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을 읽기 시작한 지 좀 됐지만,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진도가 더디게 나가는 건 내가 따로 전공 관련 논문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죽죽 읽어나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들뢰즈 철학 전반에 대한 매우 압축적이면서도 수준높은 개관을 제공해주는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적어도 편하게 읽히는 내용은 아니며 번역 또한 그러하다. 책에 대한 리뷰와 함께 번역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보기로 한 바 있지만, 그게 예상보다 많은 견적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몇 차례 나누어서 다루어야 할 듯하다. 당장에 다룰 건 제5장 '삶'이다. 한동안 덮어두었다가 다시 읽게 된 장이기도 하지만(그래서 기억이 용이하다), 번역에서 가장 문제적인 '실수'를 포함하고 있기에 먼저 짚어둘 필요가 있어서이기도 하다.
역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들뢰즈 전문가이지만, 아쉽게도 이 번역서는 그의 '명성'에 그닥 도움이 될 듯하지 않다. 독자적인 번역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자유/권리이겠지만, 그러한 자유/권리가 다른 역자의 사례이지만 '존 라이크만'의 또다른 책, <건설들(Constructions)>을 '존 라흐망' 의 <들루즈건축>(접힘펼침, 2004)으로 옮기는 수준이 되면(<들뢰즈 커넥션>의 22쪽에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그 책이다), 그러니까 비유컨대, '들뢰즈'를 '들루즈'로 옮기는 식이 되면, 문외한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비록 들뢰즈 철학이 '들뢰즈'라는 고유명사가 함축하는 '인격'이나 '주체'에 대해서 심히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그런 들뢰즈의 정신에 충실하자면, 우리는 그를, 들뢰즈라는 다양체를 '들뢰즈' '들루즈' '들러즈' '들레즈' '델레우즈' 등으로 매번 다르게 호칭해야 될지도 모른다).
역자의 '실력'을 십분 인정한다고 할 때(그렇게 쉬운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들뢰즈 커넥션>은 출간 이후 계속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있는데, 거기엔 역자에 대한 '신뢰'와 입문서에 대한 '기대'가 반영돼 있을 것이다).다), 이 책의 후반부 작업이 좀더 꼼꼼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그건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를 읽으면서 느꼈던 바이기도 하다). 가령, 145쪽에서 '기존의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inattributable)'에 병기된 영어 단어는 'unattributable'의 오타이다. 이게 발견일 것도 없는 것이 152쪽에 '설명할 수 없고'란 말이 다시 나오면서 이번엔 'unattributable'로 병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어는 대세의 차이는 없더라도 '귀속시킬 수 없는' 정도의 뜻 아닌가 싶다.
언어학의 '화용론(pragmatics)'를 '화행론'으로 일관되게 옮겨주는 것은 역자의 고집이자 권리일 테니까 넘어갈 수 있다. 그걸 때로 '실천학'이라고 옮기는 것도 '실천(praxis)'이란 말에 '아주 약한' 철학자/지식인들의 편향성을 반증하는 것으로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들뢰즈의 '실천주의'라고 부르는 것도(이상은 24쪽 역자주). 하지만, 이런 식의 '자유'가 통용/허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데서 뭔가 '제 실력'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세심함이나 치밀함 같은 것 말이다. 한데, 153쪽에서 '비인칭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례로 들고 있는 "it is dyng."이란 문장을 '그것이 죽어간다'라고 옮긴 것은 눈을 의심하게 한다. 바로 뒷페이지에서 '말하고 있다(it is talking)'이나 '이야기하고 있다(it is saying)'로 옮겨진 문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it's raining.'에서와 마찬가지로) 'it is dying.'의 'it'은 비인칭 주어인데 말이다.
