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6월 모스크바 통신문에 '몰락 이후: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란 글을 띄운 적이 있다. 다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탈린시대 러시아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가 눈에 띄길래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둔다. 본문에 밝혀져 있지만, 초고는 2000년 봄에 작성된 것이다. (*)표시하에 덧붙인 코멘트들은 2004년의 것들과 이번의 것들이 혼재돼 있다. 어차피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므로 그 정도는 굳이 가려놓지 않았다.

자료파일을 뒤적이다가 몇 년 전에 쓴 글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둔다. 아마도 2000년 봄에 작성된 듯하다. 한 ‘행사’에서 ‘학술’발표 요청을 받고 쓴 것이지만, 전혀 ‘학술적’이지 않으며, 청중 몇 명 없는 발표장에서 그냥 읽어 내려갔던 글이다. 이후 글의 일부를 한두 곳에서 더 읽은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론 자신을 둘러보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고, 몇몇 대목은 아직도 유효하기에 보존해 두고자 한다. 글의 말미에 적었듯이, ‘몰락 이후’에 대해서 좀더 부피/규모 있는 이야기를 하고픈 욕망과 해야 할 의무를 나는 느끼지만, 지금 당장은 여건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스크바 체류 기간 동안에 한번쯤 생각을 다시 정리해볼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럼, 한번 더 읽어나가도록 하겠다(참고로, 발표문의 각주를 본문에 삽입하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그리고 새로 붙인 ‘군말’에는 *를 달았다).



 

 

 

먼저, 이 글에 대한 몇 가지 기대를 접어둘 것을 부탁하고 싶다. 나는 소위 ‘몰락 이후’ 러시아문학의 최신 동향에 대해 알지 못하며(*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 최신 동향이란 건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키는데, 이와 관련된 책 몇 권을 샀지만, 아직 읽어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문학의 현재적 의의에 대해 강변할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직도 러시아문학인가?”라는 물음은 얼마 전부터 내가 주변의 동료들이나 나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며, 그에 대하여 내가 마련한 ‘대답’은 지극히 사적인 고백의 형식을 띠고 있다.

나는 주로 지난 8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한 일이십 년의 세월을 회고하면서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져온 파장의 몇 대목을 짚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나는 제목에서 제기한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응전의 ‘행태’가 러시아문학을 바라보는 한 가지 유효한 시선으로서 평가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럼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젊은 날, “나이가 좀 어리기 때문에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늙은 사람들이 머리 속에 집어 넣어준 돌자갈 같은 관념들을 바닷물 속에 비스듬히 쏟아버린 후로는 늘 멍청해서 거리를 걸어다닌다.”(이제하)는 문구를 모토처럼 되뇌고 다녔다. 그때 나는 30세 이후의 삶이란 왠지 부도덕하게 여겨졌고(이반 카라마조프도 그런 생각을 한다), 따라서 30세 이후의 ‘여생’에 딱히 무얼 해보리란 계획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요즘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리고 물론 그 대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다만 멍청했던 것이고, 아무런 믿는 구석이 없다는 것이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행복한 삶’(사실 이건 모순 형용 아닌가? 마치 ‘도덕적 자본주의’란 말처럼. 삶의 결핍과 고통 속에 놓여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삶을 ‘의식’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행복한 삶’이란 삶에 대한 아무런 의식도 갖고 있지 않은 삶이다. 자먀찐(E. Zamyatin)의 분류를 빌자면, ‘행복한 삶’은 ‘살아있고-죽어있는(alive-dead)’ 삶이다. 반대로 ‘살아있고-살아있는(alive-alive)’ 삶이란 모순과 고통, 실수로 뒤범벅이 된 삶이다!)이란 곧 “장례절차만이 남아있는 삶”이라고 떠들어대곤 했으니 행복과 그다지 인연이 없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다(*자먀찐의 에세이에 나오는 내용인데, <우리들>의 국역본 개정판에는 이전판에 실려 있던 이 에세이가 빠져 있다).

(*)나는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행복한 사람은 삶을 ‘의식’하지 않는다. 즉, 당신이 행복을 ‘의식’하는 순간, 행복은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 ‘의식’은 언제나 병과 죽음으로 우리를 이끌며, 행복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구를 빌자면, “의식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네.” 좀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행복은 의식의 대상으로서 현전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대되거나 회고될 뿐이다.

