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라기보다는 저술가란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리는) 탁석산의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더러 칼럼들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그리고 한때는 TV에서도 곧잘 볼 수 있었지만) 그의 '베스트셀러'들은 관심을 끌지 않았다. 흄 전공자로 처음 이름을 알게 됐지만(아마도 흄의 <인성론>에 관심을 가졌을 때인 듯하다), 그가 널리 알려진 건 <한국의 정체성>이란 책이 뜨면서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책을 손에 들기 전에 부정적인 평을 먼저 접했던 듯하고, 이후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최신작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2008)가 지난달에 나왔을 때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창비'에서 출간됐다는 점이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한 가지를 보태자면,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했기 때문입니다"란 주장이 눈길을 끄는 정도. 이걸 '조선 단절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근 조선사와 조선 유학에 좀 관심을 갖게 되면서(제임스 팔레와 한형조 교수 덕분이기도 하고 나이 탓이기도 하다. 나는 마흔 이후에는 한국학과 동양 고전에도 눈길을 주기로 10여 년 전에 작정한 바 있다) 문득 '조선 단절론'의 근거(evidence)가 궁금했다. 그래서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손에 들게 됐고, 또 그런 김에 관련기사도 찾아 스크랩해놓는다(나의 부지런함이여!). 강성민 전 교수신문 기자의 '탁석산론'은 퍽 신랄한 평가를 포함하고 있는데, 어차피 '한국에서의 철학=문화'라는 것이 탁석산의 지론이기에 '철학'이란 (서구식) 기준에 미달한다는 비판에 대해 저자가 괘념할 성싶지는 않다. 어쨌든 참고할 만하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국일보(08. 11. 15) [저자 초대석]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철학자 탁석산(50ㆍ사진)씨의 답이다. 개항 후 한국의 100년을 지배해 온, 탁씨가 한국인의 '생활철학'으로 지목한 세 가지다. 이 질문을 제목으로 딴 그의 새 책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발행)가 출간됐다. '한국적'이라는 타이틀의 권위를 허물어뜨렸던 전작 <한국인의 정체성>(2000)처럼 이 책도 단정적이고 도발적이다.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선비에 대한 향수가 이는데, 조선의 패러다임인 주자학과 현대 한국인 패러다임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서양의 철학을 무분별하게 베끼는 것 못지않게, 고유의 것에 집착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은 이미 서양과 조선을 뛰어넘고 새로운 시기를 100년 이상 살았다"며 "지식인 사회가 조선이라는 벽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 종교, 철학이 일치된 조선 주자학과 결별한 뒤에 '개인'의 공간이 탄생했고, 그 공간에 깃든 한국인의 철학과 정신이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라는 것이다.

"종파를 초월한 기복신앙이 현세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또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즐기자'라는 태도는 인생주의를 보여주죠. 적극적으로 감각적인 즐거움을 원하는 것, 그것이 한국인 특유의 역동성과 야성성을 낳았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허무주의를 한국인의 철학으로 내세운 것, 그리고 그것을 긍정하는 그의 논지다. "한국인의 허무주의는 서양의 니힐리즘과 다릅니다. '인생 뭐 있나. 다 그런 거지'하는 태도가 절망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시간을 견디는 방어수단 혹은 '보험'으로 작용합니다. '지치고 힘들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결국 '어쩌겠냐, 열심히 살아야지'로 이어져요. 이게 현대 한국인의 철학입니다. 건강한 허무주의죠."(유상호기자)    

 

담비(08. 06. 10) 상식은 어떻게 철학으로 포장되는가 : 철학자 탁석산  

탁석산(卓石山)은 그 특이한 이름 때문에 머리에 각인된 철학 전공의 저술가이다. 한자로 보면 더 특이하다. ‘탁월한 돌산’이니 완전히 울산바위 아닌가. 이름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는 걸 보면 본명인 것 같은데, 부친이 대단하신 분인 것 같다. 그는 지난 2000년 ‘책세상문고·우리시대’ 시리즈의 1번 타자로 나와 ‘한국의 정체성’(2000)과 ‘한국의 주체성’(2000)으로 연타석 홈런을 쳐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매우 실용적인 글들을 써서 철학자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지만, 데이비드 흄으로 박사를 받았고, 그 박사논문의 인용빈도가 높은 전공자임은 분명하다.   

