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이학사, 2007)에 대한 서평을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072). 서평에 관한 글을 쓸 일이 있어서 서평들을 간간이 둘러보는데, 읽다 보니 재미있기에 스크랩해놓는 것이다. 책은 예전에 소개하고(http://blog.aladin.co.kr/mramor/1584851) '이달의 읽을 만한 책' 목록에도 올려놓았었지만 개인적으론 극히 일부분밖에 읽지 못했다(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견물생심'이라고 서평 덕분에 또 읽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되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해 일단은 참아두기로 한다...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질 들뢰즈의 수업 시기
하나의 텍스트가 국경을 넘어 올 때 변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아마 우리의 경우에는 저자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번역도 한 몫 할 것이다). 변하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제목일 텐데, 그것을 원서의 제목과 비교해 번역본 앞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략 ‘생각 없는 제목’과 ‘생각 있는 제목’으로 나눌 수 있다면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는 ‘생각 있는 제목’에 속한다.
번역본의 프랑스어 텍스트는 들뢰즈 사후, 들뢰즈가 생전에 이런 저런 지면들을 통해 발표했지만 하나의 단일한 텍스트로 묶여 출판되지는 않았던 글들이 라퓨야드(David Lapoujade)의 편집을 통해 두 권의 텍스트(L’i^le deserte et autres textes :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Paris : Editions de Minuit, 2002, Deux re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Paris : Editions de Minuit, 2003)로 출판된 것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이 두 텍스트에서 12편의 소논문과 철학저널에 발표되었다가 나중에 단행본에 실린 것들 가운데 7편의 소논문을 번역하여 싣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후에 묶여 나오는 텍스트들의 특징인 발표 시기에 따르는 연대기적 배열과는 상관없이 철학자들에 대한 소논문들이 플라톤부터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철학사의 재구성
이렇게 사후에, 생전에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글들이 독립된 텍스트로 묶여 나오는 것은 들뢰즈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어서 이미 푸코의 경우도 Dits et ecrits(Gallimard)로 그의 이런 저런 짧은 글들이 사후에 묶여 나왔으며 그렇게 실린 글들은 우리에게 푸코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더 없이 소중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들뢰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렇게 두 권의 텍스트가 ‘철학사’에 초점을 맞춘 제목과 플라톤에서 푸코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배치된 내용을 가진 하나의 텍스트로 출판된 사연은 역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들뢰즈 철학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이 지니는 난해함 때문에 수용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난해함을 체계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역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그의 철학적 연대기를 구분하여(1953년 『경험주의와 주관성』에서부터 1968년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까지의 첫 번째 단계, 1968년 『차이와 반복』과 1969년의 『의미의 논리』의 두 번째 단계, 마지막으로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리는 1972년의 『앙티 오이디푸스』이후의 세 번째 단계) 초기의 철학사 연구를 중심으로 들뢰즈 철학의 굵은 줄기를 잡은 다음에 중기의 수렴과 후기의 발산을 따라 들뢰즈의 사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자의 생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중추에 해당하는 제3장「사유의 이미지」에서 보여준 작업은 서양고전철학에 있어서 사유의 임의적인 전제들을 추출하여 고전적 사유의 임의성을 보여주고 이에 대해 필연적인 사유의 형식을 마주침의 사유로 설립하는 작업이었으며 이러한 임의적인 전제를 추출하는 방식은 동일하게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의 임의적인 전제(오이디푸스)를 추출하는 작업과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임의적 전제’의 시굴작업은 그의 니체 연구시기에 이미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완료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초기의 철학사 연구를 통해 들뢰즈의 중기로 수렴해 들어갈 수 있으면서 또한 후기의 발산들을 따라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들뢰즈 철학의 가장 좋은 입구는 『니체와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들뢰즈에 도달하는 간략한 지도
그렇다면 들뢰즈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초기의 철학사 연구의 효용성은 지적된 셈인데, 과연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실린 철학자들에 대한 소논문들과 들뢰즈의 초기의 철학사 연구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질 들뢰즈의 수업 시기’의 결과물들은 이미 우리에게 『베르그손주의』, 『니체와 철학』, 『칸트의 비판철학』,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등과 같은 개별적인 연구서로 출간이 되어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서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연구대상인 철학자의 생각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유하는 들뢰즈의 사유 스타일(스피노자와 니체 그리고 베르그손 연구자들에게서 들려오는 끝없는 비난들-그것은 스피노자의, 니체의, 베르그손의 것이 아니다!)과 그 스타일을 통해 전개되는 들뢰즈 사유의 만만치 않은 두께에 고전을 면치 못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실린 짧은 소논문들은 문제의식과 그 전개에 있어서 큰 차이 없이 개별적인 연구서를 요약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초기의 철학사 연구 시기가 들뢰즈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면 이 소논문들은 우리를 들뢰즈에게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하는 간략한 지도와도 같다.
