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든 밥이든 마감을 훌쩍 넘긴 원고를 일단 보내놓고 다른 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쉬는 손으로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른다. 아, 벌써 8월이구나, 라고 쓰려다 보니, 그런 표현이 가장 안 어울리는 달이 또 8월인 것 같다. 어제도 덥고 오늘은 더 덥고, 하는 날의 연속이니까. 그냥 내일 강의준비도 하면서 쉬엄쉬엄 책이나 고른다. 가만히 노는 꼴을 못 보는 걸 보면 이럴 땐 꼭 시골 할머니 마음이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추천한 문학분야의 책은 김은국의 <순교자>(문학동네, 2010)이다. "6ㆍ25전쟁을 배경으로 이념 대립으로 인한 사건을 통해 겪는 신앙과 양심의 갈등을 묘사한 책으로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재미작가 김은국의 대표작"이라는 게 소개다. 사실 지난 학기에 이 작품을 교양강좌 커리큘럼에 집어넣었다가 을유문화사판이 품절되는 바람에 다루지 못했는데(덕분에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읽었다), 문학동네판이 새로 나와서 내년 봄학기에 다루려고 한다. 김욱동 교수의 연구서 <김은국>(서울대출판부, 2007)도 강의준비용으로 구비해두었는데, 왠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추천한 역사분야의 책은 이언 아몬드의 <십자가 초승달 동맹>(미지북스, 2010). "저자는 ‘유럽(Europe)’이라는 어원이 ‘아랍(Arab)’처럼 서쪽이나 암흑, 뒤처짐을 뜻하는 고대 셈어 ‘에레브(ereb)’에서 왔다는 사실처럼 유럽과 이슬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서, 11세기 에스파냐에서부터 19세기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동맹을 맺고 공동의 적과 싸웠던 사례를 5장에 걸쳐 전해주고 있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는 요즘말로 혈맹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공동 전쟁을 치렀다."
원제에서처럼 두 가지 종교로 갈려 있음에도 같은 동맹군으로 싸운 전력이 있다는 것은 유럽/아랍의 이분법이 얼마나 유효한지 회의를 갖게 만든다. 이러한 이분법의 무력화는 딱 데리다식의 전략인데, 저자의 최신작이 아니나 다를까 <수피즘과 해체>(2010)이다. 데리다와 이븐 아라비를 비교하고 있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철학분야의 책은 마리에타 맥카티의 <나를 찾아온 철학씨>(타임북스, 2010). 원제는 '철학이 어떻게 당신의 삶을 구제해줄 수 있는가'. 조금 자세한 소개는 이렇다.
저자 마리에타 맥카티는 철학 클럽을 운영하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정답 없는 질문을 자신과 남들에게 던지면서 살아간다. 왜 정답 없는 질문을 철학자는 던질까? 정답이 없는 질문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창조적 사고를 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헬스 클럽에서 몸을 단련하듯이, 철학은 우리의 정신을 단련시킨다. 정신의 단련은 생각하는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마치 근육이 성장하는 것은 파열의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맥카티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함, 의사소통, 시각, 유연함, 공감, 개성, 소속, 평온함, 가능성, 기쁨과 같이 지극히 평범하고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주제들이다. 현대 문명의 기술들은 우리 육체의 편리함을 추구하다 보니, 정신적 건강함에 대한 배려를 상실한다. 정신적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대화와 토론을 이 책을 통해서 할 수 있다
마치 짝을 맞춘 듯한 제목의 책은 알렉산드르 졸리앙의 <고마워요, 철학부인>(푸른숲, 2010). "장애를 운명으로 여기며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을 외면하던 알렉상드르 졸리앙이 철학을 통해 어떻게, 얼마나 달라지게 되었는지를 편지 형식으로 풀어 쓴 독특한 철학 에세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가감 없이 열어 보여준다. <고마워요, 철학 부인>은 단지 세상을 해석하는 철학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킨 깨달음으로서 철학을 드러내 보여주는 책"이라고 소개된다. 두 권 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그런 만큼 부담감 없이 읽어볼 수 있겠다. 옆집에 사는 철학씨, 철학부인을 만나는 것처럼.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고른 정치/사회분야의 책은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돌베개, 2010)이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은 마을에서 벌어진 갈등과 상호 학살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분석한 한국전쟁의 미시사이다. 이 책은 저자가 전라남도와 충청남도에 소재한 다섯 마을을 분석대상으로 삼아 10여 년간 해당 지역을 현장 답사하며 관련자 구술을 채록하고 희생자 씨족 가문의 족보까지 꼼꼼히 조사하여 얻은 연구 성과물"이다. 강정인 교수의 평은 이렇다.
