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커넥션>의 맨마지막 문장은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239쪽)이다. 원문은 [T]he whole problem is to believe in a world that includes them[=fools]."(142쪽) 지난주에 거의 한달이 걸린 책읽기를 끝냈다. 다른 일들과 겹치기도 했고, 원서와 꼼꼼히 대조하며 읽은 탓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시간이 걸린 셈인데, 이 글은 그 '책떨이'쯤 된다. 다른 일들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도 얼마간의 마무리는 필요할 듯하다.

'바보들'은 다소 뜬금없을 듯한데, 이 마지막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마지막 문단에서 라이크만이 얘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리아드네, 즉 통제사회에 맞게 적응해서, 전자 뇌-도시 속에서 그것과 더불어 작용하며, 우리의 실존에서 낯설고 독자적인 것에 '긍정'을 말할 수 있고, 예술과 예술의지, 새로운 감각과 감각의 구성을 향한 취향을 불어일으킬 수 있는 아리아드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핍하고 있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우리는 그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 차라리 생성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에 대한, 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 현실화되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우리들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이런 믿음이다. 들뢰즈는, 그것이 바보들을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For what we lack is not communication (we have too much of that), but rather this belief in what we may yet come, and in 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 ourselves and in our relations with one another. That may make fools laugh, said Deleuze - the whole problem is to believe in a world that includes them." 여기서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한 '믿음'의 세 가지 대상은 (1)(우리가) 생성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what we may yet come) (2)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 현실화되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 ourselves) (3)우리들 서로간의 관계(our relations with one another) 등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믿음이 '바보들을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세계(=하나의 세계)를 믿는 일이다?

(*paby님의 지적에 따른 것인데, 믿음의 대상의 두 가지이다. 역자를 잠시나마 따라간 나의 불찰이다. 원문을 내 식대로 다시 옮기면,  "왜냐하면, 우리에게 부족한 건 오히려 우리가 여전히 생성할 수 있는 뭔가에 대한 믿음,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만들어 내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들뢰즈에 따르면, 바보들을 웃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그런 잠재성들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세계를 우리가 믿는 것이다.")

원문의 'them'을 <들뢰즈 커넥션>의 역자는 'fools'로 봐서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 문제의 모든 것(the whole problem)이라고 했다. 이때의 바보들은 '성스런 바보(holy fools)'라도 되는 걸까? 뭔가 심오한 얘기를 하는 것도 같으며, 마지막 문장으로서의 여운도 남긴다. 하지만, '상식적인 논리'에 기대면 좀 이상하다.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 나의 (허술한) 문법 지식은 them=fools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나의 직관은 이 '시적인' 문장을 신뢰할 수 없도록 한다. '그것들'이란 앞에서 믿음의 대상으로 나열한 두 가지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그래야 상식적인 논리상 말이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그렇게 읽는 쪽이 내가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나 같은 '바보'는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오직 '심오한 바보'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가령, 나 같은 '바보'가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들뢰즈 자신이 몸의 조건(phystic condition)이 그를 덮치자 마자"(238쪽)에서 'phystic'이란 이상한/희귀한 원서의 단어를 나는 그냥 'physic'의 오타라고 생각한다. 역자도 그렇게 생각했음 직한데 굳이 'phystic condition'이라고 병기해주는 이유는 뭘까?(이런 게 역자의 '공'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233쪽에서도 '비조직적 판(anorgniezed plan)'이라고 '희한한' 원어가 병기돼 있는데, 이건 'anorganized plan'(138쪽)의 오타이다. 물론 나는 'anorganized'도 'unorganized'의 오타라고 생각하며, (원서에서의) 그 정도 실수는 이해해줄 수 있다고 본다. 하니, 그냥 '비조직적 판'이라고 옮겨주면 될 것을 굳이 오타를 그것도 또다른 오타들까지 보태서 'anorgniezed plan'이라고 병기해주는 이유는 무엇인지?(역자가 한번이라도 다시 읽어본 것일까?) 예컨대, 129쪽에서 '르루아 구랑(Leroi-Gouhran)'이란 인명은 원서의 '르루아-구롱(Leroi-Gouhron)'이란 오타를 교정한 것이다. 그런 정도의 '상식적인 교정'이 왜 다른 사례들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은 것인지?

