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길 버스에서 읽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엊그제 국회에서 통과된(되었다고 여당에서 우기는) 방송법 개정안이 왜 '부결'된 것인가를 짚어주는 칼럼이다. 헌법에다가 국회법까지 공부시키는 정권과 집권당의 행태에 어떻게 응전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들을 해봐야겠다. 저들은 이미 '전쟁' 모드에 돌입한 듯싶으므로...   

경향신문(09. 07. 24) 의사-의결정족수 구별 못한 여당  

지난 22일 방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투표 종료 선언과 함께 드러난 전자표결 결과는 출석의원 145명에 찬성 142명. 하지만 곧바로 국회부의장은 “다시 투표해 달라”고 주문했고, 그 결과는 출석의원 153명에 찬성 150표. 국회부의장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방송법 첫 투표 불성립 아닌 부결
민주당 등 야당은 일제히 이 같은 ‘재투표 행위’에 대해 국회법 제92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일사부재의의 원칙에 위반되어 위법하며 무효임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여당과 국회사무처는 국회법 제78조에 근거한 행위로 적법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야당은 첫번째 표결을 통해 이미 방송법 개정안이 부결되었다고 보는 것이고, 여당과 국회사무처는 부결된 것이 아니라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첫번째 표결이 불성립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의 차이는 어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의결정족수 규정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내지 해석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여당의 주장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이라는 의결정족수에 관한 규정에서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을 의결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이해하고,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표결은 표결로서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논리형식을 띠고 있다. 반면 야당의 주장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을 표결이 성립되기 위한 선결조건이 아닌 의안이 가결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논리형식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헌법과 국회법은 여러 규정에서 국회의 회의가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출석 의원 수와 국회의 의결이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찬성의원 수를 규정하고 있다. 전자를 의사정족수, 후자를 의결정족수라고 말한다. 따라서 의안을 상정하고 표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사정족수를 충족해야 하며, 의사정족수를 충족해 일단 표결에 부쳐진 의안이 국회의 의사로서 유효하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의안에 따라 헌법과 국회법에서 요구되는 의결정족수를 충족해야 한다. 의결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한 의안은 부결된다.

이렇게 볼 때, 여당과 국회사무처가 첫번째 투표에 대해 주장하는 ‘표결 불성립’은 의사정족수와 의결정족수의 구별에 대한 이해의 부족 혹은 방송법 개정안 가결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된 해석상의 오류라는 지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즉, 방송법 개정안에 대한 첫번째 표결은 의사정족수(재적의원 5분의 1 출석)를 충족했다는 점에서 적법한 표결이었으며, 의결정족수인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이라는 요건 가운데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이라는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해 부결되었다고 하겠다.

재투표는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
따라서 국회부의장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재투표는 그 용어 사용의 적절성 여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부결된 안건을 같은 회기 중에 법률안에 대한 발의 등 의사절차조차 생략한 채 다시 표결처리한 것으로 이는 국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일사부재의의 원칙에 명백히 위반된 것으로 위법하다고 하겠다. 재투표에 대해 여당과 국회사무처가 제시하고 있는 정당화 논거를 보며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방송법 개정안의 법안처리 과정은 그 결론 도출 과정에서 소수의 의사를 반영하지도 않았고 헌법과 법률에서 정하고 있는 정당화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다수라는 수에만 의지하여 진행되었다. 정당화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수에 의지하여 이뤄진 행위는 ‘다수의 횡포’이고 ‘다수의 폭력’이며 이는 민주주의 원리와 법치주의 원리에 비추어 어떠한 경우라도 허용될 수 없다.(고민수 | 강릉 원주대 교수·법학) 

09. 07. 24.  

P.S. '의사정족수'니 '의결정족수'니 하는 법률용어들이 그래도 머리에 잘 안 들어오시는 분은 화투판의 '낙장불입'을 떠올리셔도 좋겠다.   

한겨레(09. 07. 24) 일사부재의와 낙장불입

이명박 정권의 언론법 밀어붙이기는 나로 하여금 과거 우리 국회의 날치기 처리 주역, 그리고 사기도박꾼들을 존경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들이 자신이 속한 곳의 최소한 기본규칙을 존중하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고 번민의 밤을 보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22일 국회에서 방송법 의결 상황은 3단락으로 요약된다. “투표를 종료하겠습니다.”→“어! 통과가 안 됐네.”→“그럼, 다시 투표하겠습니다.” 동네 꼬마들의 홀짝 쌈치기, 양로원 할머니들의 점10 고스톱, 직장인들의 김밥·떡볶이 내기 사다리타기도 그러지는 않는다. 방송법 의결 상황을 꼬마들의 홀짝 쌈치기에 비유하면 이렇게 된다. “까봐!”→“어! 내가 못 먹었네.”→“그럼, 다시 접어.” 구슬주머니로 머리를 맞고, 쌈치기 동네에서 영원히 왕따당할 짓이다.

