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 북섹션에 알라딘 특집기사('독후감 쓰는 사람들')가 실렸고(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8) 지난주 월요일에 가졌던 인터뷰 기사도 함께 게재되었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4). 기사는 어제 아침에 읽었지만 온라인에는 주말께나 올라올 걸로 예상했는데, 웬걸, 이미 올라와 있고 시비돌이님이 옮겨놓으시기까지 했다. 쑥쓰러운 일이지만 부랴부랴 나도 옮겨놓고 몇 가지 '해명성' 발언을 덧붙인다. 기억에 인터뷰 요청은 그 전 주말쯤에 받았고 월요일에 바로 시간약속을 잡았었다. 기사는 두 시간 남짓 이루어진 인터뷰에 근거한 것인데 약간 와전된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건 구어로 이루어진 인터뷰의 '번역'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겠다. 게다가 실제 지면에 실린 것과 온라인 기사는 약간 차이가 있다(여기서는 지면기사에 준하도록 하겠다). 사진은 가급적 찍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죽어도 못찍겠다고 고집을 부리진 않은 까닭에 멋쩍은 흔적을 남기게 됐다...
시사인(07. 11. 12) "각종 1위 기록 영광 아니다"
‘알라딘 좀 그만해.’ 초등학교 1학년인 딸 아이가 자신의 등에 그런 메모를 써서 붙여놨더란다. 하루 평균 한두 시간 서재를 관리하는데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한다.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인 이현우씨는 필명 ‘로쟈’로 더 유명하다. ‘알라디너’라면 모두 그를 안다고 했지만 그의 명성은 이미 알라딘 공간을 훌쩍 넘어섰다. 최근 시사 잡지에 인터넷 서평꾼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출판사에서도 책을 내자고 찾아와 공을 들이고 있다.
알라딘 서재가 아닌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대학교에 마련된 그의 공간에는, 책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수납이 난감한 수준으로 책이 많아서이다(*모두 민폐이다). 집에는 약 8000권의 장서가 있고, 대학 공동 연구실 서가에 책을 꽂아놓았는데 그마저도 더 이상 여유 공간이 없다.(*8,000권의 장서라고 했지만 어림짐작일 뿐이고 정확한 건 아니다. 그 중 3000권 가량은 박스보관도서이니 장서로서는 유명무실하다.)
얼핏 보기에도 전공과 무관한 책이 태반이다(*얼핏 보아서 그런 것이고 연구실에 있는 책들의 상당수는 사실 전공 관련서이다). 며칠 전에는 정가 13만원짜리 <백낙청 회화록>이 도착했는데 누가 보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더란다(*이 책을 받은 날 인터뷰를 해서 잠시 화제에 올린 것이다. 며칠 뒤에 알고보니 지인이 선물로 보낸 것이다. 물론 그 인연의 시작은 이 서재였으니 알라딘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처럼 얼굴을 모르는 기부자가 꽤 된다(*'아주 드물게'라고 강조했건만, 기자는 '꽤 된다'고 옮겼다).
알라딘에는 자신의 적립금으로 고마운 이에게 책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데 가끔 로쟈의 글을 보고 좋았다는 이들이 책을 보내오는 것이다(*'땡스투' 시스템과 독지가들의 '기부'사례가 혼합/혼동돼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땡스투'로 '블로그 수익'을 얻기도 하는데 수익이라고 하기엔 곤란한 수준이라는 것과 일부 독지가나 출판사가 책을 보내주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다, 는 정도가 내가 한 말이다). 그의 평판을 듣고 책을 보내는 출판사도 생겼다. 어느 출판사는 ‘책을 보낼 테니 포털 등에 책 리뷰를 노출해달라’고 했다. 물론 거절했다. “뭐, 책이 좋으면 쓰고 아니면 마는 것이지 보내기도 전에 뭘 써달라고 하다니, 참 영업 마인드 없더라고요”라며 그는 웃었다.(*사실 나는 서평단모집에 신청해서 받은 몇 권의 서평도서들에 대해서 한편의 리뷰도 쓰지 않았다. 처음 두어 권은 실망해서였는데, 나중엔 그냥 '떼먹고' 이후엔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이건 '오프더레코드'다.)
그러니 책값의 대부분은 자기 수입에서 충당한다. 인기 없는 학과의 시간 강사인 그는 요즘도 한 달 평균 50만원, 많을 때는 100만원어치쯤 책을 구매한다(*오해를 살 수도 있는데, 나는 '인기 없는 학과'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인문학 동네의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다 보니 그런 인상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아내는 ‘책과 결혼하지 그랬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 일쑤이고, 참다 못해 인터넷 서비스를 끊어버리기도 했다(*몇 차례 쫓겨날 뻔도 했는데, 이러한 가정분란의 상당한 책임은 알라딘에 있다).
