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박지향, 김일영, 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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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의 나는 반항아였다. 교과서 내용에 대해 혼자 화내던 기억, 선생님에게 "그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아요?"하고 대들다가 급우들의 눈총을 받던 기억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읽으며 암울한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다, 그것들의  시작이 중학교 2학년 <국사>수업임을 알게 되었다. 교과서에 넘쳐나던 위대한 한민족에 대한 찬사와 민족의 적들에 대한 비난. 거기에 나타난 편견과 증오와 선동적 잔인성이 역겨웠다.

"서양사는 너무 좋지만 국사는 싫어" 가 입버릇이던 내가 다시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계기가 된 책은 패어뱅크,크레이그,라이샤워의 <동양문화사>였다. 민족주의를 주입하려는 의도가 배제된 한국사 서술이 너무나 신선해서, 이후 역사책 읽기는 나의 취미가 되었다. 세계사의 흐름 안에서 한국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즐겁다.

아직 어설픈 역사 팬에게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가슴 설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책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여성, 문학, 어학 등 여러 방면을 아우르는 논문들은 어느 것이나 진지하면서도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는 애국주의 선동의 역겨움이 없다. 일제시대의 삶을 다룬 1권은 <일제의 만행과 애국적인 독립운동>이라는 구호를 외치느라 바쁜 역사 교과서가 무시해 온 "보통 사람들의 삶"을 정당하게 평가하려고 노력한다. 차분하고 합리적인 저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상상의 날개를 펴는 동안, 국사 수업의 오래된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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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 전쟁과 사회주의의 변주곡
오쿠무라 사토시 지음, 박선영 옮김 / 소나무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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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중국 현대사를 <침략에 대한 반작용으로 만들어진 총력전 태세>라는 일관된 관점으로 읽어낸다. 침략이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을 말하지만, 2차대전 이후에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함께 미국의 위협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교과서 이후의 중국사 - 국공내전, 인민공화국 성립, 쌍백운동, 반우파 투쟁, 대약진, 문화대혁명, 천안문사태 -를 간략하고 깔끔하게 짚어 주는 개설서라는 점에서도 매력이 있지만, 역사를 보는 새롭고도 공감할 만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커다란 매력이다.

내가 동아시아 역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 한국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학문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쓴 이 중국사 개설서에서도, 대한민국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내가 사는 나라의 문제로 향했다. 일본인들의 폭력적 행위에 대한 반감에서 출발한 소박한 민족주의 정서에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들어진 폭력성을 더하고, 그것을 휴전 이후의 북한에 대한 경계심으로 굳힌 것이 오늘날 한국의 극성스러운 국가주의 아닌가. 거기에 독재권력과 기득권층의 욕망이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밝혀낸다면 저자가 찾아낸 것 이상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이 과거 이웃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겸허하게 반성하는 것이 기특하다. 그러나, 중국 공산화에 대한 미국의 영향을 언급하며 <다만 미국은 제국주의에 대한 아픈 기억을 이끌어 낸 것에 대하여 책임을 저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한 것까지는 괜찮지만, <미국의 참전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도, 그것을 토대로 중국을 노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사회주의 세력에 의한 한국 통일을 저지하고 잘하면 남한에 의한 통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럴지라도 한국전쟁은 본래 통일을 둘러싼 한민족 내부의 전쟁으로서 타국이 개입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한 것에는 '이봐, 이건 너무하잖아?'라는 느낌이었다. 일본인인 당신은 남의 일이니까 쉽게 말하지만, 미국이 한국 전쟁에 참전 안 했다면, 난 지금 지도자 동지를 위해 쫄쫄 굶어야 한다고! 뭐, 이런 당혹감 역시 동아시아 역사를 읽는 즐거움의 하나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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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온천 이야기 - 한일 목욕문화의 교류를 찾아서
다케쿠니 토모야스 지음, 소재두 옮김 / 논형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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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중년 남자, 문학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 호기심 많은 성격으로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하고 봄. 재일한국인인 아내의 영향으로 한일 관계에 관심이 많음."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 그려지는 저자의 모습이다. 우연히 들른 동래온천의 허심청에서 본 옛 온천지의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해 근대의 사료부터 한문으로 된 조선 선비들의 입욕기까지 온갖 사료들을 뒤지고, 해운대에서 금강산까지 유명 온천지들을 발로 뛰며 한국인들도 몰랐던 한국의 목욕 문화사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이는 이런 아저씨다. 역사 전공은 아니지만 사료를 대하는 태도는 진지하고, 사실과 의견을 깔끔하게 구분하여 제시하는 데서는 오랫동안 학문적인 글들을 다루며 터득한 익숙함이 느껴진다. 덕분에 읽기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신뢰감이 든다. 일상적이면서도 좀처럼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흥미로운 소재를 골라 풍부한 사진 자료와 함께 제시했고, 목욕탕 사람들과의 생생한 인터뷰로 읽는 재미를 더했다.