하여간에 이 번역서에는 그런 식으로 무성의해 보이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역자가 오역들에 대해서는 '상시교정'하겠다고 하니까 추이를 지켜볼 일이지만, 정말로 뒤늦게 '외양간 고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역자가 '이 책의 백미'라고 적극 추천하고 있는 6장에서도 오역들(혹은 '이견들')은 튀어나온다. 216쪽에서 "그것은 '비밀'을 통해 숨겨진 후 드러내지는 것이 아닌 어떤 것이다."란 문장의 원문은 "something that, though 'secret,' is not hidden and then disclosed."(127쪽)이며 역자는 'though secret'(비록 '비밀'이더라도)를 'through secret'로 잘못 보았다. 같은 쪽에서 "'강렬'과 관련해서 현대작품에서 일어나는 일은..."은 "What happens in the modern work, regarded as 'intensive'..."를 옮긴 것인데, 역시나 'regarded as'(-한 것으로 간주되는)를 'as regards'(-에 관련해서)로 잘못 읽었다.

223쪽에서 현상학에 대해 들뢰즈가 이의를 제기하는 대목. 들뢰즈는 베이컨적인 '고기(meat)'와 대비하여 현상학의 '살(flesh)'은 부드럽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이 여전히 분별하려 노력하는 세계의 초월적 개념에 둘러싸이지 않을 때에만, '하나의 삶'의 가능성이 현상학적 '삶의 세계'에서 해방되고 지각을 조건짓는 데 이바지하는 방식에서 해방될 때에만, 감각은 충분히 실험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원문은 "For sensation becomes fully a matter of experimentation only when it is no longer enclosed in the transcendental conception of the world that phenomenology still tries to discern - when the possibilities of 'a life' are freed from the phenomenologial 'life-world,' and the ways it serves to condition perception."(132쪽).

문제는 굵은 글씨로 표기한, 'serves'의 주어인 대명사 'it'을 무얼로 볼 것인가 하는 점. 번역문에서는 "'하나의 삶'의 가능성(들)"이 주어처럼 돼 있지만, 그건 복수 명사이므로 당연히 serves의 주어가 될 수 없다. it은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오는 'life-world'를 받으며 이 현상학의 용어는, 역자도 알겠지만, 관례상 '생활세계'로 번역한다. 해서 강조된 문장을 다시 옮기면, "'하나의 삶'의 가능성들이 현상학의 '생활세계'에서 벗어나게 될 때, 그리고 그 생활세계가 지각을 조건짓는 방식들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정도이다.   

224쪽에서, "들뢰즈의 실험주의적 미학의 문제는, '미학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에 대한 조사가 항상 맞대결하는 '질식(suffocation)'의 의미다. 그리고 이 의미가 주어지는 기본적이 정감은 우울증 또는 스피노자가 '슬픈 정념'이라 부른 것이다." 원문은 "The problem in Deleuze's experimentalist aesthetic is the sense of 'suffocation' against which the search for 'possibility in the aesthetic sense' is always directed."(132쪽) 의견 차이일 수 있는데, 일관적으로 '의미'라고 옮겨진 'sense'가 이런 대목들에서는 내가 보기에 '느낌'이나 '감(感)'이란 뜻을 강하게 갖는다. 해서, '질식의 의미'보다는 '질식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적어도 같이 병기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조사'라고 옮겨진 'search'는 '탐구'가 더 타당할 것이다('조사'는 보통 'research'를 가리키니까).

