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일들이 어째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가   

 최근에 이러한 질문을 했었던 것은 4대강 공사와 관련해서였다. 아무리 보아도 어리석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벌써 수조 원이 소비되었고 공사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어디를 보아도 막을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사례는 더더욱 많다. 살인, 폭력, 전쟁, 인간성에 대한 유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유대인 학살은 대표적인 그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이다.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 중 하나는 "인간이 악하기 때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악을 저지른 것은 악한 인간이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은 흔히 "(나와는 달리) 악하기 때문"이라는 뉘앙스를 띠고 잇는 것 같다. 이것은 특히 집단의 문제에 있어서 그러하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고통을 겪어 왔다는 식의 한국사 교육이 한 예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치 독일의 친위대 중령으로, 유럽 전역에서의 유대인 수송 (죽음의 수용소를 향한 수송)을 담당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유대인들은 아이히만이 그러한  끔직한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던 것은 그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헨티나에 숨어 있던 아이히만을 납치하여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워 이스라엘 국가의 이름으로 그를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에 대해 저질러진 악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재판을 방청한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의 모습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전형적인 악인과는 달랐다. 그는 가학적이지도 않았고 분노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심지어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유대인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신은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이동시키려 했을 뿐이라고.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외국으로, 다음으로는 독일 밖에 있는 게토로, 마지막으로는 죽음의 수용소들로. 그의 관심사는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동료와 상관의 인정을 받아 승진하고 출세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자신의 일이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고통을 가져올지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렌트가 사용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이러한 상상력의 결핍이 얼마나 흔하게 발견되는가를 깨닫게 한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끔찍한 일들에도 수많은 성실한 실무자들이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상사와 동료들의 인정을 받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주는 고통에 대해서 생각할 줄 모른다. "머리 나쁘고 부지런한 인간이 제일 나빠."라는 흔한 농담의 주인공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결여한 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야말로 현대의 또다른 아이히만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탈주하는 길은 무엇일까? 직접적인 대답은 주어지지 않지만, 이 책에는 아이히만의 수송 작업이 성공하지 못했던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해야 하니 너희 나라에 있는 유대인을 모두 내놓으라는 나치의 요구에 대한 피점령 국가들의 반응은 다양했는데, 그 중에는 루마니아처럼 나치 쪽에서 오히려 당황할 정도로 잔혹한 유대인 학살을 시행한 국가도 있었지만, 의도적인 태업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살아날 길을 마련해 준 이탈리아나 불가리아와 같은 국가도 있었다. 나치 쪽에서 아예 유대인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던 핀란드와 같은 사례도 있었고, 국왕이 "유대인이 가슴에 별을 달아야 한다면 내가 제일 먼저 달겠다"고 선언하고 노동자들이 나치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이고, 마침내는 자기 나라에 온 독일인들이 본국 정부에 대해 태업을 하도록 변화시키기까지 한 덴마크와 같은 사례도 있었다. 인간성과 정의에 대한 믿음이 널리 공유되는 사회는 악에 대한 면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은 유대인 독자들이 이 책에서 논의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지적을 불편하게 느꼈다는 것, 많은 유대인들이 이 책을 비판했다는 것은 유대인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악에 대한 면역력이 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은 아닐까? .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서,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심판하기를 원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 속에도 악이 있을 수 있다는 진실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국가가 원했던 것은 복수였지 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진실에 대해 보인 이러한 태도가 내게는 오늘날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끔찍한 일들, 이번에는 유대인이 가해자의 입장에서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악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의 가을 우리 시대의 고전 1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역 최악. 불어식 고유명사를 방치해둔 게으름에다, 짜증나는 '하나님' 타령까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8-06-1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번역자, 후기에 "마지막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힘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고 싶다."고 써 놨다. 그게 중세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를 설명하면서 가톨릭 용어를 싸그리 무시한 데 대한 자기 나름의 변명인가 보다. '미사', '성당' 대신 '교회', '예배'를 고집하는 것도, '신'이라 쓰면 무난한 것을 굳이 한국 개신교에서밖에 안 쓰는 정체불명의 용어 '하나님'으로 바꿔놓은 것도 개신교 (맹? 광?)신자의 아집인가 싶어 실소가 나온다. (심지어 '성모송'을 '아베송'이라고 썼다.-_-)
익숙한 라틴 이름을 어색한 프랑스식 표기로 방치해 놓은 것도 눈에 거슬린다. 중세사나 중세철학과 관련한 참고 도서들을 조금이라도 찾아봤다면 '성 보나방튀르'라든가 '(교황) 마르텡 5세' 같은 어이 없는 실수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단어 선택이라든가 문장 구성이 여기저기 결함 투성이라, 좀 어려운 부분이 나올라치면 머리를 감싸쥐고 원문을 추리해 내야 한다. 엉망인 번역 때문에 좋은 책이 망가진 것이 안타깝다.
 
