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독서평설 1월호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계획상으론 올 한 해 세계문학 작가들을 갑론을박의 쟁점으로 다루게 되는데, 제일 첫머리에 올린 작가는 역시나 셰익스피어다(두 번째부터는 좀 고민이지만). 그건 셰익스피어에 대한 찬양 못지 않게 비판도 더러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건상 두루 다루지는 못하고 셰익스피어의 만년작 <폭풍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봐야 '문제제기' 정도에 불과하지만...  

고교 독서평설(09년 1월호)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인가?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흔히 세계적인 문호의 대명사로 꼽힌다.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의 4대 비극을 비롯해, 그가 남긴 대부분의 작품이 세계 전역에서 읽히고 무대에 오른다. 또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어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이렇게 보면, 셰익스피어만큼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대중화된 작가도 드물다. 아예 ‘셰익스피어 산업’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이러한 현상은 얼핏 그의 문학이 갖는 보편적 호소력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누구나 그의 문학을 공감하며 즐길 수 있고 더불어 그의 작품에서 삶에 대한 보편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보편성, 장벽에 부딪히다
‘진실로 위대한 작가 셰익스피어!’ 이것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다. 그러한 통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의 말이다. 대단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인도인들도 공감할 수 있을까? 인도의 대학 영문학과에서도 셰익스피어를 읽고 공부하며 ‘과연 셰익스피어!’라고 맞장구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셰익스피어 문학의 보편성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셰익스피어의 문학 역시 한 천재의 소산(所産, 어떤 행위나 상황 등에 따른 결과로 나타난 것)인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한 17세기 대영 제국의 한 극작가의 작품이 시대와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문학적 감동을 선사한다는 것은 어딘지 미심쩍다.  

그리고 사실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호평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의 유려하고 시적인 언어에 대해 ‘가식적’이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모두 가식으로 가득한 부자연스러운 언어로 말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이렇듯 과장되고 가식적인 언어가 환영을 받는다면, 그건 셰익스피어의 생존 당시나 현재에나 상류층의 비종교적이고 부도덕한 심리 상태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톨스토이는 꼬집는다. 요컨대,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톨스토이를 설득하지는 못한 것이다. 하물며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의 독자라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미국의 한 여성 인류학자가 인간의 본성은 다 마찬가지이므로 자신이 방문했던 서아프리카의 티브족 사람들도 <햄릿>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녀가 <햄릿>의 첫 장면을 원주민들에게 설명할 때부터 ‘셰익스피어의 보편성’은 장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성(城)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세 사내 앞에 얼마 전에 죽은 부왕(父王)이 나타났다고 말하자, 티브족 사람들은 죽은 자가 다시 걸어 다니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이들은 특이하게도 유령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시체도 아니고 좀비도 아닌, 죽은 부왕의 유령에 대해서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또 부왕과 그를 죽인 동생 클로디어스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지를 물어서 인류학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보기엔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하지만, 정작 <햄릿>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주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더욱 극명해지는 것은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의 처신을 문제 삼을 때였다. 보통 서양의 독자들은 남편을 여읜 거트루드가 적절한 애도 기간이 끝나기 전에 너무 빨리 재혼했다고 생각한다. 극 중의 햄릿도 같은 생각이어서 “오 하느님, 이성적 사고가 결여된 짐승도 그보다는 더 오래 애도했을 텐데!”라고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티브족 사람들은 거트루드가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랐다. “남편이 없다면 누가 당신 밭의 김을 매 주나요?”라는 것이 티브족 아낙의 물음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 <햄릿>이라지만, 이 작품에 대한 티브족 사람들의 반응은 그러한 ‘명성’이 반드시 보편적 공감을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셰익스피어 작품 뒤집어 읽기 - <폭풍우>
그런데 셰익스피어 읽기는 문화적 차이가 빚어내는 이러한 견해차를 확인하는 정도에만 그치지 않는다. 정반대의 평가도 제시되기 때문이다. 통념적인 셰익스피어 읽기와 이해에 맞서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박홍규 교수는,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팽창주의의 길로 접어든 대영 제국 시기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곧 그의 작품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영국사에서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튜더 왕조(1485~1603) 말기에서 스튜어트 왕조(1603~1688) 초기를 가리킨다. 정치사적으로 보면 이 시대는 봉건주의에서 절대주의 국가로 넘어가는 이행기였다. 절대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 시대에도 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왕위 찬탈을 둘러싼 권력 다툼을 자주 다루는데, 명확하게 왕권을 지지하는 것이 그의 정치적 입장이었다. 