물론 어떤 번역이 무오류적으로 완전무결할 수는 없지만, 뭔가 과감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번역이라면 좀더 꼼꼼하게 재검토/교정 작업을 진행했어야 하지 않을까? 다소 성의가 부족해보이는 이 번역서에서 결국 '사건'이 터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161쪽에서 "들뢰즈에게는 그런 '가족주의'는 아무것도 설명하는 바가 없다." 앞에는 '그런 가족주의'에 해당하는 내용이 뭉텅으로 누락돼 있다. 오이디푸스 비판과 관련한 대목이어서 유심히 원서를 읽고 대조해보기 위해 번역문을 살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한두 줄도 아니고, 어떻게 열줄이나 누락될 수 있는 건지 신기했지만, 하여간에 이 또한 교정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실수일 수도 있으리라(하지만, 최종교정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빠진 대목은 이렇다: "The problem with psychoanalysis is that having discovered such presubjective 'powers,' such complicating impersonal 'virtualities' of our libidinal bodies and their 'vicissitudes' in our lives, it enclosed them with a new system of 'personalizing' identification - that of the family and the 'images' of familial persons, as if the unconscious were only a kind of deficient identification within the family order."(90쪽) 우리말로 옮기면, "정신분석학의 문제는 우리의 리비도적 몸체의 복잡한 비인칭적 '잠재성'과 우리 삶에서의 그 '변화과정' 같은 주체 이전의(=前주체적) '역량들'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량들을 '인칭화하는' 새로운 동일시 체계로 덮어버린 데 있다. 즉, 가족의 체계, 가족 구성원이라는 '이미지들'의 체계로 말이다. 마치 무의식이란 게 단지 가족 질서 내에서의 일종의 불완전한 동일시 정도밖에는 아니라는 것처럼." "들뢰즈에게는 그런 '가족주의'는 아무것도 설명하는 바가 없다."라는 건 거기에 이어져야 한다.
제5장에서 저자는 제4장에서 다룬 다양체/다양성(multiplicity)의 문제를 이어받아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들뢰즈/가타리의 강령적 선언을 풀이하면서 시작한다. 즉 '다양의 실천학'(=다양성의 화용론)에 의해 제기되는 물음은 차라리 "우리의 뇌는 새로운 비표준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도록 항상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면 과연 무엇이어야만 하는가"로 재정식화될 수 있다. 이러한 소수언어의 화행론(=화용론)은 들뢰즈에게서 더 넓은 (범주의) '실천철학(practical philosophy)'에 속한다. 왜냐하면, "다양체들은 특정 사회집단이나 개인으로서의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서적으로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
다시 말해, "다양체들은 사회가 우리를 나누어놓는 그램분자적 방식보다 앞서며, '인격들'이나 '주체들'이라는 우리의 바로 그 관념들보다 앞선다."(144쪽) '그램분자'라는 건 흔히 '몰'로 번역돼왔던 것이며, 나에겐 몰이란 표현이 익숙하다. 그러니까 화학에서 '분자/몰'의 대립구도를 들뢰즈는 '다양체/인격들 혹은 주체들'이란 구도로 변주하고 있는 것. 분자들이 보여서 몰을 구성하듯이, 인격들(혹은 주체들)을 구성하는 건 다양체들이다(여기서 분자운동과 다양체들의 복잡화, 곧 주름운동은 등가적이다). 해서, 중요한 것은 "동일성보다는 다양체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다양체를 만들거나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인격, 행위, 믿음 등 실천적 개념들의 폭(=범위)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재고한다는 것이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왜? 그것들은 다양체의 사태와 운동을 설명하기는 부적합한 너무 큰 범위의 개념들이기 때문이다(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휘두르는 격이다)
