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 인문학 카페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가 나온 지 얼마 안돼 관련기사들을 검색해보는데(오늘도 몇 건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특이하게도 지난 5월 서울국제도서전의 '인문학 카페' 행사 때 강연한 내용이 기사화돼 올라와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는데(뉴스라도 몇달 전 뉴스다!) 여하튼 기사는 기사니만큼 스크랩해놓는다(거의 브로마이드 수준의 사진들도 포함하고 있다!). 두 가지가 놀라운데, 하나는 매우 긴 장문의 기사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문과 오탈자가 무척 많다는 것(오탈자 몇 개는 바로잡아 놓는다). 아마 데스크에서 읽어보지도 않는가 보다. 그래도 대충 읽으면 강연 내용을 어림잡을 수 있다.  

ⓒ뉴스한국  

뉴스한국(10.09. 26) 이현우 교수의 ‘인문학 카페’ 

인문학에 관한 책은 현재까지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 단 한 권으로 굉장히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 바로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강사이며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 문학과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현우 교수다. 그는 인터넷서점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꾸리며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말을 빌려 그를 설명하자면 그렇다. “한방에 뜬 것 같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피눈물 어린 노력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이현우 선생은 그런 사람이다. ‘인문학 카페’에 매우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본인의 책에도 기록돼 있지만 그야말로 ‘사서 읽은 책’의 값을 따지자면 웬만한 ‘소형 아파트’ 값을 능가한다.

“저는 영투독이 편향적이라고 생각한다(*영투독?). 또한 개인적으로 저 역시 편식하는 편이다. 인문학 의의나 중요성, 가치 등을 강변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 그래서 ‘곁다리 인문학자’다. 이는 또한 ‘어게인스트’라는 의미가 있다. ‘타라’(*'파라')의 우리말 번역은 ‘옆에 있으면서 어깃장 놓기’다. 인문학 옆에서 전도하고 홍보하지만 동시에 불충분하다, 좀 불친절하다, 우리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 순전히 개인적 전략이다”는 이현우 교수를 한 권의 책으로 만나기에는 너무도 아쉬워 직접 만나 보았다.  

 

대중에게는 친숙한 ‘로쟈’의 인문학 스토리
그는 인터넷 공간에서 ‘로쟈’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동안 써온 글을 모아 <로쟈의 인문학 서재>란 단행본 책을 엮었다. 이 책의 절반 정도는 2004년 그가 모스크바에 채류 할 당시 섰다고(*썼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제일 한가했다고 회고하는 그다. “가족이 멀리 있고, 나이도 있고, 학교에 청강한다고 하지만 내키는 대로 집에 있을 수 있었다. 먹는 것만 해결하면 되는데 그래도 자유시간은 있었다. 그때 쓴 글이 가장 많다.”

현재 그는 많은 출판사에서 의뢰하는 ‘서평 원고’를 쓰고 있다. 역시 그러한 글들을 모아 올해 ‘서평집’을 낼 계획이다(*출판사에서 의뢰하는 서평?). 이현우 교수는 ‘가장 한가할 때 쓴 글이 가장 재미있다’고 들려준다. 그래서 바쁘게 산다는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된단다. “다들 구박했다. 혼자만 게으르게 지낸다고, 그러나 제일 게으를 때 제일 생산적이었던 것 같다. 요즘은 외양상으로 보면 가장 바쁘게 지내지만 성에 차지는 않는다.”

이현우 교수는 그때 썼던 글 중에서 ‘호모사피엔자의 인문학’이라는 이 책의 타이틀로 달고 싶었다고 말한다. ‘호모사피엔스’는 인간에게서 사유 능력이라는 것이 인간만의 특권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질병이고, 과잉이다. 무엇인가 초과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질병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자연적 종으로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동일한 자연사적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다는 것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책을 본다는 것은 자연사적 소명에 얼마나 유익하고 도움이 될 것인지 거기에 대해 약간 제 경우 반신반의한다. 다만 정당화하고 싶은 것은 자연사적 소명 호모사피엔자 못지않게 병적인 소명도 있다. 나의 인생은 삶으로 충만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삶이 내게 충분하지 않다, 불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왠지 산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존, 연명이 차원도 있다. 생체 차원이다. 조금 부정적이면 생체실험을 던져지기도 한다. 마루타로 다뤄지기고 하고 서바이벌 하는 존재로서의 생명도 있다. 그런 삶도 가능하다.”

이어 이현우 교수는 “그리고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에 물려주는, 생물학자는 유전체 운반체라고 한다.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있지만 본 줄거리는 운반해 주는 것, 유전자 택배 비슷한 것이다. 전달해 주는 것, 그 사이에 에피소드도 물론 있다.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유전자 전달이다. 그것에 충분한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 인문학이 필요하지 않다. “부자 되세요”로 충분하다. 가족과 일가친척의 행복으로 충분하다”고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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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적인 사람들, ‘산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는 이 교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강의한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나는 병든 사람이다. 나는 병적인 사람이다. 나는 심술궂은 사람이다”고 시작되는 부분에서 세상에는 그렇게 병적이고 심술궂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삶은 불충분하다고 느끼며, 산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긴다.  