그가 대학을 싫어했는지, 아니면 대학이 거부했는지 모르지만 교수의 길을 가지 않고 40대 중반 대중서 저자로 본격적으로 나선 탁석산은 책세상 문고판으로 어느 정도 유명해지자 똑같은 출판사에서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책세상, 2001)를 펴냈고, ‘철학 읽어주는 남자’(명진출판, 2003)를 내면서 이른바 ‘대기업’으로 파트너를 바꿨다. 그가 갈아치우는 출판사 이름을 한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탁석산의 고공행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웅진닷컴, 2004), ‘탁석산의 글짓기 도서관(1~3)’(2005), ‘토론은 기싸움이다’, ‘보고서는 권력관계다’(이상 김영사, 2006), ‘대한민국 50대의 힘’(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등이 그의 최근까지의 행보다. 여기에 몇 가지 추가한다면 2004년 KBS ‘TV 책을 말한다’ 사회자를 지낸 것(얼마 못하고 장정일·김미화에게 바통을 넘기긴 했지만), 2002년 도올 김용옥의 논어강의를 신문에다가 대문짝만하게 비판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정도일 것이다. 



사실 나는 교수신문 기자시절 그와 대면한 적이 있다. 2003년 조긍호 서강대 교수가 쓴 ‘한국인 이해의 개념틀’(나남출판)이란 책이 나왔을 때였다. 대외의존도가 심한 한국의 여타 학문분야에 비해 그나마 토착성을 획득한 게 심리학 분야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심리학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인’ 연구의 계보를 조명하는 특집을 준비했고, 그 서브 메뉴로 신간을 낸 조긍호 교수의 책을 다루게 된 것이다. 좀 독특하게 할 수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서평이 아닌 ‘논쟁대담’의 방식을 취했는데, 대담자로 탁석산이 정해졌다. 교보문고 1층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조긍호 교수는 내내 겸허했고 탁석산은 내내 당당했다. 저자로서 자신의 책에 이렇게 독특한 관심을 가져준다는 점에 조 교수는 감격했던 것 같다. 탁석산은 당시 A4용지 에 질문할 거리를 몇가지 적어 왔는데, 대담의 내용은 이 자리에 그리 소개할 만할 게 못된다. 인상 깊었던 건 탁석산이 대담료가 적다고 불평했다는 점이다. 두꺼운 책을 한권 다 읽고 나오는데 10만원이 뭐냐고 말이다. 그 대신 대담이 끝난 후 식사대접은 신문사 측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돈 때문에 필자들에게 책망을 듣는 일은 교수신문을 다니는 내내 겪어야 했다.(90%의 필자들이 기꺼이 글을 써주고 때로는 원고료를 받지 않기도 했지만, 나머지 10%의 필자들이 던진 쓴소리가 가슴에 꽂혔다.)

독특한 글쓰기와 사례인용적 글쓰기의 효과
그런데 이것을 끝으로 탁석산과의 인연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학술적이고 인문학적인 책을 펴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날 대담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탁석산은 책의 내용이나 수준에서 별로 주목을 요하는 저술가는 아니다. 대화체 글쓰기와 독특한 사례인용 등에 영감을 얻어 그걸 도구로 활용하는 이들은 있다. 책을 보고나면 남는 것 없지만 한두마디 에피소드는 꼭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의 저술을 놓고 본격적으로 논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을 되새겨보자. 게다가 고종석은 탁석산의 책이 매우 위험하다며 “순진한 극우주의자”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진중권은 ‘폭력과 상스러움’(푸른숲, 2002)이란 책에서 아예 기겁을 한다. “얼마 전 서점에서 우연히 탁석산이라는 철학자(?)가 쓴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이란 책을 보았다. 몇 페이지 들쳐보고는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 엽기적인 책으로, 이 책에 비하면 장기의 자유판매를 주장하는 공병호의 ‘갈등하는 본능’은 애교로 보일 정도다. 제3제국의 나치 철학 이후로 전 세계에서 핵무장을 주장하는 유일한 철학자다. 심지어 이런 책이 ‘좋은 책’으로 추천까지 받는다”라고 말이다. 나 또한 여기에 동감한다. 센세이션을 일으켜 떠보겠다는 ‘야심’까지 읽혀져서, 나는 탁석산이 김용옥을 가리켜 ‘약장사’라고 독설을 퍼부을 때 ‘영역다툼’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마 김용옥은 탁석산에 비하면 그 깊이가 1백미터는 더 깊은 사람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고작 ‘상식’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사람 아닌가. 수능학원에 다 정리돼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사랑은 오류’(웅진지식하우스, 1995)라는 소설에서 유머러스하게 정리해놓은 오류의 방정식이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아닌가. 그나마 마르케스는 이 소설에서 헛똑똑이를 참 잘 그렸다. 한 법대생이 여자친구에게 ‘일반화의 오류’니 ‘의도의 오류’니 하며 잘난 척 읊어대다가, 막상 프로포즈를 할 때는, 그 여자아이가 법대생의 말끝마다 그건 무슨무슨 오류라며 넉다운을 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탁석산이 그의 책들에 깔아놓은 내러티브는 이에 비하면 반전도 없는 밋밋한 상상력을 보여줄 뿐이다.