또 그때는 시대를 탓할 만도 했다. 그리고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공화국이 바뀌었고,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디지털 혁명이 진행중이고, 사람들이 떼로 죽거나 말거나 세계 인구가 60억을 넘어섰다. 어제로써 20년이 된 5.18 또한 점차 빛 바랜 기억이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2000년 5월 19일 시점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겠다). 이렇듯 다들 바뀌는 틈에 나도 좀 바뀐 행세를 해야 했다(디오게네스의 일화? 이 ‘통아저씨’ 디오게네스가 하루는 보아하니 주변의 시민들이 전쟁준비로 모두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이 디오게네스, 열심히 자기 통을 굴리고 다닌다.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디오게네스, 남들이 하는 건 그도 한다).

이젠 나이가 어린것도 아니기 때문에 마냥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도 없어서 나는 제법 아는 체도 하고 다닌다. 대략 이런 것들이 내가 그동안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면서 ‘겪은바’인데, 아직은 그것에 적당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겠다. 그래서 그냥 ‘세월’이라고 불러본다. 그 세월에 대한 이야기에 ‘몰락 이후’란 제목을 붙인 것은 그것이 세상을 보는 나의 기본적인 시각이면서도 동시에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물론 ‘몰락 이후’라는 건 동구권 붕괴 이후의 국제정세를 가리키는 ‘사회과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아직도’라는 건 이 글의 주제와 장르를 암시하는 바, 이어질 이야기의 주제는 ‘미련’이며, 장르는 ‘타령’이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객담에 황지우, 장정일 두 시인/작가의 이야기를 끼워넣은 것은, 내가 보기에 그들이 각각 지난 우리의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할 만한 ‘반체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좀스런 문학을 싫어하는 나는 ‘반체제작가’들을 좋아한다. *‘순체제작가들’이란 게 있다면).

시적 규범의 해체를 통한 ‘파괴의 양식화’(“나는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라고 황지우는 말한다. 왜냐고? 기존 권력-질서(그가 ‘끔찍한 모더니티’라 부르는 것)에서 건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개인-시민에 대한 공권력의 부정하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은 얼마 되지 않는다)와 ‘포르노그라피적 상상력’을 통한 ‘신버지’(신+아버지)에의 모욕(종교적 권위와 국가 권력은 ‘상징적 아버지’로서 장정일에게서 동일한 의미연관을 가지며 따라서 줄기찬 공격대상이 된다. 장정일 문학을 이끌어가는 힘은 모든 ‘아버지’에 대한 증오이며 적의이다.)은 지난 세월의 먼지를 털고 한번쯤 되새겨 볼 만한 문학적 성취에 속한다고 나는 믿는다.

#새들은 세상을 뜬다지만…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의 젊은 시인 황지우의 시 한편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아 세월은 잘 간다./ 눈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 속으로./ 잘 간다.”('活路를 찾아서') 80년 광주의 무참한 기억으로부터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던 세대에게서, 그리고 시인에게서 과연 활로란 무엇이었던가? 그저 세월이 아니었을까?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본다.”의 세월, 그 백치 같은 ‘무참한’,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만 기억의 무참함은 다스려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했는지도. 적어도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긴 그 세월의 관성이란 얼마나 끈덕지며 무서운 것인가!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데워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살찐 소파에 대한 日記')라고 이젠 살찐 중년의 시인은 적고 있다.(<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1998)

생각건대, 태초에 세월이 있었고, 하품이 있었다. 이 세상의 유구함을 만들어내는 데는 이 세월의 하품, 혹은 하품의 세월을 당해낼 자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과 더불어 말한다. “나, 이번 生은 베렸어/(...) 그래, 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한번 ‘베린’ 생은 눈먼 세월의 품안에서 가고 또 잘 갈 것이다.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걸 눈뜨고 보아주는 일이다. ‘흐린 酒店’에라도 걸터앉아서 말이다. 이 한세상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새들뿐이었다.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날아가는 새들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낄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날아가는 새들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우리는 그저 주저앉을 뿐이다. 하여, 우리는 ‘닭’이고 ‘닭대가리’이다. 무얼 더 궁리해볼 것도 없이 우리의 운명은 그걸로 싸다. 이걸 ‘몰락’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몰락(Untergang)의 길은 언제나 이행(Ubergang)의 길이기도 했으니까(<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인생은 유전하는 것이고, 이 몰락을 양식으로 삼아 세월은 또 다른 유구함을 빚어낼 것이다.

