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불우했던 천재 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 붐이 일고 있다. 그의 미완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2005)가 ‘드디어’ 번역/출간됐고(최근에 절반이 나온 이 책의 나머지 절반은 11월에 나온다고 한다), 곧 10권짜리 우리말 벤야민 선집도 연말부터는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벤야민의 세기’가 준비되는 것인가?

 

 

 

사실, 이러한 벤야민 붐은 서양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진작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특별히 한국적인 현상은 아니다. 우리도 이제 그러한 물결에 발을 담글 수 있게 된 것일 뿐. 해서, 자신이 즐겨썼던 말이지만, 그의 ‘사후의 삶’(afterlife)은 더 이상 불우해보이지 않는다. 비록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바람대로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로 평가되는 한편, ‘도시맑스주의’의 선구적 이론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싱긋 미소를 지을 만도 하지 않을까.

 

 

 

입소문이 아니라 본격적인 번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처음 벤야민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 차봉희 교수 편역의 <현대 사회와 예술>, 그리고 1983년 반성완 교수 편역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이 출간되면서부터이다(1985년엔 베르너 풀트의 전기 <발터 벤야민>(문학과지성사)이 소개되었다). 이제 25년쯤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인데, 이 시기 ‘벤야민’의 간판 노릇을 한 것은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해서, ‘벤야민=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등식이 통용되던 이 시기의 우리에게 벤야민은 친구인 아도르노에게 영감을 준 문학비평가이자 동시에 매체(미디어) 이론가였다.


벤야민 수용사의 두번째 단계는 1992년 벤야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설호 교수의 편역으로 <베를린의 유년시절>(솔출판사)이 출간되면서 시작된다(거기에는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의 개념>이 포함돼 있었다). 이를 통해서 벤야민의 예술론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새로운 벤야민’, 즉 도시 이론가 혹은 도시 ‘관상학자’로서의 벤야민의 모습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단계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는 물론이고,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실린 ‘발터 벤야민 연보’에도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전설로만 남아 있다가 뒤늦게 발견되어 독일에서도 지난 1982년에서야 전집에 묶여 출간될 수 있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우리말로도 소개됨으로써 우리의 벤야민 수용사는 세번째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근년에 나온 벤야민 관련서들이 조명하고 있는 것도 대부분 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되는바, 한마디로 “발터 벤야민, 도시를 산책하다”를 주제로 하고 있다.


어떤 도시들인가? 나폴리, 마르세유, 모스크바, 베를린, 그리고 파리 등이 그가 산책하면서 읽고/쓰고 있는 주요 도시들, 아니 도시-텍스트(city-as-text)들이다. 현대성의 상징인 이 도시-텍스트들을 재료로 하여 그가 계획했던 것, 하지만 미완으로 남겨놓은 것이 텍스트-도시(text-as-city)라는 ‘유례없는’ 텍스트로서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우리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것 말이다. 이렇게 말을 건네면서: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Welcome to Benjamin Vegas!)


여기서 나의 몫은 아직 다 둘러보지도 못한 벤야민베가스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베가스로 떠나기 위한 간단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나는 ‘가이드’가 아니라 ‘스토커’다). 무작정 떠나보는 것도 여행의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뭐라도 한 장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혹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벤야민의 유태인 세 친구의 ‘보고서’를 길잡이 삼아 미리 훑어볼 수도 있겠다.


아도르노가 쓴 <발터 벤야민의 초상>(<프리즘>, 문학동네, 2004)과 한나 아렌트가 쓴 <발터 벤야민>(<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3), 그리고 게르숌 숄렘이 쓴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한길사, 2002)가 그것들이다(아렌트의 글은 벤야민 선집 <일루미네이션>의 영역본 서문으로도 수록돼 있는데,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은 <문학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7)이다). 물론 이들을 참조하는 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참고로 말하자면, 아도르노의 글은 꽤 난해하다. 아도르노와 숄렘은 1955년에 나온 최초의 <벤야민 전집>(2권)을 편집하기도 했으니 벤야민 생전에나 사후에나 ‘최측근들’이라 할 만하다).

 


 

 

 

 

 

내가 나름대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샬 버먼의 <발터 벤야민 - 도시의 천사>(<맑스주의의 향연>, 이후, 2001)부터이다. 1996년에 영어로 발간된 벤야민 관련서 세 권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씌어진 이 글은 짤막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전기적/사상적 맥락을 잘 짚어주고 있다. 그러면서 1999년에 발간된 영어본 <아케이드 프로젝트>(하버드대출판부)를 예고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벤야민에 대한 버만의 평가: “나치와 자기 자신의 파멸의 느낌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때조차 벤야민은 독자들에게 길거리에서 춤추는 법과 현대 세계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결론: “벤야민이 센트럴 파크에서 춤추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우리가 춤을 추면서 벤야민을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늦지 않았다.”(348쪽)


