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인데, 분량상 다 적지 못한 내용을 보충하고 이미지들을 덧붙여서 옮겨놓는다.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가 글의 취지이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아직 손에 쥐어보지 못했다(그나마 최근에 몇 권 구입한 정도이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몇 권 읽으면 다행이겠다). '지정학이란 무엇인가'가 제목으로는 보다 적합하겠지만 며칠전에 같은 제목의 페이퍼를 올려놓았던지라 마지막 문장을 제목으로 삼는다. 정현종의 시구를 바꿔쓰자면,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다!..
가을이 독서와 무관한 계절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 탓인지 다른 계절에 비하면 출간되는 책들의 수준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기대에 못 미친다. 최근에 나온 책들의 목록을 뽑으려고 하니까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물론, 걱정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읽을 만하거나 읽어두어야 하는 책들은 언제나 차고 넘치니까.
책에 길이 있다면 그것은 천 갈래 만 갈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책들이 펼쳐놓는 공간은 그 자체로 ‘지리적 공간’이다. 그 지리적 공간을 삶의 공간과 포개놓을 때 그것은 지정학적 공간이 된다. 지정학적 공간은 현실적인 힘의 비균질적 분포에 따른 굴곡을 갖는다. 고로,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콜린 플린트의 <지정학이란 무엇인가>(길)는 바로 그러한 전제에서 ‘장소의 정치학’을 제안하는 교재용 책이다. “지식이나 표상은 지정학적이다.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 지식은 달리 구성된다.”는 문구가 그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전달해준다. 한때 국가주의 학문으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저자와 역자들은 지정학 비판(anti-geopolitics)까지도 포괄하는, 지정학의 적극적인 자기갱신을 시도한다. 헤게모니의 지정학이 가능하다면 탈식민주의 지정학도 가능하다는 게 이들의 문제의식이다.
마침 때맞춰 나온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정학적 미학>(현대미학사)은 예술, 보다 구체적으로는 현대영화 또한 이러한 지정학적 문제틀 안에서 사고되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이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예정이다). <보이는 것의 날인>(한나래)과 함께 제임슨의 대표적인 영화론인 이 책은 영화에 대한 그의 변증법적 사유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를 보여준다. 제임슨에 대한 간단한 입문이 필요하다면 애덤 로버츠의 <트랜스 비평가 제임슨>(앨피)를 참고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가독성에 대한 기대는 반(反)제임슨적이다(국역본들은 사태를 결코 호전시키지 않는다).




지정학의 이론적 틀과 개념적 도구들이 어느 정도 마련됐다면 몇 가지 키워드를 길잡이 삼아서 지정학적 여행을 감행할 수도 있겠다. 미국부터다. 미국의 키워드는 ‘종교’이다. 데이비슨 뢰어 목사의 설교들을 모은 책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샨티)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와 제국주의적 정치 행위가 어떻게 파시즘으로 귀결되고 있는지 환기시키는 책이다(돈과 권력, 그리고 종교의 왜곡된 조작들로 인해 미국식 민주주의가 끝장났다고 설파하는 목사님 말씀이 왜 남의 얘기 같지만은 않은 것일까?).
그리고 류대영의 <미국종교사>(청년사)는 국내 필자가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쓴 미국 종교 통사이다(*거기에 보태자면 미국의 정체성을 다룬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과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을 다룬 인터뷰집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시대의창)도 같이 읽어두면 좋겠다).




이어지는 여정은 ‘혁명’의 나라 프랑스이다. ‘하버드의 석학이 분석한 프랑스인들의 삶’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프렌치 프랑스>(고려대출판부)는 프랑스 문화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한 교재용 책이다. 국내 전공자들이 쓴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강)과 함께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거기에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을 다룬 <공존의 기술>(그린비)은 지난 2005년 ‘방리유 사태’를 추적하고 진단한 글 모음으로 ‘교재들’을 보완해줄 수 있겠다. 필자의 한 사람인 에티엔 발리바르의 주저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를 그러한 계급적대 문제에 대한 철학적 개입으로 읽어볼 수도 있겠고.




아직도 ‘나치 독일’이 연상된다면 독일인들이 섭섭해 할 테지만, 히틀러와 그의 나치즘은 여전히 출판계의 단골 메뉴이다. 그 중 최신간은 노먼 메일러의 논픽션 3부작 중 1부로 출간된 <숲속의 성>(뿔). 어린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불안정한 삶에 대한 소설인데, 절대 악에 대한 작가의 완벽한 이해를 보여준다는 평이다.




나치와의 연루로 많은 논란을 낳은 지휘자의 평전과 철학자의 연구서도 겸사겸사 읽어봄 직하다. 각각 헤르베르트 하프너의 <푸르트벵글러>(마티)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는 나치였는가?>(철학과현실사, 2007)이다. 전자는 작년에 나온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마티)에 이어지는 책이고, 후자는 <하이데거와 나치즘>(문예출판사, 2001)의 개정판이다(*부르디외의 <나는 철학자다> 등도 같은 주제의 책이다).




이제 눈길을 시베리아를 거치거나(김경주, <패스포트>) 지중해를 거쳐서(로버트 카플란, <지중해 오디세이>) 아시아대륙으로 돌릴 차례이지만 어느새 분량이 바닥났다(*<유라시아 천년을 가다>(사계절출판사, 2002)와 <지중해 철학기행>(효형출판, 2007)도 같이 들어볼 만하다). 자판에서 손을 떼고 다시 책상머리에 앉을 때이다. 독서와 무관한 계절은 다른 이들의 몫이니, 가을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입 닥치고 책이나 읽어!”
07. 0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