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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국문학 신간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그동안 별로 읽을 시간도 없었지만 눈에 띄는 작품들도 드물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 나온 책들은 젊은 작가들(이젠 30대까지는 모두 '젊은 작가'로 통칭된다)의 두번째 소설집이다. 동시대 젊은 작가들이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볼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일보(08. 04. 25) 두 번째 소설집 낸 김중혁·손홍규

2000년대 초 등단해 개성적인 작품 세계로 호평받고 있는 소설가 김중혁(37), 손홍규(33)씨가 나란히 두 번째 소설집을 냈다.

■ '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씨의 <악기들의 도서관>(문학동네 발행)엔 올해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엇박자D'를 비롯한 8편의 단편이 실렸다. "습관적ㆍ기계적으로 존재하는 작은 사물들에 훈김을 불어넣어"(소설가 이기호) 관습을 유쾌하게 깨뜨리는 작품들로 주목 받은 첫 소설집 <펭귄뉴스>(2006) 이후 꼭 2년 만이다.

전부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이번 수록작엔 피아니스트('자동피아노'), 기타리스트('나와 B'), 디제이('비닐광 시대'), 악기 가게 점원('악기들의 도서관') 등 음악과 관계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김씨는 "시기상 가장 앞선 수록작 '자동피아노'를 발표하고 나서 음악 자체와 음악을 소설적으로 다루는 방식에 대한 호기심이 동했다"고 말했다.

'비닐광 시대'의 디제이는 어마한 음반을 수집한 한 남자의 레코드 창고에 감금된다. "음악을 알면 뭐 해? 음악을 느끼지는 않고, 그걸 잘라서 써먹을 생각만 하는데…"라고 악담을 퍼붓는 남자의 정체는 불법 음반을 제작ㆍ유통시키는 범법자다.

'악기들의 도서관'의 '나'는 자신이 맡아보는 악기점을 온갖 악기 소리의 샘플을 제공하는 도서관으로 만들고, '엇박자D'로 불리는 박자 감각 없는 친구는 음치들의 목소리를 조합해 감동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스스로를 '레고 블록'이요, '문장과 생각과 철학을 리믹스하는 디제이'로 칭하는 김씨의 문학관에 비춰볼 때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김씨는 자기 작품을 '메타 소설'로 읽는 시각에 대해 "흥미로운 독법이지만 그런 걸 의도하고 쓴 건 전혀 아니다"라고 손사래 친다.

'매뉴얼 제너레이션'의 주인공은 매뉴얼(기기 사용설명서) 작가이자 양질의 매뉴얼을 모은 잡지를 만드는 편집장. 잡동사니에 기발한 상상력을 보태 잘빠진 소설을 빚어내는 김씨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 작품이다. 세상의 모든 매뉴얼은 "머리 속에다 거대한 밑그림을 그려주"는가 여부에 따라 좋은 매뉴얼과 나쁜 매뉴얼로 나뉘며, 매뉴얼의 문장들은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하는" 것이라는 게 '나'의 신념이다.

김씨는 "머릿속에 새로운 공간과 동선을 완벽하게 그린 후에 비로소 쓰기 시작한다"며 "이 삼차원 공간을 이차원 텍스트로 정확히 묘사하는 걸 중시한다는 점에서 내 소설 쓰기는 좋은 매뉴얼 쓰기인 셈"이라 말했다. 정교하게 배치된 가상 공간, 간결하고 투명한 문장의 묘미가 여전한 김씨의 이번 작품집엔 첫 책에 없던 사람 냄새가 풍긴다. '사람-사물'의 관계를 천착하던 작가의 관심이 '사람-사람'의 관계에도 옮아간 까닭이다.

'엇박자D' '유리방패' '무방향 버스' '나와 B' 등의 작품엔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온기어린 시선이 묻어난다. 일러스트 솜씨로도 정평을 얻고 있는 김씨가 직접 꾸민 '작가의 말' 코너가 독특하다.

■ '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씨는 첫 소설집 <사람의 신화>(2005) 출간 이후 발표한 단편 10편을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발행)에 묶었다. 그가 장편 <귀신의 시대>를 발표한 시점(2006년)을 기준으로 이 소설집은 뚜렷한 결절을 맺는다.

2005-2006년 작품엔 반인반수적 존재들이 포진한다. '뱀이 눈을 뜬다'의 주인공은 다리에 뱀-뱀 머리가 그의 성기다-을 품고 살고, 표제작 속 소싸움꾼 '응삼'은 평생 소와 더불다가 얼굴마저 소를 닮게 된 인물이다. 비인간ㆍ비현실의 설정을 통해 손씨는 근대사회의 억압성을 들추거나, 거기에 균열을 낸다. '뱀-인간'의 다리에 뱀이 들어앉은 것은 아버지에 이어 도시 노동자가 된 그가 첫 해고를 당한 날 새끼발가락을 철문에 찧게 됐을 때다.

한 도시에 회자하는 '걸레 신화'는 동네 남학생들에게 윤간 당하고도 '요부' '걸레'라는 낙인을 얻은 '아영'이 일으킨 엉터리 기사이적의 결과다('상식적인 시절'). 이로써 가부장제ㆍ종교의 두 다리로 버티고 선 근대사회는 저를 농락한 여성을 전설처럼 기리는 맹한 체제임이 폭로된다.

2007년 이후 쓰여진 수록작 6편엔 이런 환상적 요소가 걷혔다. 물론 분신을 모티프 삼은 작품('도플갱어')이 있지만, 그조차도 인물과 배경에서 현실적 질감이 느껴진다. 손씨는 "우회하지 말고 좀더 직접적으로 현실과 대면하자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고 말했다.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공유하는 세 편의 연작은 복수를 테마로 한, 개인적 정체성에 관한 소사(小史)로 읽힌다. 80년 광주에서 죽은 아들에 대한 복수를 평생 도모하는 '박', 이혼한 부인에게 총을 쏘다 총기사고로 되레 제 팔만 잃은 박의 또다른 아들 '정수', 불알친구들과 '강간'을 계획하다가 흐지부지하는 '승준'-정수의 아들 여자친구의 동생-을 각각 중심인물 삼은 세 단편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하찮고 사소해지는 생의 감각을 묘파한다.

습작 시절의 열정과 고뇌를 엿보게 하는 자전적 소설 '매혹적인 결말'의 결구, "그래, 악마는 되지 말아야지. 매혹적인 결말을 찾다보면, 모든 결말은 매혹적이라는 걸 잊을 수도 있으니까."(70쪽)란 문장도 한결 담백해진 작풍 변화와 맞닿아있다. 하지만 독자를 힘껏 끌어당기는, 자유자재의 유머까지 가미된 서사의 힘만큼은 여전히 우뚝하다. 손씨가 취재에 들이는 공도 오롯이 느껴진다.

남북한 문체를 번갈아 구사하는 '도플갱어'를 쓸 땐 서울 광화문 북한자료센터에서 북한 주요 문예잡지 2년치를 한 글자도 안 빼고 읽었다고 한다. 그렇게 구성한 쫀쫀한 디테일 덕에 그의 소설은 환상조차 근육질이다.(이훈성기자)

08.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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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서 '대담비평'이란 특이한 형식의 리뷰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6). 대상이 된 책은 김윤식 교수의 <백철 연구>(소명출판, 2008)이고 대담자는 방민호, 임영봉 두 국문학 교수이다(책에 대한 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904342 참조). '문학제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터라 ''백철’이라는 문학제도의 이중성'이란 타이틀이 눈길을 끌었다.