"우리가 자신과 서로서로를 '다양'하다고, 또는 '다양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많은 분명한 동일성들이나 자아들을 갖고 있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다."(145쪽) "더 일반적으로 말해 들뢰즈는 다양체 개념으로써 개인과 사회, 공동체(=공동사회)와 사회(=이익사회), 현대성과 전통 등의 구분에 기반한 사회학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여기에 새롭게 도입되는 것이 '군중(crowds)'을 대신하는 '무리(packs)'이다. '무리'라고 옮겨져 있는데, 한팩 두팩할 때의 'pack'은 패거리'나 '떼거리'란 뜻이며, 군중이라는 몰(그램분자)에 비하면 분자적 수준의 단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미시정치니 분자정치/분자혁명은 바로 이런 단위의 차원, 하위주체적이고 하위집단적인 차원에서 정치를 사고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들뢰즈는 다양체와 다양체의 시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는 도시의 문제, 즉 뇌와 도시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도시'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전통적 관념 속의 '국가'와 대립시킨다."(148쪽) 들뢰즈식의 대립구도가 여기서 하나 더 추가되는데, 그것은 '도시/국가'라는 구도이다. 다양체적 포텐셜의 계열체를 구성하는 분자, 무리, 도시 등은 모두 현실의 배아, 곧 잠재성의 영역이고, 들뢰즈는 모든 문제를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 현실(화)의 이전 단계에서 다시 사고하고자 하는 것. 그러한 수준/단계의 이름이 그것이 '삶(the life)'에 대립하는 '하나의 삶(a life)'이다. 거기서 부정관사 a는 이 삶의 불확정성, 불완료성을 지시하는바, 그것은 개별적인 삶으로 숙성/완숙되기 이전의 포텐셜로서의 삶이고 잠재성으로서의 삶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그러한 '하나의 삶'이 갖고 있는 역량을 예찬하며 이를 적극 보존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고의 빌미를 들뢰즈는 흄에게서 가져온다("들뢰즈에게는 이러한 점이 흄이 정식화한 '정체성의 문제'가 갖고 있는 힘이다"). 즉, "우리의 자아나 '정체성'은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며, 정말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라는 바로 그 관념이 일종의 철학적 허구인 것이다."(150쪽) 알다시피, 들뢰즈의 첫 철학서는 흄 연구서인 <경험론과 주체성>(1953; 씌어진 건 1947년)이며, 라이크만을 읽으며 내가 새삼 깨달은 바는 들뢰즈에게서 '경험론'이 갖는 의의인바 나는 흄의 경험론을 통한 들뢰즈 읽기가 들뢰즈 철학의 가장 쉬운 입구이지 않나라고 생각한다(이게 내 '경험론'이다). <들뢰즈 커넥션>의 제2장 '실험'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들뢰즈의 경험론에 대해서는 조만간 따로 정리해둘 예정이다). 여하튼, 그러한 아이디어에 결정적인 어시스트를 해준 건 들뢰즈에게선 베르그송의 (지속으로서의) 시간이었고, 영화였다.
영화에서의 시간-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양체는, 혹은 '하나의 삶'은 '개체 이전의' 또는 '개체 이하의' '독자성'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래서 이것은 영어에서 'it's raining.'의 'it'처럼 비인칭적인 '판'에서 다른 독자성들과 연결된다. "다양체는 항상 구성된 자아나 의식적 인격으로서의 우리를 능가하며, 바로 그것들과 그것들의 다른 가능성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타인이나 타자(autrui)라고 표현하는 것이다."(151쪽)
이어지는 대목에서 '서술(predications)'이란 역어는 흔히 'narrative'를 연상시키므로 좀 부적합하지 않나 싶다. 다른 대목들에서 '술어'로 옮겨진 것이 이 대목에서만 '서술'의 뜻을 갖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실 역자는 첫페이지(21쪽)에서 'predication'을 '말의 풀이'라고 옮겼는데, 이 또한 교정과정에서 통일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손을 덜 보았다는 것은 같은 페이지의 '확인(identification)'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후에 'identification'은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모두 '동일시'로 옮겨졌으며, 첫 대목만 '확인'의 뜻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물론 뜻이야 거기서 거기지만).