‘자생적 학문담론’과 ‘책세상문고·우리시대’라는 행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석산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단행본 출판이 그려놓는 시대풍경의 측면에서다. 그가 2000년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책세상문고·우리시대’라는 문고판 시리즈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제1권의 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석산에겐 행운이다. 당시는 한국사회가 IMF의 지독한 펀치를 얻어맞고 겨우 일어서던 시기였다. 낙관적인 이들은 비싼 수업료를 냈다며 다신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외치던 때다. 경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경제학자들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이런 비판의식은 각 학문분야로 널리 퍼져 이른바 이 땅에 걸맞은 ‘자생학문’을 위한 담론화가 활발히 시작될 때였다. 우리사상연구소가 2001년부터 펴낸 ‘우리말 철학사전(1~3)’(지식산업사)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우리말 철학하기’ 모임이 결성돼 작업한 결과물이었고,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의 ‘탈식민적 글쓰기’ 담론이 호응을 얻어 내고 있었다. 



자생학문 담론이 무르익는 상황에서 나온 책세상문고는 ‘우리시대’라는 문제의식을 눈에 띄게 표방하며, 학문의 쓰임새를 고민했다.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전재호), ‘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는갗(박동진), ‘우리시대의 북한철학’(선우현), ‘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김창수),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배식한), ‘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구춘권) 등의 문제작들을 계속 쏟아냈다. 책세상문고는 출발 당시 일본의 이와나미문고나 프랑스의 끄세주처럼 문고판 르네상스를 견인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책세상문고는 중반 이후로 가면서 필자발굴이 어려운데다 글을 대강대강 쓰는 학계의 풍토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문제의식과 글쓰기가 둔해지면서 그 빛을 잃어갔다. 하지만 탁석산은 속된 말로 하면 주가가 폭등한 책세상문고의 시세차익만 챙긴 후 발을 뺐다. 책세상에서도 그리고 동시대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에서도 말이다. 가령 그에게 강의를 들었던 어떤 이는 “일본에 관한 책을 쓴다더니 그건 언제 쓸 건지…”라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이후 그의 행보는 책장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탁석산의 글짓기교실’에서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의 글쓰기 요령을 조목조목 비판한 대목이 있는데, 이것을 읽고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이 비판이 그럴듯했다고 생각했던지 장(章)의 마지막에 표로도 정리해놓았다. ‘매일 적어도 몇 줄씩 자기 생각을 글로 써보자’는 것에 대해선 ‘메모에 불과하다’, ‘내가 잘못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불안감을 떨치자’에 대해선 ‘글쓰는 방법을 알면 불안감은 사라진다’는 식으로 비꼬았다. 서울대의 글쓰기 매뉴얼이 평범한 충고에 그치긴 하지만, 그건 그냥 어디에나 있는 매뉴얼일 뿐이다.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반박할 만한 매뉴얼이 얼마든지 있을텐데, 굳이 그는 ‘서울대’를 걸고 넘어진다. 서울대를 우습게 만들어야, 그래야 전략이 통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여러 번 비판받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뒤집는 것이 탁석산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서울대 매뉴얼 비판에서도 여지없이 관찰된다. ‘가장 쉬운 부분부터 쓰기 시작하자’는 것에 대해 ‘가장 쉬운 부분은 없다. 글은 유기체와 같은 구조이다’라고 비판해놓고선, ‘너무 규범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써보자’에 대해선 ‘어느 정도의 규범이 존재한다. 일단 규범을 익혀야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쉬운 부분부터 쓰자’는 말이 글이 유기체라는 관념을 거스르는 건가. 결코 아닐 것이다. 글이 유기체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쉬운 부분부터 쓰라는 서울대의 매뉴얼은 뭔가. 일종의 방법이자 요령이고 그것이 규범 아니겠는가. 그런데 탁석산은 서울대가 규범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듯이 비판한다. 비판에도 종류가 있다. 탁석산의 서울대 매뉴얼 비판은 한마디로 불필요한 비판이자, 비판의 장식효과를 노린 비판에 불과하다.

