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에 도착해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타고 한숨 돌린다. 지난겨울에는 시간표를 잘못 알아 리무진을 놓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확실히 여행 성수기는 아닌 듯해서 리무진 탑승객은 나를 포함해 두 명이다. 차가 좀 막히더라도 예정시각까지는 공항에 도착하겠다.

문득 독일도 가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덩달아 알렉산더 클루게의 영화 <독일의 가을>(1978)이 떠올랐다. 순전히 제목 탓이다. 1970년대 서독의 음울한 사회상을 담은 다큐 스타일의 영화. 기억에는 지난 2004년에 모스크바에서 보았다. 사전 정보도 없이 ‘독일의 가을‘이란 제목에 끌려 선택했다가 두 시간 동안 심문을 받는 듯했다. 붉은여단의 테러리스트들을 다룬 이 영화에서 기억나는 건 동료감독이기도 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무슨 말을 한 건지 기억에 없지만(이 독일 영화를 러시아어 더빙으로 봤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파스빈더는 이 영화에 나오는 파스빈더다.

1960년대가 프랑스 누벨바그의 연대였다면 1970년대는 뉴저먼시네마의 연대였다. 클루게와 파스빈더가 그 대표자들. 영화사에 좀더 관심이 있었다면 이들의 영화와 책을 더 많이 보았을 터인데 내가 본 건 파스빈더의 몇몇 영화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한나래) 같은 책이다. 클루게의 단편선 <이력서들>(을유문화사)과 러시아에서 나온 영화론집 <알렉산더 클루게> 등도 갖고 있지만 언제 읽을지는 기약이 없다. 1970년대 독일의 문학과 사회에 꽂히지 않는다면 손에 들기 어려울 수도 있다.

같은 독일의 가을이지만 1978년의 가을은 40년 전의 가을이다. 아, 1978년이면 한국도 아직 유신시대였다! 음울하기로 치자면 우리도 못지 않았겠다. 그 이듬해 가을과 겨울, 권력자의 암살과 군부의 반란으로 남한 사회는 격랑에 빠져들 터이다. 다시 되돌리기 꺼려지는 역사다. <독일의 가을>도 그냥 묻어두어야겠다.

아침부터 이런 페이퍼를 적는 걸 보니 여행이 시작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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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마지막날에 대부분 느끼는 침울함과 함께 동네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가방에는 내일 강의할 책들을 넣어 왔다. 즐거운 연휴가 끝나서 침울한 게 아니라 늘 그렇듯이 해야 할 일들을 끝마치지 못해서 침울한데, 매번 연휴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니 이 또한 습관이다. 휴일이 아닌데 휴일로 시간을 보낸 데 대한 습관적 괴로움이라니.

연휴에 무얼 했던가. 박상영의 소설집을 읽고(나는 그가 3인칭 소설을 쓸 수 있을지 궁금하다. 혹은 홍상수 영화가 그렇듯이 술먹고 섹스하는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쓸 수 있을지도), 하라리의 책을 절반 정도 읽고(하라리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안도감이다. 이걸 전세계적으로 수백만의 독자가 읽는다는 안도감. 그럼에도 역부족인 것인지 궁금하다. 하라리는 책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늠해보는 척도다. 혹은 대중독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그의 예측대로 ‘대중‘의 시대도 이제 서서히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잠시 들춰본 여러 권의 책.

