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수년만에 다시 강의에서 다루면서(이번에도 전체 7권 가운데 2권까지 읽는다) 나보코프의 <문학 강의>와 함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유제프 차프스키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를 읽는다(저자가 포로수용소에서 진행한 프루스트 강의다). 두권 모두 그 사이에 나온 책들.
‘프루스트와 톨스토이‘라고 제목을 적은 건 차프스키가 비교하고 있어서인데, 비교대상은 <전쟁과 평화>의 서두다. 러시아 상류 사교계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소설이니(영화도 마찬가지다) 역시나 사교계를 정밀하게 묘사하는 프루스트 소설과의 비교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 착오가 있다.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초반부에서 20여 페이지나 할애하여, 러시아 황후를 어머니로 둔 귀족 부인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가 그녀의 집에서 연 야회를 묘사한다. 그는 칭찬 뒤에 숨은 계략과 그것이 풍기는 분위기를 거장의 솜씨로 탁월하게 그려낸다. 이로써 우리는 안나 파블로브나에게 초대받은 귀족들의 세계를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접한다. 톨스토이는 바질 왕자와 야회를 연 여주인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제1장의 첫 두 페이지만에 이 걸작이 품은 정교함을 보여준다.˝(77-78쪽)
정말로 <전쟁과 평화>의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등장하는 인물이 안나 파블로브나인데 역자가 엉뚱하게 옮겨놓았다. ‘러시아 황후를 어머니로 둔 귀족부인‘? 어머니가 황후이면 황제의 오누이이자 공주라는 건가? 안나 파블로브나는 당시(알렉산드르 1세 치세) 황제의 어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파벨 1세의 아내이면서, 남편의 뒤를 이어 차례로 즉위하는 두 아들,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의 어머니다), 즉 ‘황태후‘의 측근이었다. 이른바 ‘황실 실세‘(조선시대로 치면 제조상궁쯤 될까?). 그래서 그녀가 여는 야회에 고관대작들이 줄지어 참석하는 것이고, 여주인인 그녀가 바실리 공작을 맞이하면서 건네는 말이 첫 대사다.
‘바질 왕자‘는 ‘바실리 공작‘(바실리 쿠라긴 공작이다)을 잘못 옮긴 것인데(바실리의 불어 이름이 바질인 걸 감안하더라도) 이 두 사람이 사교계 고수끼리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영화에서도 첫 장면에 해당한다. 아래는 BBC판 <전쟁과 평화>(2016)에 등장하는 안나 파블로브나(<엑스파일>의 스컬리 역으로 친숙한 질리언 앤더슨이 배역을 맡았다)와 바실리 쿠라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