내면의 불신과 논증의 신뢰, 그 불협화음
사실 ‘한국의 주체성’ 등은 철학자가 가한 사회비판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공감을 얻은 부분은 딱 한가지로 보인다. 주체성을 ‘정신이나 마음의 문제’가 아닌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주체성이 생기고 강대국에 대해서 할말도 한다는 단순논리이다. 조선시대부터 한국의 지식인들은 주체성을 너무 내면적인 것으로 파악해 몸은 식민지에 구속돼 있어도, 정신만 온전하면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윤치호 등이 여기서 거론되고 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한 글에서 탁석산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높이 평가했다. 물론 여러모로 미숙하다는 단서는 달지만, 아무튼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 특히 권혁범 대전대 교수가 민족과 국가에 반대하는 ‘관념적’ 태도에 잘 들어맞는다고 했다. 아니 강 교수는 권혁범 교수와는 또 다른 강단 좌파, 머리는 진보이면서 생활은 보수인 이들에게 탁석산의 책을 선물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2000년 당시 탁석산의 이런 문제제기는 신선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내면성에 대한 불신이 탁석산의 본래적 특징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책으로 출판된 그의 박사학위논문 ‘흄의 인과론’(서광사, 199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흄은 그가 20대 초반에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고 싶어 책읽기에 몰두하던 시절에 읽던 책 중의 하나였다. 그 때 그는 흄이 매우 평이한 상식적인 문제를 그토록 어렵고 힘들게 논의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흄을 주제로 논문을 쓰다보니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먹을 듯이 읽게 되고 그러다보니 흄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흄의 인과성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을 반박한다. 오히려 전통적 해석을 새로운 논리로 옹호한다. 흄에 대한 인과론적 해석의 대표적 사례인 ‘무지 논증’과 ‘브로턴 논증’을 반박하고, 이 반박에 대한 반론인 자연주의적 해석에 답변을 시도한다. 탁석산은 흄이 경험을 넘어서는 주장에 대해서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브로턴이 대상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힘 얘기를 꺼내면, 탁석산은 “흄의 책을 찾아보니 어떠한 인과적 힘이 존재하여 그 힘이 결과를 야기한다는 주장은 순환정의에 빠진다고 써있네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라는 식이다.

위에서 보듯 이 책의 전체적인 인상은 논증적이라는 것이다. 뭐랄까. 영미 분석철학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서 논술선생 같은 탁석산의 면모를 눈여겨본다. 가지를 쳐내고 논리의 핵심을 뽑아내 연관관계를 검토하는 모습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한국의 주체성’의 충격적인 주장도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주체성이 정신과 마음의 문제라면 외부 환경과 상관없이 우리가 자신을 주체적이라고 여기는 한 주체적일 수 있다. 이것은 일면 옳은 지적이지만, 약소국의 지식인이 이 점을 강조하면 전형적인 식민지 지식인의 사유라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결국 강대국이 원하는 약소국, 말로만 주체적이고 실제로는 식민지인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장에서 우리가 약소국이되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핵무기 개발과 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약소국이라도 핵을 보유한다면 강대국도 결코 만만히 보지 못한다. 북한과 파키스탄이 좋은 예이다. 왜 우리는 핵무장을 하면 안 되는가? 나는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중장기적 계획을 세워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한국의 주체성’, 79~80쪽).