 

교수신문(08. 03. 31) '백철’이라는 문학제도의 이중성과 ‘10년의 글쓰기’

임영봉 교수(이하 임): 머리말에서 김윤식 선생님은 이 책을 내는데 10년이 걸렸다는 언급을 하고 있어요. 백철의 경우, 그동안 연구대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점과 부분적인 논의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백철의 전생애를 대상으로 삼아 ‘전체상’을 복원한 이 책의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방민호 교수(이하 방): 전체가 684쪽에 이르는 상당히 두꺼운 책입니다. 1936년생이시니까 고희를 훌쩍 넘긴 연세에 이런 대작을 출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경이입니다. 거기에는 그분 특유의 매일 글쓰기, 매일 원고지를 매워나가는 근면함과 성실성, 자료를 찾아나가는 집요한 의지 같은 게 작용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임: 제 생각으로는 백철이란 존재는 김 선생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일전에 제가 <교수신문>에 김윤식 선생님의 연구방법론에 관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그때 저는 선배들의 학문적 업적을 비판적으로 계승해야 할 후학의 입장에서 김윤식 선생님의 문학사 연구에서 문제시되는 부분을 거론하면서 백철에 대한 논의방식을 사례로 제시했습니다. 그때 제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의 핵심은 김 선생님의 백철에 대한 시각, ‘뿌리없는 지식인’이라는 판단이었죠. 물론 그런 판단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문제는 그 주장이 근거 있는 설명과 이해의 결과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그런 판단은 선생님의 의도와 무관하게 백철에 관한 선입견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김윤식 선생님도 아마도 그런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고 부채라고 해야 하나, 미진함 같은 것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부채의식이 이 책을 내는데 10년이라는 시간을 요구하지 않았을까요.



방: 김윤식 선생님은 크게 두 가지로 백철을 조명하신 것 같아요. 하나는 문학평론가로서 백철, 또 하나는 문학이론가로서 백철, 이렇게 두 가지로 딱 갈라져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해방전에는 문학평론가로서의 백철, 해방 이후에는 문학연구가, 이론가로서의 백철, 이렇게 언급하신 것 같아요. 비평가와 교수, 이렇게 나눠서 말씀하시는 거죠. 물론 일관돼 있죠. 백철의 비평정신이 뭐냐 이렇게 물었을때, 그의 정신이란, 끊임없는 개방성, ‘웰컴주의’다. 뭐가 들어와도 다 받아들이는 대수용으로서의 비평정신이라고 규정하신 것 같아요.

평론가였을때 마르크시즘도 받아들이지만, 대일협력기에는 대동아공영 수용하고, 해방후에는 뉴크리티시즘 수용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보시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내가 백철을 연구해야 할까, 자문하셨게죠. 연구를 해야만 한다면, 연구의 당위성 같은 것이 있어야겠죠. 두 가지 아니었을까요. 제 생각입니다만, 그 하나가 아비찾기. 아버지 찾기란 뭐냐? 김윤식 선생님에겐 어떤, 나름대로의 계보학이 있는 것 같아요. 김윤식 교수에게 이르는 계보학 말입니다.

제가 볼 때, 김윤식 앞에 이어령이 있습니다. 이어령 앞에 백철, 백철 앞엔? 앞이라고할건 없지만, 임화가 있죠. 그런데 그 나름대로의 계보학적 구성을 위해서 백철을 연구한 거죠. 백철이 없으면 안되겠다, 임화 연구는 일찍 했잖습니까. 상당한 성과도 거두었구요. 그럼에도 왜 백철이 필요했을까요. 이어령을 거쳐 자신에게 이르는, 서구 보편주의, 개방주의, 서구의 모든 것을 수용해내는 성향을 설명하기가 불충분했기에 말이죠. 백철이라는 매개항을 설정하지 않으면, 서구 개방주의, 서구 것을 수요하는,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어떤 성향을 설명하기 어려웠던 것 아닐까요? 서구를 향해 모든 것을 열어제치는, 당신의 체질, 이어령과 김윤식으로 이어져온 비평의 어떤 성향을 설명해내기 위해서는, 그 앞에 백철을 둬야만,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었지 않을까. 자기 비평정신의 아비찾기라는 의도가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아비 찾기에 나선 자신이 한국근대문학연구라는 하나의 문학장을 개척하고 만들어 온 분인데, 도대체 지금 한국현대문학 연구, 한국사회에서 한국문학연구라는게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냐라고 했을때, 백철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철이야말로 국어학, 고전문학, 현대문학으로 구성돼 있는 삼분법적인 ‘국어국문학’의 마지막 한 축을 세운 사람 아니겠는가, 그 백철을 이어서 당신 자신이 현대문학연구라는 분과를 스스로 성숙시키는 사람이란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는 아비찾기라면, 또 하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 스스로를 중심에 위치시키는, 한국현대문학연구의 중심적 전통으로 만드는 어떤 작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임: 제 생각도 방 교수와 같습니다. 김윤식 교수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백철에 대한 시각과 논의 방식은 이전과는 크게 다른 것인데 일단, 백철이라는 존재의 전모를 염두에 두고 긍정적 측면의 ‘의의’를 읽어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백철이라는 대상을 온전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김 선생님의 고심어린 태도로 느껴졌습니다. 그게 지금 방 교수가 설명한 이 책의 내용 그 자체인거죠. 이 책에서 비로소 백철이라는 존재는 그가 있어야 할 자리, 그러니까 우리 비평사의 중요한 전통 중 하나로 검토되면서 고유한 의미를 얻고 있습니다. 실은, 분단이후 남한 비평사를 문제 삼는다면 백철을 제외할 때 온전한 설명은 불가능해집니다. 김윤식 선생은 오랫동안 미뤄뒀던 작업을 한 셈이죠. 그의 이번 작업에 어떤 내적 동기가 작용했고 관점의 달라짐 같은 것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어쨌든 백철의 전모를 복원한 이 책을 통해, 해방 이후 우리 비평사의 연속성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

방: 저는 일제말기에서 해방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문제적인 비평가가 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철도 최재서도 문제적이었지만, 모두 1908년생이지만, 저는 임화와 김기림을 중요하게 이해해요. 각자가 맡은 역할이 달랐겠죠. 일제말기에 임화,김기림 둘다 자기 자신을 지켰죠. 임화는 자신을 지키면서 했던 일이, ‘조선개설신문학사’를 연재 집필했어요. 김기림은 뭐했냐 하면, 문학사 연구는 하지 않았지만, 대동아주의라든지, 동양의 경사 등에 대해 비판하면서, 즉 그게 태평양전쟁의 정신적 거점이었는데, 그걸 비판하면서, 서구 정신의 수혈 없이는 우리 문화가 나아갈 길이 없다고 하면서, 일제 말기를 견뎌냈단 말이죠. 이 두 입장은 각자 한 방향씩을 맡으면서 일제말기를 견뎌내는 중요한 비평적 지점이 됐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왔을 때, 임화는 주체성의 길을 따라 북으로 갔고, 김기림은 개방성의 길을 따라 서구정신의 수용이라는 개방성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인 남쪽에 남았습니다. 친일파들이 득실거리든말든. 그렇지만 둘 다 전쟁의 와중에 죽었죠. 그러니까 해방이후 중요한 비평적 거점이 상실돼 버린 거죠. 특히 남쪽에서는 무너졌다고 할 수 있어요. 최재서는 대일협력으로 기울었었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밖에 없었어요.그러면 누가 있냐, 역할을 한 사람이 백철이었던 거예요. 1940년대후반에는 『조선신문학사조사』를 썼고, 1950~60년대로 나아가서는 뉴크리티시즘을 했단 말이죠. 이게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조선신문학사조사』는 임화의 작업(조선개설신문학사)의 연장판이거든요. 임화가 쓴 조선신문학사의 후속판이 백철의 『조선신문학사조사』라는 거죠. 백철의 뉴크리티시즘 수용은 뭐냐? 남한 대학의 제도 안으로 비평이론을 수용해 온 것, 그건 김기림 식의 서구지향과 같은 것이죠.



