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국의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이란 글을 창비주간논평에 실으며, 현 번역문화와 번역의 컨텍스트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739728). 아는 바대로, 우리 출판/독서 문화에서 번역서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하면 현재의 번역문화는 아직 척박한 수준이다. 번역과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열악하고, 때문에 양산되는 번역서의 질 또한 기대에 못 미칠 때가 많다(저작권이 있는 책의 경우 번역서가 나오는 게 더 고역일 때도 있다. 한국어로는 제대로 읽을 수가 없게 돼 버리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널리 확산되는 게 일단은 개선의 첫발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침 관련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로쟈란 이름도 언급돼 있어서 모른 체할 수도 없고).
한국일보(07. 12. 14) "번역물 옥석 가리자" 번역비평 '회초리' 들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하는 <2006년도 출판통계>에 따르면 작년에 나온 신간 중 23%가 번역서다. 그 비율이 7% 수준인 미국과 비교할 것도 없이 한국은 번역서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이런 현실에 발맞춰 번역물의 옥석을 가리는 번역비평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특히 학계를 중심으로 기존 번역서의 수준을 평가하는 보고서가 잇따르고, 번역비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지가 발간되는 등 번역비평의 체계를 갖추는 작업이 한창이다.
■ 번역비평의 체계화
한국번역비평학회(학회장 황현산 고려대 교수)는 지난달 연간 학회지 <번역비평> 창간호를 냈다. 첫 번역비평 전문지다. 황현산 교수는 창간사에서 “이 학회지를 통해 깊이 있는 번역론을 개발하고 번역 평가의 방법과 기준을 모색하는 한편 번역 현장의 체험에 귀 기울이고 그 결실을 비평할 것이며, 번역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과 처방들을 위해서도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썼다.
이 잡지는 ‘번역비평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의 특집과 함께 <한국 현대시의 러시아어 번역의 문제> <도스토옙스키 한국어 번역의 문제점> 등의 평론을 실은 ‘번역비평’, 서구 번역이론을 소개하는 ‘번역이론 연구와 소개’, ‘신간 번역서평’ 코너 등으로 구성됐다. 번역가이자 출판평론가 표정훈씨, <번역은 반역인가>의 저자 박상익 교수 등이 기고한 번역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코너도 마련했다.
영미문학연구회(학회장 김명환 서울대 교수)는 영미 고전문학 71개 작품의 국내 번역서들을 비교 평가하고 재작년과 올해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발행ㆍ전2권)란 보고서를 발간했다. 번역서의 41%가 표절본이고,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8%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 결과는 국내 번역 수준의 척박함을 보여주는 통계로 자주 인용된다. 이 학회는 96년 창간한 반년간지 <안과밖>에서 영미문학 번역 실태를 점검하는 고정란을 꾸려오고 있다.
교수신문은 2005년부터 2년간 동서양 대표 고전 번역본에 대한 분석글을 연재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발행ㆍ전2권)로 묶었다. 일부 소장학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수준 있는 번역비평에 나서기도 한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balmas’라는 필명으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저작 번역본을 집중 검토하는 진태원씨, ‘로쟈’가 필명인 러시아문학 전문가 이현우씨가 대표적이다.
■ 새로운 비평기준 모색
번역비평이 단순한 오역 지적을 넘어 진일보한 평가 잣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논의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특히 번역의 기본 원칙으로 여겨져온, 원전의 자구(字句)를 충실히 옮겨야 한다는 ‘충실성’과 번역하는 언어권의 독자가 읽기 편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독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불어권 문학 번역가인 정혜용 서울대 교수는 <번역비평>에 기고한 ‘번역문학 비평을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 “번역비평이라면 당연히 번역가의 번역관, 번역물의 번역 논리를 그 핵심에 둬야 한다”며 “그것이 충실성과 가독성 규범으로 포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두 잣대는 궁극적으로 폐기돼야할 비평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밋밋한 직역 대신 생생한 의역을 택했던 번역 경험을 소개하면서 “번역자는 특정 표현의 작품 내 기능에 대한 분석과 그 단어가 상징하는 작가의 언어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충실성 규범을 저버릴 수 있다”고 썼다.
영미문학 번역가 왕은철 전북대 교수는 <안과밖> 2007년 하반기호에서 “번역가는 원문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기계적으로 바꾸는 ‘하인’이 아니라 비판적 안목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하고 창작하는 자”로 규정했다. 왕 교수는 “비평가가 번역가의 기준과 원칙을 고려하지 않으면 공정한 비평은커녕 번역가를 ‘혼내는’ 형태의 비평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면서 영미문학연구회의 고전 번역 평가의 문제점을 에둘러 지적했다.
■ 현장 번역가 ‘볼멘 소리’도
학계 중심의 번역비평 본격화에 현장 번역가들은 “열악한 번역 현장을 도외시한 채 일방적 평가 잣대를 들이대면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표정훈씨는 <번역비평>에 실은 글에서 부실한 번역을 양산하는 환경을 조목조목 짚었다. 전업 번역가로 생계를 꾸리기 힘들 만큼 번역료가 박하고, 대학 도서관의 외부인 통제로 참고 자료 이용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적이다. 아울러 그는 번역서의 질적 수준을 평가할 서평 시스템의 부재, 분야별 번역 작업의 기반이 될 기초 고전의 번역 미비, 번역을 경시하는 연구자 평가 정책을 비판했다. 일본문학 번역가 김남주씨는 “번역가의 언어 선별은 병아리 감별사의 작업을 닮았다”며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직관에서 좋은 번역이 나온다는 입장을 표했다.
이현우씨는 이달 인터넷 ‘주간창비논평’에 기고한 글에서 장기적 안목의 번역 문화 개선을 주문했다. 이씨는 한국고전번역원, 한국키케로학회 등이 40~50년을 잡고 번역 작업을 진행 중임을 상기시키면서 “대학원생에게 번역 과제로 제출받은 원고를 짜깁기해 교수 이름으로 출판하는 관행부터 타파하는 등 번역 텍스트를 둘러싼 현실적 조건, 즉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해야 한다”고 썼다.(이훈성기자)
07.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