#양계장

 

 

 



“한세상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꿈을 잃어버린 세상은, 그런 꿈들이 모두 ‘닭장차’에 실려가 버린 사회는 오갈 데 없이 양계장이다(한 사회학자는 ‘사회의 맥도널드화’로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데, 이 경우는 ‘오리장’쯤이 될까?). 혹 도스토예프스키의 ‘닭장-유토피아’를 떠올리는가? “양계장의 닭들은 멍할 거야. 좆같다고 느낄 거야. 너무 바보같이 살아서 자기가 알인지 닭인지도 모를 거야. 자기만 그런 줄 알고 옆을 둘러보면,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바보 같은 놈들이 수천 수만 마리나 줄지어 서 있는 거야. 하나같이 바겐세일로 산 싸구려 모피 코트를 입고서. 잠을 재우지 않고 알만 낳게 하려고 형광등을 줄지어 빼곡하게 켜놓은 양계장의 좁다란 닭장 속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 있어야 하는 닭들은 자기가 뭐하는 놈인지 진짜 모른다.”(<보트 하우스>)

이 닭들이 꿈꾸는 ‘부르주아 유토피아’를 장정일은 ‘보트 하우스’라고 부른다. 얼음을 재운 콜라를 마시며 비치 파라솔 그늘 아래 긴 의자에 드러누워(혹은 자빠져) 쉬는 보트족!(‘보트 피플’이 아니다!) 문제는 “얼음이 있으면 콜라가 없고 콜라가 있으면 얼음이 떨어지곤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데 있다고 작가는 엄살을 떨지만, 얼음과 콜라 대신에 ‘자유’와 ‘평등’이란 말을 대입해 본다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그래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고” 혁명은 고독한 것이라고('푸른 하늘을', 1960), 일찍이 양계장 주인이었던 시인은 노고지리처럼 노래했던 것일까? 그 시인, 김수영은 또 이렇게 적었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그 방을 생각하며') 이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내겐 또한 “낄낄대면서/ 깔쭉대”는 소리로 들린다. 그것은 바로 피의 소리였고 혁명의 소리였다.



지난 60년대에 그 혁명의 소리가 ‘헛소리’가 되는 데는 불과 몇 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80년대의 힘찬 함성(“깔쭉대는 소리”)이 90년대에 “폼으로 갖다놓고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듯이”(*이 <자본론>은 요즘 상당히 비싼 책이다) 푹석 ‘주저앉는’ 소리로 바뀌는 데에는 십여 년의 세월밖에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1917년 광활한 러시아를 붉은 보자기로 싸서 이 세상 밖 어딘가에 있는 ‘있지도 않은 곳’(유토피아)으로 떼어 매고 날아가고자 했던 러시아 혁명이 털 빠진 미운 오리 새끼 마냥 폭삭 양계장에 떨어지는 데에도 고작 70여 년이 걸렸을 따름이다. 이로써 머리를 굴려 세상을 뒤바꿔보려는 합리적/계산적 이성의 기획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의 열망과 함께 파산을 고한다. 우리 머리로는 안되는 것이고(*‘머리’로는 안되기 때문에 요즘 나오는 것이 ‘욕망의 기획’이다. ‘좆같다는 느낌’으로 세상을 바꿔보려는.), 해봐야 ‘닭짓’인 것. 이걸 몰락이라 부를 수 있을까?

#人神 혹은 슈퍼닭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신들에 의한, 신들을 위한, 신들만의 공화국이었다. 아니 신들의 공화국이고자 했다. 어디 레닌과 스탈린뿐이었겠는가? 사회주의 러시아가 섬기던 신들, 혹은 신적인 인간들. 가령, 7톤의 할당량 대신에 102톤의 석탄을 캐어 낸, 1935년의 전설적인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는 또 다른 ‘강철 인간’, 즉 스탈린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요구한 것은 ‘닭들’이 아니라, 이 신적인(혹은 神格의) ‘기계들’이었다. 이러한 신적 존재들에 대한 열망은 러시아 민족/민중의 깊은 종교적 열망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들은 신적인, 그래서 비인간적인 존재를 열망하였고, 신격에 못 미치는 인간들, 즉 ‘벌레들’을 강제 수용소로 내모는 데 주저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는 ‘인간-닭’의 멸종과 더불어, ‘슈퍼닭’ 혹은 人神(Man-God)들의 도래와 더불어 개시될 어떤 것이었다. 여기에 휴머니즘이 끼어들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값싼, 게다가 통속적인 센티멘탈리즘이 끼어들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이란 종의 사회주의적 종자개량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저명한 반체제작가인 V. 보이노비치의 소설(<이반 촌킨의 모험>)에서 소비에트의 한 아마추어 생물학자는 감자 뿌리에 토마토 열매를 맺는 종자 개량 프로젝트에 ‘사회주의로의 길’이란 이름을 붙이고 매진하지만, 그가 절반의 성공 끝에 얻어낸 것은 ‘토마토 뿌리에 감자 줄기’였다. 문제는 이것이 비아냥거림만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데 있었다.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만 한단 말인가?(*한 인간의 삶은 완전한 사회주의의 도래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짧다!)