임: 이번 저작에서 김 선생님이 보여주고 있는 백철에 대한 시각과 평가는 이전의 그것과는 달라졌는데 그 핵심은 비평사의 전통, 더 나아가자면 한국 문학사 전반의 흐름 가운데서 비평가 백철의 의의를 부여하고자 하는 데 놓여 있습니다. 이 점을 강조할 때 이 책의 무게 중심은 해방기에서 전후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백철에 치중돼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죠. 『문학개론』으로부터  『조선신문학사조사』를 거쳐 르네 웰렉·오스틴 워렌의 『문학의 이론』의 번역에 이르는 과정에서 백철이 담당했던 역할과 의미를 적극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거죠.

방: 그 부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백철이라는 존재는, 제가 앞서 지적했던 부분을 연장하면, 임화, 김기림에서 불행하게 단절된 한국문학비평사의 두 줄기(주체성을 추구하는 줄기, 개방성을 추구하는 줄기)의 계승에서 존재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이후 한국문학사의 전면에 나타난 백철이, 저 단절된 두 줄기 흐름을 신문학사조사와 뉴크리티시즘 소개·수용의 방식으로 계승한 것입니다. 무슨말이냐하면, 임 교수께서 지적했듯, 그 이후의 비평이라는 건, 백철이 건설해 놓은 것이었던 셈입니다. 대학에서 비평을 이론으로 배우고, 신비평을 배우는 것, 폐허가 된 나라에서 새로운 문학을 건설할 때, 신문학사조사(비평사), 뉴크리티시즘(이론)이 두 줄기 흐름의 연장선인 거죠. 그러니까, 김윤식 교수가 봤을때, 백철이란 존재는 기묘한 거죠. 앞에서 보면 별 게 없는데, 뒤에서 보면 다르단 말예요. 지금 융성하게 된 한국 현대문학연구라는 것, 대학 학문 분과로서 한국현대문학 연구라는, 학문이란 틀의 씨를 거대하게 뿌려서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은 존재니까, 이런 백철을 어떤 식으로든 봐야 한다는 게 김윤식 교수의 생각 아니었을까요.

임: 백철에 대한 김 선생님의 평가에 있어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방 교수가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그런 의미부여를 통해 백철이 비로소 제자리에 서게 됐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백철의 삶과 문학 전체를 검토의 대상으로 삼는 데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이 책 자체는 일종의 작가연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큰 줄기에서 백철의 비평사적, 문학사적 위치는 확고히 자리매김해주셨지만, 이게 어떤 식이든지 ‘연구’라는 형태이고 보면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거죠. 꼭 이 책만 그런 게 아니라 그동안 해오셨던 이광수, 임화, 염상섭 연구 등이 거의 동일한 방식의, 대상에 대한 접근과 해석 방식을 보여주고 있죠. 그런데 김 선생님이 해오신 작가연구의 경우,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방법이랄까 원리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의 작가연구는 내용의 구성과 서술 방식에 있어 그야말로 자기만의 특색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많은 대목에서,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객관적 시각에 선 연구라기보다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드라마를 쓰고 있는 작가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방: 임 교수님 말씀은, 엄밀한 작가연구, 학문적 연구로서 필요충분조건을 충분히 갖추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이야기, 당신이 늘 강조해오셨던 모종의 서사를 제시한 것 아닌가, 여러 가지 자료를 동원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지, 설명과 논증으로 잘 뒷받침되는 그런 학문적 연구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지 않을까 라는 거죠? 이 문제는 뒤에 연구 스타일 문제에서 재론하죠. 저는, 백철에 관한 묘사 등에서 몇가지 쟁점이 추출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백철을 가치평가하는 방식입니다. 백철이 왜 훌륭하냐. 왜냐하면, 웰컴주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수용하는 이런 태도가 한국 현대문화사나 문학사의 어떤 운명을 보여준다는 거죠.

임: 그런 판단은 비평사, 더 나아가면 우리 문학사 전반의 조건 자체를 염두에 둔 결과로 볼 수 있겠죠. 이 책에서 백철이라는 한 개인의 삶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한계 속에서 조명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방: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고 백철의 운명이었다, 결국 그것은 한국근대의 운명이다, 모든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근대라는 놀라운, 밖에서 들어온 세계, 그걸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근대문화나, 근대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 그걸 백철이 가장 철저하게, 전면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백철의 긍정성을…

임: 김 선생님은 그것을 ‘순진성’이라는 용어를 통해 긍정하고 있는 거죠.

방: 그렇죠. 그렇게 봤을 때, 그 관점이 쟁점이 될 수 있죠. 정직성, 순진성으로 정리하신 대목이, 과연, 비평가의 또는 작가의 덕목이 될 수 있는가 따져볼 수 있겠죠. 그러한 가치평가가 삭제된 수용방식이 문제가 돼서, 한국현대문학연구의 난맥상이 지금까지 하나의 체질처럼 전개돼 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랬을때, 그런 약점이 될만한 것을 강점으로, 역동적으로 서술한 것에서 하나의 발상 전환을 엿볼 수 있지만, 그 발상 전환은, 저 같은 근대주의자, 근대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문학의 깊이, 내면성에 있다고 보는 연구자들에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경우 내면성은 자기 행위와 선택의 준거점으로서 사유의 깊이를 추구하고, 신중하게 선택하고, 동시에 그것을 글로 쓰고 드러내는 데로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작가나 비평가가 어떤 인생을 살든, 글을 쓰든,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나아갈 때, 그에 걸맞는 심사숙고가 필요하다는,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문학이 심오해질 수 있다는, 근대주의적 사고 방식에서 보면, 김윤식교수의 이런 발상법 전환은 다소 좀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지요.



임: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문제점을 찾고 극복하기 위한 것인데 방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겠죠. 김윤식 선생님의 이번 저작은, 전반적인 평가에 있어, 한국 현대문학사 가운데서 비평가 백철의 존재를 인정하고 독자적 의의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실상 뚜렷한 비판적 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백철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비판의 대상입니다. 그런 점을 강조하자면 백철을 바라보는 저자의 근본적 관점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이 책에서 저자는 백철이 가진 뿌리 없음과 깊이 없음, 시류에 편승하는 저널리즘 감각과 세속주의에 대해 일관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철은 ‘줄 타는 광대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백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일관성을 강조하자면, 이 책에서 김 선생님이 내리고 있는 결론은 논리의 모순이거나 비약적인 측면을 안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방: 그러니까, 그게 재밌는 부분이예요. 서문 마지막 단락은 굉장히 재밌습니다. 왜 백철 쓰는 데 오래 걸렸냐? 이 질문에 답해야하는 상황인데, 그것은 저자의 글쓰기의 출발점에 놓인 모종의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기 글쓰기의 출발점에 자의식이 놓여 있다, 그 자의식이란 뭐냐? 문학이란 삶에 앞선다는 명제, 문학이 앞선다는 것은 글쓴다는 것, 작품이 삶보다 앞선다는 것이거든요. 그러기에 자신만의 개성적 주체적 글쓰기에 임해야 한다, 이것이 글쓰기의 원점이자 자의식이었습니다. 이거 버리는데 10년이 걸린 거라는 거죠.

임: 그게 지금까지 백철을 바라보는 김윤식 선생님의 관점이었습니다. 여타의 글쓰기에서도 그러했지만 한국문학 연구라는 분야에 있어서도 김 선생님은 주체의 자리, 연구자의 문제의식을 항상 강조하셨어요. 김윤식 교수의 경우, 그런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연구행위는 거의 없어요. 그의 문제의식에 견줄 때 그동안 백철이라는 대상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미달했다고 볼 수 있겠죠. 방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머리말의 마지막 구절은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백철에 대한 이해 또한 결국은 대상에 자신을 투입하는 데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백철이라는 흐린 거울이 모종의 계기에 의해 임화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 자신을 비추어주는 새로운 거울로 떠오른 셈이죠.

방: 지금 쟁점이랄까, 쟁점될만한 부분을 언급했습니다. 하나 더 지적하기 전에, 이 책의 내용면에서 기존에 해명되지 않았던 새로운 부분이 있는지를 개괄해야 겠지요.

