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책세상
이번달 출판문화(550호)에 실은 출판 칼럼을 옮겨놓는다. 주제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에 대해 썼다. 원고를 써야 할 때쯤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돌베개, 2011)이 손에 잡히기에 읽은 게 빌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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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문화(11년 9월호)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는 질병, 책중독자
지난 7월에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를 빌미로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란 주제를 다룬 바 있다. 구텐베르크 혁명의 결과이기에 ‘구텐베르크 은하계’로도 불리는 책의 지배적 형태가 전자책(e-book)으로 변화 혹은 진화해 갈 것인가가 책의 미래에 관한 핵심 쟁점이다. 책이란 말이 붙긴 했지만 ‘전자책’이 과연 책의 변신인지 아니면 책의 종말인지, 의견은 여러 갈래다. 하지만 그런 의견의 평균치나 평균적인 전망보다 더 궁금한 건 ‘책중독자’들에게 책의 미래가 어떻게 비칠까 하는 문제다. “책 없인 못 살아!”라고 외치는 책중독자들이 적어도 이런 문제에서만큼은 더 많은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들의 고뇌를 보통사람들의 경우보다는 더 무겁게 평가해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책중독자를 자처하는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독베개, 2011) 후기에서 저자가 다루고 있는 문제가 책의 미래이면서 책중독자의 미래다. 때로 혹은 허구한 날 “책에 대한 사랑으로 살짝 몸이 달아오르는” 책중독자들이 흠모하는 것은 물론 종이책이다. 책의 대명사로서의 종이책, 두께와 질감과 중량을 갖고 있는 책 말이다. 서점 혹은 책방이란 이 책들이 차려 자세로 진열된 공간이며, 책중독자란 기본적으로 그 ‘사랑스러운 것들’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자들이다. 이 책중독자들의 기본 영역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책방을 둘러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 책을 사서 쌓아두는 것, 그리고 책을 읽는 것. 전자책이 대세를 차지하는 책의 미래라면 이런 기본적인 영역의 ‘구조변동’을 의미한다.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책의 구입은 손으로 만져보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에서 다운로드받는 것을 뜻하고, 독자는 손바닥 크기의 디지털 독서 기기를 주머니에 꽂아가지고 다니게 될 것이다. 아니 독자가 아니라 ‘최종 콘텐츠 사용자’들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우리 책중독자들이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형의 것을 책이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 세상은 더 나쁜 세상은 아닐지라도 뭔가 다른 세상이며, 그 다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책중독자란 종도 도태되거나 멸종될지 모른다. 인터넷서점의 등장으로 이미 많은 동네서점이 문을 닫은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옛날 옛적에 책이라면 종이책밖에 모르던 책중독자들이 있었더라……”
사실 책방을 둘러보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이미 생활의 기본 영역에서 빠져나간 지 오래다. 톰 라비는 1995년 즈음만 해도 다른 사람과 ‘우리의 사랑스러운 보물’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화 주제 가운데 하나인 에벌린 워의 초기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정신적인 피붙이를 만나기까지는 몇 시간, 때로는 며칠이 걸리곤 했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나도 워의 소설 <한줌의 먼지> 같은 걸 읽지 않았기에 그의 말상대가 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런 고충에 대해선 맞장구를 쳐줄 수 있다. 책중독자용 수다를 요즘과 같은 대형서점에서 나누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정은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책방들의 사정이 예전에 크게 나았던 것도 아니다. 책방 주인 내지는 서점 직원과 책에 대한 수다를 나눠본 건 개인적으로도 서점 순례 경력이 30년이 넘지만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수다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들을 만났을 때나 가능한 편이고, 대개는 온라인의 북커뮤니티를 통하는 게 빠르다. 다시 라비의 말을 옮기면, “문학에 관한 대화의 공간인 아마존닷컴이나 반즈앤노블닷컴, 또는 수많은 다른 웹사이트를 이용함으로써, 부지런한 ‘마우스질’로 책방을 둘러보고 대화를 나누고픈 욕구를 실컷 채울 수가 있다.”
