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가 그젠가 읽은 기사에 문인들이 뽑은 '올해의 시' 기사가 있다.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다. 이런 내용이다.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김경주 `무릎의 문양`) 지난 한 해 발표된 시 가운데 문인들이 가장 좋아한 작품은 김경주(사진) 시인의 `무릎의 문양`이었다. 도서출판 `작가`가 2007년 한 해 동안 각 문예지에 발표된 모든 시를 대상으로 문인 13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다. 매년 시행하고 있는 이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은 시집으로는 최금진 시인의 `새들의 역사`(창비 펴냄)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당연히 시도 찾아보았다. 저녁 시간인지라, '무릎, 하고' 불러보면서...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소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가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빠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를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를" 
 


  무릎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걸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 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08. 03. 12.

P.S. 너나없이 '무릎팍 도사'만 보지 말고 이런 시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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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3-1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시도 그림도.. 몸이 피곤해진 저녁에 읽으니 더 좋군요
무릎팍도사도 재밌어요..^-*

로쟈 2008-03-13 00:02   좋아요 0 | URL
'-인 것이어서' 같은 노티나는 구절들을 빼곤 저도 좋습니다. 특히 첫 세 행...

수유 2008-03-13 18:3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녁'에 부르는 이름이라 다소 노티 나도 괜찮습니다..

로쟈 2008-03-13 20:56   좋아요 0 | URL
'음절'이나 '근친' 같은 시어들이 김경주필인데, 자칫 시적 상투어가 될 우려도 있습니다. 노티 안 내려는 독자가 보기에.^^;

섬나무 2008-03-1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올리신 시는 여러 번 옮겨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전 옮겨쓰기 덜 번거로운 걸로 하나 올려 드릴게요.

목돈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사람들에게 이 시가 나를 붙잡은 건 애인의 빤스 같은 시인의 목돈이 아니라 시인의 목돈 같을 이 세상의 애인들이라고 말했지요.^^



로쟈 2008-03-13 00:00   좋아요 0 | URL
네, 예전에 재밌게 읽은 시로군요. 원래 솜씨 좋은 시들은 쓰는 시인이지만 저는 '땀에 절은' 시들이 더 좋습니다.^^

모래한알 2008-03-1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시 다 참 좋군요. 고맙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로쟈 2008-03-13 14:21   좋아요 0 | URL
^^

섬나무 2008-03-13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정서랑 좀 거리가 있긴 합니다. 로쟈님 애인이야 들킬수록 행복한 책이니 부족함이 있을리도 없지요. 오늘도 책과 진하게 한 판 하실 로쟈님을 응원하며...

로쟈 2008-03-13 14:20   좋아요 0 | URL
'목돈' 같은 시('땀에 절은 시')를 저는 좋아합니다. 그의 다른 시들이 너무 노숙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