임: 가장 눈에 띈 부분은, 다른 연구자들도 단편적으로 언급한 바 있지만, 백철의 이념적 지주가 천도교라는 것입니다. 백철이라는 한 개인의 통일된 의식을 문제 삼을 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죠. 김 선생님은 백철의 정신적 기반을 천도교에 두고, 그것이 비평가 백철의 전생애에 걸쳐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나 또 다른 근대 지향성과는 구별되는 백철만의 삶과 문학에 대한 선택이 그것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판단이죠.

방: 저도 그점이 새롭게 느껴졌어요. 천도교는 근대 한국 종교사상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죠. 1920년대 전후, 30년대 와서도 말예요. 그런 흔적들이 이광수에게서도, 카프 계열과의 논쟁 속에서도 나타나는데, 실제로 비평가 개인의 차원에서 천도교라는 문제가 그렇게 잘 드러나거나, 천도교와의 조우, 사상적 거점으로서 천도교 문제를 발견하긴 어려운데, 백철의 정신적 거점을 천도교라는 뿌리와 관련해 설명해나가고, 특히 동경고사 시절까지 천도교 활동이 이어져왔다고 밝혀놓은 부분은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임: 김 선생님은 이 천도교라는 요소로부터 백철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일련의 ‘모호성’을 해명해 나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몇몇 사례가 있긴 하지만 문인에게 천도교의 영향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천도교로부터 백철이 가진 모호한 성격을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긴 했지만,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김동리의 경우와 비교해 볼 수 있겠죠. 김동리 문학을 뒷받침하고 있는 유불선이라는 사상정서적 요소는 작품과 삶 전반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어요. 백철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 천도교 관련 논의는 백철의 의식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맴돌고 있다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철과 천도교의 관련성을 비평가로서 그의 글쓰기와 삶 속에서 증명해 보이는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는 생각입니다.

방: 그건 비평가로서의 백철의 체질 때문 아닐까요. 이광수는 천도교와 관련된 자기사상의 궤적을 작품 등 어떤 형태의 기록에서든 다종다양하게 남겨 놓고 있거든요.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상, 기독교든, 천도교든, 다이조 생명주의든, 모두 다양하게 곱씹어서 남겨놓았다는 거죠. 그런데 백철은 그야말로 저널리스트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고, 객관성과 외연성에 치중한다더라도, 자기 내면의 가치로 환원해서 풍부하게 사유하고, 그걸 바탕으로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는 비평가가 아니었습니다. 학생시절까지 천도교가 강한 영향을 미쳤음에도불구하고, 천도교의 제세구민같은 구호는 맑수즈의의 용어로 곧바로 번역돼서 나타나기 때문에, 김 교수께서도 혐의만 두고 주변만 맴돌뿐 딱히 ‘이것이다’ 촌철살인 방식으로 근거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데 까지는 이를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임: 백철의 모호한 성격을 염두에 둘 때, 그를 지탱하고 있는 정신적 기반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따라서 후속 연구를 통해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나가야 하겠죠.

방: 그와 관련해서 백철이 귀국해 처음 주장한 게 농민문학론이었다는 점을 좀더 사유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이론적으로 딱 근거를 댈 수 없지만, 천도교쪽에서는 노동자든 농민이든, 반상, 남녀, 노소를 차별하거나 구별하지 않아요. 천도교쪽에서는 이렇게 이미 선입견 없이 농민에 접근해 있었던 거죠.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의 연대 대상으로 농민이 있단 말이죠. 프롤레타리아 해방, 인민해방론에 입각해서 농민이 그 다음으로 나온단 말예요. 노동자문학, 조직의 문제로 나아가지 않고, 백철이 왜 농민문학으로 나아갔느냐는, 알게 모르게 천도교 영향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단 거죠. 노동자를 중시하지 않고도 농민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논의의 주변으로 새어나간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바탕에는 천도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당시 농민문학이 시류적인 것이었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말예요.

임: 그동안의 백철 연구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시점으로부터 해방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있었고, 그래서 백철의 출발점과 도달점은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못했던 셈입니다. 김 선생님의 이번 저작은 그 빈틈을 매우는 작업을 함으로써 백철 비평에 대한 전체상을 수립하고 새로운 평가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 측면들이 이 책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되겠지요.

방: 덧붙이면, 하나의 작가연구라고 봤을때, 기존의 백철 연구가 충분히 축적해 놓지 못했던 성장, 수학과정, 사상의 형성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적 가치가 상당하다는 거죠.

임: 유년기에 대한 부분도 흥미롭죠. 그 밖에도 흥미로운 구절은 많은데 백철의 삶의 행로, 특히 일본 유학시절과 북경에서의 환각체험, 네 번의 결혼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죠. 당시 북경의 분위기를 비롯해, 동경고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지식층과 문화계의 흐름에 대한 감각은 당대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런 부분은 일본어 체험세대인 김윤식 선생님만이 가질 수 있는 당대적 감각 아닐까요? 그것은 저희 세대 연구자들이 갖지 못하고 있는 어떤 부분이죠.



방: 전쟁이후, 백철의 『문학의 이론』 번역 이후 활동을 정리한 부분도 비교적 새롭지 않던가요? 기존 논의에서 언급한 것이 있긴 하지만, 좀 더 집대성하셨더군요.

임: 이 책에서 김윤식 교수가 파악하고 있는 백철의 후반기 삶의 무게는 뉴크리티시즘의 도입에 놓여 있습니다. 김 선생님은 이 대목을 많은 자료와 설명을 곁들여 강조하시고 계신데요, 제가 보기에는 다소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역시, 해방 이후 백철 삶의 무게는 바로 그 부분에 걸쳐 있는데, 논의의 폭이 너무 제한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백철은 타계하기 직전까지 글을 계속 썼어요. 물론 70년대 후반으로 넘어 올수록, 『진리와 현실』 같은 자전적 이야기를 펼쳤죠. 문단 회고담의 중간 중간에 평론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김 선생님이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고 볼 수 있겠죠. 백철의 후반기 삶에서 의미 있는 부분은 ‘신비평’의 도입까지다, 이렇게 판단을 하신 거죠. 김 선생님의 이번 『백철 연구』는 뉴크리티시즘의 도입 과정과  『문학의 이론』에 대한 번역의 시점을 백철의 도달점으로 제시하고 있어요.

방: 사실 그런 것과 관련해서, 이 저술이 갖는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은데요. 전반적으로 백철이라는 대상을, 생애와 문학을 완성해보겠다는 의지와, 그 안에 이광수, 임화 연구 등등에서 보여줬던, 당대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나, 풍경 이런 것을 한 개인의 삶과 관련해서 응집해 보여주겠다는 똑같은 의도를 갖고 시작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연로하시게 돼 그런지, 조금 반복적인 요소들이…

임: 그렇죠. 많은 대목에서 같은 이야기가 겹치거나 반복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방: 이전 저작에서 겹치는 부분이 상당수가 눈에 띄고, 논의가 이 단계에서는 좀 더 심화됐으면 하는 대목에서 충분히 심화되지 못하는 요소도 없잖아 있습니다. 예를들면, 『조선신문학사조사』나, 뉴크리티시즘 수용의 의미는, 사실 조금 더 심도있는 차원에서 논의될만한 것이고, 임화의 신문학사나, 백철의 사조사와 관련해서 깊이있게 조명할 수 있었을텐데, 호흡이 좀 짧아지신 거 같아요.

임: 앞부분은 유기적으로 상당히 촘촘한데 뒤로 갈수록 서술의 긴장감이 느슨해지고 구성이 허술해집니다. 빈틈이 많죠.