 

알라딘의 책 소개에서 이 책을 보고 꼭 사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주무대인 동래온천이 내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온천장에 있는 여자중학교의 이름이 有樂이라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불건전한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어쨌든 그곳이 나의 모교이다. 중산층 거주지역이 가까운 여유 있고도 자유분방한 교풍 속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정든 거리의 풍경이 떠올라  읽는 내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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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성 인류학 - 무의식에서 발견하는 대안적 지성, 카이에 소바주 5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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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리뷰 쓰려고 들어와 보니 다른 분들의 평가가 좋지 않아서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잣대로 평가할 때 약점이 있는 책인 것은 맞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록이어서 정리가 덜 된 부분이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저자 자신이 기존의 합리적 형이상학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측면은 동시에 이 책이 가지는 매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우선 전자는 실재로 강의를 듣는 듯한 현장감과 경쾌함을 느끼게 한다. 2년 동안 <까이에 소바쥬> 강의가 이루어진 <주오 대학>은 최고 레벨이라기에는 무리가 있는 그저 중간 정도의 학교다. 따라서 저자가 구사하는 화법은 보통 정도의 인문적 소양을 지닌, 고등학교 무난하게 졸업한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쉬운 화법으로 신화, 민속, 인류학, 정치, 경제, 종교, 과학을 망라하는 흥미진진한 세계를 발빠르게 오가는 이 강의는 대학 시절, 두 시간이 어찌 가는지 모를 정도로 푹 빠져 들곤 했던 인기 강좌들을 떠올리게 한다. 단언하건데, 아주 즐겁게 읽히는 책이다.

근대적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 역시 중요한 측면이다. <합리적 이성>이란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지만, 때로는 그 뒤에 숨어 있는 권력의 의도를 교묘히 위장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종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절대 권력들을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상적으로는 <기독교>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제시하는 진리에 대하여 "믿습니다!"라고 말해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최선인지 의문을 품고,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것은 교육 받은 사람이 져야 할 중요한 의무이다. 저자의 방식이 유일한 해법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식의 대안적 사고는 분명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역자 후기에 소개된 저자의 다마 대학 예술인류학연구소 소장 취임사 가운데서 재미 있는 표현을 발견했다. 현대인은 가축화되고 있다. 야생의 사고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 <국민국가>와 <자본주의>라는 목장의 울타리를 깨부수고 어두컴컴한 신화의 숲으로 달려나가는 상상으로 나는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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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apagos55 2006-02-16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4권이 너무 붕 뜬 느낌으로 진행되서인지 잘 와닿지 않는 면이 있었는데, 지금 5권을 읽으면서 1,2,3,4권의 내용이 비로소 크게 통합되는 느낌이 들어요. 굉장히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몽골 세계제국 - 아시아총서 제7권
임대희 / 신서원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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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도 더 전에 키아누 리브스가 나오던 할리우드 영화에서 희화화된 칭기스칸을 본 기억이 있다. 공중전화 박스를 타고 과거로 날아간 주인공들이 만난 칭기스는 전형적인 야만인이었다. 이런 영화를 만든 미국인들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역시 몽골에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역사적으로 몽골 제국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한국인이 가진 몽골상은 말을 탄 침략자 정도인 듯 하다.

저자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팽배한 몽골에 대한 편견이 명대에 편찬된 악의에 찬 元史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포함했던 이 거대 제국을 기록한 다른 기록,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제국의 正史인 Jami at-Tavarikh 즉, 集史를 바탕으로 대제국의 역사를 조망한다. 한문과 페르시아어 유럽어 등으로 기록된 많은 사료를 두루 아우르는 저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번영하던 세계 제국의 화려한 모습이 독자의 눈앞에 펼쳐진다. 강한 전사이고 실리에 밝은 상인이며, 태양을 숭배하고 부족의 결정을 존중하는 소박한 유목민이기도 했던 수백년 전의 몽고인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저자의 펜 끝에서 연구 대상에 대한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인 나에게는 몽골 제국과 고려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 특히 재미있었다. 저자는 '이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을 계속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칭찬하면서도 '민중을 희생하고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시킨 반세기 가까운 장기전을 치르는 것 외에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나라인 일본에 대한 '국가로서의 상대에 대한 응대감각이 극히 희박했다'라는 엄격한 비판에 비하면 정말로 조심스런 표현이지만, 삼별초의 활약만을 거듭 강조하는 학교 교육이 애써 무시했던 당연한 질문을 일깨운다. 무신정권과 '왕정 복고'에 대한 외국인 시점의 해석도 획일화되고 미화된 역사를 배운 나에게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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