중·고교 사회 시험에 잘 나오는 일사부재의 원칙은 별게 아니다. 쌈치기, 고스톱, 사다리타기에서도 결과가 나왔으면 받아들여야지, 다시 하자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당연히 아는 원칙이다. 일사부재의 원칙은 바둑으로 치면 일수불퇴이고, 화투판이라면 낙장불입이다. 화투장 뒤집고 나서 패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화투장 뒤집어서는 안 된다. 동네 축구에서도 자책골 넣었다고 무효라며 경기 다시 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 경기에서 구경하던 동네 친구들이 간간이 운동장으로 들어와 부정선수로 뛰었는데도 그랬다면, 더욱 할 말이 없게 된다. 지금 한나라당은 그런 동네 축구 상황을 연출해 놓고도, 연장전 선언하고 텅 빈 경기장에서 골 넣고 이겼다고 하는 꼴이다.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내용적 다수는 절차적 과정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돼야 한다. 의사 및 의결정족수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는 소수를 보호하는 기술적 절차도 될 수 있다.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필리버스터가 대표적이다. 필리버스터의 원어인 스페인어 ‘필리부스테로’는 해적·약탈자란 뜻이다. 부정적인 방법이지만, 이런 것으로라도 소수를 보호하는 것은 의미가 있기에 의회에서는 합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실 미국 의회의 최장 필리버스터는 미국의 자유와 인권을 상징하는 민권법안을 놓고 이뤄졌다. 보수파인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은 1957년 민권법안을 저지하려고 무려 24시간 18분 동안 연설을 해서, 기록을 경신했다. 1964년에도 민권법안을 저지하려고 보수파 의원들이 돌아가며 75시간 동안 연설했다. 필리버스터를 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의사결정의 절차적 과정은 존중하는 것이다.

사기도박꾼도 도박판의 승부 결정 규칙은 존중한다. 자신이 도박판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한국 국회의 오랜 전통인 날치기도 의사결정 절차에 대한 존중 때문에 나온 것 같다. 찬성 의원 수를 반올림한 사사오입 개헌, 회의장 바꾸기 전술을 선보인 3선개헌 발의, 의장이 방청석에서 등장한 지난 96년 노동법 통과 등 신기원을 이룩한 날치기도 의결정족수 충족에 대한 존중은 있었다.  

그때 그 주역들이 방송법 의결 상황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밤을 새우며 고민하고 번민했던 날치기 통과의 노력에 허탈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데 허튼 노력을 하고 욕은 욕대로 먹었다고 할 것이다. 사기도박꾼들은 분노할 것이다. 영화 <타짜>를 보니, 사기도박하다가 걸리면 손목을 잘라버리던데, 대놓고 규칙을 어기면 무엇을 자를까? 사기도박판만도 못하고, 과거의 날치기를 그리워하게 하는 국회의 방송법 밀어붙이기. 민주주의의 조종이 정말 울리고 있다.(정의길 국제부문 선임기자)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07-25 05:03   좋아요 0 | URL
관련 인터뷰,토론을 반복해 들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진보가 보수성(언론장악),
보수가 진보성(미디어시장확대) 발언을 합니다.

한 사람은 처음부터 내여 줄 마음없이 없었고,
맞은 쪽은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지만,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막내는 형들 싸움에 입닫고
배회하는 형국입니다.

로쟈 2009-07-24 21:41   좋아요 0 | URL
이번 사안은 진보/보수라기보다는 민주/반민주의 문제죠. 보수는 법을 존중합니다...

하이드 2009-07-24 22:03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이 부분이 궁금했는데, 의사정족수와 의결정족수의 차이였군요. 알수록 갑갑하네요.

로쟈 2009-07-25 09:51   좋아요 0 | URL
네, 그럼에도 헌재 판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해요...

Crete 2009-07-25 03: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십니까. 로쟈님...

아주 오랫동안 RSS 구독을 하며 좋은 책 소개와 수준높은 식견을 접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감사할 것 같네요.

제가 사회자팀으로 활동하는 공론사이트가 하나 있습니다. 아크로(acro.pe.kr)라고요... 이번 로쟈님의 '의사정족수와 의결정족수' 내용이 아크로 회원들께 품격높은 토론을 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부탁을 좀 드리자면.. acro.pe.kr 의 메인게시판에 이 '의사정족수와 의결정족수'를 좀 포스팅해 주시면 안될까요?

너무 잘 정리된 글이라 보다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은 욕심이 생기네요. 그럼 편안한 주말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로쟈 2009-07-25 09:52   좋아요 0 | URL
제게 저작권이 있는 글들도 아니므로 그냥 편하게 옮겨가시거나 인용하시면 됩니다...

게슴츠레 2009-07-25 23:57   좋아요 0 | URL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도, 그에 상관없이 이런 일들이 '현실'로 관철되는 걸 보면 정말 무력해집니다..

로쟈 2009-07-26 10:29   좋아요 0 | URL
무기력은 잠시고 국민을 무시하는 권력의 종말을 지켜봐야지요...

2009-07-26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6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