하여튼 "우리의 삶은(...) 결코 '설명되지(explicated, 펼쳐지지)' 않은 타자들과의 복합에 돌입할 수 있도록 충분히 불특정하고 모호해야 한다."(151쪽) 여기서 'explicated'는 괄호 속에 병기해 놓은 대로, '펼쳐지다'란 뜻으로 옮겨지는 게 낫겠다. 이 '주름(pli)'의 번역과 관련해서는 <차이와 반복>(민음사, 2004)에서의 용례(705쪽)를 적극 참조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역자가 기피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라이크만의 지적대로, "들뢰즈는 implication, explication, replication, complication, perplication 등 접힘, 또는 '주름'과 관계되는 단어들을 취해 놀이"(115쪽)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인용문의 '복합(complication)'도 취지를 살리자면, '온-주름운동'으로 옮길 수 있지 않을까? '복합'은 너무 밋밋하며 멋쩍다.
해서, "정말이지 그것이 모호하거나 특유화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잠재적으로 '하나의 삶'은 우리에 관해 가장 특유하거나 독자적인 것, 스피노자의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를 독자적인 본질로 만드는 것이다."(151쪽) 여기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의 삶'이며, 이런 경우 우리말 지시대명사의 어법에 맞지 않는다. 소위 번역투인데, '그것이'가 빠지는 게 우리말로는 자연스럽다(의미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제의 일'을 좀더 이어서 한다. 그 사이에 역자께서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라이크만의 책이 고급 입문서이긴 하지만, 로도윅 같은 평자의 지적대로, "들뢰즈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데 나로선 동의하며, 그건 라이크만을 읽는 게 들뢰즈를 읽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는 걸 암시한다. 들뢰즈의 원서를 번역할 수 있는 역량이라면, 라이크만의 책을 옮기는 것 정도는 가뿐하게 해치울 수 있을 거라는 게 나의 예상이었고 내가 이 책을 서점에서 보자마자 사든 이유였다. 한데, 정말 의외로 잘 읽히지 않았다!(혹 역자는 술술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들뢰즈에 대한 나의 사전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평균치는 넘을 것이다), 라이크만의 책은 그런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라는 원인에 대해서 따져보았고, 결론은 번역이 예상만큼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글의 서두에서 앞질러 지적한 건 그러한 결론이며, 이후에 제시하는 건 그 근거들이다. 너무 오버한 결론인가 아닌가는 그 근거들이 다 제시된 연후에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리라. 부분적으론 오역에 대한 지적이라기보다는 의견 차이 정도를 언급하는 정도일 수도 있다. 그런 (사소한) 대목들까지 나열하는 것은 거꾸로 역자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반영한다. 그런 거 저런 거 다 넘어갈 수 있는 정도라면, 나로선 '김재인'이란 브랜드를 특별히 선호하거나 평가할 이유가 없다(그의 번역서인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를 나는 높이 평가하며, 그 책이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한 걸 기이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역자에게 드리고 싶은 질문은 과연 이것이 자신의 역량을 다 쏟아부은 최선을 다한 번역인가, 하는 점이다. 이 글이 길어지는 건(물론 오역만을 지적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역자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계속 내용으로 들어가면, (번역과 무관하게) "우리의 삶은(...) 충분히 불특정하고 모호해야만 한다."(151쪽)에서 모호하다(vague)란 표현은 '불확정적이다'란 뜻으로 이해하는 게 알기 쉽다(고 나는 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 "'우리에 관해 개별적'이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특유한 것'은 따라서 인격적이거나 의식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존재하고 함께 존재하는 데 있어 설명할 수 없고 서술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84쪽) 원문은 이렇다: "'What is peculiar to us' without being 'particular about us' is then nothing personal or conscious, but on the contrary, something unattributable, unpredictable in our being and being together."(84쪽)