삶이 불충분하고, 불친절하고, 불공평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목숨을 내버리고 부차적인 것으로 방치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병적인 사람들이다. 삶에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 내 한 몸 보존하고 후대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뭔가 필요하다고 여기며 결핍된 삶을 산다.

그러한 생각은 인문학을 초과한다. 생계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현우 교수는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인문학을 대하면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인문학의 제스처일 뿐이다. 때문에 그것을 위해 인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편견이다. 제 책에도 썼지만 루마니아 출신의 에밀 히오랑(*시오랑) 같은 작가의 경우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고 했다. 인간의 사유 능력 자체는 이 삶을 보다 더 안락, 편안, 안전, 행복 위한 보조 수단이다”고 설명한다.

“어떨 때는 사고 능력이 제멋대로다. 자족성을 가지고 있어서 존재 자체를 폭발시키기도 한다. 부작용이며 오작동이다. 그런데 저는 그런 쪽으로 매혹을 느낀다. 그쪽으로 끌린다. 에밀 히오랑(*시오랑)처럼 “삶이란 저질 취미에 속한다”고 했다. 그 사람은 그쪽으로 간 경우다. 저는 최소한 인문학에 관한 관심이란 저질 취미까지 가지 않아도 불충분하다고 느낀다.”

병적 열망이 다른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다?
“그 요즘은 피곤해서 잘 잔다. 대학 1년 때는 긴장되어서 자다가 벌떡 잘 일어나곤 했다. ‘내가 스무 살이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내가 내 삶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 아주 긴장되고 부담이 되었다. 또한 아이를 안아 들었을 때의 부담감도 있다.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장래가 잘 될 것인가에 대한 부담감이다. 자기가 돌봐야 할 아이를 안고 있는 느낌처럼 자기의 삶도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해 가치 부여하며 산다. 하지만 병적인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가치 부여를 한 끝에 자기 한 사람만으로 잘 돌보는 게 불충분하게 느낀다. 자기의 행복만으로는 불충분하게 여긴다. 또한 그것은 속 좁은 이기주의라고 생각한다. 자기 안위만 돌보는 것을 묵살한다. “어떤 사람은 교향곡을 9개나 쓰고, 천지창조나 성상화도 그리는데 나는 뭐냐 한다. 그럴 경우는 자기 자신의 안락 요구나 욕구를 넘어 서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그게 병적인 것이다.”

이현우 교수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에피소드를 예를 들어 병적인 욕구에 대해 설명한다. “장화를 2년 넘도록 한 번도 안 벗어서 아예 발에 달라붙은 적도 있다. 장화에 신경을 안 썼으니 아마도 자녀에게 신경을 안 썼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광기고, 병적이고, 심술궂은 인간형이다. 그런 병적 열망이 다른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다. 안전이나 행복에서 벗어나 그것 말고 다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열망에 빠져 잇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다움’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일상어에서도 그렇게 쓴다. ‘인간답다’는 것은 ‘인간만으로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돼야 한다’는 말이 있다. 태어난 인간 자체라는 것과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생각의 특별한 차이가 있다. 그 간극에 대해 사고는 것, 차이에 대해 예민하게 주시하는 것이 인문학적 관심이다. 문학, 역사, 철학 세분화되어 들어가지만 그것은 결국 나중 문제다. 그런 물음 자체를 가지고 있는 것, 자기 삶에 대해서 그저 산다는 것만 아니라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설명을 들려준다.

생존만으로 부족한 삶, “그래서 호모사피엔자다”
이현우 교수는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 부호를 붙인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 될 수 없다고 강의한 적 있다는 것이다. 자기와 가족이 행복한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현대엣(*현대에) 그는 새로운 반론을 제기한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기에는 삶이 너무 길다. 그리고 지친다. 사람은 저마다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결정의 순간들, 갓 연애하고 그럴 때 행복하다. 결혼식 날 잡을 때 그러나 1년 지나면 삐거덕거린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왜 그렇게 되도록 방치하는 것일까. 가장 행복할 때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정도 식어가고, 권태, 짜증, 혐오감이 생긴다. 그러나 학문이라면 가능하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공부는 끝이 없다는 지론이다. “책도 자자손손 읽어야 한다. 그런 것이라면 살아갈 이유가 있지만 행복이 목표라면 더 살 이유가 없다. 가장 행복할 때, 덜 불행할 때 인생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살아갈 이유가 없다. 행복한 순간에 끝내야 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행복은 부족하다. 생존이 삶의 의미라고 해도 부족하다. 그 이상의 요구를 받고 있다. 병적이다. 그래서 호모사피엔자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인문학’도 있지만 ‘병든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을 말하고 싶어 한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시 구절이 있다. 보들레르의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에나’란 시다. “인생은 환자들 침대를 제각기 바꿔놓고 싶어 하는 욕망에 들린 하나의 병원이다.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괴로워하고 싶어 하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창문 옆자리에서라면 회복이 되리라 믿고 있다.” 그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병원학’이라 부른다고 설명한다. “세계가 모두 병원이고 인류가 모두 환자들인데 저마다 꿈을 꾸며 욕망을 가지고 있다. 난로 옆이면 행복할 텐데, 창가라면 행복할 텐데 등등의 것을 꿈꾼다.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열망을 가지고 있다.”

