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책읽기
강대진 지음 / 작은이야기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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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설명만 보면 번역서들의 오류를 학술적으로 분석한 딱딱한 책인줄 알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씀! 오랜만에 정말로 "행복한 책읽기"를 경험했다.

희랍과 로마의 역사, 지리,  예술, 정치, 경제, 종교, 일상생활에 대한 알짜정보들이 가득가득해서 우선 좋다. 거기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까지 탁월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읽었다. 그것도 으하하하 웃어대기까지 하면서. 원래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웹사이트에서 서로 돌려 읽으며 웃었던 글이라 하니 그 발랄한 문체도 이해가 간다.

이 책이 널리 알려져서, 여기 수록된 열두 권의 역자들이 자신들의 무식한 부분(결코 무식한 역자들은 아니다. 단지 한국의 여건상 어쩔 수 없이 무식한 부분이 있는 것뿐. 이 책의 저자도 칭찬해야 할 부분에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을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도 이 책과 더불어 저마다 조금씩 유식해져서, 그리스 신화 관련 책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무식한 번역들을 스스로  보완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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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국립진주박물관 지음, 장원철.오만 옮김 / 부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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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전체 판도를 바꾸어놓은 세계 전쟁이자 7년간 한반도 전역을 황폐화시켰던 초유의 비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을 말하는 국사 교과서의 기술은 충무공과 의병들의 충성심을 찬양하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편협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애 대부분을 일본 선교에 바친 포르투갈인 사제 프로이스가 집필한 이 책은 교과서와는 다른 시점에 전쟁을 관찰한다.  참전 신자 및 성직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전투의 상세한 모습, 중국인들의 교묘한 외교술, 본국 정부에 의해 원치 않는 외국땅으로 내몰린 현지 지휘관들의 고민,  북경과 오사카를 오가며 전개된 정전협상 등 이제까지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던 전쟁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저자의 침착하고 성실한 태도는 '선교사란 서구우월주의에 물든 배타적이고 편협한 인물들'이라는 나의 선입견과 도요토미에 의해 가혹하게 탄압받은 기독교인이 도요토미를 공정하게 묘사할 리가 없다는 편견을 깨끗이 뒤엎었다. 당시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열린 마음으로 현지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합당한 예절과 존경을 다 해 일본 사회에 섞여들어갔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적극적이고 열린 태도는 전쟁 당사자들의 무지와 극히 대조적이다. 명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제후들에게 분배하겠다는 도요토미의 계획은 일본의 특수한 영토 개념(전투를 통해 빼앗거나 빼앗길 수도 있고, 상급자에 의해 교환당할 수도 있는 임시적인 통치 지역)을 무리하게 확대 적용한 것이다.  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책봉하고, 조선왕과 일본왕이 함께 화해의 청원을 올리게 한 후 천자가 이를 허가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해결한다는 명의 계획 역시 자신들의 통치 관념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계에 적용한 것이었다. 결국 양측의 지배자들이 우왕좌왕 하고 있는 사이에,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언어도 풍습도 기후도 수질도 전혀 다른 외국으로 파견된그들의 백성은 대부분 전투가 아닌 기아와 전염병으로 죽었다. 물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두 외국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땅의 원주인인 조선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대전쟁의 재앙을 부르고, 그 재앙이 타인 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파괴했던 임진왜란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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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 당대비평 특별호
슬라보예 지젝.도정일 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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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김선일 씨가 살해당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직장일이 바빴을 거다.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일들도 있어서 뉴스에는 관심이 없었다. 관심 가질 만큼 김선일 뉴스가 많이 나오지도 않았다. 납치 보도 나오고 이틀도 안 되어 후다닥 살해 보도 나오고 촛불시위 얘기가 나오는둥마는둥 하다가 끝났다. 파병 반대라는 입장이 확고했기에 더 관심이 없었던 듯도 하다. 죽은 이가 선교사가 되려던 기독교인이라는 말 때문에 동정심이 들지도 않았다.

지금 내가 가슴 아픈 것은 그 때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집안도 좋지 않고 돈도 없고 좋은 학교도 못 나오고 영어도 잘 못하는, 그래서 미군PX 납품업체 직원이 되는 것 외에는 중동에 갈 기회가 없었던 소심한 34세남자가 사막 가운데서 "나는 살고 싶다"고 절규하고 있는데, 나는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멀티미디어 시대의 무서운 신종 전염병에 나 역시도 감염되어 있는 것이다.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는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죽음과 고통에 대한 책이다. 타인의 고통을 미디어가 보여주는 이미지로 소비해 오던 사람들에게 잠시만 그 소비 행위를 멈추고 곰곰히 생각해 보기를 요구한다. 저자들의 면면도 화려하고 실린 글들은 깔끔하고 설득력 있게 잘 읽힌다. 그러나, 내가 소리 높혀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는 그 죽음과 고통에 대한 책임이  우리 한국인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정부와 언론에 의해 철저히 은폐된 이라크 사태의 본질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파병을 통해 가해자측에 <가담되어> 버린 한국인들의 의무가 아닐까? 사건 발생 후 2년 반, 김선일도 이라크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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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9-1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선일씨 피살은 2004년 3월이 아니라 6월에 일어난 일입니다...

mizuaki 2006-09-13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치겠습니다. ^^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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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말씀드립니다. 제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한 달도 더 전의 일이온데 재주가 모자라고 성정이 독실하지 못하여 오늘에야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편지들을 읽는 동안 퇴계와 고봉 두 분의 육성을 직접 듣는 듯 하였으니, 400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의 대표적 지성인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참으로 지극하였습니다.

