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 적다가 또 날려먹었다(빌어먹을, 알라딘! 잠시의 틈도 안 주는구나!). 그냥 줄여쓴다. 이번주 북리뷰들을 대충 훑어본 결과 별로 눈에 띄는 책이 없더라는 것.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다는 것. 시인이자 철학도인 진은영씨의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2007)에 대한 리뷰 정도를 챙겨둔다는 것. 너무 식상한 제목이긴 한데(이젠 '차이'란 말도 지겹다!), "니체 철학을 주제로, 용수와 들뢰즈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저자의 독법(讀法)은 한 문장, 다음 글귀에 눈이 저절로 갈만큼 매혹적이다"란 리뷰는 '유혹적'이라서... 

한겨레(07. 09. 08) 현대 차이철학의 허무주의를 극복하라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관문이다. 그를 통과해야 현대철학의 지평이 제대로 열린다. 진은영(37)씨는 니체 철학 전공자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펴냄·1만5900원)은 그가 모교인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을 갈무리해 펴낸 책이다. 니체 철학의 함의를 풍성하게 담은 그의 책을 사이에 놓고 한겨레신문사 자료실에서 그와 만났다.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차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것입니다. 이 성과는 특히 하이데거·바타유·푸코·데리다·들뢰즈 같은 일군의 탈근대 철학자들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들을 모두 니체의 후계자로 지목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니체 철학을 베이스캠프로 사용해 현대철학이라는 산을 등정했다는 것이죠.”

그는 현대철학의 출발점에 니체 철학이 있는 이상, 니체를 공부할 이유는 분명하다고 말했다. “탈근대 철학에 도입된 차이 개념을 사유하고 차이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작업은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이 ‘차이’ 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근대 철학의 폐해를 극복할 길이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 철학이란 요약하자면, 동일성의 철학이다. 하나의 보편적 기준을 상정하고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거기에 폭력적으로 복속시키거나 복속되지 않으면 배제하고 추방해버리는 철학이 동일성의 철학이다. 이 철학의 폭력성을 극복하자는 것이 탈근대 철학이고, 그때 탈근대 철학이 구사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니체는 말하자면, 차이의 철학으로 가는 직행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니힐리즘(허무주의), 힘에의 의지(권력의지), 영원회귀,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차이의 철학’이다. 이 가운데 니힐리즘은 니체가 평생을 두고 싸운 사유의 주제였다. “니체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목표는 ‘니힐리즘의 자기극복’이었습니다.” 왜 니힐리즘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니체는 자기 시대가 니힐리즘에 철저하게 감염돼 있다고 보았다.

니체가 니힐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탄식하는 단순한 허무의식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 자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현실 너머의 ‘진짜 세계’, ‘초월적 본질’을 찾는 모든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상계 너머의 영원한 이데아(본체계)를 찾는 플라톤주의와 그것의 쌍둥이인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현세 부정의 관념으로서 전통적 니힐리즘이다. 신이 죽어버림으로써 이 전통의 니힐리즘은 끝났지만 그것을 대체해 새로운 신이 등장했다고 니체는 말한다. 현실 세계를 관통하는 어떤 법칙을 찾아내 거기에 매달리거나 자본·화폐·국가 같은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니체가 인식한 현대의 니힐리즘이다. 니체는 이 니힐리즘을 극복해야 할 질병이라고 규정했다.

“그 질병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니체가 발견한 개념이 ‘힘에의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를 니체의 말로 풀면 이렇다. “이 세계는 곧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힘들과 힘의 파동의 놀이로서 하나이자 동시에 다수이고, 자기 안에서 휘몰아치며 밀려드는 힘들의 바다이며, 영원히 변화하며 영원히 되돌아오고, 어떤 포만이나 권태나 피로도 모르는 생성이다. 영원한 자기창조와 영원한 자기파괴의 세계가 ‘힘에의 의지’다.”

