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비슷한 처지겠지만, 어제부터 책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할일은 태산이건만 자꾸 뉴스나 클릭하고 TV화면에 눈길을 준다. 사적인 인연은 없으니 비통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조문 사진들을 보다 보면 저절로 눈물도 난다. 뭔가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어렵다. 5공 청문회부터 현재까지 그가 살아온 역정이 대부분 '공적 기억'에 입력돼 있으니, 즉 '우리의 기억'이니 이런 상실감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3김 시대'와는 또 다른 것이다).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팔봉 김기진을 두고 '뜨거운 상징'이라 부른 바 있는데, 아마도 노무현 또한 한국 정치사의 '뜨거운 상징'으로 우리에게 남을 듯싶다. 그걸 해석하고 거기에 적절한 의미부여를 하기까지, 그 의미를 실천할 때까지 우리는 망연할 듯싶다. 정처 없을 듯싶다...   

마음을 붙잡기 어려워 궁여지책으로 지난주에 출간된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도서출판 숲, 2009)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천병희 선생의 노고로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의 전집이 완역되었다(예전에 나온 단국대출판부판의 개정증보판이겠다). 다음 세대의 번역이 나오려면 한 30년은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널리 읽혀서 얼른 보급판까지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어둔다.      

한겨레(09. 05. 23) 비극의 한가운데 스스로 두 발로 선 인간 

‘그리스 정신의 가장 위대한 구현’으로 불리는 3대 비극작가의 작품이 완역됐다.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에 매진하고 있는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말 <아이스퀼로스 전집>(전 7편)과 <소포클레스 전집>(전 7편)을 펴낸 데 이어 이번에 <에우리피데스 전집>(전 19편)까지 완역·출간함으로써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의 작품 전체가 국내 최초로 원전 번역을 통해 한국어본을 얻었다. 그리스 정신의 깊숙한 곳을 우리말로 읽어낼 수 있게 된 셈이다.  

세 비극시인은 그들의 고국 아테네의 전성기가 낳은 아들들이자 기원전 5세기를 그리스 문화의 황금기로 만든 주역들이다. 후대의 그리스인들은 세 사람을 모두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과 연결해 기억했다고 한다.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에 맞서 아테네가 승리함으로써 그리스 패자가 되는 기점이다.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는 45살 때 이 해전에 전사로 참가해 싸웠다. 10대 소년이었던 소포클레스(기원전 497~406)는 해전 승리를 찬양하는 축제에서 합창단 선창자로서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또 그리스인들은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5~406·사진)가 이해에 출생했다고 믿었다. 실제로는 그보다 4~5년 앞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쨌거나 이 일화에는 세 비극시인을 살라미스 해전과 함께 기억하려는 그리스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요컨대, 세 비극작가는 아테네의 영광과 거의 동일시되는 인물들인 것이다.

세 사람은 그리스 비극 전성기의 초기·중기·후기를 각각 대표한다. 가장 앞선 아이스퀼로스는 합창 중심의 조잡한 무대에 대화를 도입함으로써 비극을 정립한 사람이다. 아이스퀼로스와 더불어 비극이 비극으로서 탄생했다. 소포클레스는 극중 대화 장면을 늘리고 규모를 키움으로써 비극을 완성시켰다. 이어 에우리피데스는 인물들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구현함으로써 비극의 성격을 전환했다. 에우리피데스 이후로도 그리스 비극은 만들어졌지만 한번도 앞 시대의 영화를 재현하지는 못했다. 3대 비극작가와 함께 그리스 비극은 태어나고 완성되고 변모한 뒤 사멸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아테네 문화의 흥성과 쇠퇴를 반영한다.  


