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동문선,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585). 요즘은 출판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이재원씨의 리뷰이다(낮에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글쓰기의 영도>에 대해서는 '바르트-글쓰기의 영도-진중권'이란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1501205)에서 출간 소식을 전한 바 있는데, 나로선 쌓아두기만 한 책을 이렇듯 미리 읽고 리뷰를 쓰는 이도 세상엔 있는 것이다! 언론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책인지라 아마도 가장 자세한 리뷰가 될 듯싶다(필자와 나는 취향이 아무래도 비슷한 모양이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최근 다시 번역돼 나온 <지식인이란 무엇인가>까지 덩달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컬처뉴스(07. 11. 02) 바르트를 '바르게' 읽는 한 가지 방법
어느 사상가의 사유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흔하게는 ‘주요 저작’을 징검다리 뛰듯이 읽는 방법도 있고, 해당 사상가에 대한 입문서에서부터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전작’(全作) 읽기인데, 그것도 발간 연도별로 읽기이다. 이 방식의 단점은 전작이 모두 국역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흔하고, 그럴 경우 원서를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바르게’는 ‘옳게’(right)가 아니라 ‘정당하게’(just)에 가깝다. 즉, 내 식으로 사상가를 읽는 것도 정당한 방법이다, 혹은 그렇게 읽는 것이 한 사상가를 사상가로서 대접해 주는 정당한 방법이다.
어쨌거나 내 식으로 보면 우리는 이제야 롤랑 바르트(1915~1980)를 사상가로서 맞이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바르트의 데뷔작 『글쓰기의 영도』(1953)가 ‘드디어’ 국역됐기 때문이다(사실 이 책은 지난 1994년 『영도(零度)의 에크리뛰르: 기호학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국역된 바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국역이라기보다는 ‘외계어’역이라는 표현이 더 가깝다).

바르트는 20세기의 주요 사상을 다 넘나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맑스주의, 실존주의, 기호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탈구조주의 등 바르트는 단 한 번도 특정한 사조에 오래 매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바르트를 단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일체의 수식어를 뺀, 말 그대로의) ‘비평가’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의 영도』는 바로 그 ‘비평가’로서의 바르트가 지닌 사유의 맹아를 담고 있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이 책 이후에 발표된 바르트의 모든 책은 이 책의 기본 논지에 대한 확장이나 수정, 혹은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가깝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이 됐듯이 『글쓰기의 영도』는 1964년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의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졌다. 당시의 젊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사르트르를 비켜가기란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르트와 사르트르의 이론적 조우, 혹은 대결은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글쓰기의 영도』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신속한’ 반박이었다. 『글쓰기의 영도』가 출간된 것은 1953년이나, 이 책은 원래 알베르 카뮈(1913~1960)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일간지 『콩바』의 1947년 8월 1일자에 동명으로 연재를 시작한 기사들이 기반이 된 책이다. 사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자체도 사르트르가 창간한 잡지 『레탕모데른』 17~22호(1947년 2월~7월)에 연재된 기사들이 기반이 된 책이니, 바르트는 사르트르의 연재가 끝나자마자 당시 시간감각으로서는 실시간으로 사르트르를 비판한 셈이다. 가령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비판 중 무게감 있는 또 다른 글로서는 모리스 블랑쇼(1907~2003)의 「문학과 죽음에의 권리」가 있는데, 이 글은 1948년 1월에야 발표됐다(이 글은 조르주 바타이유[1897~1962]가 편집장으로 있던 『크리티크』 제20호에 발표됐다).
