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외출길에 우편함에 <출판문화>(538호)가 배송돼 있기에 꺼내 읽었다. 권두언에 해당하는 '초대석' 코너에 '우리시대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란 주제의 원고를 청탁받아 쓴 글이 실렸다. 주제가 너무 거창하여 주로 '5피트 책꽂이'와 '독서국민'을 화두로 삼아 나대로의 생각을 적었다. 오탈자를 바로 잡아 옮겨놓는다.
출판문화(10년 9월) 우리시대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
‘우리시대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는 ‘곁다리 인문학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창한 주제다. 나는 그냥 ‘5피트 책꽂이’ 이야기에서 내가 느낀 바를 조금 적고 싶다. ‘피트’란 단위에서 우리네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짐작하실 것이다. 미국 얘기다. 지난 세기 초의 일인데, 무려 40년 동안이나 하버드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한 찰스 엘리엇이 은퇴할 무렵에 한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 50권짜리 전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51권이다. 일방적인 제안은 아니었고, 엘리엇 총장이 평소에 “5피트 책꽂이면 몇 년 과정의 일반교양 교육을 대체할 만한 책을 충분히 담을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 지론을 바탕으로 1909년에 펴낸 것이 ‘하버드 클래식’이란 전집이고, 이 전집의 별칭이 ‘5피트 책꽂이’다.
<하버드 인문학 서재>(21세기북스, 2010)의 저자 크리스토퍼 베하의 묘사에 따르면, 자신의 외할머니가 소장한 이 전집은 한 칸의 폭이 2피트인 책꽂이 세 칸을 차지했다. 세 칸의 높이가 5피트 가량 되는 셈이니까 꽤 큼직한 책들인 듯싶다. 각 권마다 400-500쪽이라고 하니까 분량도 만만찮다. 엘리엇은 하루에 15분씩만 투자하면 누구라도 고등교육이 제공하는 최상위 수준의 교양을 갖출 수 있다고 장담했고 또 그렇게 기대했다. 그로서는 ‘5피트 책꽂이’가 교양의 ‘핵심’이자 ‘최소한’이었던 모양이다. 하나의 교과과정처럼 편집한 이 전집에서 그는 독자가 세계 사상의 주요 흐름을 간파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그야말로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위대한 교과서”로 비치길 원했다.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나서 베하는 2006년 연말에 거의 100년 전에 나온 이 전집 완독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2007년 1년 동안 독서록을 썼다. 견적상으론 1주일에 한권씩, 하루에 60-70쪽 정도씩 읽는 일이었고, 일견 대단한 일로 보이지 않지만 이뤄낸 성취는 작지 않아 보인다. 사실 우리의 경우 대학 교양과목을 2년간 듣는다고 해서 50권 정도의 고전을 독파하는 학생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버드 인문학 서재>에는 1권의 첫 작품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부터 우리에겐 생소한 49권의 마지막 작품 윌리엄 모리스의 <볼숭과 니벨룽 이야기>까지 하버드 클래식의 전체 목차와 요지가 부록으로 수록돼 있는데, 100년 전 ‘목록’인 만큼 유익한 참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절대적이진 않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이 목록이 아니라 ‘5피트 책꽂이’라는 기획이다. 민주 시민이 공유해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 제시되고 그것이 실제로 읽히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와 좀 구별되지 않을까.
하버드 클래식은 출간 이후 20년 동안 약 50만질, 낱권으로는 1000만권 가량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게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시할 만한 수치는 아니다. 또 모든 독자가 이 전집을 통해서 애초에 엘리엇이 기대한 만큼의 지적 수준과 교양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도 미지수더라도 그들의 집집마다 같은 전집이 꽂혀 있었다는 사실 자체의 의의는 간과할 수 없다. 책에 대한 기억과 독서 경험을 공유한다면 그들은 이미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니까. 설사 무얼 읽었는지 다 망각한다손 치더라도, 라이오넬 트릴링의 말대로 같은 걸 잊어버리는 것이므로 의의가 없지 않다.
미국에서 그렇듯 국민적 교양을 위한 고전 전집이 기획되고 읽히기 시작할 때 일본에서는 막 ‘독서국민’이 형성되고 있었다. 나가미네 시게토시의 <독서국민의 탄생>(푸른역사, 2010)에 따르면, 메이지 30년대(1897-1906)에 일본의 독서문화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독서국민이란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밴 국민’을 가리키며 좀더 구체적으론 ‘신문이나 잡지, 소설 등 활자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읽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독서국민은 물론 근대의 새로운 독자층의 형성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독서국민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가? 두 가지가 필수적인 계기였다. 하나는 읽고 쓰는 능력과 독서 습관의 보급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서 자료의 지속적인 공급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 국민 대다수는 소학교 졸업자였지만 그 정도 교육으로는 읽고 쓰는 능력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지방에 많은 도서관을 설립했고, 독서회나 순회문고 사업 등에 나선 언론사들도 독서 습관을 기르는 데 일조했다. 신문이나 잡지를 팔기 위해서라도 문맹퇴치와 일반적인 독서능력 함양은 필수적인 요구였다. 거기에 근대적 철도의 부설에 따라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추게 된 출판 자본이 근대 일본어로 쓰인 책들을 찍어내면서 바야흐로 독서국민이 탄생하게 됐다.
