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간지에 도킨스 인터뷰기사가 떴길래 읽어보다가 아예 '도킨스'를 다시 검색해보았다. 그 중 눈에 띄는 기사 둘을 옮겨놓는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란 칼럼은 같은 제목을 가진 러셀의 책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데 나는 아마도 대학 1-2학년때쯤 읽지 않았나 싶다(책은 다른 제목으로 출간됐었다). 나는 종교가 가진 '위안'의 기능은 무시할 수 없다고 믿는 편이지만(알다시피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연약하고 나약하다) '설명'의 기능은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그것이 신화처럼 '이야기'로서의 가치를 갖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칼럼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대목: "그러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교회가 없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믿는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럴 때 교회는 긴장감을 회복해 성찰하게 될 것이고, 사회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그 고민은 너무 늦지 않게 시작되었으면 한다.  

 

경향신문(07. 08. 02)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내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나는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 세상 만물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가면 최초의 원인, 하나님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하고, 어떤 것이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하나님처럼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 제1원인론은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이 논리는, 세계는 코끼리 등에 얹혀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있다는 힌두교도의 관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일정한 목적에 맞게 설계했다는 목적론을 살펴보자. 이것은 토끼의 꼬리가 흰 것은 총쏘기에 좋도록 하기 위해서라든가, 코는 안경쓰기에 알맞게 만들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둘째, 나는 예수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선을 행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왜 최선의 인간·최고의 현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는 매우 중대한 도덕적 결함을 갖고 있다. 예수는 자기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에게 보복하고 분노한다. 소크라테스에게서는 그런 태도를 찾아볼 수 없는데 그쪽이 훨신 더 성자답다.

예수는 무화과가 열리는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무화과를 저주해 시들어버리게 한다. 나는 예수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다른 사람만큼 높은 위치에 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기독교에 매달리지 않으면 사람이 사악해진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기독교에 매달려온 사람 대부분이 극악했다. 어떤 시대든 종교가 극렬할수록, 독단적인 믿음이 깊을수록 잔인성도 더 커졌고 사태도 더 악화되었다. 형법의 개선, 전쟁 감소, 유색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제도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세계적 조직인 교회세력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히지 않은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는 이 세계의 도덕적 발전에 가장 큰 적이 되어 왔다.



-종교 극렬할수록 잔인성 커져-
이상은 버트런드 러셀이 1927년 3월6일 영국 베터시읍 공회당에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내용이다. 이 강연이 80년 지난 낡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최근 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어 보아도 좋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러셀이나 도킨스가 없다. 이유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국회를 움직여 사학법을 다시 개정하게 만드는 막강한 학원재벌이며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무자르듯 잘라내는 무자비한 대자본이자, 정권교체를 추구하는 강력한 정당이고, 신을 팔아 거부가 되는 방법을 아는 탁월한 상인이며, 그 부가 혈맥 속에서 자자손손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욕심 많은 봉건적인 세습권력이다. 누가 이 세속의 지배자에게 도전할 것인가.



물론 기독교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비리는 일부의 일탈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런 비판을 허용받는 대가로 한국 기독교 전체를 옹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극소수만 문제일 뿐 한국 기독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정말 쓸모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비판은 그만큼 기독교가 건강하다는 증거로 이용됨으로써 기독교 전체를 살찌우는 영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21일 부산 서면 지하상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숙자를 위한 무료 식당인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는 두타 스님은 이날도 식당운영비 마련을 위해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예수천국’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고 거리 전도를 하던 남자가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이 스님의 머리를 흔들며 회개하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너그럽게도 극소수 기독교인의 행위라며 넘어갔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의 본질이다. 독선과 배타성, 다른 문화에 대한 무례, 가히 폭력 수준인 선교방식과 호전성은 바로 한국 기독교의 특질이다.

-사회·교회 관계 진지한 고민을-
그러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교회가 없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믿는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럴 때 교회는 긴장감을 회복해 성찰하게 될 것이고, 사회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두려움을 잊을 만큼 크지 않고, 세속의 권력을 쥐고 흔들 만큼 오만하지 않으며, 남의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절제를 모르는 한국 기독교는 너무 크고 너무 강하고, 너무 많이 가졌다.(이대근/정치·국제에디터)

조선일보(07. 07. 28) 당신이 믿는 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신(神)’이 컴백했다. 20세기 들어 최소한 유럽과 미국에서 신의 존재는 당대의 가장 화끈한 논쟁거리들 목록에 끼지 못했다. 그게 변했다. 2007년 7월 현재, 신은 초미의 관심사다. 저명한 과학자와 스타 논객들이 과감하고 대담하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책을 속속 출간해 논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변화의 배후에 9·11 테러가 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를 몰고 돌진한 뒤 지식사회의 판도가 변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66) 영국 옥스포드 대학 교수가 대표 선수다. 당신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막 한국판이 나온 도킨스의 신간 ‘만들어진 신(원제 The God Delusion·김영사)’을 펼쳐 들기 전에 심호흡부터 할 일이다.