방: 그렇죠 빈틈. 잠깐 이 대목에서, 백철 선생의 1960~70년대 글쓰기에 관해 언급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임: 앞서 말했듯이 이 시기의 백철은 자전적 이야기와 문단 회고담 류의 글쓰기를 전개했는데, 김 선생님의 이번 저작 또한 후기에 씌어진 그 글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백철이 썼던 글들은 1970년대의 시점에 서 있는 원로 백철에 의해 파악된 한국 문학사의 풍경이죠. 당시에도 많은 문인들이 있었고, 그 분들 나름대로 당대적 감각으로 한국 문학사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백철의 눈으로 봤다는 게 중요한 것이죠. 백철의 눈을 통해서만 보이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대 문학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일층 두텁고 풍요롭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백철이 남긴 자전적 기록과 회고담들은 전체적으로 다시 정리, 검토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보니까, 이 책에서 언급되고 비평가로서의 백철의 삶은  『한국문학의 이론』(1964)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비평가로서 백철의 삶은 막을 내렸다고 판단하신 셈인데, 그 부분도 그렇게 마무리될 게 아니라, 이후의 평문까지 검토한 뒤 평가를 내려주는 게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백철 연구’라는 제목을 염두에 둘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김 선생님께서 그렇게 많은 작가연구를 해오셨지만, 원자료와 2차 자료 등 관련 서지들에 대한 정리는 거의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광수 연구는 예외적입니다만, 이번의 백철 연구에서도 그런 작업들까지 해주셨다면 후학들에게 더 큰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방: 그렇죠. 맞습니다. 저도 해방이후 백철의 작업이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기림이 남쪽에 남아서 한 일이, 문학개론 쓰고, 과학개론 번역하고, 『시와 시론』 같은 책을 냈단 말이죠. 그게 백철이 한 일과 똑같은 거예요, 성격상. 그런가하면, 그 이후에 김동리도, 서정주도, 조연현도, 박목월도 그런 일 많이 했거든요. 일종의 교과서적 편찬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상식과 교양을 건설하는 과정이란 말이죠. 이런 디자인을 통해서 한국현대문학의 체질이 형성됐던 겁니다. 적어도, 제도권 대학 안에서 1960~70년대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거죠. 그렇다면 그게 뭐냐는 거죠. 나라 만들기 시절, 나라의 문학 만들기에 그쳐서는 안되고, 김윤식 선생님이 아직 다 해명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간주하고, 우리가 좀더 해명해야 할 부분은, 바로 그런 여러 가지 저술작업들, 한국현대문학사의 새로운 디자인 작업들이 어떤 의미, 갈래를 치면서 한국문학사에서 해방이후 어떻게 전개됐냐는 문제는 검토해볼 만한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진리와 현실』에서 저도 그런 생각 했어요. 김윤식 선생께서도 많이 인용하셨는데, 한국문학연구에서 많이 결락된 부분 중 하나가, 자전·회고와 관련된 평전 연구가 전무하다는 겁니다. 1960~70년대가 되면, 김팔봉, 유진오, 백철, 서정주 등등 많은 사람들이 자서전을 씁니다. 이 오토바이오그래피가 한 나라 문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연구가 충분히 안 돼 있고, 안 돼 있다보니 비평적 성찰의 시선도 부재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서전 서술, 평전 쓰는 게 견강부회식이 되거나, 사실에 어긋나는 부분을 과장하거나 왜곡해놓고도 부끄럼없이 늘어놓는 경우도 많은 거죠. 그래서 백철의 『진리와 현실』 같은 작업은, 자서전으로서의 성격, 스타일, 그것이 기록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어떤 문학사적 기억을 창출해냈는지 등 1960~70년대와 관련해 논의해볼 만한 가치가 있죠. 앞으로 우리가 해명해야할 부분입니다.

임: 그런 연구는 다른 작업과 비교한다면 연구자들이 훨씬 즐겁고 흥미롭게 진행할 수 있는 일이겠죠.

방: 제가 더 말씀드렸으면 하는 쟁점은 이른바 등가성론이 이번 백철 연구에도 강하게 나타난난다는 것입니다. 김동리와 견주면서 ‘등가적이다’, 김동리가 말하는 ‘생의 구경적 형식’과 백철의 ‘웰컴주의’가 본질상 같다! 라고 보는 것,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임: 김 선생님은 ‘이퀄’로 보고 있어요. 그러나 본질상 다르다고 하는 게 맞겠죠. 그게 어떻게 보면 김윤식 선생님이 가진 특유의 논법이라고 해야 하나, 관점에 해당하는 것이겠죠. 어떤 경우에 김 선생님은 대단히 거시적인 시각 위에 서서, 차별성을 삭제해 버립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그런 관점과 접근 방식은 학술적 연구에서 문제가 될 수 있겠죠. 그 기원과 내부적 구조를 추적해보면 그 두 개는 확실히 차이를 가진 무엇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요. 그런 측면에서 김 선생님은 다분히 주관적이죠. 다른 분들도 느끼시겠지만 김 선생님의 논의는 어떤 의미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반대로 ‘축소’하기도 합니다. 그런 식의 판단은 분명, 객관성의 결여로 볼 수 있습니다.

방: 도대체 근대성의 형식으로서 같다라고 하는 것이, 문학연구에서 중요할까, 백철은 이렇게 다르고, 김동리는 이렇게 다르다고 하는 게 중요할까요. 차이의 철학이야말로 현대철학이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입니다. 다른 걸 같다고 환원하는 것은 위험한 논리 아닌가요? ‘같다’라고 놓는 그 순간, 모든 개별성, 차이가 무화되면서 거대 카테고리의 위압 안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이, 김윤식 선생님의 연구 스타일의 중요 문제점 아닐까요?

임: 김윤식 선생님은 현장비평에서도 탁월하시지만, 가장 높은 고지는 문학사 연구에 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 문제점은, 거시적 시각과 연속성에 의해 뒷받침되는 문학사 연구 자체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김 선생님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겠죠. 김 선생님이 가진 학자로서의 신념 같은 것 말입니다. 학자로서 김 선생님은 자기 관점 속에서 대상을 바라보면서, 대상을 자기화하거나 아니면 밖으로 밀어내버리는 동일화의 사유와 욕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선생님 자신은 언제나 자각적 의식을 강조하고 계시지만 말입니다.

방: 김윤식 선생님의 강점은, 연구의 구체성에 있습니다. 사실들을 제시하고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확대하는 것 말예요. 그런데 지향점은 동질성, 등가성에 가닿아 있더군요. 저는 백철 연구의 앞부분에서는, 다양한 자료를 풀어나가면서 흥미롭게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강점이고 능력인 반면, 후반부, 모든 것을 근대라는 사상 속에서 등가화하는 것은, 저자의 일종의 욕망, 의지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저는 우리가 취해야 할 부분은, 앞부분에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뒷부분에서도 우리에게, 1970~80년대, 90년대까지만해도, 등가성의 원리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등가성에 기반하되, 이질성을 포섭하는 쪽으로 우리가 매진해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임: 방 교수가 말씀하신 우리의 과제에는 김윤식 선생을 포함한 앞세대의 글쓰기와 학문적 성취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문제도 포함될 것입니다. 전후세대와 60년대 세대가 남긴 유산은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생각하기에 따라, 그 높이는 우리가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걸 지금 우리가 어떻게 생산적으로 가져올 것인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결론적으로 우리 시대에는 김윤식, 김현 같은 글쓰기와 연구 작업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됩니다. 국문학 연구의 후속세대, 오늘날의 한국문학 연구자들은 일단, 그런 작업을 펼칠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앞세대들은 말 그대로 ‘화전민’을 자처했습니다. 그들은 갈아엎기를 기다리는 미개지의 한복판에 서있었던 세대들입니다. 앞세대가 가질 수 있었던 행운 중의 하나는 제도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지금의 연구자들은 학진으로 대변되는 제도에 점점 종속되고 있습니다. 『백철 연구』처럼 10년 동안, 연구의 대상을 마음에 담아두고 작업을 해나가는 일은 불가능해졌다고 보는 게 맞겠죠.