그는 어떤 책을 읽을까? 본인 표현에 따르면 ‘어린이 처세 만화 실용서를 제외한’ 책들이다. 인문학 지형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책이 그의 그물망에 걸리는 셈이다(*이런 그물이야 누구나 칠 수 있다. 당신도 매일 30분 이상씩 도서검색을 해보면 된다). 책 소개뿐 아니라 저자에 대한 단상, 문체에 대한 단상, 그리고 인문학 논쟁까지 망라하는 그의 서재는, 말 그대로 ‘인문학 살롱’으로 불릴 만하다(*얼핏 보면 그렇다).
하루 방문자는 500여 명(*최근 추세로는 600명 안팎이다). ‘로쟈의 저공비행’을 즐겨 찾는 서재로 등록해놓은 이는 줄잡아 1500명쯤 된다(*반올림해서 그렇다. 오늘 날짜로 치면 1385명이다). 그는 “어떨 때는 꽤 오래 각종 순위 집계에서 1위를 하곤 하는데, 결코 영광이 아니다. 나 혼자 이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라고 말했다. 자조는 아니다. 다만 ‘부담을 나누어 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각종 순위집계에서 1위'라는 건 와전된 것이고, 내가 말한 건 '페이퍼의 달인' 같은 데서 1위를 하면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좌절감 혹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즐찾수에 있어서는 1,2위를 다툴지 모른다고 덧붙이긴 했다. 알라딘이 낳은 '최고 스타' 가운데 한명이라지 않은가).
얼굴 모르는 이들이 책 보내오기도
그의 글은 부드럽지만(*아내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른바 주례사 리뷰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는 철학 서적이나 미학 책을 재미나게 읽는 편이다. 특히 남들이 어렵다는 슬라예보(*슬라보예) 지젝은, 왜 그의 글이 어렵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한다(*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한 건 아니고 다만 안타깝게는 생각한다). 그에 얽힌 일화도 있다. 지젝이 유행이 되다시피하자 번역자가(*'번역서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터무니없는 오역이 눈에 띄더란다. 몇 번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올리고 나자, 어느 순간부터 지젝에 관련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아시다시피 내가 즐겨쓰는 서재 이미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슬라예보(*슬라보예) 지젝은 그가 특히 사랑하는 미학자(*철학자)이다(*지젝은 아직도 대중적인 철학자는 아닌 듯하다. 사랑하는?). 그는 “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그 유령은 이미 지난 2003년 가을에 우리 곁을 다녀가기도 했는바 어느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로 시작되는 리뷰를 쓰기도 했다.
인문학 책을 많이 섭렵하는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번역의 질이다(*나는 알라디너로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게 주로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와 번역비평 때문일 거라고 했다). “막말로 소설은 빨간 꽃을 파란 꽃으로 번역하면 조금 이상할 뿐 전체 얼개를 흐트러뜨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문서는 개념이나 용어를 부정확하게 번역해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먹을 수 없게 된다.”(*'빨간꽃/파란꽃'도 '번역'된 것이다. 취지야 같지만 내가 보통 쓰는 비유는 '파란눈/까만눈'이다.) 인문학 번역의 경우 인세 계약을 하면 권당 200만원이 고작인데, 번역에 들여야 하는 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라는 것. 번역에 대한 처우가 워낙 열악하다 보니 질 낮은 번역이 판치고, 그러다보니 독자의 저변을 넓히지 못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재가 널리 알려지면서 공유의 기쁨만큼이나 제약도 늘었다. 학계의 선배나 과거 지도 교수가 그의 서재를 알고 들어오기도 하는데(*'지도교수'는 아니고 예전에 강의를 들은 '교수님들'을 가리킨다), 막상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전공 분야의 책에 대해 까칠한 얘기를 쓰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명세라면 유명세이다.(노순동기자)
07. 11. 14.
P.S. 인터뷰와 함께 실린 박스인용도 지면기사와 온라인기사는 차이가 있다. 지면에서는 더 간결하게 처리됐는데, 분량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는 지면기사에 준해서 옮겨놓는다(요약은 마음에 든다). 대표적인 글을 자천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추천수가 많았던 글들을 떠올려봤는데, 오역에 대한 비판이나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 이외에 가장 많은 추천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래의 글이었다. 본문에서 '재작년 6월'은 2004년 6월을 가리킨다. 문득 그 계절의 모스크바가 생각나는군...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 대하여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로쟈의 글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김규항·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이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바꿔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중략).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최근 <남한산성>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평했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 장수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중략).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중략).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전라도 사람으로서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 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원 글은 이 분량의 열 배가 넘는다. 그의 문체를 희생할 수 없어 군데군데 덜어내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반드시 원문 전체를 보기를 권한다. 원제: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 출전: 로쟈의 저공비행 http://blog.aladin.co.kr/mramor/84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