여기서 particular(개별적인)와 대조적으로 쓰인 peculiar(특유하다)는 것은 singular와 같은 뜻이다. 개별성은 일반성의 짝개념이며, 고진에 따르면, 단독성(=독자성)이 보편성의 짝개념이다. 들뢰즈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 독자적인 것의 영역, 단독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인격적이거나 의식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것. 그것은 그런 것들로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며, 예측할 수 없는 무엇이다(역자는 unpredictable을 '서술할 수 없는'으로 잘못 옮겼다. 'unpredicatable' 정도로 본 모양인데, 사실 그런 단어는 사전에 없다). 내가 이해하는 바대로 다시 옮기면, "우리에게 '개별적인 것'이 아닌 '독특한 것'이란 인격이나 의식과는 전혀 무관한 차원의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의 존재와 그 결합에 있어서 뭔가 귀속시킬 수 없는, 예측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이렇듯 "의식적인 인격체인 우리보다" 앞에 오는 독자성을 들뢰즈-라이크만은 '멋진 비인칭성'이라고 부르고 '4인칭 단수'라고 부른다(하이데거식의 전통 형이상학이 '3인칭 단수의 철학'이라면, 들뢰즈의 철학은 '4인칭 단수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4인칭 단수는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말해지는 것 안에 존속한다."(154쪽) 그리고 이러한 비인칭성은 (하이데거의) 세인(=세상사람들; das Mann)의 소외니 비진정성을 뜻하는 게 아니라 독자화의 조건이 되며, 삶의 가벼워짐과 그 가능성이 된다(155쪽). 여기서 '삶의 가벼워짐'은 'lightening-up of life'의 번역인데, 'lightening-up'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light up이란 표현과 관련해서) '빛나게 하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155쪽 각주 20)에서 "우리는 그것을 다다이즘의 '기계' 개념(기계와 회귀의 결별과 더불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논의에서도 발견한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기계와 회귀의 결별'이란 게 무슨 뜻인지 역자에게 묻고 싶다. 다다이스트의 기계 개념에 관한 원문은 "the concept of Dadaist 'machines'(with their uncoupling from recurrences)"인데, 여기서 'recurrences'의 뜻은 '회귀'가 아니라 '반복'이다. 짐작에 다다이스트들이 고안해낸 '기계'라는 것은 한번만 써먹을 수 있는 기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반복사용이 불가능한 기계(그런데 '기계'다!). 그러니까 "다다이스트들의 (반복사용이 불가능한) '기계' 개념" 정도로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56쪽에서 'biopolitical formation'을 '생명정치적 형성체'로 옮겼는데, 이건 의견차이이겠지만, 푸코와 아감벤 등에서 중요한 개념인 'biopolitics'는 '생체정치'란 역어가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조만간 번역출간되면 자세히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진도는 비인칭성까지 나간 것 같은데, 거기에 덧붙이자면, "들뢰즈의 생각에, '문학'이라 불릴 만한 값을 하는 것 안에는 개체화가 우리의 삶에 등장하는 방식을 그리는 비인칭적 '개체화'를 표현하려는 시도가 있다."(157쪽) '비인칭적 개체화'는 'impersonal individuations'의 번역이다. 이제 이어지는 건 아주 '멋진' 방식으로 비인칭적인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해명. 무의식은 "의식적 인격으로서의 우리보다 앞서는 다양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종의 '실천학(=화용론)' 혹은 배치(agencement)를 요구한다. 이 배치란 건 '나'와 '우리' 같은 인칭대명사에 기반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자신의 '계열' 및 계열의 '잠재성'이라는 관념과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이른바, 리비도적 잠재성.
"그래서 '하나의 삶'의 실천적 문제는 그런 리비도적 잠재성들에 어떻게 도달할 것이며, 우리와 특정 사회적 또는 문화적 질서와의 동일시보다 앞서는 방식으로 그것을 한데 모으면서, 그것들을 어떻게 맨앞에 놓을 것인가라고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159쪽, 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는 다른 가능한 관계들의 잠재성이라는 견지에서, 또는 아버지의 '부정'에서 단순히 파생될 수 없는 비인칭적 개체화라는 견지에서 (사회질서의) '바깥'을 이해하려 했다." 여기서 '아버지의 부정'은 'a father's 'no''의 번역인데, '아버지의 금지'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 아버지가 '안돼!(No!)"라고 금지시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견지에서 들뢰즈는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억압가설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억압하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이 다른 인칭화된 방식으로 우리의 욕망들을 살기 위해 억압하거나 망각하며, 이것이 우리의 삶을 각각 욕망의 독자적 복합체로 만든다."(160쪽) 해서, "우리 각자가 '하나의 삶'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 각자가 하나의 무의식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따라서 똑같은 것에 이른다." 이어지는 설명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들뢰즈식의 이해이다.