 

퇴계와 고봉이 살았던 시대의 조정은 치열한 권력 투쟁의 장이었던 바, 벼슬을 한사코 거부하는 퇴계의 모습에는 숱한 선비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얻었을 지혜가 드러납니다. 선조의 즉위로 고위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얻은 고봉의 글에는 열정이 가득하고,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날 때의 글에는 초조와 고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학문에 대한 열정, 꺾이지 않는 자부심, 겸손하게 예를 지키는 우아함, 그리고 서로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이 옛 편지 위에 은은한 향기를 더해 주고 있었습니다.

 

한문으로 된 원전을 현대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신 것이 자세하고 정성스럽다 이를 만합니다. 단지 하나 의심스러운 것은 편지를 주제별로 나누어 1부 “일상을 논한 편지”와 2부 “학문을 논한 편지”로 달리 배열한 것의 효과입니다. 사단칠정론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려는 독자라면 이 배열을 통해 논의의 시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열은 시간순 배열에 비해 두 주인공의 삶의 환경과 감정 변화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또 어떤 편지에 이전 편지나 이후 편지가 언급된 경우 그것을 찾아내어 확인하기가 매우 번거롭습니다. 만약 편지를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같은 주제의 편지를 각주로 안내했더라면 이러한 수고를 크게 덜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삼가 절하고 올립니다. 어리석은 소견을 낱낱이 풀어 놓으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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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
박지향.김일영.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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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일기장에다 그를 "너무나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라고 썼다. 1954년 그를 만나러 가기 전 대통령은 비서인 해거티에게 그를 언제까지 붙들어둘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약한 소리를 한다. "(그가  주장하는 전쟁이 일어나면) 결과는 너무 엄청날 걸세." 미국인들은 그를 <동양의 협상가>, <기만의 대가>, <형편없는 패를 들고도 공갈로 이기는 노름꾼>으로 평가했는데,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공갈협박으로 그는 매년  미국 국민의 혈세를 10억 달러씩이나 우려내고 있었다. 한국의 국내수입이 5억 달러도 안되던 시절에 말이다. 미사일을 뻥뻥 쏘아대며 미국을 협박하는 누군가의 <벼랑끝 외교>가 연상되지 않는가? 그러나 이 일화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권이 다각도로 보여주는 1945년에서 50년대 말까지, 광복과 그 후의 혼란, 한국 전쟁과 한미 동맹, 농지 개혁, 경제 정책, 사회 변화의 중심에는 이승만과 김일성이 있다. 수록 논문의 저자들은 어디까지나 실증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저 두 사람이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았다는 사실이다.

명망 있는 해외파 독립 운동가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혼란스러운 해방 공간을 발빠르게 움직여 권력을 손에 넣는다.  끼고 있는 패트런은 미국과 소련으로 서로 달랐지만 두 사람의 정책은 비슷했다. 우선은 일본인소유 재산들을 장악하고,  다음으로  지주들의 땅을 몰수해 소작인에게 나누어주었다. 토지 개혁은 교육받은 지주층을 몰락시켜 반대 세력을 제거해 주고, 절대 다수인 농민층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상대 정권을 축출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  미군이 철수하기를 기다려,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한다. 

3년간의 전쟁으로 160만명이 끔찍한 죽음을 당했지만  이승만과 김일성만은 끄떡 없었다. 원망과 증오가 커질수록 두 사람의 권력은 확고해졌으니까. 전쟁은 적과 아군의 개념을 가르쳤고, 전통적 가치를 따르던 농부들을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의 <국민>으로 조직했다.  국가의 위기라는 명분을 이용해 두 사람은 효과적으로 정적들을 숙청했다. 이승만은 안전한 부산에 앉아  휴전 협정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에게는 전선에서 죽어가는 하찮은 젊은이들보다는 "조국 통일"의 숭고한 열망이 훨씬 중요했다.

휴전 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뜯어온 원조금으로 관료 조직을 정비하고, 선거의 뒷돈을 댈 재벌 자본가들을 육성했다. 1948년 5만명에서 1954년 65만명으로 늘어난 군대가 젊은이들을 훈련시켰고, 학교는 아이들에게 근대 국가의 규범을 가르쳤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배운 아이들이 4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아직 훗날의 일.  비대해진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도, 군사 정권이 재벌을 앞세운 경제 개발을 이룰 것도 이승만은 알지 못했으리라.

이승만과 김일성은 한국사의 연속성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그들의 시대가 우리 시대의 바로 전단계로서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이 이 땅에 도입한 초기 단계의 근대 국가에다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더해 거대하고 효율적이며 강력한 지배 구조를 만들어 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국가 권력은 두 사람의 손에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특히 태평양전쟁기의 차별과 배제, 억압과 선동, 인권을 경시하고 소수를 박해하는 전체주의를 확대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나는 이 두 사람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직접적 계승자이며, 정치적 쌍생아이자 적대적 공범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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