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서점에 몇 차례 들러본 탓인지 주말 북리뷰에 올라온 책들 가운데 낯선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실물을 만져보지 못한 책이 하나 있는데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대작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그린비, 2008)가 그것이다. 제목부터 사실 학위논문 타입인데, 실제로도 그런 것으로 안다(원저는 1969년에 나왔다). 마치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가 그렇듯이(이 책도 박사학위 부논문으로 제출되었던가 그렇다). 

저자인 마트롱은 평생을 스피노자만 파고 들어간 소위 '전문가'이다. 당연히 이 책 또한 '교양서'라기보다는 '전문서'로 분류되어야겠지만 '스피노자 붐'에 고무되어 서가에 꽂아놓을 수는 있겠다. 역시 최근에 나온 피에르 프랑수아 모로의 <스피노자>(다른세상, 2008) 같이 얇은 책으로 먼저 워밍업을 한 다음에 내처 몇 장 들춰볼 수도 있겠고(모로는 마트롱의 제자인 듯하다). 개인적으론 저자가 획기적인 스피노자 연구서를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런 학술서가 전격적으로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다(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라면 부럽기도 하고 좀 뜨끔한 일이기도 하겠다). 이런 기세라면 <신학 정치학 논고>도 조만간 번역돼 나올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82743.html).   

한겨레(08. 04. 19) '윤리학’ 스피노자에서 ‘정치학’ 스피노자로

‘스피노자 부흥’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지적 사건 가운데 하나다. 그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프랑스이고, 발생 시점은 1960년대 말이다. 1969년을 전후해 마르시알 게루의 <스피노자>, 질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그리고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거의 동시에 출간됐다. 스피노자가 헤겔-마르크스의 지위를 위협·대체하며, 인간·사회·정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철학적 준거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 사건을 일으킨 저작 중에서도 특히 마트롱의 저작은 철학 전문 연구자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은 긴 잠복기를 거쳐 1990년대 이후 대중적 파급 효과를 낳았다.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탄생을 알린 이 책이 스피노자 전공자들의 번역 작업을 통해 우리말로 나왔다.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1677·사진)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기 전까지는 ‘생계를 위해 안경알을 깎은 은둔의 현자’ 아니면 ‘범신론을 주창한 신비주의자’라는 이미지로 통용됐다. 종교에 대한 도전적 해석으로 일찍이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하고, 또 <신학-정치학 논고>가 17~18세기 정치적 지배세력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을 정도로 당대 현실과 깊이 연루돼 있었는데도, 그는 오랫동안, 탈속세적 은자로 묘사됐다. 그의 사상에 관한 연구도 주저인 <윤리학>(에티카)에 집중됐고, 정치철학 저술인 <신학-정치학 논고> <정치론>은 논외로 밀려나거나 <윤리학>과 무관한 부차적 저술로 간주됐다. 그러나 마트롱에 이르러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스피노자를 넘어 ‘정치학’의 스피노자로 재탄생했다. 특히 마트롱의 저서는 윤리학에서 정치론까지 스피노자 사상을 수미일관한 통일적 전체로 다시 세움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에 관한 한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현저한 특성은 ‘방법론적 엄밀성’이다. 스피노자 <윤리학>이 수학적 추론과 논증의 방식을 따르듯이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도 하나의 명제에서 이후의 명제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빈틈없는 논리적 방식으로 서술된다. <윤리학>에서부터 <정치론>까지 스피노자의 모든 텍스트가 그 내적 논리를 따라 배치되면서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져 논리의 건축물로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또다른 특성은 ‘정치 문제’야말로 스피노자의 진정한 철학적 문제였음을 입증한다는 데 있다. 옮긴이들은 말한다. “스피노자와 정치라는 문제는 이후 네그리나 발리바르에 의해 한층 급진적으로 제시되지만, 그럼에도 처음으로 정치의 문제를 스피노자의 ‘진정한 K제기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의의라 할 수 있다.”