같은 쪽 각주33)에서 프린트상으로 엉겨나온 글자들은 부주의한 교정의 결과일 터이다. 오역에 해당하는 것은 그 다음: "비록 라캉이 (...) 자신의 카톨릭교를 통해 법과 그것의 명령에 앞서는 즐거운 지식으로까지 밀어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대목의 원문은 "as though Lacan were pushing through his Catholicism to a gay science prior to the law and its Order..."(165쪽)이다. 굵은 글씨로 표시했지만, 역자가 양보절로 옮긴 이 문장은 가정법 문장이다. 희한하게도 역자는 가정법 문장들을 거의 제대로 옮기지 않았다(설마 못한 것일까?). 가령 51쪽 각주12)에서 "로티가 이끌렸던 '대담이론'에 대해서 듀이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는 "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로 옮겨져야 한다(듀이는 1952년에 죽었고, 로티는 1931년생이다. 안면도 없었을 대학생 로티에 대해서 듀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 리 만무하다). 또 84쪽에서 "들뢰즈는 (...) 철학이 정말이지 아테네에서 플라톤과 더불어서보다는 다른 곳에서 출발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고 돼 있는데, 원문은 "Deleuze says that philosophy might well have started elsewhere than in Athens and with Pato."(40쪽)이며,  "들뢰즈는 철학이 아테네에서 플라톤과 더불어서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서 출발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그건 또다른 철학사의 잠재성이었다(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갖게 된 출발점은 그리스철학이다).

시간관계상 하나만 더 지적한다. 237쪽에서 "왜냐하면 그런 믿음, 그런 '아이스테시스'가 있을 때면..."의 원문은 "For when there is no such belief, no such 'aisthesis..."(140쪽)이다. 단순한 건데, 역자는 'no'를 빼먹음으로써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꿔서 옮겼다. 불성실이 아니라면 이런 허술한 실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하기 곤란하다. 내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다른 대목의 오역들도 마저 지적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필요할 경우의 일로 미루어둔다(이런 게 유쾌한 일은 결코 아니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과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그리고 들뢰즈의 대담 <디알로그>(동문선), 세 권에 대한 간단한 리뷰를 애초에 기획했었다. 그래서 <들뢰즈 커넥션>과 함께 <질 들뢰즈>를 읽었고(<질 들뢰즈>는 두 챕터 정도를 남겨놓았는데, <들뢰즈 커넥션>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다. 비록 일부 번역어에 내가 동의하지 않으며, 문학작품들에 대한 역자의 '무지'가 옥의 티이긴 하지만), <디알로그>를 읽고 있다. '간단한 리뷰'를 기획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때에 실행되지 않은 것은 물론 불어난 일의 견적 때문이며 대부분은 쉽게 읽을 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들뢰즈 커넥션> 탓이다. 내가 이 번역서에 갖게 되는 '감정'은 부분적으로 거기에 기인한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너희가 들뢰즈를 아느냐'는 식의 만듦새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가령 원서에서도 미주로 돌려진 들뢰즈 원전의 인용문 주가 굳이 각주로 옮겨진 이유는 무엇인가? 국역본이라곤 역자 자신의 번역서들까지도 깡그리 인용되지 않은 각주가 일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더구나 각주의 원서명들은 번역도 안 해놓았으면서). 게다가 무슨 학술논문도 아니면서 첫 페이지부터 '들뢰즈(Deleuze)'라고 '명찰'을 달게 하더니(자기 집에서 이름표 달고 있는 꼴이다), '플라톤(Platon)'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라고 국적불명('Aristoteles'는 정말 그렇다)의 표기를 병기해놓는 건 또 뭔가? 들뢰즈를 읽는 독자가 설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구인지 모를까봐 걱정이 되었을까? 원서에 그냥 'Ethics'라고 돼 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Ethica in Ordine Germetrio Demonstrata'라고 장황하게 라틴어 원저명을 병기해놓은 '깊은 뜻'은 무엇일까? 이걸 '세심한 배려'로 읽어야 하나? 그런 배려가 일차적으로 지향했어야 하는 것은 그런 류의 '티내기'가 아니라 오역을 최소화한 '성실한' 번역이었다.

