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과 흔적 - 역사: 진실한 것, 거짓된 것 그리고 허구적인 것
카를로 긴즈부르그 지음, 김정하 옮김 / 천지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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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판하고만 군데군데 비교해 보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번역들이 종종 발견된다. 완역이 아니라 발췌번역이라는 점도 아쉽다. 오히려 다행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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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만들기 -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재현의 정치학
이남희 지음, 이경희.유리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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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 "영어권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으로서의 한계 또는 장점이 두드러진다.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운동권을 해외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목적이라면 아주 유용한 책이었겠으나,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으며 단순하고 평면적이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널리 알려진 해외사례나 이론에 대입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특히 그러했는데, 해외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지만 한국 독자로서는 오히려 낯설고 과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역사에 생소한 독자들에게는 좋은 소개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민중 프로젝트를 정치·문화·상징 권력의 장에서 이루어진 힘겨루기의 산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민중 프로젝트는 억압과 저항, 권력과 해방 사이의 경계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며, 국가가 주도한 민족주의·근대화 담론과, 이와 대립 관계에 있는 민중 담론 사이에 교차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22) 그런데 이러한 접근이 그렇지 않은 접근에 대하여 가지는 변별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어떤 접근법을 극복하고자 하는가? 혹시 결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황의봉(1986)과 이재오(1984)인가?(465)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 연구가 처음 집필되었을 시기를 고려하더라도 너무 낡은 그리고 (선행연구라기보다는 텍스트에 가까운) 비판대상을 다시 끌어올려서 대조항으로 삼은 다소 민망한 전략 아닐까? 이를 차치하더라도, 민중운동을 "전방위적인 세력 다툼의 장에서 펼쳐진 담론 경쟁으로 이해"하는 것의 전략적 이점이 억압과 저항, 권력과 해방, 모순과 결함이 교차하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 역시 별로 새로울 것 없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465) 접근법과 그것의 이론적 함의 역시 다소 장황한 의미부여처럼 보인다.


위와 같은 지점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이 정도의 국내 저서를 떠올리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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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푸른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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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고 돈을 버린다는 생각으로 구매한 책이다. 하지만 정말로 돈이 버려졌다는 것을 실감하니 기분이 영 유쾌하지 않다. 국내의 많은 아렌트 번역서들은 영어로 읽을 때 더 쉽고 이해가 잘 되는 놀라운 경험을 제공한다. 


번역에 대한 관점과 견해는 물론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번역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 또는 한국어 실력에 대한 의심이 들게 하거나 (해당분야의 권위자인) 역자의 텍스트 자체에 대한 몰이해까지도 의심하게 만든다면 심각한 문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씩 추가해보고자 한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Yet before we begin to speculate about the possible advantages of our present situation, it may be wise to reflect upon what we really mean when we observe that theology, philosophy, metaphysics have reached an end―certainly not that God has died, something about which we can know as little as about God's existence (so little, in fact, that even the word "existence" is misplaced), but that the way God had been thought of for thousands of years is no longer convincing; if anything is dead, it can only be the traditional thought of God.(10)

물론 우리가 현재 상황의 가능한 장점에 대해 사색하기 이전이지만, 우리는 신학과 철학과 형이상학이 종말에 도달했다는 것을 관찰할 때 우리가 실제로 의도하는 것을 성찰할 수 있다. 이것은 바람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죽었으며, 우리가 신의 존재(사실, '존재'라는 용어도 잘못 설정되고 있다)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에 대해 사유하는 오래된 방식은 이제 더 이상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죽었다면, 그것은 신에 관한 전통적 사유가 될 수 있을 뿐이다.(55-56)


This has become impossible, partly because of our enormously enlarged historical consciousness, but primarily because the only record we possess of what thinking as an activity meant to those who had chosen it as a way of life is what we would call today the "metaphysical fallacies."(12)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부분적인 이유로는, 우리의 역사의식이 엄청나게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이유로는, 활동으로서의 사유가 삶의 방식으로서 사유를 선택했던 사람들에게 중요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형이상학적 오류'이기 때문이다.(58)


Crucial for our enterprise is Kant's distinction between Vernunft and Verstand, "reason" and "intellect" (not "understanding," which I think is a mistranslation; Kant used the German Verstand to translate the Latin intellectus, and Verstand, though it is the noun of verstehen, hence "understanding" in current translations, has none of the connotations that are inherent in the German das Verstehen).(13-14)

'이성Vernunft'과 '지성Verstand'이란 칸트의 구분은 우리의 연구에 대단히 중요하다.(내 생각으로 'Verstand'를 '오성understanding'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역이다. 칸트는 라틴어 'intellectus'를 독일어 'Verstand'로 표기했다. 그러나 'Verstand'가 'verstehen'의 명사이므로 'understanding'은 독일어 'Verstehen'에 내재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60-61)

이 부분은 언급된 철학 개념과 독일어에 조금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면 무엇이 이상한지도 알아채기 어려운 부분이다.