방: 한국문학은 연구도 그렇지만, 청년성을 면치 못하는 면이 있어요. 맨바닥에서 시작하면 항상 청년이예요. 자기 스스로를 청년이라고 사고하는 한, 김윤식 교수와 같은 체계화 작업을 하기 어려워요.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이론에 눈을 뜨고, 자기에게 축적돼온 과거를 검토하지 않는 한, 청년문학, 청년문학연구로, 청년적인 상태에서 멈추겠죠. 그것은 한국현대문학연구가, 창작이나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에 턱없이 민감하고, 동시에 자기의 과거와 익숙한 것들을 충분히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시선이 부족하다는 걸 보여주죠. 반성적 성찰이란 것을 단순히 비판적으로 봐서는 곤란합니다. 청년은 윗세대를 비판적으로 보려는 걸 좋아해요. 그렇지만 비판적으로만 보았을때 충분한 사유는 생성되지 않죠. 비판하는 시선은 앞면에서만 보기 때문에 전체를 꿰뚫어볼 수 없어요. 성찰은 뒷면을 보는, 전체적 사고가 필요해요. 이런 전체적 사고가 부족할 때, 체계화, 전통의 현대화는 어려울 수밖에 없죠. 우리 현대문학연구는 아직 이 과제에 매달려 있는 거죠. 전쟁도, 이념대립 환경도 벗어났는데, 현대문학연구 체질이 이 정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반성해야할 대목이 아닐까요?

임: 김윤식 선생의 다음 작업은 어떤 것이 될까요?

방: 글쎄, 생명과의 싸움 아닐까요?

임: 선생님이 그동안 해오신 문학사 연구의 방향과 진도를 떠올릴 때, 특히 이번 『백철 연구』를 염두에 둔다면, 다음 작가연구의 주인공은 ‘비평가 조연현’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김교수님이 지녔던 장점들을 계승하기에는 어려운 환경이 됐지만, 후학들의 노력이 더 요구되는 시점입니다.(녹취·정리= 최익현 편집국장)

08. 04. 04.

P.S. 사실 요즘엔 읽을 책은 물론이고 읽어야 할 리뷰들까지도 이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지고 있어서 '로쟈' 노릇도 임계점에 다다른 게 아닌가란 생각마저 든다. 하루에 댓 건은 카바를 해야 하지만 중과부적이다. 밥벌이도 아닌 일에 댓 시간씩 쏟아부을 수는 없지 않은가(그래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테지만). 게다가 나도 뭘 좀 써야겠고. 어디 뻗을 자리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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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04-0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기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로쟈 노릇(?)을 계속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너무 많은 도움이 되서요...몇 분이 팀을 구성하여 협업체제를 만드시거나, 일을 지원해줄 사람을 찾는 것 같은 방법으로 노력과 시간을 분담하는건 어떨까요?

로쟈 2008-04-05 12:25   좋아요 0 | URL
네, 여러 개인적인 사정들이 겹치니까 현재의 규모를 유지하기가 좀 버겁습니다. 쏟아지는 책들을 그냥 일람하는 것조차도 이젠 어렵구요. 관심있는 전공자들이 '품앗이'를 하거나 '당직제' 같은 걸 하면 어떨까란 생각마저 하게 됩니다.--;
 

문학 관련기사 두 편을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옮겨놓으려고 한 것이 며칠 미뤄졌다. 최근 첫 산문집과 함께 장편소설을 펴낸 작가 김원우씨와의 인터뷰기사, 그리고 문단의 '칙릿' 바람에 관한 동향기사이다. '젊은 여성'이 아닌지라 내가 더 공감하게 되는 쪽은 물론 중년 작가의 '줏대'이다.

경향신문(08. 03. 19) 김원우 “중산층도 크게 보니 떠도는 난민의 삶이더라”

작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면 도시락을 싸들고 연구실로 향한다. 샐러리맨처럼 꼬박 12시간을 앉아 글을 쓴다. 안식년을 맞은 지난해에도 1년 내내 하루 10장 이상 글을 썼다. 효율과 능률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첨단의 시대에, 그는 볼펜을 꾹꾹 눌러 400자 원고지에 글을 쓴다. 오후 6시가 되면 가방을 꾸려 연구실을 나와 맥주를 한 잔 하거나, 집에 돌아와 음악을 듣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휴대폰도 없고 컴퓨터도 사용할 줄 모르는 작가 김원우(61). 그러나 정치하고도 핍진한 언어로 가득 찬 그의 문학은 한국문학사에서 누구도 흉내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자리에 서 있다. 지난 수년간 궁구하듯 써내려간 장편소설과 산문집을 들고 그가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젊은 천사’ 이후 3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강)은 1990년대 이후 그의 문학의 핵심을 이루는 ‘난민의식’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지방 국립대 의대교수이자 외과의로 평생을 보낸 뒤 미수를 넘기고 세상을 뜬 삼팔따라지, 박성득의 생애를 복원해나가는 이야기다. 추모집을 준비하던 제자 여박사와 최원장은 박교수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부러 없애기라도 한 듯 그의 경력을 증빙하는 자료가 일절 남아있지 않고, 유족과 후학의 증언을 모아도 생애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자 망연자실한다. 겨우 그러모은 정보로 망자의 실루엣을 그려보지만, 해방 전후와 6·25 동란 당시의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자기 보신에 철두철미하고 믿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칼 실력뿐이었으며, 매우 과묵했고 반찬은 장아찌와 고추장이 다였고 빨랫감도 만들지 않을 정도로 온갖 것을 아껴 썼으며 외부에 대한 의존도가 지극히 낮은 인물.

생애를 온전히 복원할 수 없는 이 독특한 인물은 동시에 ‘어떤 세대의 슬픈 초상’의 보편적 실체이기도 하다. 월남 2세인 최원장이 복원해낸 박성득의 면면은 마찬가지로 삼팔따라지였던 부모와 외삼촌 등 기억이 숭덩숭덩 잘려나간 그 세대 일반의 모습이었던 것. 박성득은 근대 이후 전쟁을 비롯한 갖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나 부박하게 세상을 떠돈 한국 내 ‘이산자’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난민의 삶이고, 부평초 같은 것 아닌가요? 객지에서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삶도 난민의식의 또 다른 행태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인생을 더 큰 눈으로 조명하게 됩디다. 그런 면에서 주제가 다른 쪽으로 전화되었다고나 할까. 10여 년 전에는 중산층 부르주아에 대한 자아비판, 자기투영 등을 다뤘지만 10년 전부터는 난민 쪽으로 기울었지요.”

박성득의 생애를 독자들이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세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은 이중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다 각각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가 다르다. 독자에게 인내를 요하는 작가의 문장도 여전하다. 참을성 없는 젊은 독자라면 진저리내며 팽개칠 만큼 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단어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등장한다. 과거부터 사전을 뒤적이는 취미를 갖고 있는 작가는 고르고 고른 단어들로 문장을 채웠다.

요즘 독자들에게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요즘의 문학이 너무 뒤틀려있고 왜곡돼 있는 게 분명하다”며 “전세계적으로 문학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강렬한 자극을 주는 극단적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문학은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게끔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이 비록 시대와 불화하고 있을지라도 별로 화해할 생각이 없다는 단호한 말투는 어쩐지 그의 문장과 닮았다.