이러한 사례들에 견주면 우리의 출발은 매우 불우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데다가, 비록 근대식 교육과 언론이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독서국민은 형성되기 어려웠다. 30%의 식자층만이 한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일본어 책까지 읽을 수 있는 엘리트 독자층은 10%를 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계급 이전에 한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읽고 쓰는 능력의 유무에 따라 분할돼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라면 모든 구성원을 동등한 주권자로 전제하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이 제대로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 어렵고,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된 해방 이후 한국 현대 정치사의 굴곡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군주가 통치하는 왕정국가라면 그 국가의 존립과 흥망을 좌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군주 한 사람의 학식과 덕성이다. 그런 것이 그의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따라서 예비 군주의 교육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그의 배움을 일컬어 ‘성학(聖學)’이라 불러왔다. 똑같은 원리가 민주주의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국민 각자가 주권을 갖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그 주권자의 역량, 곧 국민의 일반적 역량이다. 그리고 그 역량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 사고력과 판단력의 원천이라 할 지식과 교양이다. 그것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물론 책을 통해서, 독서를 통해서이다. 기본적인 독서력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민주사회의 기본 토대이자 버팀목이다. 그런 독서력의 중요성에 비하면 책의 종류는 부차적이다.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밴” 다음이라면 어떤 종류의 독서라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들 각자는 ‘독서국민’이며 대한민국은 독서 강국이라 할 만한가? 우리는 국민 개개인이 주권자로서 자랑할 만한 식견과 교양을 갖고 있는가? 우리의 교육과 독서 현실은 그러한 시민을 양성하기에 모자람이 없는가?
해마다 반복되는 설문결과이지만, 우리의 독서율은 한 달 평균 1권꼴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라 한다. 이런 지표를 놓고서는 사실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식의 독서지도가 무의미하다. 하루에 30분씩만 책을 읽어도 요즘 나오는 200-300쪽 짜리 책이라면 일주일에 한 권은 너끈히 읽을 수 있다. 적어도 독서가 습관으로 밴 국민이라면 한 달에 4-5권은 읽어야 ‘정상’이다. 그런 면으로 보자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독서국민’이 돼본 적이 없다. 독서국민의 ‘효과’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5피트 책꽂이’를 집집마다 끼고 살지도 않으며, 자신의 무지와 무교양을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평균적으로는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런 우리가 또한 세계 7위의 출판대국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그 많은 책들은 누가 다 읽는 것인지 궁금할 뿐더러 누구를 위해서 책을 만드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자명한 것은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세계 7위의 출판대국이라는 것보다는 세계 7위 이상의 독서대국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도 바람직하리라는 점이다. 남에게 별로 지기 싫어하는 우리가 이 정도 욕심은 내봄직하지 않을까.
한동안 한 방송사와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책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 등의 단체에서 지역 도서관 건립운동을 벌인 바 있다. 지역민의 독서와 문화생활의 기본 거점이 되어야 할 도서관은 현재보다 대폭적으로 늘어나야 하고, 장서 및 설비도 크게 확충되어야 한다. 그건 두말할 것도 없다. 정부나 지자체가 예산타령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국민이 저마다 자기 책장 갖기를 실천하는 것은 어떤가. ‘5피트’ 대신에 ‘다섯 자’짜리라고 해도 좋겠다. 물론 참고서나 수험용 책 말고 순수하게 자신의 지적 교양을 높이기 위한 고전이나 인문서를 꽂아둘 책장이어야겠다. ‘하버드 클래식’에 견줄 만한 필독 고전 목록을 제시해도 좋겠고, 도서 구입비의 일부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도 고려해봄직하다.
출판계 안팎의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대로 독서력을 갖춘 독자층이 점점 줄고, 제대로 된 독서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아무리 좋은 인문서가 출간돼도 사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한편으론 독자를 유인할 만한 좋은 책이 계속 나와야겠지만, 다른 한편에선 그런 책을 알아보고 읽을 수 있는 독자를 교육하고 길러내야 한다. 나는 우리시대 인문학에 대한 고민이 이런 ‘바닥’에서부터 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책을 읽어야 하고 독서국민이 돼야 하는가, 라고 혹 질문하실지 모르겠다. 치명적인 질문이다. 굳이 산에 올라가봐야 하느냐, 굳이 인생을 다 살아봐야 하느냐, 란 질문처럼. 답하자면, 우리가 그래본 적이 없으므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온 국민이 매주 한권씩 책을 읽는 사회를 꿈꿔본다.
10. 0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