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우리는 노자도 어쩔 수 없이 전국시대(BC 403-221)를 살다간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전국시대에는 춘추시대(BC 770-403)보다 갈등과 대립이 더 심했다. 어떤 제후도 천하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언제까지 국가를 통치할지 장담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이때 노자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국가를 오랫동안 통치하는 방법과 천하를 통일하는 방법을 제안했던 것이다.-92쪽
국가는 기본적으로 통치자(군주)와 피통치차(민중)로 나뉘는 위계적 체계다. 국가가 원활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일종의 교환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국가라는 체계를 지탱하는 이 교환관계의 고유한 특성이다. '교환'은 기본적으로 A에게 B로 무엇인가 전달되면 B에서 A로도 무엇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원활히 기능하려면 통치자가 피통치자에게 무엇을 받았을 때, 통치자도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만 한다. -94쪽
국가 체계를 유지하는 교환의 논리를 어긴 사람은 통치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통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오직 수탈만을 일삼지 그것을 재분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노자는 통치자인 군주가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인 재분배의 도를 외면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97쪽
노자철학은 분명 영원한 진리의 철학이다. 그렇지만 그가 영원하다고 본 것은 '국가'와 '천하'라는 정치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결코 정치구조를 넘어서는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그의 철학은 국가의 형식적 작동원리를 규명하고 정당화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군주'가 이 원리에 따라 '올바른' 통치자가 될 수 있을지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노자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못한 사상가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104-105쪽
사회민주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노자철학도 기본적으로 현존하는 체제를 극복하는 전략일 수 없다. 다만 현존하는 체제를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 영속화하려는 고도의 전략일 뿐이다.(...) 노자철학이 기본적으로 남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출발한다는 사실과 남음의 혜택을 받을 부족한 사람이 다수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다시 말해 노자철학의 재분배는 '남음'과 '부족'이라는 위계성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논의될 수 있다. -109-110쪽
노자에게 진정한 통치자는 '남는 것이 있는데도 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그것을 부족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와중에 휘말려 있는 국가를 통일할 진정한 큰 국가는, '작은 국가의 아래에 있게 되면 작은 국가를 취할 수 있는' 국가다. 작은 국가의 아래에 있다는 것은 작은 국가를 수탈하기에 앞서 작은 국가를 보호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사랑의 방식을 적용한다는 말이다.-125쪽
노자의 '소국과민'이라는 정치이념에는 통치자의 강력한 지배의지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노자가 통치자에게 권한 정책의 결과는 물론 겉으로 보면 평안하고 질박하기까지 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에 현혹되어 노자의 정치이념이 목가적 공동체, 원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평안하고 질박한 풍경 뒤에는 통치자의 강력한 통치권 행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피통치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고 문자를 통한 반성적 사유와 이론적 대화능력을 근본적으로 없애려는 정책이 어떻게 문명에 저항하는 '작은 정부'나 '유토피아적 원시공동체'와 들어맞을 수 있을까?-130쪽
노자는 대가를 바라는 뇌물(수탈)을 마치 선물인 것처럼 포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직 이럴 때에만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알아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자신이 알아서 복종한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무위자연'이라는 노자의 유명한 주장의 실제 의미다. 통치자는 '수탈이나 억압이 아니라는 직접적인 통치 행위', 즉 유위의 정치가 아니라 '재분배나 자애로움이라는 간접적인 통치 행위', 즉 무위의 정치를 수행해야 한다. 오직 이런 무위의 정치만이 피통치자가 통치자에게 '알아서 스스로(自然)' 복종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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