번역본으로 900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저작의 첫 문장은 스피노자 <윤리학>의 유명한 명제로 시작한다. “각 사물은 자신의 존재역량에 따라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코나투스 테제’로 불리는 이 명제에 대해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정념론·정치학·도덕론 전체를 아우르는 단일한 출발점”이라고 단언한다. 스피노자 철학의 모든 것이 이 명제를 뿌리로 삼아 거대한 수목으로 자라오른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코나투스’(conatus)란 ‘어떤 개체 안에 존재하는 자기 보존의 무의식적 의지 또는 욕망’이라고 풀어쓸 수 있는 개념이다. 어떤 개체든,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이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다고 스피노자는 본다.

이 코나투스에서 ‘정념’의 문제가 뒤따른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념은 기쁨·슬픔, 사랑·미움과 같은 정서적 양태들을 가리킨다. 기쁨이란 “정신이 자기 코나투스와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외적 원인의 영향 하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느끼는 정념”이다. 반면에 슬픔이란 “정신이 자기 코나투스와 대립하는 외적 원인의 영향 하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느끼는 정념”이다. 풀어쓰면, 기쁨이란 자기보존 욕망이 실현돼 자기가 더 커질 때 느끼는 감정이며, 반대로 슬픔이란 자기보존 욕망이 방해받아 자기가 더 작아질 때 느끼는 감정이다. 또 사랑이란 기쁨의 정서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 집중이며, 반대로 미움은 슬픔의 정서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부정적 집중이다.

그런 정념적 존재로서 ‘개체’는 ‘개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공동체’도 하나의 집합적 개체를 이룬다. 그렇다면 그 집합적 개체로서 공동체 안에도 코나투스와 거기에 뒤따르는 기쁨·슬픔, 사랑·미움의 정념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기쁨과 사랑이 커진다면 그 공동체는 완전에 더 가까워진다. 마트롱은 바로 이 지점에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적 중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스피노자 철학은 ‘해로운 정념’을 줄이고 ‘유용한 정념’을 키울 정치체제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지를 논구하고 있다는 것이다.(고명섭기자)

08. 04. 18.

P.S. 마트롱이란 이름이 아주 낯설지는 않은데, 알고 보니 알튀세르 저작들을 주로 편집한 이가 프랑수와 마트롱이기 때문이다. 서로 인척 관계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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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8-04-19 01:51   좋아요 0 | URL
번역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우리말 제목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부사격 조사 “~에서”를 위와 같은 명사구에서처럼 쓰는 것은 오류입니다. 관형격 조사 “~에서의”로 고쳐야 합니다. 혹은 그냥 『스피노자 철학의 개인과 공동체』로 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예컨대, 〈번역에서 오독과 오역〉, 〈한국어에서 조사의 문법적 성격〉, 〈이명박 정부에서 대운하 건설 계획의 시대착오적 성격 고찰〉, 〈한국 대학원생들에서 우리말 문장 구사 실태 연구〉 따위의 논문 제목이나 책 제목이 있다고 칩시다. 모두 얼마나 어색하고 이상합니까? 관형격 조사를 쓸 자리에 부사격 조사 “~에서”를 잘못 갖다 붙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제목도 이런 사례와 똑같이 어색하고 잘못된 오류를 저지른 사례입니다. 요즘 한국의 대학원생들이나 젊은 교수들 사이에 “~에서 뭐뭐” 식의 제목 붙이가 성행하고 있는데요, 올바른 우리말 구사에 대한 개념을 결여한, 말 그대로 개념 없는 대학원생들이나 교수들의 오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qualia 2008-04-21 13:04   좋아요 0 | URL

juin 님, 토론 감사합니다.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답변드립니다.

① juin 님 : 기존의 용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의미를 혼동하게 할 위험이 크지 않다면 기존의 문법적 분류에 의해서 '완전하지 않은' 문장이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콸리아qualia 답변 : 저도 기본적으로는 juin 님의 위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경우에도 몇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첫째, 위와 같은 허용 사항을 둔다고 해도, 무엇보다도 먼저 문법적으로 올바른지 아닌지 따지는 분석 작업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말글 유형들을 현재 폭넓게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적법성 검토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그에 대한 최종적 허용 · 수용은 일종의 제도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언중의 일상적 · 탈문법적 · 시류적인 언어 사용이나 글쓰기에 대한 그와 같은 정리 작업 혹은 길잡이 작업이 없다면, 우리의 말글 생활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올 것입니다.