»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5~406) 

세 비극작가의 작품은 거의 모두 영웅 신화를 소재로 삼는다. 그러나 주제로 들어가면 세 사람의 작품 세계는 뚜렷하게 나뉜다. 아이스퀼로스 비극의 주인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이다. 신들은 인간들의 운명에 직접 개입한다. 인간은 ‘죄와 벌’의 사슬에 묶여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친다. 아이스퀼로스의 최고 성과로 꼽히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이 죄와 벌의 긴 사슬을 장대하게 보여준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자, 왕비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돌아온 왕을 죽여 딸의 원수를 갚는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한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는 모친 살해라는 또다른 죄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갈등하는 오레스테스에게 복수를 명령하는 이가 아폴론이다. 신이 주재하는 질서 안에서 한없이 고통받던 인간이 그 고통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 아이스퀼로스가 비극을 통해 보여주려 한 세계인식이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간이다. 주인공이 신에서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소포클레스에게 신들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들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운명은 당혹스러운 수수께끼다. 그 운명 안에서 인간은 결연한 의지로써 난국을 돌파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은 운명의 수렁에 빠져든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자기 나라에 역병이 돌게 된 원인이 선왕의 억울한 죽음에 있다는 말을 듣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선왕 살해자를 찾아내 응징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그 자신이 범인으로 밝혀지는데, 스스로 현명하다고 믿었던 오이디푸스는 ‘보고도 보지 못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자기 응징을 감행한다.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비극적 아이러니’는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며 운명에 갇힌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인식하게 한다.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러 인간은 신과 무관한 인간 자신이 된다. 인간들은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되 모든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존재다. 이때 비극을 끌어가는 힘으로 등장하는 것이 인간 내면의 심리작용이다. 증오와 사랑, 고통과 환희라는 내면의 격정이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인물들은 격정 속에서 복수의 칼을 휘두른 뒤 후회와 두려움에 휩싸인다. 에우리피데스가 비극을 쓰던 때는 아테네 정치가 위태로운 국면에 접어든 때였다. 그의 작품에는 쇠락해가는 시대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으며, 안으로 민주주의가 위축되고 밖으로 제국주의적 행패가 심해진 아테네에 대한 깊은 걱정이 담겨 있다. 옮긴이는 이런 시대비판적 태도 때문에 에우리피데스가 앞 시대 작가들만큼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의 우려는 펠로폰네소스전쟁 패배 후 아테네 몰락으로 현실이 된다.(고명섭기자)   

서울신문(09. 05. 23) 천병희 교수 희랍 원전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번역 출간

“아무도 안 하기에 그냥 재미로 시작했다.”는 번역일이 벌써 30여년. “뛰어난 후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희랍어 문학 번역에서 천병희(70) 단국대 명예교수는 여전히 독보적 존재다. 이번에는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숲 펴냄)을 두 권으로 옮겨냈다. 이로써 지난해 나온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전집과 함께 고대그리스 3대 비극시인의 작품을 모두 정리해 낸 것. 3대 시인 작품을 희랍어 원전 번역본으로 가진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뜻깊을 것 같은데 그는 그저 “전집을 내면 좋겠다 싶었는데 내고 나니 그냥 좋네.”라고만 말한다. 그가 처음 3대 비극시인의 작품에 손을 댄 건 1970년대 초다. “그때는 나도 힘이 들고 출판 사정도 그렇고 3대 시인들 대표작만 모아서 냈어. 더 냈으면 냈으면 하면서 한편 두편 늘리다 결국 이번에 그리스 비극 33편을 모두 끝낸 거지.”

처음 희랍어 원전 ‘아가멤논’, ‘오이디푸스왕’을 묶은 뒤 이번에 완역까지 35년가량 걸린 셈이다. 물론 그 사이 ‘일리아드’, ‘오디세이’ 등 문학작품은 물론 헤로도토스 ‘역사’, 플라톤 ‘국가’ 같은 역사·철학서들도 그의 손을 거쳤다. 하지만 그는 “35년 세월동안 다른 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늘 거기 가 있었다.”고 한다.

