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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데이터 - 디지털 세상의 미래를 향한 한 낙관주의자의 인도
샘 길버트 지음, 김현성 옮김 / 쉼(도서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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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사회과학자에게 던지는 데이터 과학자의 도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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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폭식 사회 : 기술은 어떻게 우리 사회를 잠식하는가? -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2023년도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선정 우수과학도서
이광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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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 대한 이해 결여, 과도한 수사, 증명 없는 주장 등 읽기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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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혁명과 새로운 부 - 정보·소재·기계의 융합이 촉발하는 대호황의 시대
마크 P. 밀스 지음, 홍성완 옮김 / 프리렉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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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확한 사실이 너무 많음. 문체가 장황하고 쓸모없는 정보가 가득. 요점이 없음 ㅠㅠ 돈 아까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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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 연속성에 반대한다 카이로스총서 83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 지음, 김효진 옮김 / 갈무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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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를 이해하려고 이 책을 읽진 마세요.
1. 저자는 프랑스어 원본을 거의 참조하지 않았습니다. 영역본의 오류는 넘쳐납니다.
2. 본문의 첫 문장부터 오류입니다. All Entities are Machines. 들뢰즈는 저런 표현을 쓴 적도 없고, 암시한 적도 없습니다. 있으면 찾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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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철학적·문학적 해석
백승영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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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도 해석도 잘못된 것이 많아 비추.


* 백승영 번역의 <차라투스트라>(사색의 숲, 2022)을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

백승영(존칭 생략)이 최근에 번역 출간한 <차라투스트라>는 심각한 해석 오류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한 번역 오류가 아니라, 니체의 사상을 ‘반대로’ 해석하는 문제입니다. 다른 번역본에는 없는 오류기에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나만 예를 들겠습니다.

우선 ‘서설 3’의 일부 구절을 보겠습니다.

(인용)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바로 그 바다다. 그대들의 커다란 경멸이 그 속에 가라앉을 수 있는 바다다.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다. 그대들의 행복이,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들의 이성과 그대들의 덕이 역겨워지는 때다.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내 행복. 그게 다 뭐냐! 그것은 궁핍이고 때묻었으며 가여운 안일이 아닌가! 하지만 내 행복은 삶 자체를 정당화해야 한다!’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내 이성. 그게 다 뭐냐! 그것은 사자가 먹이를 탐하듯 지식을 갈구하지 않는가! 그러니 궁핍이고 때묻었으며 가여운 안일이다!’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나의 덕. 그게 다 뭐냐! 나를 열광시킨 적이 없거늘 내 선과 악에 나는 얼마나 지쳐 있는가! 그 모든 것이 궁핍이고 때묻었으며 가여운 안일이다!’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내 정의. 그게 다 뭐냐! 나는 나를 작열하는 불꽃과 숯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롭다는 자들은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이다!’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내 동정. 그게 다 뭐냐! 동정은 인간을 사랑했던 그자가 못 박힌 십자가가 아닌가? 하지만 내 동정은 십자가형이 아니거늘.’
(인용 끝)

이 중에서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내 정의. 그게 다 뭐냐! 나는 나를 작열하는 불꽃과 숯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롭다는 자들은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이다!’”

이에 대해 백승영은 이렇게 해설합니다(세창출판사, 2022, 67-8쪽).

(인용)
그다음 순서는 정의다. 경멸의 대상은 응보와 복수기제를 갖고 있는 정의다. 니체의 대안은 복수기제를 갖지 않는, 나중에 ‘사랑하는 정의’의 형태로 제시되는 ‘인정과 관계’로서의 정의다. 이 정의개념은 분배정의와 교환정의의 전제이자 귀결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사항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정의와 관계된 <차라투스트라> 텍스트 전체에서 오로지 여기서만 발견되는 흥미로운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내 정의. 그것이 다 뭐냐. 나는 나를 작열하는 불꽃과 숯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롭다는 자들은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이다”가 바로 그것이며, 여기서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은 『성서』를 패러디한 것이다.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독일어 『성서』 ‘작열하는 숯glühende Kohle’) 쌓는 셈이 될 것입니다. 악에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 <로마서>의 이 구절을 니체는 보복과 복수기제로 이해한다. 인간이 하지 않아도 결국에는 신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에, 신의 정의 구현은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응보로서의 정의 구현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인 보복이자 복수가 정의가 되어있는 이 상황을 보며 차라투스트라는 우리는 ‘작열하는 불꽃도 숯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복수기제를 벗어버린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용 끝)

어떻게 해야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일단 맥락부터 보죠.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백승영의 번역을 이용하겠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다. 그대들의 행복이,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들의 이성과 그대들의 덕이 역겨워지는 때다.”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란 그대들 자신이 갖고 있는 ‘행복, 이성, 덕’이 역겨워지는 때입니다. 이어 그 목록이 제시됩니다. ‘행복, 이성, 덕, 정의, 동정’ 순입니다. 지금 검토하는 구절이 등장하는 맥락이지요. 다시 해당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대들이 이렇게 말하는 때지. ‘내 정의. 그게 다 뭐냐! 나는 나를 작열하는 불꽃과 숯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롭다는 자들은 작열하는 불꽃이자 숯이다!’”