예를 들어, 이 텍스트에 실린 「베르그손, 1859~1941)」은 그간 들뢰즈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소논문이다. 그러나 “지속duree”, “기억memoire”, “생의 약동elan vital”, “직관intuition” 과 같은 베르그손 고유의 개념으로 베르그손의 철학을 정리할 때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다가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차이와 반복』의 구조를 앞서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짧은 소논문은 사후적으로 우리가『차이와 반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물론 『차이와 반복』으로 들어가는 소논문은 이 뿐만이 아니다. 「드라마화의 방법」은 『차이와 반복』의 다른 방식의 요약이기도 하다).
철학사 해설을 위한 최대치의 변화
따라서 들뢰즈의 저서가 거의 대부분 번역되어 있으면서도 수용에 있어서의 어려움이 여전히 크다는 것이 현재 우리의 상황이라면, 한국어로 번역·재구성함에 있어서 이렇게 배치하는 것은 우리를 기대에 들뜨게 하는 초청장일 듯하다.
하지만 나는 역자의 친절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려움은 남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논문들을 통한 접근이 주는 효용은 읽어야할 텍스트의 페이지수가 줄어드는 정도의 효용에 불과할 뿐, 들뢰즈의 사유 그 자체를 따라가기 위한 어려움은 그리 크게 감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그손, 1859~1941)」을 읽으면서 우리는 당연히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이나 『물질과 기억』과 같은 베르그손의 저작을 꺼내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베르그손 본인의 생각이 정말 그러했던가? 라는 어리둥절함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그의 가장 난해한 저서에서”와 같은 들뢰즈의 표현을 보면 울화가 치밀 수도 있다(“이봐 들뢰즈! 당신이 더 어려워!”).
그러나 들뢰즈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지만 『차이와 반복』같은 대작 앞에서 시간적으로 망설여진다면, 우선적으로 「드라마화의 방법」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글 번역의 페이지수를 계산하면 『차이와 반복』은 708페이지이만 「드라마화의 방법」은 23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런 식의 배치는 단지 난점들에 대한 효과적인 공략법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역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서문에서 니체적 영감에 힘입어 말하고 있는 콜라쥬(collage)의 문제이기도 하다. 니체 이후로 현대 철학이 처한 어떤 비가역적 상황 가운데 하나는 바로 철학 책 쓰기의 문제이다.
철학사는 이미 고정된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철학 자체의 재생산이다.” 따라서 “철학사에서 해설은 [해설되는 철학의] 진정한 분신으로 기능해야 할 것이며, 이 분신에 적절한 최대치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을 들뢰즈는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철학자들에 대한 비역질을 통해 괴물을 낳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에서 푸코에 이르는 들뢰즈의 소논문들의 연대기적 배열은 들뢰즈에 의해 변용된 하나의 사유의 계보 또는 괴물의 계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유일무이한 철학사를 만나게 된다. 역자가 붙인 제목처럼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마지막으로 책의 표지에 대해서 한 점의 불만을 토로해보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에 등장하는 철학자들 가운데 일부의 초상화를 이 책은 표지에 배열했는데. 과연 그 철학자들에 대한 들뢰즈의 글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을까? ‘최대치의 변화’를 겪은 얼굴인데도?(정재화│철학 박사과정)
08. 0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