저자는 마을에 잠복해 있던 민간차원의 갈등이 남북한 국가권력의 침투와 맞물려 비극적인 충돌과 학살로 귀결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되돌아보면서, 오늘날 남북관계나 한국사회에서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가는 능력이 과연 얼마나 성숙했는가를 되묻는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한 해에 출간된 이 책은 한국전쟁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 구술사/미시사 책으로 작년에 나온 김영미 교수의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 2009)도 떠올리게 한다. 한편 저자의 다른 책으론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경인문화사, 2010)도 올해 나온 책이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고른 경제/경영서는 역시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군터 파울리의 <블루 이코노미>(가교출판, 2010)다. 제목대로라면 '청색 경제'를 주장하는 책인데,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의 저자 군터 파울리(Gunter Pauli)는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전 세계 지식인들의 모임인 로마클럽의 초창기 회원으로 활약했다. 로마클럽은 더 이상의 성장이 환경에 심각한 위협을 가져올 것임을 경고한 <성장의 한계>(Limits to Growth)라는 책을 출판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지구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의 성장을 자제해야 한다는 결론은 사람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태도를 180도 바꿔 성장과 환경 보호가 양립가능한 명제라고 말한다. 4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녹색경제(green economy)를 대체할 ‘청색경제(blue economy)’를 주창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녹색경제는 환경 보호라는 목표의 달성을 위해 기업과 소비자에게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문제점을 갖는다고 한다. 이에 비해 청색경제에서는 환경을 보호하면서 더 큰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난번에 <블루 이코노미>와 함께 묶었던 책은 재닌 베니어스의 <생체모방>(시스테마, 2010)인데(http://blog.aladin.co.kr/mramor/3855767), 생체모방, 생태모방이란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필히 챙겨두어야겠다.
6. 과학
최영주 교수가 고른 과학분야의 책은 로널드 넘버스의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뜨인돌, 2010). 이미 적잖은 책들이 나온 주제인데, "이 책은 이러한 과학사의 전통적 통념이, 즉 과학과 종교가 끊임없이 대립하였다는 통념이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과학적 관점 때문에 목숨을 잃은 과학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지동설의 갈릴레오나 진화론의 다윈의 신앙 이야기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통해 과학과 종교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종교와 과학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책으론 최근에 나온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사이언스북스, 2010)도 떠오른다.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가 책의 부제다. 그리고 물론 작년에 나온 <종교전쟁>(사이언스북스, 2009)도 다시 떠오르고.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아직 구입하지 않았군...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이기영의 <민화에 홀리다>(효형출판, 2010). 드디어 처음 보는 책이 등장했다. "외교학과를 나와 발전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어느 날 도자기에 빠져 도예가가 된 필자가 그동안 사랑했던 민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거기에 현대적 미감으로 민화를 다시 창조해내고 있는 작가 서공임의 작품 80여 점이 함께 우리를 매료시키는 책"이라는 게 소개의 변이다. 민화에 대한 책은 그간에 아주 드물지 않았나 싶다. 우리 옛 그림에 대한 책으론 김정애의 <우리 옛 그림의 마음>(아트북스, 2010)이 최근에 나온 책이고, 작년에 나온 걸로는 오주석 선생의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월간미술, 2009)이 있다.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고른 교양분야의 책은 김동진의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참좋은친구, 2010)이다. 한국현대사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파란눈'임을 예감할 수 있는데, '한국혼 헐버트'의 간단한 행적은 이렇다.
한국 이름은 흘법(訖法) 혹은 할보(轄甫)였던 헐버트가 1886년 5월21일 벙커, 길모어 부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조선에 도착한 것은 7월4일. 벙커나 길모어 부부 모두 청년 이승만의 개화정신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이 시절 이승만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곧 대한민국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이 때부터 20년간 한국에 살면서 헐버트가 보여준 활동의 범위는 말 그대로 눈부셨다. 교육자이자 한글학자,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선교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 그는 고종을 위해, 서재필을 위해 그리고 이승만을 위해 헌신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헐버트란 이름은 생소하지만 한국과 인연을 맺은 외국인 가운데 언더우드란 이름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찾아보니 몇 권의 책이 나와 있다. <언더우드가 이야기>(살림, 2005)도 있고, <조선견문록>(이숲, 2008)도 있다. <언더우드가 이야기>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4대에 걸쳐 한국에 살며 120년간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을 함께 한 언더우드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선교를 위해 한국에 도착해 선교 및 교육, 의료 사업을 진행했던 언더우드 1세부터 얼마전 출국한 언더우드 4세까지, 한국을 사랑한 한 서양인 가문 이야기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가 함께 펼쳐진다."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추천한 실용분야의 책은 매니 하워드의 <내 뒷마당의 제국>(시작, 2010)이다. 표지가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데, 가장 생소한 책이지만 소개는 가장 흥미진진하다.
