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따로 책을 찾다가 책장에서 빼놓은 책은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창비)이다. 이전에 만져보기만 했는데 비로소 읽으려고 빼낸 것. 루카치의 소설론부터 다루고 있어서다. 실로 30년만인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문예출판사)과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한길사)을 다시 읽으려고 한다. 처음 손에 든 건 아니기에 ‘다시‘라고는 했지만 대면이 아니라 ‘대결‘에 방점을 찍으면 첫 독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두 저자가 검토하고 있는 근대소설사의 주요 작가와 작품을 두루 읽고서, 그러니까 맨주먹이 아니라 꽤 무장을 하고서 마주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과장 없이 30년이 걸렸다. 세르반테스와 괴테, 플로베르와 톨스토이,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루스트까지 대표작은 빼놓지 않고 강의에서 모두 읽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내 역량만의 한계는 아니고.

예전에는 이 대단한 이론가들의 작업을 올려다보아야 했지만 지금은 참견과 이견도 말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루카치가 미완으로 남겨놓은 도스토예프스키론과 지라르가 한권으로 갈무리해놓은 도스토예프스키론에 견줄 만한 책을 쓸 준비가 되었다(도스토예프스키 강의는 올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에는 나올 것이다). 마무리 짓는다면 반생의 과제 하나는 해치우는 게 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진 빚도 갚는 게 된다. 우리는 인생의 작가들을 한번 읽으며 빚을 지고 다시 읽으며 그 빚을 갚는다. 그래도 남은 빚이 있다면 또 다시 읽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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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헤세의 <황야의 이리>(1927)를 강의에서 다시 다루었다. 그 설거지에 해당하는 페이퍼인데, 교재로 쓴 민음사판 해설의 오타를 교정하려 한다. ˝1924년 1월 헤세는 바젤에서 두 살 연하의 루트 벵어와 두번째 결혼을 한다.˝(319쪽)는 대목인데 두 살 연하가 아니라 스무 살 연하다.

루트 벵어(혹은 뱅어, 벵거까지 표기가 통일돼 있지 않다)는 1897년생이고 1877년생인 헤세와는 정확히 20년 차이다. 헤세는 루트의 엄마와 교분을 갖다가 그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첫번째 결혼생활(1904-1923)이 파경에 이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 두번째 결혼생활은 더 불행했고 두 사람은 1년만에 별거하기 시작하여 결국 1927년에 이혼했다(그 즈음 동거하던 니논 돌빈과 헤세는 1931년에 세번째 결혼을 한다. 열여덟 살 연하였던 니논은 여생의 반려자가 된다).

결혼생활의 이력을 적은 것은 헤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데미안>(1919)과 <황야의 이리>는 모두 결혼생활의 파경을 배경으로 한다. 1차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에 헤세는 아버지를 여읜데다가 아내와 막내아들이 정신질환을 앓게 되자 자신도 심리치료를 받게 된다(알려진 대로 융의 제자로부터 정신분석을 받고서 치유효과를 경험한다). <데미안>은 그러한 경험을 배경으로 하여 쓴 작품으로 헤세에게는 작가로서 새로운 출발(재탄생)의 의미를 갖는다.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헤세는 독자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말했다).

헤세의 첫번째 아내는 여성 사진가였던 마리아 베르누이(1868-1963)로 헤세보다는 아홉 살 연상이었다. 체구나 기질이 헤세의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니까 흔히 하는 말로 모성의 결핍을 채워준 여성이었다. 1904년에 결혼하여 두 사람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지만 1923년에 이혼한다. 앞서 적은 대로 그 이후에 헤세는 루트 벵어와 재혼하며 이 두번째 결혼마저 파경에 이르고 나이는 벌써 쉰을 목전에 두게 된 1926년에 <황야의 이리>를 쓰기 시작한다.

1892년 자살까지 기도했던 열다섯 살의 헤세를 제외하면 1916년과 1926년, 헤세는 개인사적으로 두 차례 실존적 위기를 경험하며 <데미안>과 <황야의 이리>는 그 증상과 극복과정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이해된다. 헤세와 이들 작품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가장 자전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황야의 이리>를 통해서 극심한 방황과 배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헤세는 니논 돌빈과의 동거와 결혼 이후에 안정을 되찾는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는 다시금 익숙한 그 자신의 문학세계로 회귀한 헤세를 만나게 해준다. 헤세는 이후에 <동방순례>(1932)와 <유리알 유희>(1932-43) 등의 작품으로 넘어간다.

그러한 작품세계의 추이를 보건대 <황야의 이리>는 원심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작품으로 여겨진다(자아의 분열과 해체의 양상까지 보여주기에). 자전적인 작품들이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이질적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최근에 다룬 작품들 가운데서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젊은 베르터의 고뇌>)과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도 그러하다. 작가론의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한다...