문제를 넘지 못하는 문제제기의 황당함
정말 놀랍다(!) 철학자가 이런 주장을 펼쳐도 되는가. “우리가 핵에 대해서 세계 인류 차원의 평화만을 공허하게 외친다면 우리의 주권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단다. 소설가 김진명하고 친구 사이인가. 그 많은 지식인들이 평화를 위해 핵을 반대하는가. 궁극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평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핵이라는 것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남을 몰살시킬 수 있는 대형무기를 합법적으로 보유하며, 그것을 통해 타인에 대한 상시적 위협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의 못견딤, 미국중심의 핵질서에 대한 제3세계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적 스탠스는 아랑곳없다. 너무 단순한 주체성의 물신화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된다. 강준만 교수는 탁석산에게 핵무장을 주장하기 전에 리영희를 읽었어야 했다고 충고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특히 이 책의 71쪽에 나오는 “조금이라도 눈치를 덜 보고 살려면”이라는 조건절에 눈길이 간다. 탁석산에게 주체성이란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것이다.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 그것이 주체성의 내면성이며 내면성은 자신의 독립을 지킬 수 있는 힘의 확보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모순된 연결인가.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는 주체성의 원초적 본능 아닌가. 원초적 본능과 내면성은 다르지 않은가. 내면성은 어떤 성찰적 이성이 개입된 각성된 마음이 아닌가. 주체성의 내면성이란 자아-타자 관계를 복잡하게 내면화한 심리상태란 말이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내가 아는 한 학자는 겨울에도 집에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어떤 사람과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장(長)과 죽어도 함께 밥을 먹지 않고 그 직장을 그만두기도 했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관계를 잘라내고 복원하는 결단의 연속을 생활의 호흡으로 삼는 것이다. 웬 핵무기를 끌어들여 민감한데다가 사람마다 다른 문제를 왜소화시키고 희화화시키는지 모르겠다.

그는 “외세는 약소민족의 역사를 종식시킬 수는 있을 것이나 그의 역사를 결정할 수는 없으며”라는 남경희 교수의 말에 대해 “이해할 수는 있으나 무리가 있다”며 “역사를 종식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역사적 결정이 있나”라고 반론을 편다. 그러면서 주체성을 내면화하는 것으로는 주인으로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면화와 동시에 힘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누구의 말마따나 참으로 괴로운 철학과 경제의 결합이다. 철학의 힘만으로는 주체적 삶이 불가능하다는 그 아포리아에 경제의 논리를 잇대어 기워나가는 것은 뭐랄까 범주의 착오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경제와의 타협을 포기하고 차라리 주체성을 포기해버리는 이들은 그런 손쉬운 타협을 몰라서 안하는 것일까. 우습고 유치하고 더러워서 못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결론에서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破邪現正(파사현정)이란 말이 있다. 잘못된 것을 없애면 올바른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강대국 논리의 논파를 이런 맥락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정파사’의 전략을 택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강대국의 논리와 의도를 논파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정의를 내리고 그에 따른 행동 지침을 마련하여 잘못된 논리와 상식을 논파하려는 것이다. 올바른 논리가 서면 잘못된 논리는 봄 햇살에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탁석산의 말인즉 본인은 로드맵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대로 따라오라는 말인데,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잘 그리는 로드맵을 보라. 그대로 따라갔다가 낭패 보길 한두 번인가. 게다가 탁석산은 언어문제, 핵문제에서 전문가도 아니지 않은가.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 픽 웃고 말 허술한 논리, 살펴봐야 할 현실의 장애물들과 프로세스도 제대로 모르는 그런 비전문가가 사회쟁점을 열거하면서 따라오라고 하면 누가 따라가겠는가. 현정이 안 되기 때문에 파사도 안 된다.

“교과서에 적힌 것만 역사인가요?”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를 살펴보자. 민족주의를 사다리라고 말하며 그는 그것이 ‘실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實體란 말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 현실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란 의미로 탁석산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민족주의는 이념이거나 정서이거나 하기 때문에 만지고 볼 수는 없다. 당연히 그의 논리에 의하면 실체가 아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현실에서 민족의 중량감은 크다. 만질 수 없지만 없다고 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물건을 탁석산은 실체(thing)가 아닌 실재(entity)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어를 바꿔 단다고 해서 민족에 대한 그의 ‘반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탁석산의 이런 논리를 ‘실체의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여러 가지 무리한 주장을 한다.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인가. 과연 남한과 북한이 동일한, 아니면 유사한 문화를 갖고 있는가? 문화가 같으려면 정치체제, 경제구조 등의 바탕구조가 어느 정도 유사해야 한다. 하지만 남북한은 매우 상이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연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유재산과 이자에 대해 남한 사람만큼 이해할 수 있겠는가? (…) 그래도 남북한을 같은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핏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핏줄이란 가족을 정의할 수는 있지만 민족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핏줄로 민족을 정의하려면 사돈의 팔촌의 사돈의 팔촌으로 한없이 확장해야 할 것이다.”

