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외출하기 전 자투리 시간에 무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로쟈의 한줄'을 적기로 한다. <모비딕>의 한줄이다. 지난주 구입도서 가운데 가장 반가운 책의 하나는 멜빌의 <모비딕>(작가정신, 2011) 보급판이었는데, 아셰트클래식판으로 나온 <모비딕>(작가정신, 2010)은 일단 너무 두껍고, 너무 무거워서 휴대가 불편했다. 게다가 참고로 들어가 있는 삽화들이 본문과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참고용'이었기에 빠져도 독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이번 보급판에선 삽화를 빼고 페이지당 행수를 두 줄 늘렸다(25행에서 27행으로). 그렇게 해서 전체 페이지수는 817쪽에서 718쪽으로 100쪽이 줄었다. 기분상 무게는 절반으로 줄어든 느낌이다. 같은 번역본을 보급판으로 다시 구한 이유인데, 책에 대한 집중도는 더 좋아질 듯해서 마음에 든다. <모비딕>의 세계문학전집판들이 경쟁 번역본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정본' 역할을 해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옥에 티'가 교정돼 있지 않기에 지적해놓는다. <모비딕>의 핵심장 중의 하나인 36장 '뒷갑판' 말미에서 에이해브 선장이 이번 항해의 목적이 흰고래 모비딕을 잡는 데 있다고 말하고 유일한 반대자인 일등항해사 스타벅까지 설득하는 장면으로 부하 선원을 압도하는 그의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에이해브의 완력 앞에 일, 이, 삼등 항해사가 모두 움츠러드는 장면은 이렇게 기술된다.  

그 강력하고 긴박하고 신비스러운 선장의 태도 앞에서 세 항해사는 기가 꺾여 움츠러들었다. 스터브 플래스크는 눈길을 돌렸고, 정직한 스터브는 눈을 내리깔았다.(아셰트판, 249쪽; 보급판, 219쪽) 

이 대목의 오류는 누구라도 지적할 수 있다. 기가 꺾인 '세 항해사'에 대한 묘사인데, '스터브-플래스크-스터브'라고 해서 '스터브'만 두 번 호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정직한 스터브'는 '정직한 스타벅'으로 고쳐져야 한다. 참고로, 원문은 이렇다(내가 참고한 건 펭귄판이다).   

The three mates quailed before his strong, sustained, and mystic aspect. Stubb and Flask looked sideways from him; the honest eye of Starbuck fell downright.

완성도 높은 번역이기에, 이 정도 흠도 교정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바로 이어지는 37장 '해질녘'의 첫 문단에도 한 줄이 첨가되면 좋겠다.  

나는 하얗고 탁한 자국을 남긴다. 내가 항해하는 곳이며 어디에든 창백한 물, 그보다 더 창백한 얼굴, 질투심 많은 파도는 내가 남긴 자국을 삼키려고 옆으로 비스듬히 부풀어 오른다.(아셰트판, 251쪽, 보급판 221족) 

이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I leave a white and turbid wake; pale waters, paler cheeks, where'er I sail. The envious billows sidelong swell to whelm my track; let them; but fisrt I pass

차이는 원문의 마지막 문장 'let them; but fisrt I pass'(뒤따라오라지, 하지만 내가 먼저다)가 번역문에는 누락됐다는 점. 몇 단어 안 되지만, 에이해브의 성격을 말해주는 부분이어서 나름대로 중요한 대목이라는 생각이다. 방대한 분량에 견주면 사소한 오류에 지나지 않지만, 더 정밀한, 더 좋은 번역본으로 나오는 게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이지 않겠는가... 

11. 0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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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19 13:55   좋아요 0 | URL
"뒤따라오라지, 하지만 내가 먼저다."
짧지만 아주 멋진 번역인데요. 나중에 다른 번역자들은 이 문장을 어떻게 옮겼는지 각 번역본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는데요 ㅎㅎ^^

로쟈 2011-05-19 20:49   좋아요 0 | URL
다른 번역본은 확인해보지 못했고, 그냥 제 식으로의 번역입니다.^^;

비로그인 2011-05-19 18:08   좋아요 0 | URL
흑흑 저는 양장본을 싫어해서 못마땅해하며 샀는데 이런 식으로 보급판이 나와 뒤통수를 치다뇨ㅜㅜ

로쟈 2011-05-19 20:50   좋아요 0 | URL
알면서 얻어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일즈 2011-05-19 21:29   좋아요 0 | URL
백경을 원서로 보려고 이해가 잘 안되면서 여러번 읽다 보니까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시점이 이스마엘에서 인디언 피쿽으로 바뀌면 어떨까하는 겁니다. 포경선 선원과 선장에 대한 묘사도 많이 달라지겠지만 백경을 바라보는 관점도 매우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로빈슨 크루소를 다소 관점을 바꿔 프라이데이 입장을 넣은 방드르디라는 소설을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혹시 그런 소설이 이미 나왔다면 알고 싶고요^^

로쟈 2011-05-19 22:44   좋아요 0 | URL
'되받아쓰기'를 말씀하시는군요. <모비딕>은 아직 못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모비딕> 자체가 상당히 도전적이긴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경향도 있구요...

pyenjea 2011-06-13 09: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작가정신 편집부입니다. 정성을 기울였는데도, 저희가 미흡한 부분이 있었네요. 말씀해주신 부분 역자와 상의해서 다음 쇄에서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 로쟈 님께서 찾아주신 덕분에 책의 오점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금보다 더 잘 다듬어진 모비딕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