한글로 읽는 사서
다시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다시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책날개에 나와 있는 역자 약력에서 신학대학과 영문과를 졸업했다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합리적 이성"과 "건전한 상식"을 강조하는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니 비로소 납득이 갔다. 과연 신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기독교 교리보다는 현실에 뿌리를 둔 공맹의 가르침이 훨씬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기는 하다.

한문으로 되어 있어 접하기 어려운 유교 경전을 기독교 성경처럼 쉬운 한글로 풀어 한 권으로 묶어 내고 싶었다는 저자의 목적은 퍽 훌륭하게 성취되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일주일만에 <사서>의 전체 내용을 열람할 수 있었으니 저자에게는 큰 도움을 받았다.

실상 내가 <사서>를 읽으려는 이유는 급하게 한문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나 막막하던 차에 번역 텍스트를 먼저 읽고 나니 원문을 어떻게 읽어가야 할지 대략 감이 잡힌다. <대학>과 <중용>은 분량이 적으니 기한을 정해 집중적으로 독파해야겠고 <논어>는 짧은 장들로 나누어져있고 어디서 한 번쯤 본 듯한 친숙한 내용이 많은만큼 사무실에 두고 틈틈히 조금씩 읽어야겠다. 분량이 가장 많은 것은 <맹자>인데, 이 사상가는 무난한 소리만 하는 그 스승 공자에 비해 겁이 없어서 조마조마한 위험 발언도 아무렇지 않게 턱턱 던지기 때문에, 네 권 중 가장 기대되는 책도 <맹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의 무늬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올 한 해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를 읽은 밤엔 흥분으로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잠이 안 왔다. 이제껏 "국어"에 대해 들은 수많은 말 중에 그의 것만큼 나를 매혹시킨 것은 없었다. 얼마 전 올해 대학생이 된 어린 친구가 '추천 도서'를 물었을 때, 나는 "내가 스무살 때 이글을 읽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아."라는 말을 붙여 <감염된 언어>를 소개해 주었다. (실은 <감염된 언어>에 대한 서평을 쓰고 싶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반 년전 읽었을 때 바로 써 두지 않은 게 후회된다.)

오늘 읽은 두 권의 책 <바리에떼>와 <자유의 무늬>에는 <감염된 언어>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바리에떼>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1부에 잠깐 나온 독도 얘기였는데 겁많은 그답게 신변잡기 사이에 눈에 안 띄게 숨겨 놓아 흥분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어지는 술 얘기 여자 얘기는 그냥저냥이었고, 3부의 시인 얘기에 이르러서는  워낙 내 관심 영역을 벗어나서  휙휙 넘길 도리밖에 없었다. 신문과 주간지 컬럼을 모은 <자유의 무늬>는 소재가 평이해서 이해하기 쉬웠지만, 매체의 성격상 글들이 다 짧아 확 빨려들어갈만한 데가 없었다. <토지>가 너무 길어진 대중소설에 불과하고 <태백산맥>이 좌익집단주의고 하는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였지만, "이런 소리 하는 사람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가 결론이어서는 피식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역시 이 아저씬 겁이 많아. 그 외에 기억에 남은 건 장애인 얘기랑 국어선생이라면... 이라는 글이랑(애들의 지적 수준을 대단히 크게 오해하고 있는 실현불가능한 판타지지만) '인터네셔널 가'에 대한 것. <바리에떼>보다는 <자유의 무늬>가 나았다 싶어 이쪽으로 서평을 쓰러 들어왔지만, 별점 세 개를 줘야 하나 네 개를 줘야 하나 한참 망설였다.

그럼에도 결국 네 개 클릭을 결심한 이유는 이  아저씨가 '좋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는 이쁜 소리를 한다. 그는 자유의 적들을 민감하게 분별해 내는 정치적 안목과 묻혀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골라내는 심미적 안목을 가지고 있으며, 지성과 교양을 추구하면서도 소수자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때때로 그가 하는 얘기에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예를 들어 책표지에서 저자 약력을 빼는 게 좋다는 생각에 나는 동의 못하겠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의 저자가 어느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매우 궁금해 하는 사람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성균과대 법대를 나와 서울대에서 언어학 석사, 파리대학에서 언어학 박사를 했고, 한국일보, 시사저널, 한겨레에서 일했다는 고종석의 경력은 고종석을 이해하는 데 퍽 도움이 된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그 이쁜 소리들을 이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의 책은 독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햇살 좋은 오후 예쁜 서양식 테라스에서 달콤한 케이크를 곁들여 낸 차 한 잔 같은 서비스 말이다. 그는 예의 바른 주인이어서 웬만해서는 손님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다. 지적이고 우아하고 솔직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이런 사람과의 수다는 설령 그의 주장이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라 해도 충분히 기쁘고 즐거운 법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7-09-2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 책이고, 거의 다 읽었고, 매우 공감되는 서평입니다, 저도 이 아저씨가 참 좋아요 ^^