㉡ 둘째, 고급 교양서나 학술서나 논문 따위에서 ‘완전하지 않은’ 문장을 (그것이 언중에서 통용된다고 해서) 갖다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적어도 출판계의 편집자, 번역가, 저술가 분들은 가능하다면(!) 단 하나의 오류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고 주의해야 할 줄로 압니다.

㉢ 셋째, 제가 아래의 댓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부사격 조사 “~에서”를 관형격 조사처럼 사용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적법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사격 조사 “~에서”를 관형격 조사로 변칙 전용해도 된다는 법칙이나 규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말의 미묘한 어감(말느낌)에 비춰볼 때도 그런 오용은 매우 어색합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오류임이 분명한 것을 대중서도 아닌 학술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② juin 님 : 이 경우, '에서의'가 '에서'에 비해 더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주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 콸리아qualia 답변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말에서 조사는 의미의 미묘한 차이와 분화를 아주 다양하게, 따라서 아주 세밀하게, 따라서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기능을 합니다. 한 문장에서 똑같은 조사 하나 가지고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180도 다른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는 게 우리말입니다. 또 그 똑같은 조사를 문장 성분의 어디에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문장의 의미가 변화무쌍하게 바뀝니다. 바로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과도 상통하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에서”와 “~에서의”가 함축해줄 수 있는 의미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하나는 부사격, 다른 하나는 관형격이므로 기능도 다르고요. 기능이 다르면 당연히 함축하는 의미도 다르잖습니까? (이에 관한 내용은 너무나 평범하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구체적 용례는 생략하겠습니다).

③ juin 님 : '에서'로 멈춤으로써 겪는 미완의 느낌, 불안한 느낌은 적응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데, 혹자가 '에서의'에서 느낄 껄끄러움도 그에 못지 않게 강한 감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콸리아qualia 답변 : 비문법적이지만, 어감으로는 오히려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말글이 분명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문법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어감으로는 껄끄럽고 덜컹대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말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은 말글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에 말느낌 혹은 어감의 문제는 본질적이기보다는 이차적 · 부차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봅니다. (물론 어감의 문제가 이차적 · 부차적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따라서 ‘~에서의’가 껄끄러운 느낌을 준다고 해서 쓰지 못할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껄끄러움이나 어색함을 그다지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에서'로 멈춤으로써 겪는 미완의 느낌, 불안한 느낌은 적응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말씀하셨는데요,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같은 사용례는 분명 잘못이므로 적응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관형격 조사로서 그 적법한 역할을 적법한 위치에서 제대로 하는 “~에서의”나 “~의”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굳이 잘못된 조사를 일부러 사용해가면서까지 적응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qualia 2008-04-26 17:02   좋아요 0 | URL

juin 님, 재반론 감사합니다. 답변이 늦어 매우 죄송합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답변 드리겠습니다.

① juin 님 → 그러나 qualia님의 답변으로도 아직 회의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에서의'라는 형태가 확신하시는 것처럼 정말 문법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즉 '에 있어서(의)'와 대동소이한 유래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만약, 제 회의가 정당하다면, 문법적으로 바르지 않은 혹은 정통적이지 않은 '에서의'를 사용하는 것과 '에서'를 부사격에서 관형사격으로 확장적용하는 것, 두 대안이 생깁니다(이견이 없는 '(스피노자 철학)의' 를 제외할 때).

⇒ 콸리아qualia 답변 : 문법적으로 옳은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말은 “교착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즉,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또는 어간에 문법적인 기능을 가진 요소가 차례로 결합함으로써 문장 속에서의 문법적인 역할이나 관계의 차이를 나타내는 언어”라는 것이죠(네이버 사전 인용). 여기서 문법적 기능을 가진 요소란 바로 어미, 조사, 혹은 조사 상당 어구 따위를 가리킵니다.

우리말에서는 이 조사가 단독으로 쓰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조사 여러 개가 결합하여 하나의 복합 조사처럼 쓰일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3중, 4중, 5중, 혹은 그 이상의 결합 조사가 쓰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실제로는 대체로 3중 조사까지만 쓰이지만).