   

한편 경제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봉건적 공동사회에서 상업적 이익사회로 넘어가는 이행기였다. 상업적 이익사회는 상품 거래를 통해서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 자본주의의 융성과 맞물려 형성되며, 이 상업 자본주의는 ‘지리상의 발견’의 결과로 촉진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약 100년간 식민지 쟁탈전을 주도한 나라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었다. 영국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대서양의 패권을 차지하고, 17세기에 들어서 식민지 경영의 선두 국가가 된다. 흥미롭게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활동은 이러한 영국의 식민 사업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의 작품에 중세 이래 유럽의 무역 중심지였던 베니스가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 가운데 식민주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마지막 작품 <폭풍우>(1611)다. ‘태풍’ 또는 ‘템페스트’란 제목으로도 번역·공연되는 이 작품은 보통 희비극으로 분류되는데,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나폴리의 왕 알론소 일행은 아프리카 튜니스에서 결혼식을 마친 뒤 배를 타고 돌아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난파하여 어느 섬에 도착한다. 그 섬에는 12년 전 밀라노의 공작이었다가 동생 안토니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어린 딸 미란다와 도망쳤던 프로스페로가 살고 있다. 알론소 일행을 난파시킨 폭풍우는 그가 복수를 위해 마법을 부려 일으킨 것이다. 

처음 프로스페로가 도착했을 때 섬은 시코락스라는 여자 마법사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스페로는 그녀를 물리치고 그녀의 아들이기도 한 ‘야만인’ 칼리반과 많은 요정을 노예나 부하로 삼는다. 그는 알론소와 안토니오를 다시 만나 용서하고서 미란다를 알론소의 아들 페르디난드와 결혼시키고, 그 자신은 밀라노 공작의 지위를 회복한다. 한편 칼리반은 주인인 프로스페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계획하지만 실패하고 그에게 용서를 구한다.    

작품의 중심 플롯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알론소 일행에 대한 프로스페로의 복수’와 ‘프로스페로에 대한 칼리반의 반란’이다. 전자가 권력 쟁탈전의 양상을 띤다면, 후자는 ‘식민지 해방 투쟁’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여기서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은 ‘프로스페로와 칼리반의 관계’다. ‘칼리반(Caliban)’이라는 이름 자체가 식인종을 뜻하는 ‘캐니벌(cannibal)’에서 왔다는 점은, 이 작품에서 ‘원주민’ 칼리반이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미리 짐작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작품 속에서 그는 주로 ‘야만적이고 흉측한 노예’로 소개된다. 2막에서 칼리반을 처음 본, 알론소의 광대 트린쿨로는 아예 이렇게까지 말한다. “이게 뭐야? 인간이야? 생선이야? 죽은 거야? 산 거야? 생선이네. 생선 냄새가 나. 잡은 지 오래된 생선 냄새야. 싱싱하지 않은 말린 대구 같은데. 괴상한 생선인걸!” 그는 이 ‘괴물’을 영국으로 데려가면 한밑천 잡을 거라고 상상한다. 영국인들은 죽은 인디언을 구경하는 데도 돈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식민 시대에는 원주민들이 서커스단의 동물처럼 구경거리로 전시되어 돈벌이에 이용되기도 했다. 프로스페로의 표현을 빌리면, 칼리반은 ‘악마와 사악한 마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악한 노예’일 뿐이다. 이런 부정적인 묘사 때문에 <폭풍우>의 공연사에서 칼리반은 17세기에는 야만스러운 괴물로, 18세기에는 다양한 악행의 구현자로, 19세기에는 반인반수(半人半獸)로, 그리고 20세기에는 인간에 내재한 야수성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평가는 식민주의적 시선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애당초 섬의 주인은 칼리반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칼리반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섬은 내 거야, 내 어머니 시코락스 거였으니까. 그걸 네가 나한테서 뺏어 갔지.” 처음 프로스페로와 대면했을 때 칼리반은 그의 온정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섬의 구석구석을 보여 주었다. 프로스페로는 그런 칼리반에게 미란다를 강간하려 했다는 죄를 씌워 마법으로 제압하고, 바위 안에 가둔 다음 노예로 삼아 버린다. 칼리반을 부를 때마다 욕설을 입에 담지만 형편상 그가 없으면 곤란하다. 칼리반이 불도 지피고, 나무도 해 오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약탈과 지배는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미란다의 말은 시사적이면서도 노골적이다.  