분명 그렇게 독서환경이 바뀌었다. 하기야 그런 변화된 환경이 아니었다면 나도 ‘인터넷 서평꾼’으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 라비도 비슷한 경험을 한 모양이다. “사실상 문학적 신실함을 증명해주는 거라곤 주변에 엄청나게 쌓아놓은 책 더미 외에는 없는 평민 책중독자가 자신의 초라한 신분을 넘어서 진정한 서평가가 될 수 있다.” 바로 인터넷 시대에는! 여기서 라비가 ‘평민 책중독자’라고 한 것은 본래 책중독이 상당한 재력과 서가공간을 필요로 하는 아주 ‘비싼’ 질환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 서양 귀족들은 유명한 애서가가 세상을 떠날 경우 그가 남긴 장서를 모두 사들이는 게 관습이었다고 한다. 비좁고 불편한 책방에서 서성거리며 어렵게 책을 골라낼 필요도 없고, 일반 대중과 섞이는 일도 없으니 여유만 된다면야 아주 편리한 방식이었다. 그들은 책방의 책을 모두 갖다달라고 하고선 “내가 원하는 건 갖고 나머지는 넘겨주겠소”라는 식으로 말했다. 예컨대 영국인 독서가 리처드 히버는 앉은자리에서 3만권을 사기도 했다고. 물론 그런 건 보통 사람들, 곧 평민들로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책중독자는 대개 재산가들이었다. ‘평민 책중독자’의 등장은 값싼 페이퍼백 혁명 이후의 일이다.
분류하자면 나 또한 책중독자이다. 더 나쁘게는 평민 책중독자. “돈이 생기는 대로 우선 책을 사고 그다음에 옷을 사 입으리라”고 한 에라스무스의 말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면에서도 그렇고, 라비가 제시하는 책중독자 테스트 항목을 체크해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25가지 항목 가운데 ‘책을 몇 권이나 샀는지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다’거나 ‘책을 사들이는 것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들을 당혹스럽게 한 적이 있다’, ‘책방 직원이 찾지 못하는 책을 당신이 찾아낸 적이 있다’ 등은 주저 없이 ‘예’에 해당하고 ‘책을 읽다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징계를 받은 적이 없다’는 비록 해당사항이 없기에 ‘아니오’라고 답하지만 카드로 책값을 돌려막다가 신용불량자가 됐던 경험은 해고나 징계에 근접하지 않을까 싶다. 책중독자가 ‘되는’ 게 아니라 책중독자로 ‘태어나는’ 거라고 하면, 가족 중에 유독 나 혼자만 책중독에 빠진 걸로 보아 유전적 돌연변이인 것 같기도 하다(유감스럽게도 과학계는 어떤 유전자가 이 질환과 관계가 있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라비의 정확한 지적대로 대부분의 책중독자는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치유되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 영혼을 들어올릴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중독이라는 시궁창에서 나뒹굴어야 한다.” 이게 치유법인가? 그렇다. “책 사는 데 돈을 몽땅 쏟아부어 고통과 죄책감을 일으킬 때까지 책을 사들어야 한다.” 그런 고통과 죄의식의 밑바닥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도움과 구원을 요청하게 될 것이니, 이건 어떤 필연의 여정이다. 라비의 충고는 이렇다. “책을 많이 많이 사들여라. 그래서 심한 곤경에 빠져 다시는 책을 사고 싶지 않을 때까지.”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는 질병이란 점에서 책중독은 사랑의 열병을 닮았다. 역사적으로 이를 입증해주는 사례도 적지 않다. 19세기 프랑스 사람 실베스트르 드 사시는 “아, 내 사랑하는 책들!……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라고 부르짖곤 했단다. 전자책에 대한 책중독자들의 거부감은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형의 것을 책이라고 부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책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진 못하잖아”라는 식의 기분을 갖게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책중독자는 신기술을 반대하는 ‘러다이즘’ 신봉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과는 무엇인가. 책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사들여서 집안 곳곳에 쌓아두고 서가에서 빼내 냄새를 맡으며 훌훌 넘겨보다가 일부분을 읽고는 다시 꽂아두거나 쌓아둔다. 그러고는 다음날도 똑같을 일을 반복한다. 라비에 따르면, 굳이 라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런 것이 “우리 책중독자들에게 무척이나 유쾌하고 의미 있는 일련의 이벤트와도 같다.” 하지만 이제 ‘책의 미래’와 더불어 진정한 책중독자의 시대도 종말을 고할지 모를 일이다.
사실 “아아, 결국 우리는 죽으리라”는 운명이 유별난 비애감을 자아내는 건 아니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애서가의 경우도 특별하지 않다. 책을 사랑하던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도래할 뿐이다. 사랑의 대상이 반드시 종이책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세대마다 취향은 다르니까. 달라질 수 있으니까. 세살 때부터 핸드폰과 아이패드를 만지작거리며 자라는 다음 세대에게는 전자책이 특별한 에로티시즘의 대상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책의 형태는 비록 달라질지라도 ‘읽는다’는 독서 행위는 적어도 당분간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게코스키의 독서편력>(뮤진트리, 2011)에서 저자는 “내가 읽었던 책들과 나의 이전 자아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자아를 형성시키는 이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된다”고 적었다. 이 읽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빛이 사라지고 밤이 드리워질 때까지, 더는 책을 읽지 못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책을 읽게 되리라.”
11. 0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