도킨스는 서문에서부터 다짜고짜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권한다. 도킨스에게 ‘종교 없는 세상’은 “자살 폭파범도, ‘9·11’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보스니아 대량 학살도, 명예 살인도,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 입고 TV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는 세상”이다.

그동안 도킨스는 “모든 동물과 식물은 유전자가 자기를 복제해 후대에 퍼뜨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이용하고 버리는 ‘탈 것(vehicle)’에 불과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자신이 “최선의 사례는 무시하고 최악의 사례만 뽑아 종교를 난타했다”는 비판에 이렇게 응수한다.

“세심하고 미묘한 종교가 주류라면 세계는 확실히 더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고 나는 다른 책을 썼을 것이다. 우울한 사실은 이런 유형의 절제되고 온건하고 개혁적인 종교가 소수파라는 것이다. 전세계 신자들의 대다수는 제리 팔웰 목사, 오사마 빈 라덴, 아야톨라 호메이니 같은 지도자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과 너무나도 유사한 종교를 믿는다.”(580쪽)



도킨스 뿐 아니다. 도킨스가 작년 9월 런던에서 ‘만들어진 신’을 출간한 데 이어, 지난 2월 미국의 대표적인 과학 철학자인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65) 터프츠 대학 교수가 ‘마법 깨뜨리기(원제 Breaking the Spell·동녁 사이언스 근간 예정)’를 냈다. 5월에는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활동해온 논객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58)가 ‘신은 위대하지 않다(원제 God Is Not Great·국내 출판 일정 미정)’를 들고 나왔다.



이들의 주장에 ‘찬동했느냐, 분개했느냐’는 별개로 치고, 대중의 반응은 일단 격렬했다. 도킨스와 히친스의 책은 단숨에 미국 뉴욕타임스지(紙)와 영국 더타임스지(紙)가 집계한 베스트셀러 목록 10권에 들었다. 종교학과 신경학을 전공한 미국 저술가 샘 해리스(Sam Harris·40)가 지난 2004년에 낸 스테디 셀러 ‘종교의 종말(원제 The End of Faith·한언)’도 이 두 권과 함께 장기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종교는 사악하다”고 선명하고 맹렬하게 외친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을 개인적 선택의 영역에 묶어뒀던 전(前) 세대 지식인들과 크게 다르다. 가령 도킨스에게 신은 절대자가 아니라 “존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설’에 불과”하다. 그는 또 알 카에다나 탈레반 같은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뿐 아니라, “신앙 그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모두 “아이들에게 의문을 품지 않는 믿음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며, “온건한 종교의 가르침은 비록 그 자체로는 극단적이지 않아도 극단주의로 이어지는 공개 초청장이 된다”고 주장한다(467~468쪽).

데닛, 히친스, 해리스도 도킨스 못지 않게 공격적이다. 데닛에게 종교는 신성한 숭앙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문화적 장치에 불과하다. 히친스는 자기 책에 ‘종교가 어떻게 모든 것에 해를 끼치는가(How Religion Poisons Everything)’라는 부제를 달았다. 히친스는 나치의 만행을 묵인하고 방조한 로마 교황청 등을 예로 들며, “종교가 없어야 세상이 좋아진다”고 주장한다. 해리스는 “‘야훼’나 ‘알라’ 같은 말이 ‘아폴로’가 간 길을 걷지 않으면 이 세계는 파멸을 맞게 된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미국의 일급 지식인들이 이처럼 공격적인 무신론을 외치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9·11 테러가 있다. 해리스는 ‘종교의 종말’에서 “전쟁 기술의 진보로 우리의 종교적 믿음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게 됐다”고 썼다(17쪽). “우리 이웃들은 지금 생화학 무기와 핵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서구에서 종교는 넥타이 색깔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경험과 소신과 안목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혹은 배척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었다. 타인의 종교에 대한 관용은 역설적으로 종교에 대한 논쟁 자체를 금기로 만들었다고 해리스는 주장한다. 해리스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은 신의 가르침을 ‘곡해’했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분석을 공격한다. 그가 보기에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문제점은 신의 가르침을 경전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거진 것이다. 해리스의 책이 나왔을 때, 도킨스는 영국 가디언지(紙)에 쓴 서평을, “해리스의 책을 읽고 잠에서 깨라(Read Harris and wake up)”는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신이 논쟁의 복판으로 컴백한 또 다른 배경은 90년대 이후 미국에서 기독교가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전미 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는 2005년 현재 미국 기독교 신자가 1억6587만8323명이라고 집계했다. 2004년보다 240만 명 늘어난 숫자다. 교세 확장을 주도한 것은 텍사스주(州)를 중심으로 한 미국 남부 침례교회들이다. 다른 종교에 개방적이고 교리 해석에 유연한 주류 기독교는 점점 신도 숫자가 줄어든 반면, 전통적으로 성경 해석에 보수적인 남부 교회들은 빠르게 덩치가 불었다.