횡보 염상섭의 문체와 닮았다는 세간의 지적에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횡보의 문체하고는 많이 다를 겁니다. 횡보는 전통적인 서울 말씨를 발굴해내고 사전에 등재돼 있지만 사어화 돼가는 단어를 살려내 정확하게 썼는데, 그에 비해 나는 경상도 출신인 데다 횡보의 자연주의적 경향과는 차이가 나거든요. 만연체를 조립하는 데 성의를 다한다는 점은 비슷하겠지. 종결어미를 바꾸고 절대 똑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 등 문장 축조력에서는 많이 따르려 하다보니 영향을 받았다면 받았을 겝니다. 언어라는 게, 문장이라는 게, 결국 유동성과 세속성이거든요. 당대 세속에 질펀하게 깔려 있는 걸 안 받아들이면 생동감이 없어지니까 진부해지지. 이건 어떤 작가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일까? 등단 30여 년 만에 처음 펴낸 산문집으로 이번에 함께 출간된 ‘산책자의 눈길’(강)은 염상섭의 문학 연구를 다룬 글을 꽤 묵직한 분량으로 싣고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책에서 그는 ‘문단의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처럼 문장론과 문학상, 문예지와 원고료 등 오늘날 한국 문단의 현실에 대해 가감 없이 비판한다. 2부는 횡보 소설의 근대성과 함께 횡보를 중심으로 한국 소설의 성립 과정을 조명한 글들을 모았다. 3부는 각각 문학평론가 신수정씨와 시인 김정환씨의 대담 형식으로 자신의 문학뿐 아니라 결혼제도와 정치의식 등 당대 문학의 화두를 함께 다뤘다.

“서문에도 썼지만 처음으로 내 전공인 소설이 아닌 것을 내게 됐어요. 오히려 책을 내서 세상을 더 흐트러뜨리는 일이 아닌가 했는데 막상 나온 책을 보니 나름대로 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소설? 당분간 못 쓰지요. 하루 12시간 이상 집중력을 요하는 건데. 방학이나 돼야 쓸까?”(윤민용기자)

경향신문(08. 03. 11) 소설, 젊은 여성에 눈돌리다…‘칙릿’ 잇따라 공모 당선

문단에 칙릿(chick-lit) 바람이 거세다. 거액의 고료를 내걸고 출판사와 문예계간지들이 공모한 장편소설상을 칙릿풍의 장편소설이 휩쓸었다. 최근 출간된 서유미씨의 ‘쿨하게 한 걸음’(창비)과 이달 안에 출간될 우영창씨의 ‘하늘다리’, 백영옥씨의 ‘스타일’이 바로 화제의 소설들이다. '쿨하게 한 걸음’은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이고, ‘하늘다리’는 계간 ‘문학의 문학’이 5000만원을 내걸고 공모한 제1회 장편소설 공모당선작이다. ‘스타일’은 세계일보가 1억원 고료를 내걸고 공모하는 ‘세계문학상’ 제4회 수상작이다.

이들 소설은 모두 30대 초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들의 일과 사랑, 삶을 그려가고 있다. ‘쿨하게 한 걸음’은 요즘 30대 여성의 관심과 고민을 따라간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남자친구와 헤어진 30대 초반의 직장인 연수는 구조조정에 인수설까지 나돌자 회사를 그만둔다. 소설은 자신의 길을 고민하면서 새로이 영화공부를 시작한 연수와 은퇴 후 새 일자리를 찾는 아버지, 갱년기를 맞은 엄마, 30대가 돼서야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촌, 직장과 결혼 사이에서 고민하는 친구들 등 주변인물과의 소통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고민을 담담히 그려낸다.

'하늘다리’와 ‘스타일’은 좀더 감각적이고 트렌디하다. ‘하늘다리’는 31세의 증권사 대리 맹소해를 주인공으로, 숨가쁘게 돌아가는 증권사의 일상과 재테크 세태, 동성애와 유부남과의 사랑 등 좀더 자극적인 소재를 등장시킨다. 패션잡지에서 일하는 30대 초반 여기자의 좌충우돌 일상을 그린 ‘스타일’은 유행에 민감하고 가벼움과 재미를 쫓는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이다. 유명 배우의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골몰하고, 까다로운 음식비평가 ‘닥터 레스토랑’의 정체를 탐색한다는 얼개에 일과 사랑, 패션계의 치열한 경쟁, 사내 권력관계, 명품과 음식이야기 등을 감각적인 문체로 엮었다.

작가 서유미씨와 백영옥씨가 30대 초반의 여성으로 자기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것과 달리 그간 시인으로 활동해온 우영창씨가 50대 남성작가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이처럼 장르문학의 일종인 칙릿이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달고 좀더 공격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고 있다. 칙릿이 대중성과 문학성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시선을 의식한 듯 백영옥씨는 당선 인터뷰에서 칙릿을 옹호했다. “내가 쓰고 싶은 건 번드르르한 트렌드가 아니라 현대 도시인들의 삶”이며 “칙릿이란 게 ‘된장녀’ 부류들만 나오는 가벼운 장르가 아니다.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도 당대 여성의 삶을 솔직하게 그렸다”고 설명했다.

우영창씨도 “사랑과 일, 이 두 가지는 도시의 미혼 여성에겐 현실의 굴레이자 삶의 추진력이기도 하다”며 “작금의 도시 직장 여성들의 삶은 칙릿 소설이 함부로 예단할 만큼 가볍지가 않고 그 내부엔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회의,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지속적인 불안 등이 자리잡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심진경씨는 최근 문단의 이 같은 칙릿바람의 원인을 “자본에 의한 문학의 지배”로 요약했다. 외국 칙릿 소설이나 영화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20~30대 여성들이 일정한 독서소비층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이들을 겨냥해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이 있는 출판사, 언론사들이 고액의 상금을 내걸고 상을 만든 것도 아직까지는 소설 독자들이 있고, 문학이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상업적 이유가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심씨는 또 문학의 영향력 감소를 중요한 요인으로 들었다. 젊은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소비문화를 잘 드러내주는 칙릿은 문학 내부에서 시작된 장르가 아니라 영화, 드라마, 광고 등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새로운 장르문학이라는 점에서 문학이 다른 예술장르의 영향을 받아 생성되는 현대의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자를 잃은 한국문학이 계속 추구할 방향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칙릿
젊은 여성을 뜻하는 속어 ‘chick’에 문학을 뜻하는 ‘literature’를 결합한 신조어. 젊은 도시여성들의 일과 연애, 취향 등을 다루는 소설들을 일컫는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영미권 문학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으며, 국내에 본격 소개된 것은 소피 킨셀라의 소설 ‘쇼퍼홀릭’ 시리즈를 통해서다. 여기에 20~30대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와 미국 드라마가 함께 인기를 얻으면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칙릿이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윤민용기자)

08.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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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3-2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다리]는 검색했는데 책이 안떠요. 혹시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인건가요?

다락방 2008-03-27 15:29   좋아요 0 | URL
아, 다시 자세히 읽어보니 이달안에 '출간될' 이라고 써있었군요 --

로쟈 2008-03-28 00:11   좋아요 0 | URL
자문자답이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자의 눈길 153쪽에 버나드 쇼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김원우 씨의 말은 오류.카알라일의 영웅 숭배론에 나오는 말인데요.그리고 또 하나.토마스 만의 펠릭스 크룰의 고백을 읽었다면서(물론 고교시절에 읽었다니 오래되어 그럴수도 있지만)토마스 만의 섹스 묘사가 너무 간접적이라고 했는데 제가 읽은 바로는 엄청나게 노골적입니다.주인공 크룰도 난봉군이요,여자등장인물 들도 유럽의 옹녀들입니다.재밌긴 재밌어요.호텔 종업원인 청년의 연애 난봉기라고나 할까요.군대 면제받으려고 용을 쓰면서 끝내 성공하는 과정은 압권입니다.

로쟈 2008-04-07 21:37   좋아요 0 | URL
벌써 읽으셨군요! 오류는 저자에게 전달해야겠습니다.^^
 

어젠가 그젠가 읽은 기사에 문인들이 뽑은 '올해의 시' 기사가 있다.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다. 이런 내용이다.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김경주 `무릎의 문양`) 지난 한 해 발표된 시 가운데 문인들이 가장 좋아한 작품은 김경주(사진) 시인의 `무릎의 문양`이었다. 도서출판 `작가`가 2007년 한 해 동안 각 문예지에 발표된 모든 시를 대상으로 문인 13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다. 매년 시행하고 있는 이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은 시집으로는 최금진 시인의 `새들의 역사`(창비 펴냄)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당연히 시도 찾아보았다. 저녁 시간인지라, '무릎, 하고' 불러보면서...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소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가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빠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를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를" 
 


  무릎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걸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 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08. 03. 12.