여기서 경멸의 내용인 ‘내 정의’는 ‘작열하는 불꽃과 숯’이 아니기에 경멸당합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바로 ‘작열하는 불꽃과 숯’이어야 합니다. 문맥이 명백하게 이를 보여줍니다. ‘정의롭다는 자들’로 번역한 구절은 독일어로 der Gerechte, 영어로 하면 one who is righteous입니다. ‘정의롭다는’이 아니라 ‘정의로운’이죠. 그럼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그건 문맥을 정반대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진우 번역을 보겠습니다(책세상, 2020).

“나에게 정의가 무슨 소용인가! 나는 내가 불꽃이자 숯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불꽃이며 숯이다.”

니체는 정의는 ‘불꽃이자 숯’, 더 정확히 번역하면 ‘잉걸’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승영이 정의와 관련한 해당 대목을 “오로지 여기서만 발견되는 흥미로운 표현”이라고 여긴 건 문맥과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의의 문제에 대해 니체는 책 내내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백승영이 오해했을 뿐이지요. 문제는 이런 오해가 번역과 해석 내내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백승영 번역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끝으로 최근에 진행중인 번역을 소개할 테니, 비교해 보기 바랍니다.

(인용)
봐라,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이 바다다. 너희의 큰 경멸은 그 안으로 내려갈 수 있다.
너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뭘까? 그건 큰 경멸의 시각(時刻)이다. 그때 너희의 행복은 너희에게 역겨움이 되고, 너희의 이성과 너희의 덕도 그렇게 될 거다.
그때 너희는 말한다. “내 행복이 무슨 소용이지! 그건 가난과 오물, 그리고 빈약한 쾌적함이다. 하지만 내 행복은 실존 자체를 정당화해야 한다!”
그때 너희는 말한다. “내 이성이 무슨 소용이지! 그건 사자가 먹이를 탐하듯 앎을 탐하고 있나? 그건 가난과 오물, 그리고 빈약한 쾌적함이다!”
그때 너희는 말한다. “내 덕이 무슨 소용이지! 그건 아직 나를 미쳐 날뛰게 만들지 않았다. 나는 내 선과 내 악에 너무 지쳤다! 그 모든 건 가난과 오물, 그리고 빈약한 쾌적함이다.”
그때 너희는 말한다. “내 정의가 무슨 소용이지! 나는 내가 잉걸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잉걸이다!”
그때 너희는 말한다. “내 연민이 무슨 소용이지! 연민은 인간들을 사랑하는 자가 못 박히는 십자가 아닐까? 그러나 내 연민은 십자가형(刑)이 아니다.”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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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ddns200411092 2023-07-1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투스트라 번역본 추천좀요

armdown 2024-02-21 20:23   좋아요 0 | URL
https://youtu.be/I9sFrL6sS-Q 완결되진 않았지만 참고하세요.

알베르카뮈 2024-02-19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대로 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번역본 추천 부탁드려요

armdown 2024-02-21 20:23   좋아요 0 | URL
https://youtu.be/I9sFrL6sS-Q 완결되진 않았지만 참고하세요.

지나가는사람 2024-04-1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질문이 생겨 남깁니다.
선생님은 ‘내 X‘와 ‘X‘를 구분하시고, 니체가 ‘내 X‘를 부정하고 ‘X‘를 긍정한다는 식으로 해석하시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백승영님은 특별히 ‘내 X‘와 ‘X‘를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기존의 X 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제가 보기엔) 보입니다. 그래서 제시된 모든 X들에 대한 서술을 부정적 서술로 본 것이죠. 그리고 ‘실제 나‘에 대한 서술들을 진실된 서술, 긍정적인 서술로 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연민은 인간들을 사랑하는 자가 못 박히는 십자가 아닐까˝를 보시고 니체가 ‘십자가형‘의 연민을 긍정하고 ‘십자가형이 아닌‘ 연민은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불꽃 숯 부분보다 여기서 선생님과 백승영님 간의 대립이 더 뚜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armdown 2024-05-17 15:26   좋아요 0 | URL
최근에 확인해서 답이 늦었습니다.

니체는 자신의 연민이 ‘십자가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십자가형은 연민(혹은 기독교의 인간 사랑, 즉 인간을 사랑해서 대신 죽는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의미의 연민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연민은 가장 잔혹한 모순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사랑=십자가형). 이 구절들에서 니체는 기존에 가치 있다고 여겨진 개념들을 일일이 뒤집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챨리브라운 2024-05-1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잘못이 아니라 철학자와 예수쟁이 사이의 극렬한 견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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