실체를 신봉하는 그는 정치, 경제, 문화를 보니 남북한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기억’을 보지 못한다. 생활이나 습성에 스민 전통을 보려하지 않는다. 그게 남북한 사람들을 얼마나 끈질기게 묶고 있는 것인지, 황석영의 ‘손님’(창비, 2001) 정도만 읽었다면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탁석산도 역사를 염두에 둔다. “역사적 유산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민족을 정의하는 것은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라며 이순신의 예를 든다. 북한 역사교과서에 이순신이 “양반 지주계급으로 봉권왕조에 충성해 싸웠을 뿐”이라고 해석돼 있기 때문에 “동일한 역사를 공유한다는 건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겨레문학의 상징이라고 떠받드는 박지원이나 김시습 같은 이는 어떤가. 그들은 남북한 사람들에게 공히 영광스러운 유산 아닌가.

심지어 실체주의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는 언어마저도 같은 민족을 삼는 보편적 기준이 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영국과 미국, 싱가포르와 호주는 같은 영어를 쓰지만 같은 민족은 아니라고 근거를 댄다. 역사를 돌이켜보자. 청교도와 영국이민자들이 1607년 미국에 건너와 식민지를 건설한 후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1776년까지 1백7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 후 미국과 영국은 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과 북한은 어떤가. 한국전쟁 이후 고작 60년이 지났을 뿐이다. 전쟁에 참전한 이들이 많이 살아있다. 고향이 북한인 사람도 많다. 기억이 완전히 분리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남북한 문화의 이질성이 강조되는 것은 당장 남북한의 경제, 정치체제를 합쳐서 단일국가로 만들자는 급진론에 대한 반론이지, 남북한을 하나의 민족으로 정의하고 느끼는데 사용될 필요는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핏줄이 민족의 조건으로는 약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철학자 김용옥이 프랑스인 사위를 봤는데, 손자가 태어나면, 그리고 손자가 다시 외국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는다면 핏줄이 흐려지지 않느냐고 한다. 그는 확실히 역사적 사고에 약하다. 그는 논리의 좌우를 따지는 데 익숙할 뿐이지 거기에 통시적 시각을 부여하는 데는 서투른 것이다. 그 손자가 태어나고 다시 결혼해 애를 낳으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리지 않을까. 요즘 같은 담론의 민주화 시대에 30년이라는 시간은 바뀐 현실을 따라가며 민족의 배타적 테두리의 어느 한 부분을 헐어버리는 데 충분한 시간이지 않을까.

“민족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개인의 삶을 너무 억압하고 있다”는 말도 문제의 소지가 많다. 가령 명확한 사례를 보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억압받는 건 있다. 민족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탁석산이 좋아하는 국민 혹은 시민의 여건을 갖추지 못해서일까. 나는 국가장치가 그들을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인종적 편견은 홀리건들이 득세하는 유럽이나 러시아보다 그리 심하지 않고, 소수 민족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정서는 대체적으로 호혜적으로 바뀌고 있다. 인터넷과 온갖 미디어들이 이 세상 곳곳을 대명천지처럼 비추는 시대에, 그것도 그 나라의 3D 업종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생활필수품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밀어내서야 그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쯤은 상식차원에서 동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민족이 대한민국 국민을 억압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스포츠민족주의(월드컵), 영토민족주의(독도·간도) 등이 시끄럽고 귀찮으면 귀찮았지 억압은 확실히 ‘오버’다.  

고정관념 깨는 맛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엘리트주의
탁석산에게는 사회적 고정관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오래된 습성이 있다. 이는 그의 글 구석구석에서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다가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구절에서 “태어나니 역사적 사명이 기다린 것이지,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은 아닌데”라고 의문이 들었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타고난 자질 같다. 탁석산을 읽으며 불편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제기형 글쓰기다. 물론 문제제기형 글쓰기는 중요하지만, 결과가 합리적이어야 한다. 탁석산의 문제제기는 문제를 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민족이 내용 없는 형식적 구호일 뿐이라는 식의 극단적 비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그는 “무엇을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거짓말을 하거나 별 근거가 없는 주장을 하거나 아니면 본심을 숨기려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본인에게 정확하게 대응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엔 철학을 생각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퍼져있다. “내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철학”이라는 단순화는 보통 철학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벌고자 하는 책들에 퍼져있다.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도 그렇게 시작한다. 왜 지식인은 대중에 대응하는가. ‘대중의 발견’. ‘철학이 대중과 멀다는 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하다. 멀 수밖에 없는데, 철학은 성찰적이고 더딘 것이고 괴로운 사유의 길인데, 거기 대중이 다 참여할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조선시대에 철학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 시대엔 양반이면 누구나 철학자연 하는 게 상식이었지만, 계급이 없어진 요즘은 철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 철학을 하면 된다. 사실 철학과가 너무 많고, 철학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우리 사회가 그 공급을 다 수요하지 못하는 것이지, 철학의 위기라는 말은 냉정히 보면 “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질 때”를 모르는 미련한 소리인 것 같다.  

