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의 출세작이자 대표작 <그라마톨로지>(민음사, 2010)의 개정 번역판이 출간됐다. 첫 번역판을 출간한 김성도 교수의 개역본이다. 원래 가볍지 않은 책이지만 상당한 분량의 역주가 추가되어 분량이 무려 967쪽에 이른다. 일단 '편하게'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내가 갖고 있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은 그래도 가방에 넣고 다닐 수는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나온 것인 만큼 한국어본으로서 제몫을 해주길 기대한다. 참고로, 푸코의 <말과 사물>,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등도 재번역되고 있으니 내년쯤엔 출간되지 않을까 싶다. 바야흐로 프랑스의 '스타' 철학자들이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라마톨로지'를 검색해보던 중 오래전 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3. 10. 11)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그라마톨로지」라는 낱말이 1960년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문자학」을 가리켰다. 문자의 유형·계통·역사를 다루는 실증적 학문으로서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69)는 이 단어를 문자의 철학적 목적론적 성찰이라는 뜻으로 달리 사용하고 있다. 

1967년 출판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Gramatology)」는 데리다 사상의 좌표점을 설정하는 대작이다. 96년 국내 번역본이 나왔다. 고려대 언어학과 김성도 교수가 옮긴 이 책은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글쓰기가 마치 독자의 지성과 인내력을 시험하는 것 같다. 소쉬르·레비스트로스·루소·하이데거 등 기존 문학이나 철학에서는 한 줄로 꿰기 힘든 이질적인 텍스트들을 종횡무진으로 읽어내는 데리다의 솜씨를 따라잡기란 무척 벅찬 일이다.   

「그라마톨로지」는 한마디로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비판이다. 데리다는 플라톤 이후 기존 형이상학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을 1차적인 것으로 보는 이른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현전(프레장스·presence)의 형이상학은 인종 중심주의· 소리 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이다. 이 전통에 따라 목소리는 영혼과 본질적·직접적 근접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 반면 문자언어는 존재의 반영 또는 그림자로 멸시됐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무엇이 따로 있다는 믿음, 그것에서 출발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은 결국 모든 가치의 서열 체계를 매기려는 욕망이며 따라서 억압의 구조라고 데리다는 폭로한다.  

여기서 데리다의 사상을 집약하는 「해체」의 개념이 등장한다. 해체의 궁극적 겨냥점은 「울타리 엿보기」이다. 형이상학은 닫혀진 원이 아니며 울타리너머에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복수의 진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해체는 파괴가 아니라 기존 사유 체계의 한계를 교정하는 것이다.  

 

프랑스 저술가 장 뤼크 샬뤼모는 『데리다는 자기 자신의 문화를 재검토하고 있는 유럽인의 한 전형이고 전통적 제가치의 소멸을 분명하게 밝힌 증인』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로 꼽힌다. 해체는 유행어가 됐다.  

자크 데리다 193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65년 이후 이 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쳤으며 70년대 중반부터 예일·존스홉킨스 등 미국 주요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 「목소리와 현상」「에크리튀르와 차이」「철학의 여백」「회화에서의 진리」등이 있다.(오미환기자) 

10. 12. 26. 

 

P.S. <그라마톨로지>는 이번이 세번째 출간이다. 첫 번역본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 1996)로 14년 전에 나왔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가 두 번째 번역판이었다(이번 전면 개정판 서문에는 "2002년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고 적혀 있는데, 착오로 보인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영역본은 '전설적인' 번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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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12-2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개역본이 나왔군요. 전 김웅권의 번역본과 스피박의 영역본을 갖고 있습니다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TGIF(twitter, google, iphone, facebook)의 시대에 데리다의 의미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역본도 장만해서 함께 숙독해 봐야 할텐데 언제 시간이 날런지...

로쟈 2010-12-27 10:53   좋아요 0 | URL
소위 '서플먼트'가 풍부한 책이긴 합니다. 들고 다니기가 불편해서 탈인데, 방학때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헌내 2010-12-26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박이 그라마톨로지 영역도 했군요....

로쟈 2010-12-27 10:53   좋아요 0 | URL
원래는 번역자로 더 유명했어요...

자꾸때리다 2010-12-27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도 교수의 첫번째 번역은 곳곳에 오역이 산재해있다는 혹평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절치부심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별로 믿음이 안 가서...

로쟈 2010-12-27 10:55   좋아요 0 | URL
서문에 보면 상당한 자부심이 피력돼 있습니다. 사실 소쉬르에 대해선 권위자인 만큼 동문서 번역보다 더 나을 수는 있습니다. 베테랑 편집자와 작업했다면 좋은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고요...

paul 2010-12-2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 해제와 역주로 인해서 볼륨이 늘어났네요...역시나 들고다니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두께네요^^ 그래도 올해 마지막 가장 반가운 뉴스였습니다. 명작들이 그러하듯 이 책도 많은 생각의 갈피들을 생산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바늘에 실을 꿰듯이 읽어가고 있는데, 장인(데리다)의 숨결을 느끼기에는 역시 부족한 감이 없진 않지만, 데리다의 텍스트는 가능한한 데리다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죠...제가 보기엔 자부심이라기 보다는 번역을 놓고 절치부심한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띄더군요.

로쟈 2010-12-27 23:38   좋아요 0 | URL
네, 절치부심도 맞는 말 같습니다. 노심초사한 노작이라고 할까요.^^

청루 2011-01-21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말과 사물은 어떤 분이 번역하시는지 아시는지요?

로쟈 2011-01-22 00:35   좋아요 0 | URL
얼핏 <광기의 역사> 역자가 하는 걸로 들었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