그 기다림 속에서 ‘완전한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는 점차 고도(Godot)를 닮아갔고, 소비에트 사회는 점차 부조리한 사회로 변모해 갔다. 그러는 사이에 간혹 ‘수용소군도’의 생활이 폭로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가 제기됐다. 그것이 몰락의 징후였던가? 아니면 값싸고 통속적인 인간적 자질(그것도 자질이라고 한다면)이란 것이 떨쳐내야 할 부르주아적 속성이 아니라, 끝내 떨쳐낼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일부였던 것일까?

아무튼 언제부턴가 소비에트 러시아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신들은 권태를 이겨내지 못했고, 人神들의 금욕은 ‘당근’의 생산량을 늘리는 데 실패했다. 사회주의는 유토피아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이행이면서 동시에 몰락이었던 것이다. 몰락, 그것은 다시 ‘인간-닭’들에게로 되돌아가는 여정에 붙여진 이름이다.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살 줄을 모르는 자들, 그들이 바로 ‘우리-닭’들이다. 몰락, 그것이 우리-닭들의 운명이다: “양계장의 닭들은 멍할 거야. 좆같다고 느낄 거야. 너무 바보같이 살아서 자기가 알인지 닭인지도 모를 거야...”

#안나 까레니나

 

 

 



그렇게 시작되는 <보트 하우스>는 작가가 “소설가로서의 나의 희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는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한 권의 장편소설을, 단숨에 써버리는 것”이라며 써내려간 소설이다. <죄와 벌>을 패러디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서울 소재의 사립대학교의 졸업반”인 한 여주인공 애라는 ‘고르비 영감’이 주인으로 있는 신촌의 화엄전당포를 찾는다. 그녀는 “숨가쁘게 넘겨온 고학 생활의 마지막 1년을 견디지 못하고 휴학에 들어갔”는데, “작년 이맘때만 해도 그녀의 장래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녀가 다니는 대학은 우리 나라에서 서너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인데다가, 학과의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앞으로 활발하게 진행될 러시아와의 교역을 생각하면 졸업 후에 괜찮은 직장을 고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IMF를 맞이하여 그녀가 맡고 있던 과외가 모조리 떨어져 나갔고, 휴학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고물딱지 사진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전당포를 순례하게 된 것. 그녀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네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영화를 좋아하는 타르코프스키. 문학을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미술을 좋아하는 칸딘스키.”가 그들이었다. 이 “네 명의 ‘스키’는 단돈 5만원을 주고 산 폐차 직전의 차를 타고 4년 동안 함께 단짝이 되어” 어울려 다녔는데, “강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빨아, 강남에 부르주아의 천국을 만든 거”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한 건을 계획한다.

“‘스키’들이 정한 곳은 압구정동에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당도했을 때는 거리에는 차량과 인파가 붐볐고 백화점은 아직까지 영업중이었다. 유럽식 외관을 하고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의 대리석 벽에 넷이 나란히 오줌을 누기 위해서는 유치장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에코와 푸코 그리고 바흐친을 이리 저리 섞고 아전인수식으로 변조하여 장래의 문화평론가로 행세하게 될 노어노문학과의 네 ‘스키’들은 전혀 그런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었다. 길거리에 방뇨를 하는 것은 꺼림칙하지 않지만 파출소에 붙들려 들어가 경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맥주와 보드카까지 섞어 마신 ‘스키’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백화점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서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그러면서 “너무나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체제 친화적이 되었다.” 이들과 같이 차를 타고 동행하던 애라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차에서 내려 인도로 뛰어가는데, 그런 “까닭을 이 멍청한 ‘스키’들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어떤 현상도 자신들이 분석하지 못할 게 없다고 믿는 이 시건방진 ‘스키’들은 그 가운데 한 명의 ‘스키’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흠, 알 수가 없는 여자군. 안나 까레니나야.”