이 힘들의 흐름은 영원히 되돌아와 영원히 되풀이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니체는 ‘영원회귀’라고 말한다. 그때의 영원회귀는 똑같은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다. 영원회귀는 차이의 반복이다. 다시 말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이다. 그리하여 삶은 끝없는 변화와 생성 속에서 반복하되 항상 차이나는 반복이 된다. 삶과 세계는 차이의 바다, 차이의 축제가 된다. “그런 식으로 니체는 차이를 새롭게 사유했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근대의 동일성 철학을 돌파하는 차이의 철학은 바로 여기에서 성립했다. “그러나 이 차이의 철학은 차이라는 개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유행하는 탈근대적 차이철학에도 동일성 철학의 폐해가 끼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차이를 불변의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차이를 ‘승인’하는 형태의 철학에서 그런 경향이 발견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걸로 끝내버리는 것인데, 그래서는 차이와 차이의 진정한 만남도 없고 그 만남을 통한 또다른 차이의 생성도 없다.

이런 ‘차이 승인’의 철학을 그는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부른다. 이 현대적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면 차이·다름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사유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차이를 즐기는 것,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 생산 활동’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차이의 철학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 생산 철학’도 오늘날 자본주의적 지배 전략으로 전용되고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끝없이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면서 ‘차이’와 ‘다름’의 판매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지금 자본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이의 철학은 거기에 합당한 정치학과 윤리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책은 차이의 철학이 자본의 논리에 빠져들지 않고 자본의 포획욕망에 저항해 그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수 정치학’을 내세운다. 지배의지로 뭉친 다수성의 논리와 맞서 싸워 다름의 풍요로움을 지켜내고 또 그 풍요로움을 창조하는 소수성의 정치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차이의 철학’은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글 고명섭 기자)

문화일보(07. 09. 07) 소멸은 곧 생성… 삶을 끝없이 긍정하라 !

이 책의 저자를 처음 접한 것은 시집을 통해서다. 지난 2003년 출간된 저자의 첫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보고, 이렇게 기사 첫머리를 풀었다.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은 항상 가슴을 설레게 한다.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같은 새로운 세계가 한, 두편의 ‘우연’에 머무르지 않고 시집 전반을 관통할 때 설렘은 기쁨과 탄성으로 연결된다.”

이 책 역시 설렘을 넘어 기쁨과 탄성을 자아낸다. 더욱이 난해하기 그지없는 니체 철학을 주제로, 용수와 들뢰즈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저자의 독법(讀法)은 한 문장, 다음 글귀에 눈이 저절로 갈만큼 매혹적이다. 빼어난 감수성과 예민한 지성의 결정체를 보는 듯하다.