아무튼 누구나 철학적 감수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철학하는 이들은 철학적 감수성이 없는 이들의 질시와 투정을 받아줘야 한다. 본인이 설 곳을 모르고 대중사회로 내려와 영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중이란 얼마나 영악한가. 나는 이 철학의 대중화를 앞에서 어려운 척 자기들끼리의 언어놀음에 빠져있는 학자들을 향해 교양주의라고 비판하는 탁석산이야말로 일종의 교양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철학자가 자신의 내공을 공개적으로 입증하는 방법은 누구나 관심있는 문제를, 누구나 아는 용어를 사용하여,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롭고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라는 교양의 신봉자다. 나는 진정한 철학자라면 누구도 관심 없는 문제를 그래도 한번쯤 관심을 가질 수 있게 사유해서 그 과정을 보여주는 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탁석산은 핵문제 같은 누구나 아는 문제에 대해 쉽게 풀어내지도, 탁견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극우적이고 순진한” 발상을 했을 뿐이다. 탁석산은 또 말한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사유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특징인데 사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고이지 옛날 철학자들의 사유가 아니다. 물론 같은 문제를 사유하다보면 앞선 사람들의 사고를 배우고 익혀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 사유를 튼튼하게 하고 풍요롭게 한다. 따라서 과거 철학자들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참조일 뿐이고 훈련과정일 뿐이다.”

요즘 누구나 입만 열면 하는 교과서적인 소리이고 개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행어에 대한 주석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철학사에 파묻혀 제대로 훈련하려면 10년은 투자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다. 10년이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인생이다.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고 현장이고 사유가 꽃피는 순간이다. 탁석산 같은 이들은 사유의 과정을 분절화하고 세밀하게 흐름화하여 그 속의 소리와 이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감수성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내 힘으로 생각한다”는 것. 이게 말처럼 그리 쉬운 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막막하게 가부좌만 틀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다는 돈오(頓悟)라는 말이 있는 것이고, 유교에서는 계속 자세를 바르게 하여 읽고 또 읽고 그대로 따라서 생활하다보면 언젠가 깨닫는바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읽기와 쓰기의 무수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교환, 피곤과 절망의 뒤범벅 속에서 피어나는 한줄기 아이디어, 대책 없는 분노와 용기에서 내질러진 비명과도 같은 말들, 이 말들이 몇번씩 부딪혀 곤죽이 되어야 그 곤죽이 길에 비로소 길을 낸다. 제대로 된 말은 자기 생각의 시체들을 깔고 흘러가기 시작한다.

열정만 있다면 재미있고도 어려운 철학책은 많다
탁석산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을 하는지는 조금만 신경 쓰면 잘 알 수 있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옛 경전을 버려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가령 경전처럼 숭상되는 하이데거, 플라톤, 니체,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보자. 그들 중에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게 무시한다고 무시당해진다면 애초에 고전이란 이름을 달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전을 버리라는 말을 경전을 상대화해야 한다는 말로 고쳐 읽으면 그나마 말은 된다. 그것도 겨우 된다. 하나마나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 초심자들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읽기 전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보라고 한다. 그는 글쓰기 책에서 “어느 정도 규범을 알아야 그 때부터 글이 써진다”고 하더니 생각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생각이 글쓰기보다 더 쉬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생각과 글을 따로 따로 보는 것일까. 그의 말은 이렇듯 종잡을 수가 없다.

철학 깨나 했다는 이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철학을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타자화하는 것이다. “철학책이 수면제 외에는 쓸 데가 없으므로 철학 소비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적 현실이라고 제시해놓은 게, 오히려 현실을 크게 왜곡하는 경우이다. 요즘의 독자들은 약간만 지루해도 잠들어버린다. 문학이라고 과학이라고 안 그러겠는가. 심지어 책은 재미있어도 읽다 보면 잠이 온다. 그게 책이다. 책은 잠과 서로 침투하는 공생관계다. 책의 수면제 역할은 책이 책 고유의 역할 너머의 역할을 통해 자신의 매체적 수명을 연장해온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현행 ‘철학=수면제’라는 인식을 폭력적으로 일반화하고 있다.