“난 너를 측은히 여겨 말을 가르쳐 주었고, 매번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이 야만종, 네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짐승처럼 어버버거릴 때 내가 말이 통하게 해 주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네놈의 비천한 천성은 고쳐지지 않아. 선량한 우리로선 곁에 두고 봐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바위 속에 가둬 두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칼리반 가르치기는 결코 시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칼리반에 대한 ‘계몽’은 부차적이며, 오히려 그에 대한 지배를 더욱 원활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곧 프로스페로와 미란다의 언어 교육은 칼리반이 말을 더 잘 알아듣게 만들어서, 더욱 쉽게 부려먹고 착취하기 위해 이루어졌을 뿐이다. 19세기 이후 ‘영어’가 식민지 지배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날카로운 통찰로도 읽힌다.  

그러면 칼리반은 이러한 ‘주인의 논리’에 어떻게 대꾸하는가? “네년이 내게 말을 가르쳤지, 덕분에 난 저주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붉은 종기 역병에나 걸려라, 이년.” 칼리반의 욕설은 그가 받은 교육의 결과이며 ‘되받아치기’다. 칼리반은 제국의 언어를 배우지만 그 언어로 욕을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문명화’ 교육의 이면을 드러내 주면서 저항의 가능성도 제시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칼리반의 저항, 곧 반란 기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알론소의 집사인 술주정뱅이 스테파노를 새로운 왕으로 모시고 프로스페로에게 대항하려 하지만, 그의 반란은 희화적으로 묘사될 뿐 결국 프로스페로의 사냥개들에게 단숨에 제압당한다.  



고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빼앗긴 자신의 섬을 되찾으려는 칼리반의 시도는 식민지 해방 투쟁에 값하지만, 그는 이것이 스테파노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김으로써 가능하리라고 본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입장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다. 그는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을 탐욕과 환상이 빚어낸 어리석은 행동으로 줄곧 그려 왔고, <폭풍우>에서 칼리반의 반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적들을 모두 용서하는 5막은 전형적인 셰익스피어식 대단원으로, 그의 용서를 받은 칼리반은 다시금 ‘길들여진 노예’ 상태로 돌아가 자발적으로 순종을 맹세한다. 그들의 확고한 주종 관계가 재차 확인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결말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야만인’ 칼리반이 교정이 필요한 위협적인 존재이고, 강간이나 모반 같은 그의 반(反)사회적 행위는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그 당시 연극의 주된 관객이었던 영국 지배 계급의 식민주의적 태도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폭풍우>는 프로스페로식의 ‘식민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다시 읽을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와 무관하게 말이다. 셰익스피어를 제국주의자로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폭풍우>가 그렇듯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용도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으며, 그것이 고전의 의의이기도 하다. 

09. 01. 11. 

