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그나마 기분을 풀어준 기사는 '88만원 세대'의 칼럼이었다. 필자는 대학생 논객. 비록 청소년 울리는 '알바'의 실상을 여실히 폭로하고 있는 칼럼이지만 그 주장의 예리함과 미더움 때문에 오히려 흡족한 기분이 들게 했다. 오늘 아침 환승하기 위해 서 있던 용산역 플랫홈에서였다. 연구소에 도착해서 칼럼을 다시 찾았더니 중앙일보의 칼럼까지 덩달아 눈에 띄었다. '기성세대'의 감각을 여실히 전해주는 것이어서 나란히 읽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모아놓는다. 제목을 '88만원 세대 vs 기성세대'라고 붙여놓을 수도 있겠다...
경향신문(08. 12. 19) [88만원 세대 논단] 청소년 울리는 ‘알바’
11월부터 약 한 달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디든 지원자가 넘쳐났고, 위치도 좋고 시급도 괜찮은 곳은 나 같은 비숙련자들이 넘보기가 힘들었다. 며칠을 집중해서 알바 사이트를 뒤지다 보니, 알바 구직 시장에서 쓰이는 몇 가지 상투적인 표현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테면 ‘용모 단정’. 고등학생 때는 정말로 ‘용모’가 ‘단정’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한 미모 하는 사람만 연락하라’는 뜻이다.
시급 협의. 시급 협의라고 써놓은 데 치고 최저임금 제대로 주는 곳을 못 봤다. 만일 직종이 편의점이라면 십중팔구 최저임금에서 한참 깎아서 준다. ‘가족 같은 분위기.’ 알바 체험 게시판에 따르면, 불합리한 일이 생겨도 ‘가족처럼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라고 한다. ‘왜 임금이 더 작아요? 좀더 쉬게 해 주세요’라고 하려면 ‘우리가 남이가’ 하는 식으로 막으려는 수사다. ‘열정을 가지고 일하실 분!’ 예전에는 ‘근면 성실한 분’이 차지했던 자리다. 제 정신 가지고 일하려면 견디기 힘든 격무라는 소리 되겠다. 실제로 “일이 힘들어요. 열정을 갖고 하셔야 합니다”라고 면접 때 이야기했던 그 패밀리 레스토랑은 실제 일을 해 보니 보통 체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조금 괘씸하게 느껴진다. 근면 성실은 습관과 인내로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열정은 내가 그 일에 대한 강한 목표가 있고 일에서 주체적인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상태에서 가지는 적극적인 태도다.
일을 시작해 보니, 왜 그렇게 열정 어쩌고 하면서 힘들다는 걸 강조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는 곳에서 접시와 컵의 물기를 닦았는데, 동작 자체가 힘이 드는 건 아니어서 처음에는 할 만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곧 점심시간이 되고, 식기세척기에서 끊임없이 그릇들이 나오고, 그릇을 빼내고,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접시를 닦아 쌓고, 낑낑대며 홀에 갖다 놓고, 그러고 나면 식기세척기에서 나온 그릇들이 또 한참 쌓여 있고….
그런데 앉을 수가 없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앉을 수가 없었다. 거의 열두 시간을 그렇게 서서 접시를 닦았다. 행주를 말릴 틈도 없이 접시를 닦다 보니 젖은 행주와 접시에서는 고릿한 냄새가 올라오고, 손은 퉁퉁 부었다. 나보다 몇 주 먼저 일을 시작한 아이는 주부습진으로 손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이곳은 월급날까지 한 달을 채워야 임금을 주기 때문에 참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 전에 그만두는 아이들은 일을 했어도 시급을 받지 못한다.
월급날 통장을 확인해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적었다. 다음날 물어보니 식사시간 한 시간을 제하고 주는 거란다. 내가 29분을 일했다 해도 30분을 다 채우지 않고 퇴근하면 그만큼의 시급은 없다. 모두 노동법 위반이다. 그러나 알바 사이트에는 광고만 가득 있을 뿐, 관련 법규에 대한 안내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 수능 끝난 고3인 알바생들은 알바가 원래 이런 것이려니, 원래 돈은 그렇게 주는 것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며 일하고 있었다.
얼마 전 노동부에서 최저임금제 적용범위 완화를 추진했다는 소식과, 이영희 노동부 장관의 “최저임금이 우리 경제 수준에 비해 가파르게 올라 고용불안을 야기하고 있다”는 언급을 들었을 때, 언젠가 소설에서 읽었던 좀 적나라한 표현이 떠올랐다.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지.” 그러나 친애하는 노동부 장관께서는, 우리의 완전 소중한 기업들이 혹여나 최저임금의 굴레에 발목 잡힐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우리의 똑똑한 기업들은, 굳이 그렇게 법을 고쳐가며 돕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의 위대한 힘으로, 적정 임금을 알아서 조정하고 있다. 아,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이응소 | 인터넷 논객)
중앙일보(08. 12. 19) [노재현 시시각각] 바닥을 겁내지 말자
며칠 전 충북 제천의 청풍호(충주호) 부근을 다녀왔다. 짧지만 인상 깊은 여행이었다. 이 일대의 명물인 벚나무들은 아직 봄을 기다리며 은인자중하고 있었지만, 호수를 끼고 도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는 철을 타지 않았다. 호숫가 산마루에 자리 잡은 청풍문화재단지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충주댐 건설로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자 1983년부터 3년에 걸쳐 옛 가옥과 누각·향교, 생활물품, 고인돌·비석 따위를 옮겨 조성해 놓았다.