희랍어와 인연을 맺은 지 50년이 지났지만, 그 시작은 우연에 가까웠다. “라틴어 수업 들으려다가 시간표가 안 맞아서 그냥 희랍어를 들었지. 처음에는 별로 재미가 없었는데 장익봉 교수의 플라톤 ‘향연’ 강독을 들으면서 푹 빠졌지.” 강독이라지만 너댓명 정도 학생이 돌아가며 읽고 번역하는 수업, 학생이 하나둘 빠지더니 언젠가는 혼자 강의를 들은 날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술자리 이야기처럼 편안한 ‘향연’을 읽는 게 너무 좋아 계속 희랍어를 공부했다. 그러다 “아무도 하지 않고 있더라.”는 이유로 번역까지 손댄 것이다.

그는 “희랍 문학 등 서양 고전을 모르면 문화 전반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힘주어 말한다. 요즘에는 좋아하는 ‘향연’같은 술자리도 가지지 않고 “본래 작가의 뜻을 최대한 냉정히 전달하겠다.”며 하루 7시간씩 번역에 매진한다는 천 교수. 지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번역 하고 있다. “그거 끝나면 쫌 쉬어야지. 철학서적 번역이야 잘하는 후배들 많은데 뭐. 다음에는 쉬엄쉬엄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이나 정리하려고.” ‘쉬엄쉬엄’이란 그의 말이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강병철기자) 

09. 05. 24. 

 

P.S. 주요 그리스 비극 작품이 완역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리스 비극에 관한 입문서나 연구서를 마음놓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천병희 선생의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 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 그리고 임철규 교수의 <그리스 비극>(한길사, 2007)이 국내서로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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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5-25 08:54   좋아요 0 | URL

한겨레에서 에우리피데스 완간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난주 신문에서는 큰 기사던 작은 기사던 로쟈님 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알라딘에서는 종합 1위군요...^^

로쟈 2009-05-25 09:19   좋아요 0 | URL
네, '홈그라운드'라고 많이 응원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릴케 현상 2009-05-25 10:36   좋아요 0 | URL
지금은 사회과학 주간베스트 2위네요^^ 홈그라운드 응원이 좀 더 필요해!!요

로쟈 2009-05-25 23:36   좋아요 0 | URL
1위가 <예수전>이예요. 불경한 일은 삼가하렵니다.^^;

가넷 2009-05-25 20:08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전면적으로 광고 해주는 건가요? 접속하자마자 크게 뜨네요.ㅋㅋㅋ;;

로쟈 2009-05-25 23:37   좋아요 0 | URL
아직도 뜨나요?^^

드팀전 2009-05-25 21:16   좋아요 0 | URL
오늘 낮에 서점에 나갈 일이있어서 간 김에 샀습니다. ^^ 편집이 갈끔하데요...앞쪽 진열대에서 어떤 뇌성마비 총각이 로쟈님의 책을 힘겹게 넘기며 훑어보는 것을 봤습니다. 이제 잘 나가줘야 할텐데요...

로쟈 2009-05-25 23:38   좋아요 0 | URL
제가 봤다면 감동할 뻔했습니다.^^ 책이 좀 무겁죠?^^;

[해이] 2009-05-25 21:37   좋아요 0 | URL
악... 책을 읽고싶어 미치겠습니다. 빨리 다음달이 되어야 카드를 긁을수가 있기에ㅋㅋ

사회과학서적1위 재탈환을 위한 대장정을 시작해야지요 ㅋ

로쟈 2009-05-25 23:38   좋아요 0 | URL
그게, 글의 제목을 서재에서 검색하시면 한 80%는 읽으실 수 있는데요.^^

베토벤 2009-05-27 00:58   좋아요 0 | URL
저작권때문이겠지만 로자님이 직접 링크하셨던 사진들이 없어서인지 살짝 밋밋한 느낌이. ^^; 물론 모니터가 아니라 책의 질감을 느끼면서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로쟈 2009-05-27 01:19   좋아요 0 | URL
네. 이미지는 제약이 많더군요. 김기덕 영화의 포스터를 넣지 못해서 개인적으론 아쉽습니다...

sophia49 2009-05-29 05:17   좋아요 0 | URL
천병희교수님의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구입했습니다.
우리아이...책 표지목록이 하나 더...늘어갑니다.
어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민음사>를 가지고 놀고있더군요...

로쟈 2009-05-30 10:09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