P.S. 너나없이 '무릎팍 도사'만 보지 말고 이런 시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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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3-1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시도 그림도.. 몸이 피곤해진 저녁에 읽으니 더 좋군요
무릎팍도사도 재밌어요..^-*

로쟈 2008-03-13 00:02   좋아요 0 | URL
'-인 것이어서' 같은 노티나는 구절들을 빼곤 저도 좋습니다. 특히 첫 세 행...

수유 2008-03-13 18:3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녁'에 부르는 이름이라 다소 노티 나도 괜찮습니다..

로쟈 2008-03-13 20:56   좋아요 0 | URL
'음절'이나 '근친' 같은 시어들이 김경주필인데, 자칫 시적 상투어가 될 우려도 있습니다. 노티 안 내려는 독자가 보기에.^^;

섬나무 2008-03-1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올리신 시는 여러 번 옮겨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전 옮겨쓰기 덜 번거로운 걸로 하나 올려 드릴게요.

목돈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사람들에게 이 시가 나를 붙잡은 건 애인의 빤스 같은 시인의 목돈이 아니라 시인의 목돈 같을 이 세상의 애인들이라고 말했지요.^^



로쟈 2008-03-13 00:00   좋아요 0 | URL
네, 예전에 재밌게 읽은 시로군요. 원래 솜씨 좋은 시들은 쓰는 시인이지만 저는 '땀에 절은' 시들이 더 좋습니다.^^

모래한알 2008-03-1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시 다 참 좋군요. 고맙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로쟈 2008-03-13 14:21   좋아요 0 | URL
^^

섬나무 2008-03-13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정서랑 좀 거리가 있긴 합니다. 로쟈님 애인이야 들킬수록 행복한 책이니 부족함이 있을리도 없지요. 오늘도 책과 진하게 한 판 하실 로쟈님을 응원하며...

로쟈 2008-03-13 14:20   좋아요 0 | URL
'목돈' 같은 시('땀에 절은 시')를 저는 좋아합니다. 그의 다른 시들이 너무 노숙해서요.^^;
 

책에 대한 시름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책을 사지 못하고(쌓아놓을 공간이 없다), 읽지 못하고(마음놓고 읽을 시간이 없다) 책에 대해 쓰지 못하는(하루에도 몇 건씩 놓치게 된다) 시름이다. 그간에 벌여놓은 일들이 임계치를 넘어선 듯하다(사실 작정하면 페이퍼를 쓰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란다).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조만간 '악몽'이 될 듯하다. 내가 동경하는 나라 아이슬란드(http://blog.aladin.co.kr/mramor/1338458)로 이민이라도 떠났으면 싶다("2006년 영국 레스터대 애드리언 화이트 교수가 발표한 ‘행복지도’는 178개국을 대상으로 건강(평균수명).부(GDP).교육(중등교육을 받을 가능성) 등 3가지 요소를 토대로 발표했다. ‘톱 10’에 덴마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아이슬란드 핀란드 스웨덴 등 유럽 6개국이 포진했고, 미국은 23위, 한국은 102위에 그쳤다.") 일단은 '북유럽 문학이 몰려온다' 같은 기사나 옮겨놓지만 조만간 결단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 아이슬란드...

한국일보(08. 02. 26) '살아 있는' 북유럽 문학이 몰려온다

안데르센 동화집, 입센의 <인형의 집> 정도로만 만나왔던 북유럽 문학이 최근 2, 3년새 성큼 다가왔다. 인터넷서점 알라딘(www.aladin.co.kr)의 ‘세계문학 분류’ 자료에 기초,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5개국 작품(어린이ㆍ청소년 대상작 제외)의 2000년대 출간 현황을 분석한 결과 2001~2005년 1~4건에 불과하던 번역작 수는 2006(8건), 2007년(11건)을 거치며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올해는 1월에만 5편의 장편이 나와 큰 폭의 증가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일부 국가에 편중된 해외문학 시장을 다각화하려는 출판계 전반의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핀란드 소설가 아르토 파실린나(66)의 작품을 집중 소개하고 있는 솔 출판사 김지은 편집팀장은 “세계문학 시장에서 소외된 지역을 눈여겨 보던 중 파실린나를 호평하는 독일 언론 보도를 접했고, 작품 검토 후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유럽 북페어에서 작가와 직접 계약했다”고 말했다.

2005년 하반기에 나온 덴마크 작가 페터 회(51)의 추리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마음산책 발행)과 파실린나의 <기발한 자살 여행>은 출간 직후부터 독자의 호응을 얻으며 북유럽 문학 출간의 길을 텄다. 두 책은 현재까지 각각 3만여 부, 2만여 부가 팔렸다. 2000년대 소개되고 있는 북유럽 작가들은 대부분 1940, 5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현역작가’들이다. 한국계 입양아 출신으로 화제가 된 쉰네 순 뢰에스(33ㆍ노르웨이)나 페르닐라 글라세르(36ㆍ스웨덴)처럼 30대 작가의 작품도 나오고 있다. 원작 출간연도 역시 작고 작가인 크누트 함순(노르웨이ㆍ1920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자크 디네센(덴마크), 미카 왈타리(핀란드)를 빼면 대부분이 90년대, 2000년대 작품이다.

북유럽 문학은 기존 유럽문학과 구별되는 매력을 갖췄다는 평이다. 알라딘 박하영 편집팀장은 “사변적인 프랑스 문학과 개인주의적인 일본 문학이 잘 절충된 느낌을 주는 것이 북유럽 문학”이라며 “소박하고 위트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진지하고 지적인 사유가 담겼다는 것이 독자들의 반응”이라고 말했다. 김지은 팀장은 “다소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 인간-사회 혹은 인간-자연에 대한 속깊은 성찰 등 특유의 문학성이 한국 독자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유럽 작품을 활발히 내는 출판사들은 특정 작가에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솔 출판사는 파실린나, 현암사는 철학 소설 <소피의 세계>의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56ㆍ노르웨이), 영림카디널은 아날두르 인드리다손(47ㆍ아이슬란드), 들녘은 카린 포숨(53ㆍ노르웨이), 좋은책만들기는 헤닝 만켈(60ㆍ스웨덴)의 작품을 주로 출간하는 식이다. 시장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 출판사들이 새로운 작가보다 상업적으로 검증된 작가 위주로 ‘안전 경영’을 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렇다 보니 지금의 출간작으론 북유럽 문학의 진면목을 알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재웅 한국외대 교수는 “1800년대 중반 이후 헨릭 입센(노르웨이 극작가), 게오르그 브란데스(덴마크 비평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스웨덴 극작가) 등 대문호가 대거 등장하고 20세기엔 스웨덴이 노벨문학상 시상국이 되면서 북유럽 문학은 일찌감치 세계적 반열에 올랐다”며 “현재 번역작들은 요슈타인 가아더처럼 이미 잘 알려진 작가나 헤닝 만켈 류의 인기 장르소설가의 작품에 치우쳐 희곡, 아동문학, 시, 소설 등 장르 전반에서 일고 있는 북유럽 문학의 활기를 보여주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 북유럽 언어에 정통한 번역가가 적어 구미 시장의 시각으로 선별된 영어, 독일어판 작품을 중역하는 경우가 많은 점도 현지 문학의 실상을 보여주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이훈성기자)

08. 02. 25.

P.S. 아래는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의 야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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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5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25 23:52   좋아요 0 | URL
무엇보다도 아담하고 조용하고 깨끗할 거 같아서요(물론 좀 춥겠지만). 괜찮은 도서관만 하나 있다면 거의 '천국'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길 다녀오시다니!^^

2008-02-26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26 09:57   좋아요 0 | URL
포잡까지 해야한다면 흠, 이민은 어렵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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