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애초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이나 이종인 외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 2006) 같은 책을 생각했지만 조금 읽은 느낌으로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에 더 가깝다. 해서 '20여 년간 번역 현장을 지켜 온 최고의 번역가가 절실한 고민을 이론으로 갈무리한 독창적 번역론!'이란 광고문구에서 '최고의 번역가'와 '독창적 번역론'에 괄호를 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읽을 만한 책으로 남을 듯싶다.
어제 책을 구하고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건 직역/의역의 문제를 다룬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인데, 번역이론이나 독단적인 주장에 기대지 않고 번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접근한 것이 좋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진단에서부터 '조리법'이나 '요리법'이란 한국어 대신에 '레시피(recipe)'라고 읽는 것이나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 번역하는 것 등의 사례 제시도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그러니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란 지적에도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론 직역이나 의역이나 일장일단이 있는 만큼('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선택지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편들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직역 편향이 좀 교정될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래야 균형이 좀 맞겠기 때문이다.
저자가 사례로 들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이나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일본도 이제는 외국어 원문을 자기 말로 길들이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외국에서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면서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 일본 경제가 확실히 도약하고 자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번역자, 출판사, 독자가 모두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가독성을 높이는 번역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것이 번역문이고 어느 것이 창작문인지 일반이이 구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란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직역/의역의 문제가 경제적/문화적 자신감과 연동돼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보라!). 한갓 취향이나 이론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정신현상학> 번역이다. 1998년에 어려운 단어를 거의 쓰지 않고 쉬운 말로만 번역한 하세가와 히로시의 번역본이 나오자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네 사정이 달라진 건 또 아니다. 해서 "난해하기로 소문한 헤겔의 저서를 (...)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려하고 명쾌한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독자들에게 충격과 감격을 주었"다는 건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다. 때문에 드는 생각은 <헤겔 사전>(도서출판b, 2009)이 그렇듯이 자체적인 역량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국어본 <정신현상학>을 기다리기보다는 하세가와의 일역본을 중역하는 게 더 낫지/빠르지 않을까 싶다.
일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지만 하세가와의 솜씨를 감상해보면, 그는 "자연적 의식은 자신이 지(知)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증(自證)할 것이다."란 옛날 번역을 "자연 그대로의 의식은, 지(知)는 이런 것이라고 머리에 떠올릴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또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란 표현은 "완결무결한 모습으로"라고 옮겼다. 명쾌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의 현실은 아직 이런 사례와는 거리가 멀다. 번역비평에 관한 발표문을 준비하면서 읽은 논문 중의 하나는 '비트겐슈타인 번역의 미학'(박정일)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비트겐슈타인 전공자이자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서광사, 1997)을 번역한 바 있는 필자가 두 가지 종류로 번역돼 나온 <청갈색책> 번역에 대해 비교분석을 시도한 논문이었다. 그 두 종이란 진중권 번역의 <청갈색책>(그린비, 2006)과 이영철 번역의 <청색책. 갈색책>(책세상, 2006)을 말한다. 필자를 따라서 한 대목만 원문과 같이 비교해본다.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자신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침대에서 뒤척이는 것을 보고 "이제 일어나려나?"하고 혼잣말을 할 때처럼 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 274쪽)
"예를 들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또한 나는 나 자신의 움직임들을, 어떤 사람이 침대에서 방향 전환하는 것을 내가 예를 들어 "그는 일어나려고 하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바라보듯이 바라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가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 250쪽)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 also I don't look at my own movements as I might look at someone turning about in bed, e.g., saying to myself "Is he going to get up?"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But there is not one common difference between so-called voluntary acts and involuntary ones, viz,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 the 'act of volition'."
먼저, 두 번역에 대한 비교평에서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voluntary acts' 'involuntary ones' 'act of volition' 등의 표현을 '의지적 행위'' '무의지적 행위' 의지 행위'(진중권)라고 옮긴 것이 '수의적 행위' '불수의적 행위' '의지의 작용'(이영철)이라고 옮긴 것에 비해 어색하며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act'가 정신적인 것을 가리킬 때 주로 '활동'이란 개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근거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see(보다)와 look at(바라보다)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쓰는 데 진중권은 이를 모르거나 놓치고 있다는 것. 이어지는 다수의 사례를 통해서 필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영철본에 비해서 진중권본은 "번역 요건의 최소한의 정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번역자의 학문적 기반을 의심케 하다"고 혹평한다. 그렇지만 진중권본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이해하려고 할 경우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반면교사로서는 유용하다는 평을 내린다(진중권본의 문제점을 그대로 지나치면서 읽는다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다는 증거다!).
한데, 비트겐슈타인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로서 나의 초점은 좀 다른 데 있다. 대의를 파악하는 데 둘다 별 지장이 없다면 가독성 면에서는 진중권본이 좀 낫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다 지나친 직역투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 <번역의 탄생>의 저자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동적인 언어라서 명사나 명사구보다는 동사구 표현을 선호한다. 해서 "명사가 한국어보다 훨씬 많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글이 어려워"진다.
대체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란 첫 구절을 어떻게 옮기는 것이 나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놀람'이란 명사형도 우리말에서는 어색하지만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는 건 또 뭔가? 뭔가 심오해 보이는, 그래서 시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정작 영어에서 그 표현이 그토록 심오하며 시적인 표현인 것인지?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고 옮기는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 그냥 "이런 경우에는 놀랄 게 전혀 없다"라고 옮길 수 없는 것일까?
그건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와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라는 두 문장에서도 차이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공통점이다.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를 '직역'한 것이긴 하나 '현존이 있다'나 '부재가 있다'는 표현은 한국어가 아니다(동어반복이거나 모순어법이다).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옮길 수는 없을까? "하지만 소위 수의적 행위와 불수의적 행위 사이에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작용'이라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 같은 문장도 자꾸 읽고 쓰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으로 수용될 수 있다. 많은 번역투의 문장과 문체가 한국어화된 것처럼. 하지만 한국어의 특성에 맞게 가려쓰고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옮겨주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란 문제가 말 그대로 '선택의 문제'라면 나는 그쪽을 택하고 싶다. 어떤 쪽인가? 아래 문장을 순차적으로 좀더 우리말에 가깝게 바꾸어본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라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이영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진중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의적 행위와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는 불수의적 행위는 서로 다르다.
09. 0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