뜻밖에도 문화재단지 안의 고가(古家)가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문화재’라는 단어가 어색할 정도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거의가 어릴 때 살고 쓰던 집 구조요,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내 또래 이상의 연배라면 누구나 같은 느낌을 받았으리라. 쟁기·고무래·삼태기·다래끼·종다래끼·망태기·도롱이에서 오줌장군과 안방에 턱 놓인 사기 요강까지, 정겨웠다. 탈곡기와 씨아(목화씨를 빼내는 기구)도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었고, 누에를 치던 집이었는지 섶이랑 잠박도 전시돼 있었다.
고가의 부엌 아궁이에서는 지금도 매캐한 연기 내음이 나는 듯했다. 그랬다. 솔가지와 장작을 때다 어느 시점엔가 연탄 아궁이로 바뀌었다. 나는 지금 기름 때는 집에 산다. 고가의 도구들은 대부분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에서 나왔다. 공장 물건은 드물다. 그만큼 결핍의 시대, 내핍의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십대에 갓 들어선 나도 생활도구에 관한 한 문화재와 첨단을 두루 경험하지 않았는가. 압축성장의 사례는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 시대에 한국전쟁까지 겪은, 더 연세 드신 분들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돈을 찾으러 시골 단위농협에 들렀다. 자그마한 사무실 창구 옆에 알사탕이 소복이 놓여 있었다. 공짜 서비스용이다. 한 쪽엔 무료 커피 자판기도 있었다. 저 알사탕이 옛날엔 얼마나 선망받았던가. 세계적인 뇌영상 과학자인 조장희(72·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박사의 회고록이 떠올랐다. 그는 62년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 유학갔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엘리베이터와 커피 자판기, 인기척이 나면 자동으로 켜지는 복도등, 더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 모두 처음 대하는 것들이었다. 한국은 나무들이 땔감으로 잘려나가 대부분 민둥산인데, 스웨덴은 온통 빽빽한 숲 천지였다. 강의실마다 필기구를 비치해 학생들이 공짜로 쓸 수 있게 한 것도 놀라웠다. 조 박사가 스웨덴에 가는 데 든 항공료는 550달러였다. 그런 거금(?)을 들여 해외에 가기 때문에 국무총리의 출국 결재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당시의 한국은 가난했다.
많이 쓰이는 영어로 ‘Been there, done that’이라는 말이 있다. ‘I have been there, I have done that’을 줄인 표현이다. 말 그대로 ‘거기에 가 보았고, 해보았다’는 뜻이다. 현장을 충분히 목격한 데다 온몸으로 겪어도 보았다는 말이다. 한국의 기성세대야말로 ‘Been there, done that’ 세대다. 식민지에, 전쟁에, 산업화 시대 일중독에, 민주화 열망에, 게다가 10년 전 혹독한 외환위기까지 현장마다 가 있었고 빠지지 않고 체험한 세대다. 만만치 않은 내공이 몸에 배어 있다. 문화재급 유물에서 시작해 첨단 제품까지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젊은이들이 ‘88만원 세대’ 운운하며 상대적 빈곤과 취업난을 호소하지만, ‘가 보았고 해 본’ 기성세대가 겪은 적빈(赤貧)과는 비교가 안 된다. 기성세대가 예전에 경험한 바닥보다 더한 바닥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바닥도 두렵지 않다.
경제위기의 끝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쯤이 바닥일지 감 잡기도 힘들다. 그러나 바닥을 겁낼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다. 특히, 숱한 고난으로 단련된 기성세대가 이번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노재현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08. 12. 19.
P.S. 경험과 내공에 차이가 있고 그런 만큼 생각이 다른 두 세대가 어떻게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역지사지'하는 수밖에. 자기 주장을 맛깔나게, 그리고 당당하게 펼칠 줄 아는 이응소 학생이 아예 일간지 논설위원을 하고, 만만치 않은 내공에다가 안해본 일이 없어서 어떤 바닥도 두렵지 않다는 노재현 논설위원이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열정'을 갖고 접시를 닦으면 되겠다(이번에 사표를 내신 1급 공무원들께서도 솔선수범하여 같이 닦으셔도 좋겠다). 서로 한 달만 바꿔서 일한 다음에 다시 칼럼을 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