 결혼도 알지
고뇌도 알고 의의와 유산도 알지
그만큼 아는 친구가 있던가
몇년 전 강남역에서 삼겹살을 같이
구워 먹은 친구는 대리운전을 한다지
사업을 벌인 줄 알았는데 우리는
아는 게 없어 멜빌과 마르크스만큼도
누구를 소개할까
최근에 사귄 친구는 헨리 소로지
마흔다섯에 세상을 떠나
나보다 어린 친구 그래도
배울 게 많은 친구 숲속의 생활과
불복종 전문가라네
게다가 혁명적 사상가라네
두 권의 전기를 어제 주문했다
소로의 인생 전체가 곧 배송될 테지
나는 더 깊이 사귈 수 있을 테지
나는 죽은 친구들과 주로 사귀지
너도 떠난 지 오래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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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1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 자는 편리하다
죽은 자와 사귀는게 산 자와 사귀는 것보다 편리하다
좀 비겁한? 친분쌓기를 저도 하고 있는 중이네요.

로쟈 2018-05-12 11:45   좋아요 0 | URL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은되죠.

2018-05-12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2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2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2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