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년 간 신춘문예 당선시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원하의 첫 시집이 나왔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꽤 오랫동안 신춘문예 시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다가 <신춘문예당선시집>을 구해서 읽은 게 2018년이 아니었나 싶다(기억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혹은 그 이전에도 당선시집을 읽었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화제의 당선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때문이었다. 


















시에 대한, 시집에 대한 글을 간간이 올리면서 대개 언어실험적인 무의미시 경향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달고는 했는데, 그와는 대비되는 시가 이원하의 시였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그 시의 전문이 이렇다.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_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 시의 희귀한(상대적으로 희귀해졌다) 미덕은 자연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시로 만들어낼 줄 안다는 데 있다(한국현대시의 기원이 되는 소월의 어법이 그러했다. 그렇지만 남성시인 소월이 여성적 어조로 만들어낸 '특이한' 시들이었다). 나는 이 시가 예외적인 성취인지, 아니면 이 시인의 탁월한 개성인지 궁금했는데, 시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반가움과 기대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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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20-04-10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바로 장바구니 담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로제트50 2020-04-10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은 거의 안 사는데.
이것은 장바구니에 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