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바뀌었다. 아니 계절도 바뀌었군. 게다가 바쁘게 또 한주들을 시작하는 월요일이지만, 이번 학기에는 시간표상 딱 월요일 오전이 자유시간이다. 하지만 대개 이 자유는 무기력에 바쳐지곤 한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저명한 중국사학자 레이황(황런위)의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새물결, 2004)에 대한 기사를 읽으니 '이 책이다!' 싶다. 아무일도 하지 않을 때, 혹은 하고 싶지 않을 때 읽어볼 만한 책! 나는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 1997)로 읽었는데, 어느새 12년 전이다(이런 역사서도 가능하구나, 라고 경탄했던 책이다). 그 사이에 두 판본은 모두 절판된 상태다. 책이 다시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6. 01) [책읽는 경향]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결국 나라가 망하다

1587년은 명(明)의 운명이 걸린 해였다.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레이 황·새물결)는 위기상황에서 혁신이냐 쇠락이냐의 갈림길을 가늠하지 못하면 한 국가가 어떻게 망해가는지를 보여준다. 중국계 미국사학자인 저자는 명 말기 만력제·장거정·신시행·해서·척계광·이탁오의 평전과 정사 등을 꼼꼼하게 분석, 실타래처럼 얽힌 역사적 사실을 소설처럼 풀어낸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패배한 역사적 전환점이던 1년 전, 중국은 사소한 일이 다소 있을 뿐이었다.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장거정이 5년 전 죽고 만력제는 지루한 일과에 지쳐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무위이치(無爲而治)하고 있었다. 대학사 신시행이 감독하는 경연(經筵)은 황제에겐 고된 과외였다. 관료들은 경연을 통해 황제를 제어하려 했다. 황제에게 충성하기보다는 도덕적 통치기풍(陽)과 숨겨진 욕망(陰)을 황제를 통해 조절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을 고안해낸 것이다. 



군사제도의 혁신을 꾀한 척계광은 모함으로 문관들에게 탄핵되고 1588년 1월 병사했다. 척계광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30년 후 청(淸)에 패하는 상황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해 이탁오는 머리카락을 깎고 중과 유학자의 경계를 넘나들다, 문관들의 고발로 체포돼 결국 옥중에서 자신의 목을 베었다. ‘왜 자해했는가’ 묻는 옥사장에게 그는 “늙은이가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었겠소” 하고 숨을 거두었다. 자유로운 사상과 과감한 언설을 거리낌없이 설파하던 그에게 조정이 선물한 것은 죽음이었다. 1587년 그 해, 뭔가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명은 망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무일도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들, 그들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민철기 임원경제연구소 번역팀장) 

09. 06. 01. 

P.S. 물론 '혁신적인 변화'와 그러한 변화를 차단하는 '변화의 제스처'는 구별되어야 한다. 공권력을 남용하고 상상 이하의 일들을 벌이느라 바쁜 정권도 실상은 '아무일도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들'이다. "그들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런 교훈과 함께 또 월요일 아침을 짜증스럽게 하는 소식 한 토막(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46180).   

 

1.5km 정도 거리를 가볍게 걸어서 봉하마을에 들어섰더니, 눈에 띄는 '알림판'이 두 군데나 붙어 있었습니다. 아마 국민장이 끝났음에도 전국 각지에서 봉하마을을 찾아오는 조문객들에게 밥 한 그릇은 고사하고, 물 한 그릇도 대접할 수 없는 자원봉사자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써 붙인 안내문인 듯하였습니다. 

"행안부와 김해시의 식사 및 식수지원이 중단되어 부득이 조문객 여러분께 지급해드리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 자원봉사자 일동"

김해시와 행자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틀이 지나고서 여론의 질타를 당한 후에야 부랴부랴 식수와 식사를 지원하더니, 국민장이 끝나자마자 모든 지원을 완전히 중단하였다는 것입니다. '뻑' 하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는 이놈의 나라, 참 인심 한 번 야박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국민장 기간이 끝났다고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국민들이 끊이지 않고 봉하마을을 찾고 있는데, 밥 한 그릇은 고사하고, 물 한 그릇도 대접해주지 못하는 것이 김해시 인심이라는 것 아닙니까?  

'그들' 또한 아무일도 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과 성을 다해 모든 집회를 봉쇄하고 모든 비판을 틀어막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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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6-01 11:42   좋아요 0 | URL
하하핫, '그들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군요.

로쟈 2009-06-01 23:18   좋아요 0 | URL
애들 크는 걸 보면 시간도 아니죠...

비연 2009-06-01 12:29   좋아요 0 | URL
정말, 그들이 하는 짓을 보면...동네 개가 다 웃을 짓을 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빨리 가급적 빨리 소멸되기를...

로쟈 2009-06-01 23:18   좋아요 0 | URL
시계에 밥을 더 많이 줘야겠습니다...

푸른바다 2009-06-01 13:10   좋아요 0 | URL
이 사람들은 임기중 가능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국가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로쟈 2009-06-01 23:17   좋아요 0 | URL
그 전에 물러나면 더 좋긴 한데요.^^

베토벤 2009-06-01 18:54   좋아요 0 | URL
어떻게 타이밍이 맞았는지 출판사 측에서 한달 정도 있으면 재발간된다는군요.

로쟈 2009-06-01 23:17   좋아요 0 | URL
오, 굿뉴스네요.^^

치타 2009-06-01 19:26   좋아요 0 | URL
맨 아래 차단된 '광장'사진,
이보다 더 완벽하게 우리의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있을까요.

로쟈 2009-06-01 23:17   좋아요 0 | URL
명박산성이 있었죠.^^;

테레사 2009-06-03 12:39   좋아요 0 | URL
로쟈라니, 박노자의 서재라고 생각한 적은 있는데, 역시 러시아와 관련이 있긴 있었구나..혹시 알런지 모르겠지만, 아무일도 없었던 해를 펴낸 가지않은 길은, 나를 포함한 몇 명이 만든 출판사였지요. 모호한 꿈만큼이나 그냥, 모호하게 끝나버린 어떤 시도였던 셈인데, 그 책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하는 사실에 놀랍네요. 어제 처음 로쟈씨의 정체를 신문광고란에서 우연히 보고, 블로그란 곳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는데, 그리고 댓글 한줄 남겼는데 지워졌나보네요...시집을 낸게 아니라 에세이(?)를 내다니..암튼...

로쟈 2009-06-03 23:30   좋아요 0 | URL
ㅎㅎ 아는 분 같군요...

rei 2009-06-04 19:55   좋아요 0 | URL
와,,,이책 저도 예전에 도서관에서 보고 재발간 소식 기다렸는데..근데 위에 이책 만드신 분이 오셨네요..레이황의 이 책과 더불어 같은 년도의 서양에서 있었던 큰이라고 하시면서 아르마다 다룬 한권도 같이 내셨던거 같은데 억시 그책도 굉장히 재밌었구요.....그쪽은 재발간 소식 없나요..^^

로쟈 2009-06-05 08:48   좋아요 0 | URL
네, 그런 책도 있었죠. 재간 소식은 못 들었는데, 다시 나오면 좋겠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6-04 22:35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선 만력제가 임진왜란 때 군대 파병해 줬다고 만동묘를 만들어 기념하고 대단했는데...사대주의의 상징이지요.사실 중국사에서 만력제도 무능군주에 속합니다.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혈맹이라면서 떠받들었지만요.

로쟈 2009-06-05 08:49   좋아요 0 | URL
유능군주가 예외적인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