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그렇겠지만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에(그러니까 마무리지으려는 일들 때문에) 연말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는데, 어느덧 마지막 날이다. 며칠 전에 받은 이번주 시사IN에는 별책부록이 딸려왔는데, 시사인IN과 알라딘이 공동으로 선정한 '올해의 책' 특집이다. 인문/역사쪽 추천위원을 맡고 있어서 추천한 책은 물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다. 사회적 파장까지 불러온 화제작이라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기에. 나로선 <시크릿>이 있던 자리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놓여 있다는 것과 시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책이 갖는 '의의'라고 생각한다. 그런 걸 짧게 몇 마디 적었다. 생각해보니 마감에 맞추느라 신촌의 한 PC방에서 급하게 쓴 글이다.
시사IN(172호) [2010 행복한 책꽂이]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란 소개 문구를 내걸긴 했지만, 이만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10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인문철학서로는 기록적으로 60만 부 이상이 판매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올해의 책’으로 꼽히는 이유다. 최근 몇 년간 교보문고의 종합베스트셀러 1위도서가 <마시멜로 이야기>(2006), <시크릿>(2007-2008), <엄마를 부탁해>(2009) 등이었던 걸 고려하면 결코 가볍지 않은 인문서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은 이례적이다. 덕분에 ‘정의’는 올해의 화두가 되었다.
가령 새해 예산안을 ‘날치기’로 강행처리하고서 여당 원내대표가 “대다수 국민들이 예산처리를 바랐고 이것이 국가를 위한 정의”라고 말한 것도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발한 ‘정의 담론’의 효과 아닌가. 비록 ‘국가를 위한 정의’와 ‘권력을 위한 불의’를 혼동한 감은 있지만 그의 발언에서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은 읽을 수 있다. 아무리 정의와 무관한 일을 벌이더라도 명분은 ‘정의’여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다면 절반은 성공이라 할 만하다. 그 나머지 절반은 이름과 실제가 부합하도록 정의에 이름값을 돌려주는 것일 터이다.
일찍이 파스칼은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그가 보기에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며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만 한다. 정당한 것, 곧 정의가 강해지지 않으면 강한 것이 정당함을 참칭한다. 정의는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가. 정의로운 사회를 희원하는 사람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를 다룬 뛰어난 철학서를 소개하고,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오늘날의 법적․정치적 논쟁을 다루는 수업”으로 요긴하다.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의 주요 문제를 어떻게 사고하고 또 논쟁할 수 있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의론의 전체 구도를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해한다. 각각은 행복 극대화, 자유 존중, 그리고 미덕 추구가 정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공리주의자들에게 옳은 행위란 공리를 극대화하는 행위이다. 도덕적 판단에 계산가능성을 도입함으로써 공리주의는 도덕철학보다는 도덕과학을 자임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 모든 가치를 비용․편익 분석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란 의문과 함께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한편 자유주의 정의론을 대표하는 칸트에게서 도덕은 정언명령에 따른 자유로운 행동만을 가리킨다. 이 경우엔 무엇이 선이고 좋은 삶인지 판단하려고 하지 않기에 ‘중립을 지키는 국가’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자아’를 지지한다.
하지만 샌델이 보기에 선택의 자유만 확보하는 것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는 노력이 거기에 덧붙여져야 하며,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목적론적 정의론의 요체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는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를 옹호하며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이런 결론보다 중요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질문의 여정이며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길잡이로서 제격이다.
10. 12. 31.
P.S. 개인적으로 ‘정의’ 못지않게 중요한, 2010년의 키워드는 ‘그들’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적대를 무화하는 ‘우리’라는 이데올로기적 수사에 견주어 자본주의적 적대를 분명하게 직시하도록 하는 ‘그들’이란 기표의 파괴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그들’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내준 책이 있던가? 바로 그런 ‘계몽적인’ 이유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2010) 또한 ‘올해의 책’에 값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함께 <정의란 무엇인가>, 이 두 권의 인문사회과학서가 합심하여, 혹은 ‘하버드’와 ‘케임브리지’가 합작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정의!’ 그게 내겐 2010년을 정리해주는 문구로 보인다.
한편 장하준이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한다면, 슬라보예 지젝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에서 그러한 자본주의가 결국엔 ‘사회주의’(혹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로 귀결된다고 보고, 그것을 공산주의와 대비시킨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그래서 도래하지 않은 ‘올해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