이어지는 얘기에서, 여대생 라스콜리니코프, 애라는 자신을 탐하는 고르비 영감을 남근 모양의 수석으로 내리치고 몇 푼 훔쳐내어 도망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죽지 않고 되살아난 고르비 영감은 초능력자였고, 애라는 그의 성적 포로가 된다(그게 그녀의 '벌'이다). 그리고는 장정일적인, 거짓말 같은 황당한 포르노그라피가 이어진다. 이것은 어중이떠중이 사회주의자 ‘스키’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면서 동시에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종교적 화해에 대한 포르노적 희화화일 것이다(장정일은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적 유토피아 모두에 회의적이다. 그가 가장 믿는 것은, 그의 소년시절과 관련 깊지만, 매를 때리고 맞는 감각의 확실성이다. SM, 그 고통의 체험 속에서 그는 구원의 빛을 본다)...

#나 다시 돌아갈래!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절세 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인데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여” 작가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이 노래에서 따온다. 허만수(고르비 영감)와 김대신(빼갈), 그리고 애라. 에라, 우리도 한번 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이다. 그것을 나는 앞에서 ‘세월’이라고 적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여자들’ 말고 또 있다면 그것은 ‘세월’이다. 그리고 ‘운명의 힘’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세월의 힘’이다. 아, 무정의 세월이여, 몰락의 세월이여...

그리하여 다시 양계장. 세월이 주인인 이 이 양계장에선 언제나 ‘모피를 두른 닭’과 ‘털 빠진 닭’ 들이 서로의 문화적/상징적 폭력(대학이라고 해서 크게 예외는 아니다. 다만 그런 문화적/상징적 폭력(P. 부르디외)에 대해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대학이란 공간은 마련해 줄 따름이다. 지금 이 자리도 마찬가지의 뜻을 갖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며 삶의 퇴폐와 부패가 명패를 바꿔차는 것도 아니다), 즉 ‘쪼기’와 발길질을 교환하며 다투고 있을 따름이지만, 간혹 우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회한에 젖어들 때도 있는 법이다.

 

 

 

 

2000년 벽두부터 “나 다시 돌아갈래!”(<박하사탕>)라고 절규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아, 언제였던가(80년대 중․후반의 정서? 영화 <겨울나그네>에서 “나 다시 시작하고 싶어!”라는 민우(강석우)의 대사,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강석경의 <숲속의 방>, 그리고 주윤발 주연의 <영웅본색>. 덧붙여 이대근, 원미경 주연 <변강쇠>류의 코믹 에로영화들)!...



소비에트 러시아가 아직 ‘페레스트로이카’란 달빛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을 때 나는 대학에 들어왔다. 우리는 고르비 아저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탐독하면서, 사회주의의 몰락과 해체보다는 ‘강화된’ 사회주의의 장래를 믿고 싶어했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남한의 제 5공화국(그것도 ‘공화국’이라고 한다면)이 그렇게 빨리 붕괴될 줄 몰랐으며, ‘마지막 제국’인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에 대한 예견들을 미심쩍어했다(*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새로운 현실>이란 책에서 그런 예견을 했었다).

 

 

 

 

하지만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을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복학하기가 무섭게 사회주의 러시아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러시아혁명사>를 맘잡고 한번 읽어보기도 전에, 러시아 혁명은 그렇게 파산해 버렸다. 정말 여기엔 한 푼의 에누리도 없었다! 그리하여 들이닥친 몰락 이후. 몰락 이후의 생존? 이 몰락과 파산의 잿더미 속에서, 그래도 뭔가 값나가는 것이 없을까 뒤적거려보는 이들도 나는 더러 보았는데, 그들은 ‘낭만주의자’이거나 ‘넝마주의자’이다.

