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눈길을 끄는 책에 대한 서평도 없는 김에 미처 챙기지 못했던 책의 서평을 옮겨놓는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그린비, 2009)이 그것인데, 지난 3월말에 '아이아총서'의 한권으로 출간됐다. 근래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일본에는 아예 '오키나와학'이라는 것이 성립돼 있으며 <전장의 기억>(이산, 2002)의 저자이기도 한 도미야마는 '오키나와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하 후유의 사상을 통해 '폭력'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고찰한다. '폭력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저항'의 출발점이 되어줄 만하다고 하므로 관심을 가져봄 직하다.
교수신문(09. 04. 27) 죽임에 처한 자들의 ‘지각’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오키나와’를 다룬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때 오키나와는 일본열도의 서남부 끝에 위치한 섬들을 지칭하는 단순한 지리적 명칭이 아니다. 도미야마가 말하는 오키나와는 물론 지역명이지만, 이 지역을 그렇게 명명한 폭력을 되묻기 위한 거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오키나와라는 이름은 지구 전체를 분할해 명명해온 지정학적 시선과 힘을 본원적으로 반성하는 계기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 지정학에 대한 되물음은 역사적 시선과 중첩돼있다. 그 시선은 바로 제국일본이라는 과거 통치 권력의 현재적 잔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제국일본은 현재 동아시아라고 불리는 지역을 스스로의 판도 내에 포섭하면서 유지돼온 통치체제이다. 이 역사는 현재 ‘식민통치’ 혹은 ‘침략’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이 식민과 침략이라는 말에 내포된 지역적 분할을 문제 삼게 한다. 식민과 침략으로 이 역사를 정의할 때, 일본(식민자/침략자)과 오키나와·타이완·조선(피식민자/피침략자)을 가르는 지역적 분할은 자명한 것으로 고정된다.
이때 식민과 침략의 책임과 피해는 고스란히 현재의 국경을 기준으로 한 국민국가 단위로 승계된다. 그 결과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이 드러냈던 복잡다단한 폭력의 양상은 안정적으로 정리된다. 현존하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해 통치했던 역사, 이 투명한 인식 안에서 규명될 수 없는 것은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식민지라고 불리던 지역의 경험을 비교 검토해 더 자세한 실상을 드러내 고발하는 일이거나, 제국이라 불리던 침략의 주체가 ‘진출’이라는 말로 스스로의 경험을 여러 경로로 분식하는 일뿐이다. 도미야마는 이런 인식과 사유의 틀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지금부터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오키나와 역시 식민지라는 말로 수렵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식민주의라는 개념을 지리적 영역인 오키나와에 적용하고 분석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오키나와는 다른 식민지들과 나란히 놓이게 되고, 상하관계 속에서 서열화되고 비교되면서 공통성이나 이질성으로 표현되기 쉽다. … 다시 말해서 식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그 어떤 문맥을 문제 삼든 간에 먼저 어디가 식민지인가라는 지리적 공간의 문제로 치환되고, 이어서 이 지리적 공간이 이미 설정된 보편적인 식민주의를 체현하는 방법으로 정의되고 분석되며 이해돼 왔다. … 바꿔 말하면 식민주의를 지리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식민주의 혹은 탈식민주의 분석을 가능케 하는 整地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는 정지되지 않은 빈터로 남겨지게 된다.”
즉 오키나와는 식민과 침략이라는 타동사적 어법이 전제하고 있는 ‘주/객’ 혹은 ‘능동/수동’의 분할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를 드러내는 계기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키나와는 기존의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잔여의 경험, 결코 언어가 다다를 수 없는 경험을 적시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오키나와라는 물음 앞에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정학적 분할은 분석과 비판의 힘을 잃는다. 과연 오키나와는 일본인가. 오키나와는 일본의 식민지였는가 미국의 점령지였는가. 이 하나 하나의 물음에 답하다보면 오키나와는 갈기갈기 찢겨진 분열적 역사경험을 고백하게 될 터이고, 이 때 오키나와라는 이름이 하나의 균질적이고 통일된 정체성을 드러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식민과 침략이 자행한 폭력이라고 도미야마는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폭력이 결코 철학적이거나 이론적으로 추상화돼 사념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이가 감지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에 대한 저항은 “살해당한 시체 옆에 있는 자가 획득해야 할”가능성이다. 따라서 이 폭력을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폭력이다’라는 식으로 폭력의 범주를 유형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에 사례를 환원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표현상의 절박함이 중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폭력을 분석/비판하고 저항하기 위해서는, 말이 더 이상 발화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혹은 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경험을 전달하는 ‘記述’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총살을 기다리는 자는 폭력에 벌거벗은 채 노출돼 있기에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죽은 것은 아니기에 말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도미야마가 말하는 폭력 비판의 출발점, 그 저항의 거점은 바로 이 순간, 말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지만 아직 상실되지 않은 순간이다.
“압도적인 약세의 위치에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누군가를 기지의 폭력으로 압살하는 것이 예정된 어떤 특정 시대나 사회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결말이 나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 존재하며, 이런 상황에서 폭력에 대항할 가능성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기술은 예감하는 것에서 재개해야 한다.”『폭력의 예감』은 그래서 폭력이 다가옴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 따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예측과 대비는 이미 폭력행사의 주체와 객체를 확정하는 지식과 技術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압도적 약세의 위치에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이들이 결코 지닐 수 없는 사치스러운 도구에 다름 아니다.
도미야마가 말하는 예감은 이미 태생적으로 방어태세를 습득한 이들의 ‘지각’이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저항은 이 지각을 어떻게 ‘언어표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 때 언어는 중립적인 척하면서 보편적 시각틀을 제공하는 무시간적 매체이기를 그친다. 이와 달리 도미야마는 “글은 밀폐된 교실에서 사용되는 교과서가 아니라, 버려지는 전단지이며, 팸플릿이라는 사실임을 주지하고 말을 자아낼 때의 긴장감을 생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단지와 팸플릿의 언어, 어찌할 수 없는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발화하는 자의 언어, 과연 폭력은 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타격을 입을 것인가. 총살을 기다리는 자의 언어와 저항으로까지 일상속의 스스로를 전락시키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상처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도미야마는 조심스럽게 경고하고 있다. 이 전락을 성취하는 일, 여기서부터 폭력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저항은 출발해야 할 것이다.(김항 고려대 HK연구교수·문화연구)
09. 05.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