역자가 재번역하고 있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이런 투정을 부릴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05. 09. 26.  

P.S. 르페브르님의 '바보들의 세계'에 관련한 대목을 찾아주셨다. 들뢰즈의 <시네마2>에 나오는 것으로 영역본 쪽수로는 173쪽(불어본 225쪽)이다.

We must believe in the body, but as in the germ of life, the seed which splits open the paving stones, which has been preserved and lives on in the holy shroud or the mummy's bandages, and which bears witness to life, in this world as it is. We need an ethic or a faith, which makes fools laugh; it is not a need to believe in something else, but a need in this world, of which fools are a part.

르페브르님의 번역으로 이 대목은 "우리에게는 바보들도 웃게 만들 수 있는 윤리나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믿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바보들이 일부를 이루고 있는 이 세계를 믿어야 한다는 요구이다" 정도의 뜻이다. 아마도 이것이 <들뢰즈 커넥션>에서 라이크만이 염두에 두고 있는 대목일 듯싶다. 따라서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와 관련한 나의 의혹은 나의 오독이다. 단, 나로선 자세한 맥락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다소 뜬금없는 표현으로 느꼈던 것. 아무튼 역자에겐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역자에게 직접 한 수 배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반나절만에 내가 궁금했던 대목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 나로선 소득이 없지 않다. 무지한 자가 배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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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y 2005-09-2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도 발견하지 못하신 오역이 있군요. 문제의 구절에서 믿음의 대상은 셋이 아니라 둘입니다. 다음과 같은 정도가 적절한 번역이겠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소통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건 너무 많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오히려 우리가 아직도 도달할 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의 관계 안에 그것을 만들어 내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믿음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것은 바보들을 웃게 만들 수도 있다 – 모든 문제는 그들을 포함하는 세계를 믿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겠는데, 저야 들뢰즈도 모르고 들뢰즈 커넥션도 읽어 보지 않았으니, 주어진 영어 문장 하나와 저의 상상력만 동원해서 짐작을 해 봅니다. 일단 “그것”은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도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의 관계 안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만들어지게 되면, “그것”은 바보들을 (바보들도?) 웃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조건들을 만족시켜 주는 “그것”이 도대체 뭘까요? 아마도 그것은 들뢰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태 정도가 되겠지요. 그리고, 제 추측으로는, 그런 이상적 상태가 바로 “바보”들이 웃는 세계, “바보”들을 포함하는 세계인 것 같네요. (* 그리고 문법적으로 보아도 them은 fools가 맞습니다.)

로쟈 2005-09-2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음의 대상에 관한 건 옳은 지적이십니다. '바보들'을 문제삼느라고 제가 거기까지는 주의를 두지 못했군요.^^ 문법적으로 them이 fools를 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이른바 문법적 모호성이겠죠. 하지만, paby님의 추측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저로선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보다는 간단한 상식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belief in/believe in 구문의 유사성이 여기서 의미상의 반복을 만들어낸다고 보며, 그럴 경우 굳이 다른 (거창한)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건 제 '추측'이며, 들뢰즈가 '바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을 찾아본다면 풀릴 수 있는 의문이라고 봅니다. 저 또한 들뢰지안이 아니어서 어디서 나오는 얘기인지 현재로선 집어올 수 없지만...

paby 2005-09-2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해설(로쟈님에 따르면,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가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상식"에 따른 해설)에 의하면, them은 도대체 무엇이 됩니까? what we may yet come과 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을 병렬적으로 연결한 것이 되나요? 이들을 them으로 받는다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곤란하지요. (우선 what절과 명사를 함께 묶어서 them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곤란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논리를 엮어서 그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용적으로 곤란하지요. 어떤 것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논리라는 것은 내용적으로 동등한 차원의 것이 아니니까요.)