 

P.S.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원고지 30매는 얼마간 준비를 필요로 하고, 개인적으로는 공부할 핑계도 된다. <폭풍우>를 중심으로 글을 쓰기로 작정한 덕분에 관련 자료를 제법 찾아읽었다. 물론 챙겨놓고 미처  읽지 못한 자료가 더 많지만, 국내에서 씌어진 논문과 관련서만 해도 10여 종 이상 읽은 듯하다(나중에 좀더 긴 분량의 글을 쓰려고 한다). 챙겨놓은 자료들 가운데 가장 부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논쟁 작품 연구(A Case Study in Critical Controversy)' 시리즈의 한 권으로 나온 <템페스트>(2000)이다. 제랄드 그라프와 제임스 펠란의 편집이고 350쪽 분량. <템페스트>의 원문과 함께 관련 쟁점을 일목 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주요 논문들을 싣고 있다(한국문학에도 이런 기획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챙겨보려고 하는 자료는 해롤드 블룸 편집의 <템페스트>(2007). 역시나 주요 비평모음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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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1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9-01-12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브족 사람들의 얘기 인상적이네요. 김정환씨가 번역한 세익스피어를 올해 한 번 읽어볼까싶은데 그게 세익스피어 자체보다도 김정환씨가 그걸 완역한 이유가 뭘까가 더 궁금해서라고나 할까요? 뭐 세익스피어를 제대로 읽어본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도 이유가 되긴 하지만요. ^^ 새해죠.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올 한해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로쟈 2009-01-13 01:20   좋아요 0 | URL
김정환 시인은 영문과 출신이고 셰익스피어 번역을 오래전부터 필생의 숙원사업으로 얘기하던 분입니다. 바람돌이님도 새해 건강하시길...

비로그인 2009-01-1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읽기(해석)의 시금석이 되는 작품을 택하셨군요. 콜리지(Coloeridge)는 템페스트의 프로스페로는 바로 셰익스피어 자신이라고도 했지요. 식민지화에 대한 화두를 비롯해서 많은 화제를 풍부히 제공해주는 템페스트 연재, 기대됩니다. 혹시 원문도 함께 인용해주실 건가요? 예를 들어, 프로스페로가 칼리반을 언급하며 'this thing of darkness I / Acknowledge mine.' 이라고 한 부분에서 주어 'I'에서 동사 'Acknowledge'가 떨어져 다음 줄에 쓰이기 때문에 칼리반과의 자신과 닮았음을 인정하면서 잠시 주저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것 말입니다. 본문에 가득한 그런 장치가 한글 번역에서 표현되었다면 모르지만요. 어쨌든 셰익스피어는 무엇보다 언어의 마술사요, 인간심리의 마술사이니까요. 마노니 때문에 프로스페로가 수난이군요. ^^

비로그인 2009-01-12 22:28   좋아요 0 | URL
아, 그런데 고등학생들이 대상이라면 원본까지 인용하기는 좀 그렇겠군요... 아무튼 이 복잡한 작품에 대한 로쟈님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로쟈 2009-01-13 01:21   좋아요 0 | URL
아, 이건 연재가 아니고요, 단타성 글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푹풍우>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고는 싶지만요...

비로그인 2009-01-13 04:5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아쉽습니다. 언제 <폭풍우>에 대해 좀더 다루시게 되면 혹 제가 놓치지 않도록 알려주세요. ^^

드팀전 2009-01-1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실제로 세익스피어 작품을 가지고 원주민들에게 그런 실험을 한 학자들도 있군요.^^ 웃기는 에피소드 같지만 문화인류학자의 입장에서는 해 보고 싶은 실험이었으리라 생각도 듭니다.
<햄릿>의 아버지 유령을 보니-올리비에 영화 속 사진 같습니다- 지젝이 말한 '죽은지 모르는 아버지'도 생각이 나구요.
<템페스트>이야기는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의 세익스피어버전 같습니다. 결론이 탈식민주의와 고전에 대한 옹호로 이어져서 좋네요.^^

로쟈 2009-01-13 01:23   좋아요 0 | URL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피에르 바야르가 소개하고 있는 것인데, 바야르의 책에 <햄릿에 관한 앙케트. 귀머거리들의 대화>가 있죠. 제가 소개해보자고 출판사들에 얘기한 적이 있는데, 별로 관심들을 안 갖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