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헤세의 <황야의 이리>(1927)를 강의에서 다시 다루었다. 그 설거지에 해당하는 페이퍼인데, 교재로 쓴 민음사판 해설의 오타를 교정하려 한다. ˝1924년 1월 헤세는 바젤에서 두 살 연하의 루트 벵어와 두번째 결혼을 한다.˝(319쪽)는 대목인데 두 살 연하가 아니라 스무 살 연하다.

루트 벵어(혹은 뱅어, 벵거까지 표기가 통일돼 있지 않다)는 1897년생이고 1877년생인 헤세와는 정확히 20년 차이다. 헤세는 루트의 엄마와 교분을 갖다가 그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첫번째 결혼생활(1904-1923)이 파경에 이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 두번째 결혼생활은 더 불행했고 두 사람은 1년만에 별거하기 시작하여 결국 1927년에 이혼했다(그 즈음 동거하던 니논 돌빈과 헤세는 1931년에 세번째 결혼을 한다. 열여덟 살 연하였던 니논은 여생의 반려자가 된다).

결혼생활의 이력을 적은 것은 헤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데미안>(1919)과 <황야의 이리>는 모두 결혼생활의 파경을 배경으로 한다. 1차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에 헤세는 아버지를 여읜데다가 아내와 막내아들이 정신질환을 앓게 되자 자신도 심리치료를 받게 된다(알려진 대로 융의 제자로부터 정신분석을 받고서 치유효과를 경험한다). <데미안>은 그러한 경험을 배경으로 하여 쓴 작품으로 헤세에게는 작가로서 새로운 출발(재탄생)의 의미를 갖는다.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헤세는 독자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말했다).

헤세의 첫번째 아내는 여성 사진가였던 마리아 베르누이(1868-1963)로 헤세보다는 아홉 살 연상이었다. 체구나 기질이 헤세의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니까 흔히 하는 말로 모성의 결핍을 채워준 여성이었다. 1904년에 결혼하여 두 사람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지만 1923년에 이혼한다. 앞서 적은 대로 그 이후에 헤세는 루트 벵어와 재혼하며 이 두번째 결혼마저 파경에 이르고 나이는 벌써 쉰을 목전에 두게 된 1926년에 <황야의 이리>를 쓰기 시작한다.

1892년 자살까지 기도했던 열다섯 살의 헤세를 제외하면 1916년과 1926년, 헤세는 개인사적으로 두 차례 실존적 위기를 경험하며 <데미안>과 <황야의 이리>는 그 증상과 극복과정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이해된다. 헤세와 이들 작품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가장 자전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황야의 이리>를 통해서 극심한 방황과 배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헤세는 니논 돌빈과의 동거와 결혼 이후에 안정을 되찾는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는 다시금 익숙한 그 자신의 문학세계로 회귀한 헤세를 만나게 해준다. 헤세는 이후에 <동방순례>(1932)와 <유리알 유희>(1932-43) 등의 작품으로 넘어간다.

그러한 작품세계의 추이를 보건대 <황야의 이리>는 원심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작품으로 여겨진다(자아의 분열과 해체의 양상까지 보여주기에). 자전적인 작품들이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이질적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최근에 다룬 작품들 가운데서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젊은 베르터의 고뇌>)과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도 그러하다. 작가론의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한다...

PS. 헤세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는 베르벨 레츠의 <헤르만 헤세의 사랑>(자음과모음)을 참고하면 되는데 책을 찾지 못해서 작가연보와 함께 박홍규 교수의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푸른들녘)를 참고했다. 박홍규 교수는 그 많은 작품 번역들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헤세 평전이나 체계적인 연구서가 없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헤세 평전이자 전 작품 읽기˝를 시도한다. ‘전 작품 읽기‘로서는 의미 있는 시도이지만 평전으로서는 분량이 너무 적은 편이다(전작 읽기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서다). 향후 더 깊이 있는 연구서가 국내서로도 나오면 좋겠다. 아래 사진은 헤세와 루트 벵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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