‘19세기 세계수도로서의 파리’를 베를린보다도 사랑했던 벤야민이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하지 않고 미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이후에 ‘20세기의 세계수도 뉴욕’도 사랑하게 됐을까? 자본주의적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는?(라스베가스에 처음 카지노가 들어선 것은 1941년이라고 한다.) 그런 의문은 ‘도시맑스주의’(Metromarxism)란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지리학자 앤리 매리필드도 던지고 있는데, 그가 짐작하기에 “벤야민이 20세기 후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그 역시 전(前) 뉴욕 시장인 줄리아니의 보도(步道) 개혁을 혐오했을 것이고, 노숙자와 노점상, 무단횡단자, 그리고 뉴욕의 노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주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161쪽)


당연한 일이지만,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의 한 장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 아니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에게 바쳐지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많은 오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연구를 통해 도시를 연구했던 엥겔스와는 달리 도시 연구를 통해서 맑스주의를 연구했던 벤야민의 ‘도시맑스주의’를 그의 전기적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해명하고 있다.   


 

 

 

 

 

각각 ‘도시의 천사’ 벤야민,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을 화두로 하고 있는 버먼과 매리필드의 글이 말하자면 워밍업이 되겠다. 거기에 이어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에 대해서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자세한 안내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건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이다. 특히, 서론과 결론은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 데 아주 유용한데, 마치 63빌딩의 전망대 같은 역할을 해준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몇 군데 부정확한 대목을 포함하고 있다).


질로크가 셈하고 있는 벤야민의 도시풍경 연작들은 1924년에 씌어진 <나폴리>를 기점으로 <모스크바>(1927), <바이마르>(1928), <마르세유>(1928), <파리, 거울 속의 도시>(1929), <산 지미냐노>(1928), <북해>(노르웨이의 베르겐시에 대한 스케치, 1930) 등을 포함하며 이들은 ‘사유이미지’로 통칭된다. 물론 19세기 파리에 바쳐진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사유이미지’의 총결산이다. 질로크는 이러한 도시풍경을 관상학, 현상학, 신화, 역사, 정치, 텍스트라는 6개의 범주, 혹은 키워드로써 갈무리한다. 

 

그가 보기에 벤야민의 도시풍경은 “맑스주의적 전통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벤야민만의 아주 독특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현대성과 현대적 삶의 중핵으로서의 도시를 사랑했고 또한 혐오했다. 도시는 그에게 매혹의 대상이자 동시에 구원의 대상이었으며,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질로크의 표현을 빌면, 벤야민은 ‘걸어다니는 모순’이었는바, 현대성의 비판과 구원이라는 벤야민 텍스트의 힘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모순 속에서이다.  


질로크의 책을 통해서 벤야민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윤곽에 대한 브리핑을 제공받았다면, 이제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벤야민베가스’를 직접 거닐어볼 차례이다. 여기부터는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를 지참하는 게 좋겠다. 그녀는 벤야민의 프로젝트가 나폴리(남쪽)와 모스크바(동쪽), 베를린(북쪽), 파리(서쪽)라는 네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나폴리에 관한 짧은 텍스트인 <나폴리>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지만(이에 대한 해설은 질로크와 매리필드를 참조), 모스크바에 관한 텍스트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는 올해초에 소개된바 있다. 베를린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은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 등이며(전자가 번역돼 있다),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파리 텍스트가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것.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수집가’ 벤야민이 마지막 열정을 다 바쳐서 모아놓은 자료들의 거대한 묶음이자 몽타주 재료들이다. 요컨대, 도시 자체이다(그래서 ‘텍스트-도시’이다). 벤야민이 사랑했던 파리의 아케이드는 현대성의 환상(판타스마고리아)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매혹의 장소이며, 또한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횡단)해야 하는 공간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 도시의 바깥, 현대성의 바깥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도 구원도 가능하지 않다. 오직 우리를 찌른 창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도시의 ‘경험’만이 우리를 도시의 환상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다. 이것이 벤야민의 변증법이며, 그가 우리에게 텍스트-도시의 경험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자, 저것이 우리에게 손짓하는 텍스트-도시, 벤야민베가스의 입구이다. 판돈과 배짱이 충분하다면 한번 들어가 보시라! 나의 동행은 여기까지이다...  

 

 

 

 

 

 

 

05. 08. 20-22.

*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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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8-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이자 지옥이었던...
저에게 공부할 한 가지 일이 더 늘었군요.

여울 2005-08-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오늘 도서관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들었다 놓았다하며 결국 빌리지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쯧~. 벤야민 가지치기가 많군요. 이거 어쩐다. 까이거 대충 글을 따라 설명글 많은 것....몇권 꼭 훑어야 쓰것네요. ..ㅎㅎ

로쟈 2005-08-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충, 까이거 읽어야 할 게 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