160쪽에서 '우리의 특이성(peculiarities)의 분자적 배가'에서 '배가(倍加)'는 'multiplication'의 번역인데, 왜 이 대목에서만 '배가'로 옮겨지는지 궁금하다('배가'란 말 그대로 '두 배로 만든다'는 뜻 아닌가). 일반적으론 '증식' 정도로 옮겨질 텐데.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따라서 가령 들뢰즈는 '남자 아니면 여자다'라는 보통의 '다수적' 모델에서 떠나 모든 사람이, 심지어 여성조차도 통과해야 하는 '여성-되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Thus, for example Deleuze talks of a 'becoming-woman' that everyone, even women, must go through in departing from normal or 'majoritarian' models of what is to be a man or woman." 여기서, "normal or 'majoritarian' models of what is to be a man or woman"은 "남자가 아니면 여자다라는 보통의 다수적 모델"이라기보다는 "남자다, 혹은 여자다라고 (규정)하는 표준적인, 다수적인 모델"을 뜻하는 게 아닐까?
161쪽, "오히려 생성은 그 어떤 것의 모방이나 재현도 아니기에, 동일시라는 바로 그 항들을 이동시키고 복잡하게 만든다."에서 '동일시라는 바로 그 항들'은 'the very terms of identification'을 옮긴 것인데, '동일시의 바로 그 항들'의 오역이다. 'terms'와 'identification'이 동격이 되려면 수가 일치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 문단: "우리는(...) 우리와 사회질서의 동일시를 그 삶들의 결핍 속에서 그런 동일시가 상정하는 역할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해야 한다." 원문은 "We should understand our identifications with a social order in terms of the roles they assume within the unfolding of our singular, indefinite lives (...)"
먼저, 'assume'는 여기서 '상정하다'가 아니라 '떠맡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는(?) 오역이 등장하는데, '결핍'은 도대체 무얼 옮긴 것일까? 곰곰이 따져본 결과 역자는 아마도 'indefinite'(불확정적인)를 'in deficient'로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착시'가 말해주는 것은 역자가 문장을 거의 직독직해 수준으로 옮겼을 거라는 점. 즉, 이런 오역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내 실력으론 불가능하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으며, 이 또한 나로선 역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빌미가 된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무의식적 욕망 그 자체에 대한 다른 그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리비도적 잠재성들이 펼쳐져 보이는 이 공식적 판의 견지에서, 무의식적 욕망을 '건설주의적'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나는 역자의 무의식적 '결핍'이 불확정적이고 건설적인 삶의 '조성판'에서 재배치되기를 바란다. 번역의 자기동일성으로부터 탈피해서 말이다. 더 좋은 번역의 잠재성들을 현실화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해야 할 사람은 누구보다도 역자 자신일 테니까...
05. 09. 07 - 08.
P.S. 나머지 다른 장들에 대한 지적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교정일'이 나의 직업은 아니므로). 내가 보기에 들뢰즈 입문서로서 더 평이한 것은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2004)이다. 이 역시 사소한 오역이 없지 않지만, <들뢰즈 커넥션>보다는 무난하게 읽히며 더 넓은 범위를 다룬다(저자가 문학전공자라서 들뢰즈 문학론에 대한 설명이 좀더 자세하다). 콜브룩에 따르면 라이크만의 책은 '수준높은 개관(advanced overview)'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초급'용은 아닌 것이다. 그런 콜브룩의 책에 비해서 라이크만의 책이 월등히 많이 팔려나간다는 것은 우리 독자들의 수준이 초급은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전문가들'이 좀더 긴장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