게다가 바르트의 비판은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 도발성은 『글쓰기의 영도』 제1장의 제목이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도 쉽게 확인되는데(『문학이란 무엇인가?』 제1장의 제목도 「글쓰기란 무엇인가?」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사르트르의 야심찬 프로그램, 즉 ‘참여문학’(littérature engagée)이라는 프로그램에 직격탄을 날렸다는 점에서 그 도발성은 근본적이기까지 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참여문학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전후의 냉전시기를 살아가는 작가로서는 당대의 지배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즉, 혁명의 가능성)를 대중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지유에 직접 몸담기 위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사르트르는 혁명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언어’(langue)를,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스타일’(style)로 전달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르트르가 시(여기서 사르트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시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아니라 산문(여기서 사르트르는 『레땅모데른』 식의 저널리즘을 염두에 두고 있다)을 특권화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바르트가 보기에 스타일은 언어를 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혹은 바르트가 보기에 사르트르는 스타일과 ‘형식’(form), 더 나아가 ‘장르’(genre)를 혼동하고 있었다. 바르트에게는 스타일 자체도 언어처럼 “하나의 고유한 자연과 같은 것”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언어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인데 반해 스타일은 ‘개인사적’으로 형성된다는 점뿐이다. 즉, 대문자 역사(Histoire)를 우리가 선택할 수 없듯이, 소문자 역사(histoire) 역시 우리의 선택 밖에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주장대로 스타일 역시 우리의 선택 밖에 있다면 우리는 사르트르처럼 특정한 스타일, 더 나아가 특정한 장르(즉, 산문)를 특권화할 수 없게 된다. 요컨대 바르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특정한 스타일을 낳은 ‘역사’를 비판해야지, 그 스타일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혹은, 다르게 말하면 이미 스타일 자체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다.
그렇다면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특정한 ‘글쓰기’(écriture)만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글쓰기는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작품이 지닌 내적인 속성 일체, 예컨대 어조, 에토스, 리듬, 분위기 등의 총체를 말한다.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언어와 스타일은 대상들이다. 반면에 글쓰기는 하나의 기능이다.” 즉, 작가는 이미 자신에게 자연처럼 주어져 있는 언어와 스타일을 버릴 수는 없고, 단지 그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목적에 따라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그것을 변모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르트에 따르면 글쓰기 자체도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글쓰기조차 “대문자 역사와 전통의 압력을 받아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압력 속에서 글쓰기조차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로서는 자유로운 언어를 창조하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는데, 언제나 그것은 규격화된 형태로 작가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궁지가 있으며, 그것은 사회 자체의 궁지이다.”

예컨대 바르트가 자기 저서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칭찬해마지 않았던 (특히 『이방인』에서의) 카뮈의 글쓰기, 즉 ‘영도’(Degré zéro)의 글쓰기조차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타일의 이상적 부재 상태”를 보여준 글쓰기, 그래서 일체의 이데올로기 혹은 “한 언어의 사회적‧신화적 특징들”에서 벗어난 “중립적인 글쓰기”이자 “무색의 글쓰기”(l’écriture blanche)였던 카뮈의 혁명적인 글쓰기마저 오늘날에는 부르주아 문인들에 의해서 ‘좋은’ 프랑스 문학의 전범으로 제시되지 않는가?
『글쓰기의 영도』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향한 직격탄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르트의 주장은 영원히 혁명적일 수 있는 글쓰기(혹은 사르트르의 스타일)는 없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런 점에서 참여문학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사르트르가 너무나 간단히 치유하려 했던 “현대 작가들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사르트르는 이듬해인 1948년과 13년 뒤인 1965년, 각각 「검은 오르페우스」라는 글과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강의를 통해서 바르트의 비판에 대해 신속하게/때늦게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바르트는 현대 작가들의 임무에 대해 사르트르처럼 명쾌하지 말하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오히려 사르트르보다 현대 작가들의 상황을 더 정확히 짚어낸다. “문학적 글쓰기는 역사의 소외와 역사의 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필연성으로서 그것[즉, 문학적 글쓰기]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 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 자체이다.” 소외와 꿈 사이에서 진동하는 ‘시시포스’, 그도 아니면 소외될 것을 알면서도 꿈꾸기를 그치지 않는 ‘시시포스’, 그것이 바로 바르트가 보는 작가들의 형상이다.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를 쓰던 당시 카뮈를 필두로 한 프랑스 현대 작가들의 글쓰기를 “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고유한 수난극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때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그 에피소드가 ‘마지막’(last)으로 끝날지 그도 아니면 ‘최근’(latest)의 것이 될지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새로운 에피소드를 일으킬 수 있을지 없을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쨌든 비평가 바르트는 그때 이후로 30여 권 분량의 책을 집필하며 그 시시포스로서의 운명을 당당히 헤쳐 나가다가 1980년 2월 25일 차에 치었다. 이는 카뮈가 자동차 사고로 죽은 지 약 20년하고도 52일 뒤의 일이었다. 영국의 문예이론가 테리 이글턴(1943~ )의 말을 살짝 비틀어 말해보자면, “신은 실존주의자도, 구조주의자도 아니었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1.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