사실 바로 believe in의 구문적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는 "간단한 상식" 때문에 저는 what we may yet come이 a world that includes them과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는 왜 저자가 양자를 실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지, 그리고 왜 여기에 갑자기 fools가 등장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죠.

로쟈님의 설명에서도 여전히 fools가 왜 등장하는지는 설명이 필요한 사실이지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가 있어야 할 테고요. 갑자기 아무런 상관없이 이야기를 끌여들이면서 책을 끝냈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훨씬 더 어려운 해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로쟈님 방식을 따를 경우 그러한 해설이 어떻게 가능할지 짐작도 할 수 없으니까요.) 또한 로쟈님의 해설에서, believe in 구문의 유사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전/혀/ 분명하지 않습니다. X를 믿는다는 것과 X를 포함하는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니까요.

제 생각으로는 로쟈님이 believe in의 내용으로 our relations가 있다고 오해하셔서 그러한 잘못된 "해설"을 제시하셨던 것 같습니다.

armdown 2005-09-29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습니다. 문법상의 명백한 오류들은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제 홈페이지를 통해 바로잡겠습니다. 그밖의 사소한 정황들은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밝히고 또 해설하겠습니다. 바보들의 문제 잘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

lefebvre 2005-09-2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들의 문제 잘 풀어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장은 좀 빈정 상하는 표현이군요. 라이크만이 (간접) 인용한 들뢰즈의 문장은 Cinema 2: The Time-Image, p.173.[Cinéma 2: l'image-temps, p.225.]에 나옵니다. (물론 뉘앙스의 문제이긴 하지만) "잘 풀어보라"라는 말은 마치 수수께기를 낸 문제제출자의 태도 같군요. "나는 아는데 너희는 모르냐?" 식의......흠......

paby 2005-09-2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보았는데, 문제의 구절을 새로 번역하신 부분을 추가하셨군요. 그런데 그 번역은 오역입니다. "간단한 상식"에 따르면, 대쉬(-) 이후에 나오는 문장은 대쉬 앞의 문장을 설명하는 기능을 담고 있지요. "하지만"의 뜻을 넣어서 번역될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번역되려면 반/드/시/ "but" 따위의 말이 있어야 하지요.) 로쟈님의 설명을 고집하시려다 보니 그런 "난해한 독해"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오역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paby 2005-09-2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ps.도 있었군요;; 어쨌거나 이젠 지난 문제가 되었네요. 참고로 "Platon"과 "Aristoteles"는 "국적불명"이 아니라 그들의 원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그런 표기를 병기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말이죠.)

로쟈 2005-09-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려나 Paby님의 지속적인 관심/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문법적/축어적 의미가 통하지 않을 때는 의미가 통하도록 어떻게든 비틀어보는 성향이 있는데, 간혹 그런 게 안 통할 때도 있지요.^^ Platon과 Aristoteles가 음역 표기라는 건 다 아는 얘기입니다. '국적 불명'이란 그게 '영어'도 아니고 '불어'도 '한국어'도 아니란 것입니다(단, 불어로도 Platon이라고 표기하는 듯하지만, 그때는 '음역'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고유명사의 원어 병기는 혼동의 여지가 있거나, 생소할 경우에 해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혹은 정식으로 소개할 경우(풀네임과 생몰연대를 같이 적을 경우). 제가 철학 번역서들을 읽으면서 가장 짜증스러울 때는, 그런 경우들에 해당하지 않으면서 '플라톤(Platon)', '칸트(Kant)', '헤겔(Hegel)' 등으로 병기해줄 때입니다. 그러한 표기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으면서 '철학자연' 혹은 '철학서연'하는 티를 냅니다. 저는 그런 태도를 혐오합니다...