아마도 80년대는 ‘총체성’의 원조, 루카치의 년대로 기록될 수 있으리라. 나는 열아홉 살에 강의실에서, 과사무실에서, 루카치란 이름이 읊어지는 걸 들었고, 학술 심포에 가서 루카치와 브레히트의 논쟁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성사적 논쟁이라는 걸 ‘학습’했다. 비록 루카치주의자들(‘스키’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러시아 문학은 오직 1917년의 시점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그의 단언은 감동적이었다.

 

 

 

 

1917년 이전의 러시아 문학은 모두 그리로 수렴되고, 1917년 이후의 문학은 모두 그로부터 발산한다는 것. 이것은 말 그대로 문학사의 ABC였다. 문학사란 역사적 준거시점으로부터의 회고이며 전망인 것이기에. 그 밖에 내가 아는 문학사란 잘난 작가들과 못난 작가들의 ‘가족 로맨스’뿐이다(*가령, 해롤드 블룸의 <영향에의 불안>을 보라).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90년대는 ‘대화성’의 비조, 바흐친의 년대로 기록될 수 있을까? 적어도 몰락 이후에 루카치의 굵고 쉰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에 역사의 종언론과 대화주의만이 다성악처럼 울려퍼졌다.

 

 

 

 

도대체 1989년, 혹은 1991년 이후의 러시아 문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오 러시아여, 너는 어디로 가려느냐)? 1917년의 시점은 이미 유효기간을 상실했고, 1991년이 시점은 아직 전망을 얻고 있지 못한 처지에서 우리는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외로운 까마귀 신세가 되어 버렸다. 분명 뜨긴 떠야만 할 텐데, 떼어 맬 세상조차 오리무중일뿐더러, 떼어 매고 가야 할 세상밖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리하여 몰락 이후에 우리는 망연자실 막연히 존재하고 있을 따름. 그러는 사이 우리의 삶은 어느새 ‘전당포 주인’들에게 접수 당한 듯하다. 그 덕분에 우리의 여생은 많이 좀스럽게 돼 버렸다.

# 믿음이 없는 새

 

 

 



몰락이라고? 무엇이 변해 버렸는가? 사실 변한 건 없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나빠졌을 뿐.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사실 나는 이 나라 바깥 구경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내가 몰락 이후 러시아의 현실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어폐가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몰락 이후 러시아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요즘 구경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물결을 탄 자본과 권력의 반격은 민족과 사회에 헌신하고자 하는 인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도덕공동체를 해체시켰고,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가족의 문제에만 신경을 쓰면서 ‘사회가 없는 듯이’ 행동하는 ‘규범부재’, 편법과 편의, 파렴치한 세상을 만들었다.”(김동춘, <근대의 그늘>)는 진단이 전혀 낯설지 않듯이 말이다.



“너무 짧은 기간에 지나치게 부유해지고, 지난 1000년 동안 보다 최근 30년 동안에 더 많은 변화를 겪은” 나라, 혹은 ‘거품 공화국’에 살면서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 대한 믿음도, 문학에 대한 믿음도 턱없이 부족한 터에,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를 묻는 것은 그런 오락가락하는 정신상태에서이다. “믿음이 없는 새는/ 어떤 몸짓의 날개를 치며 날아야 하는가를.”(김춘수) 간구해 보지만, 어떡할 것인가, 우린 ‘닭’인 것을!...

#편집증이냐 분열증이냐



 

 

 

중언부언 몰락의 회고 속에서, 회고의 불가피한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이다. 먼저, 편집증 환자의 길.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게 이들의 구호이다. 러시아문학에 손발을 들여놓은 이상, 손을 씻을 수도 없고, 발을 뺄 수도 없다는 것. 예컨대, 마약을 거래하는 건달들의 두목으로 등장하는 ‘빼갈’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들먹이며 ‘넘버3’ 류의 일장 연설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말야. 노인은 고기의 살점을 모두 빼앗길 걸 알면서도 상어떼와의 대결을 포기하지 않은 거야. 녹초가 되어 부두에 배를 매었을 때는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어. 하지만 노인은 아무 미련없이 끄덕끄덕 자기 오두막으로 기어들어가 모든 걸 잊어버린 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을 자는 거야. 그리고 꿈속에서 노인은 또 다시 사자 꿈을 꾸는 거야. 이 소설을 통해서 헤밍웨이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알아? 전부가 아니면 무다! 생이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거다! 헤밍웨이는 그런 메시지를 던졌던 거야. 또 바로 그게 나의 좌우명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왜, 손씻는다. 발을 뺀다하는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지 알겠지? 나는 세상에서 그런 놈들이 김일성이보다 더 미워. 진정한 프로는 끝까지 가는 거야. 진짜 복권에 미친놈은 오늘 복권에 1등 당첨이 되어도 그 다음날 또 길거리에 나가서 복권을 사는 거야...”