뉴욕에서 요리평론가로 이름을 날리던 저자가 로커보어를 자처하면서 푸드마일 실험에 도전했다. 직업으로 미뤄 음식에 일가견이 있고, 도심에 살면서 가장 가까운 곳의 식재료를 추구하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 뒷마당에 눈길이 꽂혔다. 마당을 갈아엎어 농사를 짓고, 축사(畜舍)를 손수 지어 가금(家禽)을 기르면서 진행한 농장 6개월 프로젝트의 결과는? 참담한 실패다. 교본을 따라 해도 이상하게 작물은 자라지 않았고 가축은 쉽게 배반했다. 토네이도가 농장을 때려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런 곡절 끝에 첫 만찬에 올라온 찬거리는 구운 닭 반 마리와 콜라도 그린(Collard green, 배추 비슷하게 생겼다), 토마토 세 조각. 땅의 정직함, 계란 하나와 가지 한 조각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책 중간 중간에 배치된 사진이 실험의 치열함을 말해준다. 배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가슴팍까지 구덩이를 파는 모습, 닭을 잡아 털을 뽑아 요리하는 장면 등이 서바이벌 게임의 치열함을 말해준다. 가장 극적인 후일담은 아내에 대한 감사의 글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음에도 히스와 제이크를 품에 안고 떠나지 않은 아내가 고맙다”. 마당에서 뛰노는 닭을 보기는커녕 고구마 하나 제 손으로 캐보지 않았으면서 식탐에 젖은 사람이 읽으면 쿵∼ 감동이 내려앉을 책이다.
책의 부제가 '자급자족에 도전하는 뉴요커의 리얼 생태 서바이벌'. 이보다는 덜 격렬하지만 유사한 컨셉의 책으론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담은 다마무라 도요오의 <전원의 쾌락>(뮤진트리, 2010)도 있다.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부부가 밭농사를 지어보겠다며 멀리 일본 알프스가 바라보이는 신슈지역 해발 850m 도부마치의 언덕에 집을 짓고,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고된 초보 농사꾼의 수습 기간을 온 몸으로 겪어낸 몇 년간의 시간을 토마토 페이스트처럼 진하게 농축시켜 열두 달의 일상으로 유쾌하게 그려낸 것"으로 소개되는 책이다.
한국책도 하나 얹자면 서화숙의 <마당의 순례자>(웅진지식하우스, 2009) "27년간의 기자생활로 독해진 마음을 풀고, 22년간의 아파트 생활을 끝내고,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진짜 삶을 찾은 동화작가이자 한국일보 기자인 서화숙의 에세이"이다. 부제는 '부암동 푸른 마당에서 누리는 고혹한 자유'. 부암동이란 동네는 언젠가 한번 가봤는데, 독특한 정취를 뽐내는 곳이었다(같은 서울인데도 '관광객'들이 많아서 불편하기도 하다고). 큼직한 도서관만 하나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10. 루이스 멈퍼드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은 루이스 멈퍼드(멈포드)다. 어차피 8월 마지막 주에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의 저자인 박홍규 선생과 대담을 하게 돼 있어서(http://blog.aladin.co.kr/mramor/3933690) 일독해봐야 하는 책들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이번에 나온 <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 외 <예술과 기술>(민음사, 1999)뿐이니 큰 부담은 없다. 하지만 전에 소개됐던 <역사 속의 도시> 등이 다시 나오면 좋겠다.
10. 07. 28.
P.S. 8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카프카의 <소송>이다. 최근 들어 매년 새 번역본이 출간되고 있어서 '입맛'을 다시고 있던 차였다. 계획은 세 종의 번역서를 대조해서 읽고 뭔가 써보는 것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오손 웰스의 영화 <심판>도 다시 보고 싶군. 답답한 여름에 갑갑한 영화를 보는 것도 이열치열의 한 가지일까...
10. 0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