종교적 보수주의로의 회귀는 전통적인 창조론에 과학 연구 성과를 접목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에 힘을 실어줬다. 생화학자 마이클 베히(Michael J. Behe)가 쓴 ‘다윈의 블랙박스(원제 Darwin’s Blackbox·풀빛)’가 대표적이다. 다윈이 주장한 자연선택과 점진적인 진화에 의해서는 도저히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형태의 생명이 출현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로써 한때 다윈주의자들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 했던 ‘창조론’과 ‘진화론’의 오랜 싸움에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김수혜 기자)

07. 08. 07.

P.S. 기사 덕분에 '김수혜'란 이름의 기자를 기억하게 됐다. <만들어진 신> 때문에 논쟁의 중심에 선 리처드 도킨스와의 인터뷰(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6/2007080601354.html)까지 성사시킨 걸 보면 기자로서의 '근성'을 높이 살 만하다. 비록 "이로써 한때 다윈주의자들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 했던 ‘창조론’과 ‘진화론’의 오랜 싸움에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란 마지막 멘트는 넌센스라고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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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7-08-07 13:56   좋아요 0 | URL
너무 재미있는 글이네요. 러셀의 글은 학창시절 영어 독해 공부할 때 -_- 읽었던 기억도 나고;;; 무엇보다 '타인의 종교에 대한 관용은 역설적으로 종교에 대한 논쟁 자체를 금기로 만들었다' 완전 동감합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려면 정치, 종교 얘기는 절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하죠.

로쟈 2007-08-07 16:36   좋아요 0 | URL
제 주변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지만(하기야 인구의 1/3이라니) 여전히 (거짓)진화론 vs (참된)창조론을 반복하는 목사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걸 보면 '부조리'란 말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부조리'란 적어도 합리적인 세계에서나 의미를 갖는 말이기에...

심술 2007-08-07 17:56   좋아요 0 | URL
이대근, 김수혜. 이번 글 쓴 두 분들 이름은 영화배우 이름이랑 똑같거나 닮았군요.

로쟈 2007-08-07 18:38   좋아요 0 | URL
네, 덕분에 잊어먹기 힘든 이름들입니다...

퍼그 2007-08-07 20:40   좋아요 0 | URL
'설명'이 아니라 '신화/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하면 '위안'의 기능이 약해지지 않을까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이 둘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종종 느끼게 됩니다...

로쟈 2007-08-07 22:52   좋아요 0 | URL
도킨스가 열거하고 있는 건 설명, 훈계, 위로, 영감, 네 가집니다. 거기서 설명과 위로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설명이 논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위로는 정서와 연결되는 것이죠. 가령, 내가 호감을 갖는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호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치한 비약이자 폭력이죠. 어떤 시구절이 내게 위안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처럼 어떤 성경구절도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치니 2007-08-10 11:00   좋아요 0 | URL
찜 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나중에도 다시 읽고 싶어서. ^-^

어부 2007-08-10 17:32   좋아요 0 | URL
저도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 방식이 도킨스식이라면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도킨스야말로 과학주의라는 종교의 또다른 광신도로 보여지는군요. 과학이 다른 모든 언어들을 규정하는 메타언어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그런 메타언어의 발화자의 위치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도착적 태도야 말로 얼마나 광신도의 그것과 같은지.. 지젝 아저씨 말처럼 기독교가 가지는 '상징적 실천의 사회적 공간을 지배하는 논리'에 대한 성찰 없이 종교의 오류성을 침튀기며 설파하는 태도는 또다른 환상매달리기처럼 보이네요

어부 2007-08-10 17:40   좋아요 0 | URL
신이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을 믿는 자들에게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신은 의미가 없는 것이겠죠. 그것은 부재하는 효과로서 우리에게 반드시 귀환할 테니. 신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에 나는 속지 않는 자이다. 라고 말하는 도킨스보다 '속지 않는 자는 방황한다.' 고 말하는 라캉에게 더 큰 지혜를 배운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저는.

로쟈 2007-08-10 18:04   좋아요 0 | URL
"신이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라면 도킨스의 목표는 초과달성인데요(더불어 그의 책은 잉여적이고요)! '누구나'에 포함되지 않는 다수의 신자들만 처리하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