mizuaki 2007-09-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싫어하기 힘든 사람인가 봅니다. 방금 웬디양 님의 서재에 다녀왔는데, 리뷰하신 많은 책 중 제가 읽은 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재미있었어요. 다른 취향의 두 사람이 만나는 접점이 되는 사람이 고종석이군요. ㅎㅎ
찾아 주시고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웽스북스 2007-09-28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zuaki님, 제가 책도 별로 안읽으면서 불성실하기까지 해서 읽은 책들의 리뷰를 다 남기지는 못하고 있답니다 ^^ mizuaki님 서재를 토대로 제가 파악한 결과 접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답니다~ ^^

마늘빵 2009-09-1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염된 언어>는 저도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쿵쾅쿵쾅 거렸답니다. 지금의 제 한국어관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고종석의 그 글이고요. ^^

mizuaki 2010-01-25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도 그러셨다니 반갑습니다. 좋은 책에는 여러 사람을 바꿔놓는 힘이 있지요. ^^
 
로마인 이야기 1~15권 양장본 세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역사를 읽는 것은 무척 즐거운 경험이다. 과거의 모습에서 현재를 보는 것, 타인의 모습에서 나를 보는 것. 자기 중심적 인간인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유명한 <로마인 이야기>를 이제야 읽기 시작한 것은 방대한 분량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지만,  '일단 제일 재미있을 것 같은 시기로 딱 다섯 권만 읽자."하는 생각으로 골라온 2~6권은 생각보다 부담 없이 빨리빨리 읽혔다. 이 작가는 성실하고 친절할 뿐 아니라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능이 있다. 명불허전.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읽기 전에 기대하지 못했던 즐거움은, 이 2천 년 전의 대제국의 모습에 자꾸만 현재의 아메리카 제국이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역사 시대 대부분을 중화 제국의 변방에서 보낸 자들의 후손으로, 현재 아메리카 제국의 변방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제국을 논하는 자리에서 미국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실은 저자인 시오노 씨에게도 해당되는 일이고, 그것은 이 책이 가진 특별한 매력으로 연결된다. 

"특히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정의와 비정의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 범죄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전쟁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라도 열렸다면, 한니발이 전범 제1호가 되었을 것이다. (중략) 로마가 카르타고와 맺은 강화는 엄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보복이 아니었고, 하물며 정의가 비정의에 내리는 징벌은 전혀 아니었다. 인류가 결코 초탈하지 못하는 전쟁이라는 악업을 승자와 패자가 아니라 정의와 비정의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렇게 구분했다고 해서 전쟁이 소멸한 것도 아닌데."

포에니 전쟁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서 아메리카 제국의 도쿄 재판에 대한 은근한 야유를 읽어내는 사람은 나뿐일까? 포에니 전쟁 이후 자영농이 몰락하고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독점되며 군사 대국화가 가속되는 로마는 1,2 차대전 이후의 미국을 연상시킨다. "부와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끊임없이 침략 전쟁과 내정 간섭을 시도한다는,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의 비판은 오늘의 대제국 미국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끈질기게 저항하는서유럽 '야만인들'은 2천 년 전의 베트콩과 알 카에다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은 로마의 패권 체제 유지에 협력해야 한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비용이다."라는 키케로의 주장은 그대로 한국과 일본에 군대의 주둔 비용을 요구하는 미국의 주장과 겹쳐지지 않는가?

시오노 씨에 대한 제국주의자라는 단정은 그가 이런 류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혼란 속의 자유냐 제국 지배하의 질서와 풍요로움이냐의 문제는 2천 년 전의 로마 속주에서나 21세기의 한국에서나 쉽지 않은 문제인만큼, 좀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저자의 심하다 싶은 찬양, 특히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서만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일본이 전쟁에 패해 아메리카 제국의 모범 속주가 된 것은 시오노 씨가 8세 때, 군대조차 인정하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에서 고생 모르고 자란 양가집 아가씨에게 '군사 독재'에 대한 증오란 이해 불가능한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