Dead matter, natural and artificial, changing and unchanging, depends in its being, that is, in its appearingness, on the presence of living creatures.(19)

무생물은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변화하든 불변하든 현존하는, 즉 겉으로 드러나는 상태에서 생물의 존재에 좌우된다.(66)


Since sentient beings―men and animals, to whom things appear and who as recipients guarantee their reality―are themselves also appearances, … (19)

인간과 동물 같은 지각력이 있는 존재들―사물들을 지각하며 감각적 수용자로서 자신들의 실재를 확인한다―자체는 또한 현상이다.(66)


Seeming corresponds to the fact that every appearance, its identity notwithstanding, is perceived by a plurality of spectators.(21)

겉보기는 다수의 구경꾼이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상을 지각한다는 사실에 조응한다.(69)


Since we live in an appearing world, is it not much more plausible that the relevant and the meaningful in this world of ours should be located precisely on the surface?(27)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세계에서 유의미한 것과 연계된 것이 정확하게 표면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77)


For an "expression" cannot but express something, and to the inevitable question, What does the expression express? (that is, press out), the answer will always be: something inside―an idea, a thought, an emotion. The expressiveness of an appearance, however, is of a different order; it "expresses" nothing but itself, that is, it exhibits or displays.(30)

'표현'은 중요한 어떤 것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으며, 표현이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불가피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이념, 사상, 정서 등 내부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의 표현성은 상이한 등급에 속하며, 현상은 그 자체만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현상은 자기 자신을 밖으로 나타낸다.(80)


Aristotle's De Anima is full of tantalizing hints at psychic phenomena and their close interconnection with the body in contrast with the relation or, rather, non-relation between body and mind.(33)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는 영혼 현상에 대한 감질나는 암시, 그리고 육체와 정신 사이의 관계 또는 영혼 현상과 육체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언급들로 가득 차 있다.(84-85)


Courage can then become second nature or a habit but not in a sense that fearlessness replaces fear, as though it, too, could become an emotion.(36)

따라서 용기는 제2의 본성 혹은 습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두렵지 않음은 감정과 같이 두려움을 대체하므로 제2의 본성 또는 습관이 아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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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y1105 2022-04-1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못 읽을 정도인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원서로 읽을만한 수준이 안되어서...

청루 2022-04-17 12:26   좋아요 0 | URL
제 한국어 수준으로는 읽기 어려웠습니다.
 
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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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다.
그런데, 프로타고니스트도 안타고니스트도 아닌 부모를 가진 이들은 언어화할 수 있는 어떤 유산을 가지고 있는가? 서발턴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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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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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황정은 소설의 정치성을 말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이 실제로는 비정치성을 수행하고 있다고 느낀다.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라는 이상에는 너무나도 공감하고 동의하지만, 그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점에서 나는 그의 작품이 새롭기보다는 진부하고, 치열하기보다는 순진하다고 생각해왔다. 불편함에 대한 감수성을 민감하게 유지하는 것으로는 불편함을, 나아가 죽음을 만들어내는 세상을 바꿀 수 없지 않는가. 끊임없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이 세계를, 그 배제된 것으로부터도 무언가를 다시 배제하는 이 세계를, 상식의 이름으로 통용되는 폭력을 바라보고 느끼며 기록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윤리에 대한 호소? 작은 것에 대한 감수성? 회복되고 발견되어야 마땅한, 기각할 수 없는 이 가치들은 왜 좀처럼 구현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작가의 문학적 답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답을 가지고 작가는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 문학은, 더군다나 정치나 혁명에 대해 말하는 문학이라면 이 고민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작가가 한 것은 이 세상과의 싸움이었는가 세상에 대한 논평이었는가. 비분강개하여 나와 남의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것과, 자신이 받은 상처를 계속 더듬기만 하며 대들지 않고 나지막이 읊조거리는 것. 전자를 진정한 정치라 신화화하는 것도 역겹지만 후자를 섬세한 정치라고 상찬하는 것 역시 건강해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답이 필요하지 않은가. 내가 정치와 문학에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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