PS. 헤세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는 베르벨 레츠의 <헤르만 헤세의 사랑>(자음과모음)을 참고하면 되는데 책을 찾지 못해서 작가연보와 함께 박홍규 교수의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푸른들녘)를 참고했다. 박홍규 교수는 그 많은 작품 번역들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헤세 평전이나 체계적인 연구서가 없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헤세 평전이자 전 작품 읽기˝를 시도한다. ‘전 작품 읽기‘로서는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평전으로서는 분량이 너무 적은 편이다(전작 읽기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서다). 향후 더 깊이 있는 연구서가 국내서로도 나오면 좋겠다. 아래 사진은 헤세와 루트 벵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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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기대하는 시집은 김광규 시인의 선집 <안개의 나라>(문학과지성사)다. 오래 전에 나온(현재는 개정판도 절판된) 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민음사)로 처음 만난 이래로 꾸준히 그의 시집을 읽어오다가 언제쯤부턴가 흐지부지되었는데 이번 선집은 복기의 기회를 제공해줄 듯싶다.

개인적으로는 1970-80년대에 나온 초기시들이 가장 좋았다는 생각이다. ‘어린 게의 죽음‘도 그 가운데 하나.

어미를 따라 붙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 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평이하지만 깊이 있는 시다. 언젠가 마광수도 <상징시학>에서 이 시를 고평했는데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난해해야지만 시가 깊이를 얻는 건 아니라는 걸 입증하는 좋은 사례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런 시들이 생각만큼 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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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차 아침에 대구에 내려갔다가 늦은 저녁에야 귀가했다. 한주간의 일정이 그렇게 일단락되었고 나는 녹초가 되었다. 바쁘게 지나갔지만 꽤 길게 느껴진 한 주였다. 그렇게 또 한 고비는 넘겼다 싶지만 이월된 숙제들이 계속 쌓이고 있다. 강의와 관련해서도 보충할 대목이 많다. 마치 어부가 귀항해서는 어망과 어구를 손질해야 하는 것처럼 끝은 끝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진이 빠진 상태라 어제오늘 배송받은 수십 권의 책에 대한 면접을 미뤄둔 채 자리에 누웠다. 페이퍼 거리도 많이 밀려 있지만 간단한 것만 하나 적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유작 <명암>의 새 번역본이 나왔다는 것. 전집판을 포함해 세 종의 번역본을 갖게 된 셈인데, 나는 아무런 주저없이 바로 주문을 넣었다.

재작년에 소세키 전집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면서 당연히 마지막 시간에 <명암>을 읽었는데 기회가 닿으면 이 미완성작을 다시금 음미해보고 싶었다. 내가 꼽기에 <명암>은 <그후>와 함께 소세키 문학의 최대치다. 강의에서는 주로 <산시로>나 <마음>을 다루는데 <산시로>를 건너뛰면 그 다음 작품인 <그후>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고, <마음>은 정확하게 소세키 문학의 의의와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명암>은 마지막 작품이지만 놀랍게도 하나의 세계를 종결짓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새롭게 시작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독서의 흔적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어서 개인적으로는 더 흥미를 갖게 된다(‘일본문학에서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 소개되면 좋겠다).

일본문학기행을 이제 열흘 가량 앞두고 있는데 주로 <산시로>와 <마음>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다른 작품도 몇권 다시 읽고 싶다. 강의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은 작품도 서너 편 되기에 아직 읽을 거리는 많다.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렇지만 소세키의 경우에도 강의에서 다루지 않은(그래서 자세하게 읽지 않은) 작품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된다. 마치 맛있는 딸기타르트가 아직 남아있는 것처럼.

오늘은 비록 기진하여 누워있지만 내일 읽을 책과 내주에 받아볼 책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이런 것도 불치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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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여러 무대에 오르고 있다. 뮤지컬로도, 발레로도. 국립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는 지난해 11월초에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되었는데 뒤늦게 안데다가 일정이 맞지 않아서 관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회를 다 놓친 건 아니어서 다음달 2일 저녁 대전예술의전당 공연은 보게 될 것 같다. 당일 오후 원작을 소개하는 강의를 요청받아서다.

발레 버전의 <안나 카레니나>는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공연으로 한 차례 본 적이 있다. 찾아보니 2009년이었다. 이번 국립발레단 공연은 강수진 예술감독의 지휘하에 크리스티안 슈푹이 안무를 맡았다. 발레 애호가들뿐 아니라 <안나 카레니나>의 독자들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원작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대다수?) 미리 읽어두는 것도 공연을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강의는 그 대용이다.

한편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지난 10일 막이 올라 2월 25일까지 공연된다. 전세계 라이선스 초연이라는데 어떻게 무대화되었는지 궁금하다. 2월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가봐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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