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골의 <오월의 밤>(생각의나무, 2007)과 함께 낮에 배송받은 책은 이인식의 <유토피아 이야기>(갤리온, 2007)이다. 과학저술가의 책으론 이채롭게도 '유토피아'란 단일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다가 516쪽의 분량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매품 <미래교양사전>(갤리온, 2006)을 같이 껴준다는 '이벤트'도 고려가 됐다(작년에 과학저술로는 호평을 받은 책이었다).

한데, 결론을 말하자면 '오판'이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부터 조지 오웰의 <1984년>까지, 세상이 두려워한 위험한 생각의 역사를 추적한 책"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아니 '편역자'가 해놓은 일이란 건 10쪽의 프롤로그의 외에 각 저자의 생애와 줄거리에 관한 간단한 소개, 그리고 발췌 번역이 전부이기 때문이다(무엇을 추적했다는 말인가?). '이인식 쓰고엮다'라고 적었지만 분량으로 치자면 그냥 '옮기고 엮은 책'이라고 해야 온당하다.
소개대로 "다루고 있는 책은 플라톤의 <국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를 돌아보며>,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 예프게니 자먀틴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년> 등이며 세계 문학사의 이정표가 된 작품들을 해석과 함께, 원문을 소개한다."
나는 미처 '원문을 소개한다'는 걸 간과한 탓에 이 책이 저작이라기 보다는 발췌번역본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것이고, 그게 나의 불찰이라면 불찰이다. 프롤로그의 첫문장대로 "이 책은 이상사회를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을 문학작품 위주로 골라서 그 내용을 간추려놓은 유토피아 길라잡이"인 것이다. 일종의 다이제스트북인 셈. 그게 이 책의 주제이다. 자기 주제.
때문에 "이 책은 그러한 면에서 국가와 종교, 문학과 철학,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사상가들의 창조적인 성찰과 통합적 사유의 모습을 보게끔 인도하는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는 광고는 과장으로 읽힌다. 개별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도 해설도, 전복적인 해석도 제시하지 않는 책이 무슨 '나침반' 구실을 할 거라는 건 공상에 가까운 것 아닐까? 해서,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사들인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실망스러운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과적으론 비매품 <미래교양사전>만을 고가에 구입한 것이 돼 버렸군...
07. 05. 08.
P.S. 책의 내용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나의 불찰을 적었지만(인터넷 구매의 맹점이다. 서점에서 책을 미리 살펴봤다면 절대로 구입하지 않았을 책이다), 저자의 불찰도 만만치는 않다. 9종의 책을 소개하면서 "원문은 번역판이 출간된 7종의 경우, 그대로 사용할 수 없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원문을 좀더 충실히 소개하기 위해 직접 옮기는 작업을 했음을 밝혀둔다."(6쪽)고 했는데, 그런 수고를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도 의문이거니와, 플라톤의 <국가> 등은 '원문'을 옮긴 것이 아니라 '영역본'을 옮긴 것이다. 게다가 <국가>의 경우 참조한 책도 원전 번역인 박종현본이 아니라 영역본을 중역한 최현본이다. 기본적인 서지에도 둔감한 경우이다.



거기에 "국내에 번역판이 나오지 않은 <뒤를 돌아보며>와 <우리들>의 원문은 이상헌 박사가 옮기는 작업을 맡아주었다."고 돼 있는데, 이 또한 절반은 불필요한 수고였다. 편자가 '예프게니 자먀틴'이라고 옮기고 있는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열린책들, 2006)은 이미 오래전에 번역되었고 개정판까지도 작년에 출간됐기 때문이다('Zamyatin'은 '자먀찐'으로도 '자먀틴'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Yevgeny'를 '예프게니'로 읽는 건 무지이거나 겉멋의 소산이다. 음악 애호가들이 <예브게니 오네긴>을 <예프게니 오네긴>으로 잘못 읽는 것처럼).
러시아 작품이어서 먼저 훑어보았지만 '편자'는 <우리들>에 대해서, 작가의 생애에 관해 4쪽 가량, 그리고 줄거리 10쪽 가량, 나머지 30쪽 가량은 작품 일부의 발췌로 채워놓고 있다.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의 '교양'을 채워주려는 의도인지 모르겠지만(작가 생애나 작품 줄거리는 인터넷상에 얼마든지 떠다닌다), '허접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 편자 자신이 그러한 우려를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지난 여름부터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나에게 반신반의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과학 저술에 전념해온 내가 유토피아 문학작품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어째 어색하고 미덥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표정들 같아 보였다."('책을 펴내며')
그런 표정을 편자는 '과학과 문학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우리 사회의 통념'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나는 '문학'을 너무 만만하게 본 편자의 '편견'에 더 큰 책임을 돌리고 싶다. 편자의 책을 몇 권 더 갖고 있지만 이런 '얕은 수준'의 책을 엮어내느니 그냥 과학저술가로서의 명망을 이어가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공연히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사게 할 필요 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