paby 2005-09-28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드릴 사람은 오히려 저지요. 이런 식의 귀동냥을 통해서 얻는 것도 적지 않은 것 같거든요. 제가 참견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참견하지 않는 경우에도요. 참고라고 끝에 붙인 것은 사족이 되어 버렸네요^^ 사실 저도 "칸트(Kant)" 이런 식의 병기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한 거부감이 로쟈님만큼 크지는 않은 것 같지만요. 다만, 그런 문제는 그것이 "국적불명"인가 아닌가와는 좀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굳이 국적을 찾는 것이 문제라면, "Platon"과 "Aristoteles"는 "Kant"나 "Hegel"처럼 독일어라고 하면 되잖아요^^;;;

palefire 2005-09-2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마지막이 머리에 와닿았던 - 저는 이 책을 원서로 접할 때 5-6장, 특히 6장을 흥미롭게 읽었었기에 - 저로서는 이런 논의들이 이어진게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jaewoni님(제가 누군지 아시겠죠?)이 적절히 잘 지적해 주셨네요.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와 사유의 관계, 영화의 내재적 형식뿐 아니라 영화의 윤리적 존재에 대한 들뢰즈의 속내를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어쨌든(저는 아직 국역본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문단을 다시 보니 [시간-이미지]의 7장(로자님도 인용하신 그 부분은 7장 제2절의 마지막 문장들입니다. '사유의 무력함'에 대해 모던영화가 대응하는 방식들을 논하고 있죠')의 맥락에서 - 좀 더 포함하자면 '통제사회'론과 [시간-이미지]결말부의 연관성에서 - 쓰인 부분입니다. 저자가 직접인용부호를 달아주었다면 더욱 친절했겠지만, 저자가 이 문단의 처음을 열면서 특별히 따온표를 단 'belief-in-the-world'(belief=croire)가 [시간-이미지]와의 연관성을 알려주는군요.

palefire 2005-09-2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이 경우 로자님도 수긍하신 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역자의 번역이 맞습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저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보완하고 있는 맥락들을 역주로 개입했다면 좀 더 친절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바보들'에 대해 로자님같은 탁월한 주석자-교정자님도 의문을 표시했을 정도니까요. 역주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던 듯합니다. paby님이 의문을 표하신 '우리가 아직 생성하고 있을 지 모르는 것'과 '바보들을 포함하는 세계'는 서로 다른 대상입니다. 전자는 잠재성의 차원이고 후자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가 창궐하는 통제사회의 상황 일반을 가리킵니다. 바보들([시간-이미지]의 영역본과 여기서는 fool, [시간-이미지] 원본에서는 idiot)을 웃게 만든다는 건 바로 통제사회를 맹신하거나 혹은 이를 관장하는 바로 그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로쟈 2005-09-29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네마2>의 국역본을 어제 저도 읽어봤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이어서 곧 '브리핑'을 올릴 생각입니다. 더불어, 아직 다 풀지 못한 의문점들도(idiot와 fool에 관련된 것인데, 둘이 같은 뜻인가요?)...

yoonta 2005-09-29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아니었으면 모른채 넘어갈뻔 했던 오류들이 많이 수정된 거 같네요. 김재인님 홈피에서 보다 여기서 그 책의 수정을 보는게 빠르다는건..좀 문제가 있는 거 같네요. 한가지 아쉬운건..번역에 대한 지적보다는 라이크만의 책 내용에 대한 로쟈님의 견해가 더 듣고싶은데...그건 없네요..^^

로쟈 2005-09-29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 끝에서 사정 얘기를 약간 언급했는데, <디알로그>까지 마저 읽게 되면 리뷰를 쓸 계획입니다. 주제는 (1)들뢰즈의 경험론, (2)들뢰즈와 정치, (3)들뢰즈와 영화이며, (3)은 당장 기약할 수 없지만, (1), (2)는 이번 가을에 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대단한 분량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yoonta 2005-09-29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기대하고 있겠습니다..^^

lefebvre 2005-10-0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lefire 님/ 음......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분은 혹시 맞으시다면, 연락 좀 주시겠습니까? 저희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