“그러니 비치 파라솔 밑에 누워서 얼음 재운 콜라 따위나 홀짝이고 있고 싶지 않은 거지. 씨팔, 보트가 있으면 타고 나가야지 왜 창고에 처박아 두고 보기만 하느냐 이거야. 노를 저어 갈 힘이 있으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거지 무슨 보트 하우스 타령이야. 헤밍웨이를 봐. 사냥도 낚시도 타자기를 누를 힘도 없으니까 총을 입에 물고 탕, 해버리잖아. 죽기 전에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는 거야. 이제 써지지 않는다, 이제 써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탕! 이게 프로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해체로 인하여 많은 ‘스키’들이 잠적하거나 침묵했지만, 입에 총을 물고 “탕!”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저 모두들 보무도 당당하게 공공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 한번 갈기고 너무도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주식에 재미를 붙이고, 벤처로 떼돈을 벌면서 자본주의에 적응해 갔다. 비록 러시아 문학이 앙상한 뼈다귀만 남더라도 끝까지 갈 만한, 갈 데까지 갈 만한 ‘노인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편집증 환자의 길, 즉 프로의 길이 아니라면? 분열증 환자의 길이 있다. 장정일의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는 한 여인을 사랑했으나,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해 그녀의 언니와 결혼, 처제와 형부라는 가족 관계를 맺음으로써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려고 한 사내 ‘나’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이 정신분열증적인 주인공 ‘나’는 회사의 부장으로 승진하지만 삶의 비상구를 찾기 위해 스티로폴을 타고 강물을 따라 어디론가 떠내려 간다. 그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이 스티로폴이 상징하는 표류의 이미지가 내게는 몰락 이후 러시아의 운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운명인 것으로 읽힌다(*우리는 ‘스티로폴 피플’이다).

 

 

 



‘러시아의 최초의 철학자’ 차아다예프는 명민하게도 러시아의 운명을 ‘사생아의 운명’으로 규정한 바 있다(<철학서한>). 키예프-러시아, 모스크바-러시아, 타타르-러시아, 표트르의 러시아, 소비에트-러시아, 그리고 옐친과 푸틴의 포스트소비에트-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아버지-찾기와 아버지-되기는 험난한 여정을 헤쳐왔다. 러시아(문학)에서 모태(母胎)로서의 ‘어머지-대지’와 정체(政體)로서의 ‘아버지-이념’ 간의 관계는 흥미로운 연구주제이다.

(*)지난 6월 7일, 그러니까 푸슈킨의 205주년 생일 다음날이 차아다예프의 탄생 210주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즈베스찌야>의 한 칼럼에서 지적된 대로 러시아에서도 거의 잊혀져 가는 존재인 듯하다. 6월 1일은 작곡가 글린카의 생일이었는데, 이 세 사람, 차아다예프-푸슈킨-글린카는 동세대 이념의 스펙트럼을 잘 보여주는 트리플이다. 진보-중도-보수. 물론 <철학서한> 파문 때문에, 황제에 의하며 정신병원에 감금된 ‘광인’ 차아다예프의 이념적 입장은 때로 모호하며 수수께끼이지만.



분명 몰락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아마도 문학 또한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문학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문학이 될는지도 모른다. 사실 19세기 중반에 탄생한 러시아 근대문학이 20세기 후반에 죽음을 고했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닌 듯싶다. 예술사가 보여준 바, 모든 예술은 역사의 품안에서 성장하여 나이테를 늘려가다가 역사의 껍데기 안쪽에서 소멸해 가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죽음 이후의 문학은 유산(遺産)으로서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대학 강의실에서 소수 관리자들에 의해 방부처리되어 보존될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문학에 대한 사랑은 점점 더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를 닮아갈 것이다(Poor Yorik!).