연휴에는 책주문을 자제하는 편이지만 이번 연휴에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외서는 일단 (개인적인) 주문제한이 적용되지 않는 데다가 내달 독일여행을 앞두고 이래저래 챙겨볼 책들이 생겨서다. 여행서가 대표적인데, 론리 플래닛 베스트 시리즈 몇권을 주문한데 이어서 이다혜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나 오지은의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등의 책이 장바구니에 들어가 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는 물론 보들레르의 인용일 텐데, 오늘처럼 흐린 날 침울한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더욱 절감하게 된다. 언젠가 적은 대로 시는 인식이 아니라 기분의 권력에 봉사한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그 권력의 순종하는 신민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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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강의준비를 하다가(내일 아침 마감인 원고도 써야 한다) 막간에 책장 한칸을 사진으로 찍었다. 식탁이 도서관 책상으로 변신하면서 평소보다 더 자주 이용하게 될 듯싶다.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강의나 원고와 관련된 책들을 그때그때 꽂아두려고 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 조금 정돈은 했지만(옷을 추스리는 것처럼) 아직 정리가 끝난 건 아니고 이 칸에서도 절반의 책은 다른 자리로 이동해야 한다. <책에 빠져 죽지 않기>(교유서가)는 서명으로 넣은 것이고 <똑똑함의 숭배>(갈라파고스)와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은 최근에 서평을 쓴 책들이다. 언제 예고한 대로 <이데올로기 청부업자들>(레디앙)에 대해서도(원서를 어렵사리 구했다. 주문하고 배송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돼 ‘어렵사리‘ 구한 것처럼 느껴진다) 읽는 대로 서평을 쓰게 될 것이다(늦어도 다음달까지는?).

가운데 꽂은 책은 독일의 젊은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신간 <나는 뇌가 아니다>(열린책들)이다. ‘21세기를 위한 정신철학‘을 표방한 책. 가브리엘은 1980년생으로 유발 하라리보다 네 살 어리며 나와는 띠동갑이다. 인문학 책을 읽으며 나보다 어린 저자의 책을 읽을 일은 드물었는데 앞으로는 점점 빈번해질지 모르겠다(즐거운 일일까, 씁쓸한 일일까).

가브리엘의 다른 책들도 다 갖고 있는데 눈에 띄는 대로 옮겨올 예정이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열린책들)와 지젝과의 공저 <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인간사랑) 등이다. 독일문학기행을 앞두고 읽어야 할 독일문학과 철학, 문화예술, 여행 관련서들이 잔뜩인데, 당장은 가브리엘을 읽기로. 그리고 아마도 제바스티안 하프너와 히틀러 관련서들을 읽으려고 한다. 그 책들이 결국 이 칸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정돈하게 되면 다시 한 컷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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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9-11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 고딩아이를 위해 구매목록에
올렸으나 얘가 세계사 안한다고 해서
오리무중-.-
*책에 빠져 죽지않기 - 읽는 중.
한번 빠져죽자,고 먼저 1부 서론 보고
관심분야부터 읽는데 친절한 설명에
게다가 내용이 짧다^^

로쟈 2018-09-03 17:43   좋아요 1 | URL
서평은 짧아야 한다는게 소신이어서.~
 

여러 차례 책이사를 해야 한다고 적었는데 어제(금요일) 책장 15개를 새로 들여와서 대략 2천권을 꽂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식탁과 그 주변에 쌓여 있던 책들을 깔끔히 정리한 게 성과다(사진은 식탁이 있는 쪽 벽면으로 역시나 온전하게 정리하지는 못하고 꽂아두기만 한 상태다).

한편으로 오늘도 200권 남짓한 책을 서고로 날랐는데 이런 일은 앞으로 주말과 휴일에 자주 반복하게 될 듯싶다. 한꺼번에 옮기는 것보다 비용과 수고를 더는 대신에 기간은 오래 걸린다. 그렇게 옮겨놓고 또 필요한 책을 다시 들고오는 일의 반복. 오늘 다시 들고온 책 가운데 하나는 지젝이 엮은 <코기토와 무의식>(인간사랑)이다. 지난여름에 나온 ‘무의식의 저널‘ 시리즈의 <나의 타자>(인간사랑)와 같이 읽어보려는 생각에. <코기토와 무의식>은 원서도 어딘가에 꽂혀 있을 텐데 찾아봐야겠다.

<나의 타자>의 부제는 ‘정체성의 환상과 역설‘이다. 서재와 서가는 서평가의 환상이 공연되는 무대이자 무의식의 공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서평가의 환상과 역설은 무엇인가. 가장 열렬하게 책을 사랑하는 축에 속하지만 매일같이 책에 짓눌리며 빠져 죽지 않을까 두려워 하는 처지라니! 모든 사랑이 봉착하게 되는 얄궂은 운명을 책에 대한 사랑도 여지없이 반복하는 것인가.