아시다시피 “~에서의”는 〈에서 + 의〉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말 문법에서 완전히 정당한 조어법입니다. 사전을 살펴보면, “~에서”는 장소 · 출발점 · 기준점 따위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나와 있고, “~의”는 소유 · 소속 · 귀속 · 인과 따위의 관계를 나타내는 관형격 조사로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에서의”는 두 개의 조사가 결합된 이중 조사인 것이죠.

사전을 보면 이와 같은 이중 조사가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예컨대, “~에서라야”, “~에서부터”, “~에서야말로”, “~에서처럼”, “~에서조차” 따위는 모두 두 개의 조사가 결합된 이중 조사들입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3중 조사도 흔히 쓰이는 것이 많죠. “한국에서조차도”, “한국에서부터도”, “한국에서까지도”와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사들끼리 서로 결합해서 아주 다양한 의미의 분화를 산출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미묘한 의미 생성 능력 혹은 기능이 우리말 조사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말의 뛰어난 장점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우리말 조사의 기능 · 속성을 놓고 볼 때, “~에서의”의 기원은 바로 우리말 조사 자체의 조어 능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사들끼리 자유롭게 결합해 세밀한 의미의 차이를 생성하는 원초적인 능력 말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할 논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 있어서”는 우리말 기원 자체가 없습니다. 이수열 선생님께서는 “~에 있어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일본어 ‘~いお(於)て’를 직역한 것으로 우리말에는 전혀 필요없는 기형인데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굳이 써서 공연히 시간과 공간, 노력을 낭비하고 우리말의 위상을 훼손한다. [이수열 (1999).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 현암사. 325쪽.]

예문을 들어서 설명해보죠. 〈번역에 있어서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를 봅시다. 〈번역에 있어서(는)〉 부분을 억지로라도 분석한다면 다음처럼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즉, “번역을 하는 상황에 있을 때는” → (축약해서) → “번역에 있어서는”으로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억지 분석이죠. “번역에 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말이 되지 않으므로 분석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우리말에서 그 기원을 처음부터 아예 찾을 수 없는, 일본말투를 흉내낸 기형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런 우리말답게 〈번역에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얼마나 깔끔한가요. 혹은 〈번역을 할 때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므로 “~에서의”와 “에 있어서”를 같은 범주로 다룰 수는 없는 것이죠. 하나는 완전한 우리말이고, 하나는 본디 우리말법에는 없는 일본식 말투를 무분별하게 흉내낸 기형어이니까요. 이것으로써 어느 정도 충분한 답변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② juin 님 → 그리고 오해를 무릅쓰고 약간 군말을 달아야 될 것 같습니다. '에 있어서(의)'나 '에서'의 확장에 대한 qualia님의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보여서요. 예컨대 아래 로쟈님에 대한 답글에서 '직역 개념 아래에서'라고 쓰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뭐뭐 '아래에서' 혹은 뭐뭐 '위에서'라는 표현도 '에 있어서'만큼이나 정체가 모호한 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면서 저도 불가피하게 쓰곤 합니다만). '아래에서' '위에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신지요?

⇒ 콸리아qualia 답변 : “~아래에서”라는 말은 그 정체가 결코 모호한 말이 아닙니다. 아주 흔히 쓰는 말이고, 우리말법에도 전혀 어긋날 것이 없는 완전한 우리말 관용어입니다. 주인(juin) 님의 위와 같은 오해는 명사 “아래”의 표면적 의미만을 생각하시고 그 비유적 · 은유적 ·상징적 의미 따위를 고려하지 않은 까닭인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아래”는 본래의 공간적 · 수량적 의미말고도 (예컨대 “한 지붕 아래에서”, “서른 살 아래” 따위) 상황 · 조건 · 환경이라는 의미로 쓰일 수도 있는 낱말입니다. 예컨대, 〈한국과 같은 지적 풍토 아래에서 비판 행위는 자살 행위와 마찬가지다〉, 〈엄하신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왔다〉 따위가 그런 사례이죠.