그는 근대경험론(흄)을 전공하고 거기에서 양식을 구하는 사람이다. 경험한 것 이외의 것들은 아예 취급도 안하는 곳이 근대경험론이다. 그가 사회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찬반의견을 많이 표출하는 것도 바로 경험 가능한 사실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탁석산의 현실주의와 솔직함은 모두 경험과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것의 이치가 안보이는 모든 것보다 앞선다는 독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흄이 그랬다고 탁석산이 말하지 않았는가. 가라타니 고진은 타자(他者)를 보지 못하는 걸 가리켜 독아론(獨我論)이라고 불렀다. 탁석산은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의 폭을 넓히고 있지만, 철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유하고 말 걸고 현실을 분석하는 데에서는 경험론의 자리에 멈추어 있다. 그의 계속되는 독서와 현실관찰이 철학적 태도의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강성민 학술평론가) 

08. 12. 24.  

P.S. 한국인의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를 (부연)설명하고 있는 본론보다 내가 흥미를 갖는 대목은 부록격의 '특강'이다(한국문화론이라면 이어령, 강준만, 정수복 등의 책과 비교해봄 직하다). '불교와 주자학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이 사실은 내가 이 책에서 읽고 싶었던 부분이며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더불어 불교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한다. 왜 그런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리하도록 하겠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8-12-24 18:06   좋아요 0 | URL
^^ 재밌는 글입니다. 그의 견해에 언제나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하는 철학자죠. 그래서 좋아합니다.

로쟈 2008-12-25 00:19   좋아요 0 | URL
제가 조금 읽은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한데, 충분한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 않은 주장들도 자주 나오네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정도면 약한데요...

쉽싸리 2008-12-25 00:18   좋아요 0 | URL
크라이스트의 이브가 지났네요.
로쟈님의 종교는? 궁금^^


탁선생이 전에 "TV 책을 말하다" 진행할때, 어? 어색, 참신, 경직?? 이정도 느낌이 들었드랬습니다.
저의 단편적인 사고로는 (사정은 누구나 있겠지만/그러므로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하겠지만)박사를 따면 강의를(교수건 강사건)해야하지 않나요? 안할 수도 있겠지요, 못 할수도 있겠지요,박봉이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학문의 기본?이 그렇지않느냐는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와우!!(주님 영접하느라 UP 되어있습니다)66

로쟈 2008-12-25 00:21   좋아요 0 | URL
성탄절이라고 특별한 감회를 갖지는 않고요, 다만 아이의 선물 '궁리'나 하는 편입니다. 물론 겸사겸사 예수나 기독교에 관한 책들을 괜히 들춰보긴 하지요.^^;

2008-12-25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5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rori 2008-12-25 11:39   좋아요 0 | URL
탁석산의 탁상(산)공론인지 탁석산 까기의 탁상공론인지..
----------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옛 경전을 버려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가령 경전처럼 숭상되는 하이데거, 플라톤, 니체,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보자. 그들 중에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게 무시한다고 무시당해진다면 애초에 고전이란 이름을 달지도 못했을 것이다.
--------
이 부분에서 필자가 매우 화가 난 상태로 글 썼다는 걸 알았어요.
철학이 실용적인 학문은 아닌데.. (필자가)독단적 철학 숭상주의 같아요. 고전= '진리' 라고 말하는 거 같고요. 필자가 좀 편파적이네요.
그래서 제 결론은 둘 다 탁상(산) 공론. 둘 다 비생산적인 글을 배설하는 듯.

로쟈 2008-12-27 07:24   좋아요 0 | URL
사감도 좀 들어가 있다고 봐야죠..

porori 2008-12-25 11:42   좋아요 0 | URL
만약 영화감독 Jean Luc Godard가 이글을 봤다면 그나마 탁석산을 옹호할 듯.

yoonakim 2008-12-26 00:48   좋아요 0 | URL
전 속이 다 시원한대요..수년전에 대학원 총학에서 '한국의 주체성','한국의 정체성' 책이 바로 나왔을때 초청강연을 하는것을 본적이 있어요. 그 이후 그분의 책을 관심있게 본적이 없네요..ㅎㅎ..근데 참 많이 나왔네요..그런데 학술평론가...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8-12-27 07:24   좋아요 0 | URL
원래 학술담당 기자였습니다. '학술평론'이라고만 돼 있는데, 제가 '가'를 더 붙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