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 9.11과 그에 관련된 날짜에 관한 다섯 가지 논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종주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9.11과 이후의 국제정세를 다룬 책들은 제법 나와 있지만,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은 지젝의 것이다. 하지만, 이 국역본은 대개의 지젝 번역서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책이어서, 유감스럽게도 지젝의 고뇌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의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리게만 할 뿐이다.

잠시 그 몰염치를 추궁해 보면, 먼저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에서 따온 책의 제목부터가 잘못 번역되었다. '실재라는 사막으로의 초대'란 뜻인데, 풀어쓰면, (영화에서처럼)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도이다. 제목의 '환대'란 말은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데, ‘환대’는 '누구누구를 환대하다'나 '어디어디에서의 환대'라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로의 환대’라니?

책의 서문은 또 어떤가? 25쪽에서, 체스터튼을 인용하면서 지젝이 자유의 역설을 얘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안전한 보호물이라고...'로 돼 있는 부분은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에 대항하는 가장 안전한 방어벽이라고...'의 오역이다. 역자는 'safeguards against freedom'를 '자유를 지켜내는 보호물'이라고 정반대로 옮겼다. 그렇게 되면, 자유사상과 자유간의 역설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건 시작에 불과하다. 1장의 제목을 역자는 '실재계에 대한 열정, 모사에 대한 열정'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지난번 지젝 초청강좌에서의 제목처럼 ‘모사’보다는 '가상'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며 이해하기에 쉽다. 또, 37쪽의 '외관'은 전부 ‘semblance’의 번역인데, 1장에 제목에서처럼 '모사'라고 했으면, 아예 일관성 있게 ‘모사’라고 하든가, 아니면 '가상'이라고 옮겨줘야 한다. 그것이 외관/외양을 뜻하는 ‘appearance’와 동일하게 번역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리고 'cutters'를 '자르는 자'로 번역했는데, 면도날 등으로 자기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자(대개 여성)를 가리키므로, '면도날 자해자'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8쪽의 ‘심신상관학설’은 ‘holistic’을 옮긴 것인데, holistic이란 건 기계론적(mechanical) 자연관과 대비시켜서 쓰는 말로서, ‘전일론적’ 혹은 ‘전체론적’이란 뜻을 갖는다('심신상관학설'이란 건 영한사전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번역이다).

40쪽에서 '그것을 해내지 못했고'는 '테러(그것)를 한 것이 아니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전형적인 포기자(disclamer)'는 '전형적인 부인 문구'의 오역이다. 즉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실제와는 무관하다'는 식의 문구를 말한다. 이어지는 41쪽의 '리얼리티 소프(reality soap)'는 '리얼리티 비누'라고 안 옮긴 게 그나마 다행인데, 이건 그냥 우리식의 드라마이다(TV연속극). ‘soap’는 TV용 연속극이나 멜로드라마를 뜻하는 ‘soap opera’의 약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여자(participants)'는 '출연자'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같은 쪽에서 '생물발생학설(biogenetics)'는 물론 '생물유전학'의 오역이다. 이걸 '생물은 생물에서만 발생한다는 학설('biogenetic'이 그런 뜻이다)'이라고 역자주까지 달아놓은 건 좋게 봐줘도 코미디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그러니, 아무리 원저가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이 번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이 다시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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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6-0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s a translator, he is one of the worst!...

비로그인 2004-07-2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쿤데라 카페의 로쟈 님이시다ㅇ_ㅇ 알라딘에서 뵈어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일반 교양서로 이 책을 구입하고 싶었습니다만 로쟈님의 말에 따르면 번역가로서 최악인 분께서 옮긴 책인데, 글읽기에 미숙한 제가 제대로 읽어낼런지 시작 전부터 두렵군요.;

2005-04-18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4-1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지 싶습니다'가 아니다, '맞습니다'. 작년 6월이면 제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이고, 한글 쓰는 요령도 알지 못할 때라서 어줍잖은 영어로 댓글을 달다 보니까 오타가 났군요. 다른 지적들도 마음놓고 해주시길...

jo 2013-01-1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안보실거 알지만 흔적을 남깁니다.
책러브에 저희 어머님이 다니시는뎅.......
저도 교보문고에서 하시는 강의도 보러 간 적있고요....
인기가 많으셔서 댓글이 통제되어 있나봐요. ㅎㅎ
아, 2012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2013-01-18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