따라서 “직역 개념 아래에서”라는 표현은 전혀 모호한 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말법에도 전혀 어긋나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으로써 제 답변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토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qualia 2008-04-19 05:20   좋아요 0 | URL

번역서 제목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 부사격 조사 “~에서”의 적용이 왜 잘못인지 간단하게 제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① 본디 “~에서”는 주로 장소, 영역, 분야, 출발점, 기준점 따위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쓰거나, 주어 구실을 하는 단체명에 붙여 주격 조사로도 쓰는 형태소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이명박이라는 인간에서 위선, 기만, 비양심의 극치를 발견한다〉거나, 〈경제개혁연대와 참여연대에서 삼성 특검의 기만적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와 같은 예가 그렇습니다.

이때, 부사격 조사 “~에서”가 붙은 부사어는 서술어와 호응하여 하나의 완전한 문장(즉 구가 아닌 절)을 구성해야 자연스럽습니다. 이와 달리,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같이 서술어가 없는 명사구에서처럼 쓰게 되면, 문장이 완결되지 않아 불완전한 표현이 되고 맙니다. 코도 풀다가 중간에 그만둔 것처럼, 느낌이 영 개운치 않은 불완전한 구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개인과 공동체” 혹은 그냥 “스피노자 철학의 개인과 공동체”와 같은 완전한 명사구로 표현해야 올바를 것입니다.

② 이수열 선생님께서는 저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1999, 현암사, 182-200쪽 참조)에서 “~에서의”, “~에로의”, “~로부터의”, “~에의”, “~으로서의” 따위와 같은 이중 삼중 조사가 일본어 직역투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올바른 우리말을 좀먹는 오류라고 비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말본에는 맞지 않으므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수열 선생님의 기본적인 비판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합니다만, 위와 같은 이중 삼중의 조사들이 순전히 일본어 (번역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말의 매우 뛰어난 특징이자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사들이 지닌 유연하고 무궁무진한 활용성과 결합성과 적응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말에서 조사는 문장의 어떤 성분, 어떤 품사, 어떤 형태에라도 자유롭게 가서 붙어, 다양하게 기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미묘하고 변화무쌍한 의미의 분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즉 위와 같은 이중 삼중의 조사들은 원초적으로 한국어가 지니고 있는(있었던) 무궁무진한 활용성, 결합성, 적응성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위와 같은 이중 삼중의 조사들을 일본어 번역투라 규정하고 우리말에서 모조리 제거한다면, 그것은 가장 우리말다운 우리말의 장점이자 특징을 거세해버리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수열 선생님께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에서 주장하신 다른 내용들은 대부분 타당하다고 봅니다. 몇몇 가지 논란점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저는 우리말 바로 쓰기에 힘쓰시는 이수열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따라서 위 번역서의 제목을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개인과 공동체”로 고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③ 이미 다 드러난 사실이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라는 제목에서 “철학에서”는 부사어입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이 부사어에 호응하는 단어는 제목 안에 없습니다. 즉 부사어는 관형어나 서술어를 수식하는 성분인데, 제목 안에 그와 호응하는 관형어나 서술어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위 제목은 완결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구문에 머문, 불완전한 표현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부사어 “철학에서”는 “개인과 공동체”라는 명사구를 꾸며주는 관형어 “철학에서의”나 “철학의”로 고쳐야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완전한 명사구의 제목이 됩니다.

④ 이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오류들이 너무나 많이 난무하기에 뻔한 내용을 중언부언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영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치거나 배울 때 문법적으로 얼마나 자잘하게 따집니까? 그런 자잘한 사항들 가지고 토익이니 토플이니 하는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따려고 그렇게들 맹렬히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말은 그냥 슬슬 대충 넘어간다? 바로 이런 태도들이 개념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로쟈 2008-04-20 10:02   좋아요 0 | URL
"우리말의 매우 뛰어난 특징이자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사들이 지닌 유연하고 무궁무진한 활용성과 결합성과 적응성"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에서'를 '-에서의'로 대체하는 게 어감상 더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둘다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기본적으론 chez/in Spinoza 같은 표현을 번역하려다 보니 만들어진 것이고, 말씀대로 '스피노자의 개인과 공동체' 같은 우리말로는 가장 자연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척도가 되어야 한다면...

qualia 2008-04-21 13:25   좋아요 0 | URL
제가 위에서 juin 님께 답변드렸듯이, 로쟈 님의 어감 문제에 관한 언급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답변드릴 수 있습니다. 즉 문제의 핵심은 문법적인 옳고 그름이라는 것입니다. 어감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고요.