저자는 니체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소장 철학자다. 결코 호락호락한 책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철학에 별 조예가 없는 일반인의 시선까지 잡아끄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조금만 정신차려 읽는다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우선 니힐리즘을 화두로 니체를 푼다. 니힐리즘을 통해 서구 철학사의 지배적 흐름을 형성했던 경향을 규명하려고 했던 니체의 생각을 보여준다. 니체는 ‘불변의 실체’를 상정하는 경향을 니힐리즘의 한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니힐리즘은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먼지 같은 존재로서 하루해를 넘기지 못하고 부스러져 영원히 사라져간다’는 정서다. 따라서 니힐리스트들은 자기 존재의 불안정성을 완화시켜 줄 안정감을 갈구하게 된다. 즉, ‘영원불변한 실체’를 상정함으로써 안정감을 가상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 예컨대 ‘가상계에 대립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차안을 넘어선 피안을, 제1원인으로서의 신을, 자연현상의 배후로서의 법칙 등을 상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 같은 시도들이 삶을 병들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영원불변하는 것에 대한 욕망은 유전(流轉)과 파괴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 두려움을 제거하고 변화 자체를 긍정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영원성에 대한 욕망, 안정화되고 고착되려는 욕망은 완전히 사라진다”며 “(영원성에 대한 욕망의 제거를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유전과 파괴가 허무한 소멸이 아니라는 점이 납득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유전과 파괴를 ‘생성(生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성에 대한 긍정만이 유전하고 소멸하는 자연과 삶에서 슬픔과 고통 대신에 평안한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성이란 무엇인가. “생성은 질적 ‘차이’를 가진 다수의 질료들이 끊임없이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과정 그 자체”이며 “다수자들의 차이는 생성을 보장하며 생성의 철학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원리”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가 이 같은 차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근대성의 사유가 다양한 종류의 차이를 절대적인 보편성을 통해 억압함으로써 현실적 차이를 지닌 존재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왔다고 탈근대 철학자들은 파악한다. 따라서 근대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차이 개념을 철학에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 개념은 오늘날 시장이데올로기와 냉소주의의 상투어가 돼 버렸다. “새로이 등장한 탈근대적 지배전략은 근대성의 산물인 국가, 민족, 인종 등의 배타적 경계를 강화하거나 실체화하기보다는 그것을 해체”하며 오히려 “차이들이나 복수성을 강조, 상품생산과 시장형성의 논리에 이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의 상대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차이를 고정화해 실체화함으로써 서로 다른 존재자들간의 어떠한 관여나 상호 작용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이처럼 차이를 고정화해 실체화하는 오늘날의 흐름을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같은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기 위해 “인도의 불교 철학자 용수,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와 더불어 니체의 통찰이 아로새겨진 사유의 긴 회랑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굳이 용수와 들뢰즈를 통해 니체를 보려 하는 것일까. 니체의 사유를 한층 더 발전시켜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는 새로운 존재론이자 정치학을 만들기 위해서다. 저자는 용수와 들뢰즈의 입을 빌려 ‘원인이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는 상호의존성’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풋사과를 먹고 배탈이 났다고 하자. 원인(풋사과) 때문에 결과(배탈)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만일 풋사과를 먹은 뒤 장을 보완해주는 다른 음식을 먹어서 배탈이 나지 않았다면 더 이상 풋사과는 배탈의 원인이 아니라 소화라는 결과의 원인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 사건을 구성하는 원인들의 배치에 현재 발생하는 새로운 원인들이 참여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사건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순간은 언제나 생성의 순간이며, 과거 사건의 배치 속에 원인들을 새로운 사건의 원인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숙명론을 극복하고, 현재를 무한히 긍정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용수와 들뢰즈를 경유해 해석한 니체는 저자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김영번기자)

07. 09. 08.

P.S. 여기도 간단히 적는다. 참고문헌에 대해서 세 문단쯤 적었었는데(참고문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나의 '취미'다), 오기된 부분만 지적한다. 데리다의 <에쁘롱>(동문선, 1998)의 역자들이 '김다운, 황순회'로 잘못 기재됐다. '김다은, 황순희'가 맞다. 그리고 알랭 르노의 <개인>(동문선, 2002)의 원저가 잘못 기재됐다. 'L’ère de l’individu. Contribution à une histoire de la subjectivité'(1989)로 돼 있는데, 국역본의 부제가 '주체철학에 관한 고찰'이니까 원저는 'L’individu. Remarques sur la philosophie du sujet'(1995)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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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9-07 21:30   좋아요 0 | URL
허 이분 칸트 전공자 아니었나요? 언제 갈아타셨지? (물론 칸트에 대한 개설서에서 니체, 들뢰즈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내긴 하더군요.)

로쟈 2007-09-07 22:11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엔 원래 니체 전공자인데요...

자꾸때리다 2007-09-08 07:33   좋아요 0 | URL
리라이팅 시리즈로 처음에 칸트 개설서를 내서 칸트 전공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ㅋ

로쟈 2007-09-08 20:50   좋아요 0 | URL
석박사가 모두 니체입니다...

nada 2007-09-08 14:09   좋아요 0 | URL
이젠 차이란 말도 지겹다, 는 구절에서 키득거렸어요.^^
고병권 씨 책하고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동어반복일 거 같기도 하공.

로쟈 2007-09-08 20:52   좋아요 0 | URL
제가 그것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었는데요.^^; 여하튼 '차이의 철학'이 거꾸로 유행어가 되다보니...

yoonta 2007-09-08 17:47   좋아요 0 | URL
기사에 있네요. 저 책이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이라고..

로쟈 2007-09-08 20:51   좋아요 0 | URL
혹시 석사는 칸트를 했는지 확인해보니까 모두 니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