해서, 몰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문학이란 별의 몰락/사멸에서와 마찬가지로 거리에 의한 시간차에 기댄 것이기 쉽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했지만, 그 부고(訃告)가 우리에게 날아드는 데 막간의 시간이 소요되고 있을 따름이며(20세기 중반에 가장 큰 화제를 뿌린 러시아(출신) 작가와 작품이라면, 나보코프의 <롤리타>(1955),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1957),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이 세 작품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실 혹은 정치와 맞서며 러시아 문학의 죽음/단절과 부활/연속성을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몰락 이후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떠나는” 우리, 센티멘탈-쟈니의 ‘떠남’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 하여도,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의 사랑, 나의 적의

“이제 나는 안다. 해변가에서 반바지와 소매없는 티 셔츠를 입은 채 파라솔 아래 펴놓은 긴 비치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얼음 재운 콜라를 마시는 순수한 날이 내게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 글들을 쓰게 하는 것은 내 적의라는 것을.”(장정일과 마광수의 차이는 바로 이 적의의 있고 없음의 차이다.)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에 대한 ‘적의’와 이젠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적의를 밑천 삼아 내친 김에 이제껏 “손 한번 못 댄 세월”에 언젠가는 손을 봐주고 싶다. 그 세월의 무덤 속에서도 간혹 겨드랑이가 가려운 걸 나는 참지 못할 테니까...

이젠 마치기로 하자. 언젠가 ‘몰락 이후’에 대해, 역사의 ‘부록’에 대해, 나의 ‘여생’에 대해 그에 걸맞는 부피와 규모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데끼리!

04. 06. 23.



P.S. 이 글을 정리한 날은 김선일씨 살해 소식으로 아침부터 기분이 침울해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직도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겠다. 이 전지구적 ‘야만의 시대’를 어떻게 손봐야 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제(24일) 모스크바영화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상영되었던 ‘두 공산주의자’ 감독의 한국영화 <자본당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는 아주 단순하게(그래서 상투적으로),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손쉬운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모스크바의 크레믈린궁 앞에 서 있는 마르크스 동상. 단대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다.



자본주의의 안락(coziness)을 고려하지 않는 비판은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예찬만큼이나 공허하다. 자본주의의 안락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본주의가 가장 ‘천박한’ 경제시스템이긴 하지만, 그것은 ‘천박한’ 인간의 본성과 요구에 잘 부응하는 시스템이다(돈에 의한 차별이 신분이나 인종에 의한 차별보다 더 천박하거나 야만적인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한편의 인간들을 야만적으로 착취하지만 다른 한편의 인간들에겐 최고의 안락한 ‘서비스’를 제공한다(서비스=착취). 거꾸로 말하면, (이론적으로) ‘착취 없는 사회’는 (실질적으로) ‘서비스 없는 사회’이기도 하다(*이 서비스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룬 바 있다). 과거 소비에트 사회주의에서처럼(러시아에서 ‘서비스’란 개념은 자본주의화 이후에 들어온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다).

서비스 대신에 들어서는 것은 ‘무표정한 의무’(=기계들)이거나 ‘자발적인 헌신’(=천사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지는 세 가지이다. (1)천박한 (인간들의) 사회 (2)기계들의 사회 (3)천사들의 사회. 물론 당신이 인간이라면, ‘인간적’으로 가장 나쁜 사회는 ‘천박한 사회’이다. 하지만, 당신이 기계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라면,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건, 최악이지만 그래도 좀 ‘덜 나쁜 사회’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더 좋은 사회’? 그건 ‘기계들의 사회’나 ‘천사들의 사회’이다. 당신이 더 좋은 사회를 기대한다면, 인간과 기계들의 전쟁에서(<터미네이터>)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분명해질 것이다. 휴머니즘은 가장 ‘인간적인’ 이즘이지만, 동시에 가장 ‘천박한’ 이즘이다…

04.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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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2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갈게요.^^

로쟈 2006-05-22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은 과분한데요.^^

푸른괭이 2006-05-22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레믈린 궁> 앞이 아니라, <볼쇼이 극장> 맞은편이에요 ^^

로쟈 2006-05-22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가 거기 아닌가요? 볼쇼이와 크레믈린 사이...

아놔키스트 2006-05-2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글읽기였습니다. 깜빡 잊고 있던 사실 깨닫고 갑니다. "맞아, 닭인 것을.."

로쟈 2006-05-23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닭들이 좀 많습니다...

허리우스 2007-07-30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 그 자체입니다. 찜해 둡니다.

보랏빛소 2020-05-21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로쟈님의 책을 사게 되네요. 인터넷에서 이렇게 유혹적인 글쓰기는 반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