(직역 개념 아래에서) “chez/in Spinoza”와 같은 원문에 너무 얽매여 우리말 문법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저도 “스피노자 철학의 개인과 공동체”로 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승주나무 2008-04-19 16:13   좋아요 0 | URL
한때는 세상에 철학자가 스피노자만 존재하는 것처럼 빠져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다소 정적인 나의 인식은 경험론보다는 대륙의 합리론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들뢰즈의 <표현의 문제>는 사실 소화하기 너무 어렵더군요. 로쟈 님이 올리신 글을 보니 <표현의 문제>에 못지 않은 심도 있는 책이 것 같은데~
찜했다가 스피노자를 떠올릴 때 다시 꺼내 읽어야겠습니다.
좋은 안내글 잘 봤습니다^^

로쟈 2008-04-20 10:05   좋아요 0 | URL
국내 '스피노자 붐'은 좀 과장된 면이 있는데, 전공자들이 불만스러워하는 <에티카> 번역만이 하나 있었을 뿐이니까요. 학계 최고수준의 고급 학술서들이 '교양서'처럼 번역되고 읽히는 건(누가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좀 특이한 현상입니다. 다른 분야와의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말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4-19 23:50   좋아요 0 | URL
이오덕 선생도 에서의,에 있어서의...이런 표현 되게 싫어하더라구요.음...어떻게 해야 하나...
저는 스피노자에 대해 잘 몰랐는데 요즘 스피노자 르네상스로군요.음...

로쟈 2008-04-20 10:07   좋아요 0 | URL
번역투이긴 한데, 말이란 게 유기체 같은 것이서 일률적으로 '단죄'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입니다. 어법에 맞지 않는 인터넷 언어들도 그렇구요...

qualia 2008-04-21 14:15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 님, 좋은 사례를 지적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에 있어서” 혹은 “~에 있어서의” 하는 투는 전형적인 일본어 직역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용례에 관해서는 이수열 선생님께서도 일본어 직역투라고 강하게 비판하셨죠.

저는 글을 읽다가 이런 표현과 마주치면 읽는 글 전체가 보통 천박 · 조잡해 보이는 게 아닙니다. 친일파 계통의 닳고 닳은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이 걸핏하면 “~에, 또” 하는 어투와 함께 즐겨쓰던/쓰는 일본어식 말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에 있어서” 혹은 “~에 있어서의”, “~에 있어서는” 하는 투는 우리말 문법으로는 제대로 분석할 수 없는 기형이라고 봅니다. 이 말투들은 아예 우리말 기원부터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뭐가 있기는 있다는 것인지 툭하면 갖다 붙이는 “~에 있어서”라는 이상한 말투, 정말 읽기도 듣기도 싫더군요.

예컨대, 〈번역에 있어서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는 사례를 봅시다. 이것은 그냥 〈번역에서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 혹은 〈번역을 할 때는 외국어 실력보다 우리말 실력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면 아주 우리말답게 되죠. 번역에 있어서는??? 이런 기형적 표현이 전혀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죠. 이제 이런 따위 일제의 찌꺼기 같은 말들은 우리말글에서 모두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22 00:20   좋아요 0 | URL
이오덕 책은 구수한데 이수열 책은 학습 참고서 같았어요.여하튼 우리글 우리말 공부할 땐 필독서죠.물론 다 받아들이진 않죠.
예전 박영문고에 에티카 번역본이 있던 기억이 나네요.요즘은 절판...싸고 좋았는데...책세상 것은 문고판 치곤 좀 비싸고요.

로쟈 2008-04-22 19:43   좋아요 0 | URL
<에티카>도 추천 번역본이 없는 고전 중의 하나죠...

누굴까 2008-04-22 12:30   좋아요 0 | URL
서광사에서 나온 에티카 개정판은 개정판이 아니라 오자,탈자 정도만 수정한 거라는 댓글이 달려있던데 .... 로자님.. 번역이 믿을만 한 것인지 조언 부탁드려도 될까요 ?

로쟈 2008-04-22 19:44   좋아요 0 | URL
개정판은 제가 안 갖고 있습니다. 번역에 대한 건 스피노자 전문가들에게 문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