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들에 대해 적는다. 특별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미나리'들이 정겹고 안쓰럽다. 내가 미나리 사촌쯤 되는 처지여서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미나리들도 아니다. 두 편의 시에 등장하는 미나리들에 대해 적는다. 하나는 권혁웅의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민음사, 2007)에 실린 시 '저 일몰'에 나오는 미나리다(나는 순전히 미나리 덕분에, 라면 과장이지만, 이 시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당신도 마음에 들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건 나의 미나리일 뿐이니까.
그대 마음이 만만(滿滿)했다고
내가 거둬낸 건 거품일 뿐이라고
터지 미더덕에 덴 혀로
더듬거리는 저녁이 내게도 있었지
저 일몰 어디쯤
내가 앉기를 거절한 저녁 식사 자리가
마련되기도 했을지 몰라
그래서 온통 붉었던 건지도 몰라
레인지에 올려 둔 해물탕처럼 딱 한번
끓어넘치고는
굳기름처럼 어두워졌을지 몰라
입가에 묻은 술기를 닦아내며
먼 곳의 취기거나
수위를 가늠하는 시간, 나도
미역처럼 머리를 푼 여자와
못생긴 아이 하나쯤은 데리고 올 수 있었다고
풀죽은 미나리가 동서(東西)를 모르듯
여기까지 오려고 온 것은 아니라고
일단 배경은 해물탕이다. "그대 마음이 만만"했다는 건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는 뜻이겠다. 다 끓은 해물탕처럼. 문제는 나. 하지만, '나'는 '거품'이나 거둬낸다. 고작 터진 미더덕에 혓바닥이나 데면서 실없는 소리나 더듬거렸겠다. 한마디로 '현명한 등신' 같이 처신한 그런 저녁이 있었겠다. 이런저런 계산으로 마음 복잡했을 저녁 식사 자리.
결국 "레인지에 올려둔 해물탕처럼 딱 한번/ 끓어넘치고는/ 굳기름처럼 어두워졌"던 것이 '나'의 마음이겠다. 잠시 '다른 삶'을 화끈하게 꿈꾸어보지만 이내 정신 차리고 "입가에 묻은 술기를 닦아"냈을 법하다. 이젠 먼 곳으로 물러앉은 '취기'가 꿈꾸었을 다른 삶이란 어떤 삶인가? '수위를 가늠하며', 곧 냉정하게 따져본다. "미역처럼 머리를 푼 여자와/ 못 생긴 아이 하나쯤을 데리고 올 수 있었"을 삶이다. 그 다른 삶의 끝간데? '머리를 푼'에 상응하는 것이 '풀죽은 미나리'이다. 동서(東西)를 모르는 미나리란 앞뒤를 재지 않는 미나리이다. 그런 미나리다운 변명이 "여기까지 오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는 게 아닐까? '나'에겐 "미역처럼 머리를 푼 여자"와의 또다른 삶에 대한 욕망이 잠시 끓어넘쳤지만 따져보면 그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이 아니며 결국엔 '후회'하게 될 삶이다. '풀죽은 미나리'의 푸념만이 남을 삶이다. 그래서 '나'는 '저 일몰'의 유혹에서 비껴난다.
이 시의 '이야기'는 그렇게 읽힌다. 하지만 그 이야기와 무관하더라도 "풀죽은 미나리가 동서(東西)를 모르듯"이란 비유는 절묘하다. '동서(東西)'를 아는 것들은 이 절묘함을 모르리라...
이 '풀죽은 미나리' 때문에 떠올리게 된 또다른 미나리는 '복어탕의 미나리'이다. 시인이었던 소설가 이응준의 시 '어둠의 뿌리는 무럭무럭 자라나 하늘로 간다'에 등장하며 이 시는 <나무들이 숲을 거부했다>(고려원, 1995; 작가정신, 2004)에 수록돼 있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인용하면 이렇다(시집을 손에 들고 있지 않기에 인용은 온라인에서 따온다).
아버지는 어린 내게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 속에서 망망대해를 떠돌더라도 살아남고 싶어했던 그 아버지의
아이는 이렇게 자라나
진 자가 되었다. 나는
가끔 내 오른 손목 동맥 근처의 송충이 같은 칼자국을 바라본다. 나는
적어도 책 한 권에 인생이 변했노라고 말하는 비열한 인간은 되기 싫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원숭이들이 대충 무슨무슨 원숭이로 분류되는 것처럼 나와
내가 사랑햇던 그대의 種名은 지난날이다. 저
걸레로 닦아내고 싶은 검은 안개다. 쉽게 말해서 나는
여름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반짝이는 이유가, 그들의
잎사귀 앞면과 뒷면의 푸름이 다르기 때문임을 너무 일찍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그대라는 도끼가 찍고 난 뒤에 파인
떡갈나무의 바로 그 자리, 진물이 흐르는
상처가 되고 싶었다. 헐떡거리며 뭍에 오른
아가미이고 싶었다.
창밖 보름달이 홍역을 앓고 있다. 바로 그때 나는
방에 엎드려 성산문은 죽고 한명희는 정승이 된다는 세상의 이치를
문장으로 쓰고 있던 우울이었다. 그저 내가 어디론가
사라지기 바라던 사람들의 물살에 휩쓸려 가고 있을 뿐이었고
-바다의 금붕어
-늪의 상어
-태양 아래 두더지
라고 그들은 나를 표현햇다. 어쩌면
사랑하는 그대로 그랬는지 모른다. 치욕과 멸시가 아교의 끈적끈적한 감촉으로
내 산책에 닳은 구두 밑창을 햝던 그해, 나는
수음 직후의 뿌연 형광등 불빛 같은 생을
물 말아 먹어버렸노라고 고백했지만
도대체가 그들은 나를 복어탕의 미나리 정도로밖에는 생각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내 혈관에
쥐약 1g의 치사량이라도 있었더라면 피에 물들지도
눈물에 번지지도 못했던 이 슬픈 옷깃에 묻은
안개의 굵은 입자 따윈
쉽게 털어내버릴 수 있었을 텐데 이제
비로소 누군가에게 나는 죄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낱말들을 어려워하고 심지어는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았기에 내 죄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눈물이 마른 자리가 얼마나 더러운지도,
오늘이라는 노비문서에 불을 지르는 법도, 어둠의 뿌리가 무럭무럭 자라나 하늘로
올라간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다.
한때(아직 20대였다!) 복사해서 가방에 넣어다니기도 했던 시인데(그런 시들이 좀 된다), 다른 구절들은 차치하고 요는 "도대체가 그들은 나를 복어탕의 미나리 정도로밖에는 생각해주지 않았던 것이다"란 시구에서 '복어탕의 미나리'란 은유가 얼마나 절묘한가라는 것이다. 한 서점의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나는 시인에게 이 구절이 얼마나 경탄스러운가를 말했지만 그는 뜨듯미지근하게만 답했다. 이런 구절이 정겨운 건 아무래도 나 혼자 미나리 사촌이어서가 아닐까도 싶다.
요컨대, 미나리들에 대해 늘어놓는 나는 '복어탕의 풀죽은 미나리'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소 위안이 된다. 미나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미나리 아닌 것들은 미워하면서)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여기저기 해물탕들이 끓고 있겠다...
07. 11.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