사랑의 역설이란 무엇인가. 당신 때문에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책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믿지만 너무 많은 책 때문에 미칠 지경인 사람을 서평가라고 불러도 좋겠다. 다시 태어나도 서평가의 길을 걷겠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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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9-0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분이 그러셨어요.
살면서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대상이 있냐고요.
저에겐 책이 그런 존재랍니다.
(독서활동에 다른 인간의 개입이
필요없어서 다행이라고 봄^^;)

서점나들이를 좋아하죠.
기획적으로 진열된 곳보다 뒷편이나
책장에서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죠.
로쟈님 포스팅이 그런게 있어요.
요즈음 올라온 책더미를 열심히
봐요. 제가 아는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그래서 월 1회, 책장 하나 고르셔서
사진 좀 선명하게 올리시면
재밌을 거 같아요*^^*


로쟈 2018-09-02 12:54   좋아요 0 | URL
사진은 일부러 흐릿하게.~ 정돈이 되면 그렇게 해볼수도 있을텐데 수년이 걸릴 것 같아요.^^;

로제트50 2018-09-02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돈안된 채로요...
제가 원하는 건...
여러 권 책을 곳곳에 둔
우리생활처럼~

로쟈 2018-09-02 23:56   좋아요 1 | URL
네 가끔 올려볼게요.~

홍범희 2018-09-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욕에 살다보니 한국책 (?) 보기가 정말 어렵네요.새책은 정가2배내고 주문해야되고 그나마 서점도 문을닫아 이제는 한군데만 남아있고..연초에 한국갔을때 50여권 챙겨왔는데 눈총깨나받았네요..부럽습니다...깨꿋하게 사진좀 볼수있나요? 카톡ID beom57
beom57@hotmail.com

로쟈 2018-09-09 11:04   좋아요 0 | URL
책장은 전체의 극히 일부이고,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 공개는 못 하고요. 가끔 한칸씩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반면교사 거리로.^^;
 

지난주와는 다르게 주말에 강의 일정이 없어서 모처럼 금요일밤다운 금요일밤이다(귀가길에 가볍게 맥주도 한잔 했다). 주중에 내내 진행된 방공사도 오늘 일단락되었다(나로선 특별히 거든 게 없지만). 다음주에는 새로 책장을 잔뜩 들여놓을 예정이고 아마도 가을은 책정리와 함께 맞을 듯싶다.

정리라고 썼지만 실상은 그냥 꽂아두기다. 책정리를 포기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어차피 견적을 가늠할 수 없는 주관적 책정리에 공을 들이느니 그냥 꽂아져 있는 객관적 현실에 적응하자는 주의다. 방공사의 여파로 서가에도 변동이 생겼는데 마치 보직이 바뀌어 새로운 동료들과 같이 일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배열은 뒤죽박죽이지만 이 또한 자유정신의 구현이라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예컨대 정면 책장에는 모옌의 영어 연구서 옆에 페소아의 <불안의 책> 영어판이 꽂혀 있고,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그리고 <김일엽 선집>이 나란히 이웃하고 있다. 제각각이지만 그래도 모두 문학에 속하는 건가. 하지만 그 옆으로는 <식민지 트라우마>와 <영국집사의 일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배열에 논리를 따지는 건 의미없는 일이다. 필요한 건 적응해서 익숙해지는 것이다. 새로운 배치로 바뀌기 전까지는.

거실을 채우고 있던 가구와 살림들이 얼마간 정돈이 되어 일주일만에 난민 신세에서는 벗어난 듯하다. 모처럼 기분을 낼 만한 책을 골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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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8-2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아니고 꽂아두기라도 끝내시느라 수고하셨네요.
근데 사진으로 보니 저렇게 꽂아놓고 과연 책을
찾을수 있을까???
배열에 익숙해져 적응하는것도 보통일은 아닐듯 하네요.
산너머 산~

로쟈 2018-08-25 11:13   좋아요 0 | URL
바닥에 쌓여 있는 거에 비하면 꽂혀 있는 책을 찾는 건 일도 아니죠.^^

dmsdud5789 2018-09-1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