이현우 교수가 좋아하는 부류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퇴폐적인 데카당스파 시인 보들레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인문학은 삶의 수준을 질적으로 풍요롭게 높여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지칭해 ‘인문학 전도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한다. “인문학 자체도 불충분하다. 인문학적 교양 자체는 서양고전이다. 구색 맞추기로 동양고전, 중국의 공자 맹자 책들이 들어가 있다. 스탠더드는 서양 백인이 클래식 전통을 고전이라 한다. 인문학의 표준으로 되어 있다. 제 경우는 거기에 공감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다.”

‘내가 인간이라는 종이구나, 내가 이렇게 구체적이구나’
“제가 쓴 글 중 ‘느릅나무’라는 장이 있다. 20년 전 쯤에 매혹적인 두 가지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첫째 ‘내가 인간이라는 종(種)이구나’ 느꼈다는 것이다. 일종의 발견이다. ‘이렇게 생겼구나’란 발견과 같다. 자신이 이렇게 생기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발견이며 놀라움이다. 자기 성격에 대해서도 발견한다. 잠재적 재능도 그렇다. ‘생물, 생명이구나’ 하는 것 역시 나 자신을 놀라게 했다.”

그는 또한 서울대 진학 후 1학년 때 ‘내가 이렇게 구체적이구나’란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고 말한다. 막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살과 피를 가진 생명체로서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한다. 칼에 베이면 피가 나온다. 관념이 아니라 실제 존재한다는 것이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로서 그는 ‘자연사적 소명’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 형이상학이 놀랍게 했다. 하이데거 책이었는데, ‘형이상학 입문’에 대해 딱 하나 질문한다. ‘왜, 무엇인가가 차라리 존재하는가’, ‘아무것도 없지 않고 있는가’란 물음이었다. 스스로 감탄부호를 찍었다. 이후 제가 아는 말이나 글이나 쓰는 글은 모두 그쪽으로 어필된다. 그게 형이상학이다. 존재 자체로 끝나지 않고 질문하며 경탄하는 것, 그것이다.”

그의 모든 관심의 뿌리는 두 가지다. 그것을 채워나가는 것이 이현우 교수의 공부라고 여긴다. “저 역시 나름 환자다. 병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계나 가족보다 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환자고 병이 들려 있다.” 

니체의 오버맨 초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극복돼야 할 존재다”. 인간으로 부족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행복이 궁극적인 목표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 대해 병든 사람들은 면역 항체 역할을 한다. 한 방향으로 휩쓸리고 있기 때문에 ‘행복에 대해 조금 진정’시키고 싶어 한다. ‘행복이란 주술’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삶이라는 주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덧붙인다.

“장 에밀(*아메리)에게 ‘자살’ 대신 인간적 존엄과 품위를 지키기 위한 ‘죽음’도 있다. 인문학은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 인문학이 있다면 노자(*로쟈)의 생각은 삶, 행복에서 해방되는 것, 속박 되지 않은 것, 인간의 조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병적 열망이 있다.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다. 동물에게 ‘너는 강아지를 극복할 열망이 있느냐’ 물어보라. 인간만 가지고 있다. 너랑 나랑 다르다는 괴리감도 좋다. ‘너는 강아지, 나는 인간이다’는 생각 자체가 좋다”는 이현우 교수.

이러한 인문학을 위해 그는 카페를 운영하고 블로커 활동을 하며 자신의 ‘인문학 서재’를 개방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니진스키의 말, “나는 셰익스피어의 어릿광대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유머가 풍부하지만 때때로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신이 아니다. 나는 신 안에 깃들인 어릿광대다. 그래서 나는 농담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현우 교수는 니진스키처럼 하녀고 광대인 인문학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읽고 쓰고 떠들겠다’고 선전포고를 한다. 대단찮은 것이어도 ‘겸손한 식사’ 정도는 될 수 있다면 말이다.(안현희 기자) 

10.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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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27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노자(*로쟈)님!

로쟈 2010-09-27 20:22   좋아요 0 | URL
라디오에서도 한번 '노자 사상'이라고 언급됐었죠.^^;

펠릭스 2010-09-2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로쟈 2010-09-29 08:10   좋아요 0 | URL
^^

리토르넬르 2010-10-0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인생관이 보이는군요.

로쟈 2010-10-02 09:27   좋아요 0 | URL
네, 나름의 인생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