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15권 양장본 세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7년 2월
품절


로마인조차도 고대 최고의 전술가로 인정하게 된 한니발인데, 사군토 공략에 8개월이나 걸렸다. 현대 전사가들은 쌍방의 군대가 어울려서 싸우는 대규모 회전의 전술에서는 한니발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지만, 성을 공격하는 전술을 서툴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사군토를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런 도시쯤은 203고지를 공략할 때 악전고투한 노기 마레스케(러일전쟁 때 여순을 함락한 일본 육군대장-역자주?) 같은 사람도 쉽게 ㅅ함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내 생각에, 한니발은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끈 것 같다. 사군토 공략전을 오래 끌어, 로마의 선전포고를 유발하려 한 게 아닐까. 곤경에 빠진 동맹국을 내버려두고 못 본 체하는 것만큼 당시 로마인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2-116쪽

한니발이 알렉산드로스를 배운 것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같은 인간이 아니다. 한니발과는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적의 허를 찌르거나 책략을 꾸민 적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이라는 민족성의 차이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와 한니발이라는 개인의 성격 차이로 돌릴 수밖에 없다.
호메로스의 영웅들 가운데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사랑한 것은 고귀하고 용감하지만 책략과는 인연이 없는 아킬레우스였다. 한니바리 좋아한 영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교묘한 계략으로 트로이를 함락시킨 오디세우사가 좋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교묘하게 고안된 전략 전술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의 성격에 맞지 않으면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기질에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법이다. 기원전 4세기의 '아킬레우스'는 야습조차도 하려들지 않았지만, 한니발은 기원전 3세기의 '오디세우스'였다. -2-194쪽

특히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정의와 비정의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 범죄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전쟁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라도 열렸다면, 한니발이 전범 제1호가 되었을 것이다.
강화 내용은 분명히 엄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략) 카르타고에 대한 요구만이 유독 가혹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로마인들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렀듯이,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카르타고 쪽이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한니발이 교묘하게 로마의 선전포고를 유도했다 해도 전쟁을 시작한 것은 카르타고다. 로마가 치른 16년 동안의 노고, 10만 명의 넘는 전사자, 10명이 넘는 집정관급 사령관의 죽음을 생각하면, 패전국이 되긴 했지만 카르타고가 치른 희생은 놀랄 만큼 약소하다. 이것을 보아도, 로마인은 패자와 강화를 맺을 때 증오에 눈이 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강화 교섭에 직접 관여한 스키피오의 인품이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강화를 민회에서 군말없이 승인한 로마인의 성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맺은 강화는 엄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보복이 아니었고, 하물며 정의가 비정의에 내리는 징벌은 전혀 아니었다. 인류가 결코 초탈하지 못하는 전쟁이라는 악업을 승자와 패자가 아니라 정의와 비정의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렇게 구분했다고 해서 전쟁이 소멸한 것도 아닌데.-2-343쪽

나는 제1권에서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로마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이 관계는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의 관계다. (중략) 기원전 201년부터 기원전 187년 무렵까지 원로원에서 스키피오의 영향력은 막강했는데, 이 시기에 스키피오가 생각하고 실천한 대와관계는 바로 이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였던 것 같다. '파트로네스'는 패권국이 된 로마다. '클리엔테스'는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그 휘하에서 독립과 자치를 누리는 동맹국이다. 로마의 책무는 '클리엔테스'를 보호하는 것이다. 로마인 사회에서 이 관계를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요소가 '신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와 동맹국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도 착취나 이용이 아니라 신의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의 연구자들, 특히 통치 방식에 민감한 영국 학자들은 이 시기 로마의 대외정책을 '온건한 제국주의'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온건한 제국주의 노선에도 약점은 있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가 양쪽 다 같은 관점에 서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약점이다. 즉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이 노선은 성립하지 않는다. '파트로네스'가 주장한다.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자유는 제한하겠지만, 질서와 안전은 보장하겠다. '클리엔테스'가 반박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스키피오 시대부터 2천 3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인류는 이 양자 가운데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 아직껏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2-376쪽

(기원전 1세기에) 적어도 200만 명을 헤아렸던 노예들의 분야별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노예 가격은 알려져 있다. 그것을 비싼 쪽부터 차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교사: 그리스어나 웅변술을 로마의 양갓집 자제에게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그리스인의 독점시장이기도 했다. 비싼 경우에는 로마 시내의 단독주택이나 나폴리 근교 해변의 별장을 사는 것과 맞먹는 값이었다. 이만한 투자를 했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노예라고 해도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대단히 정중하게 대우했다. 그리스어 문장을 잘못 썼다는 이유로 교사가 학생에게 체벌을 가해도 부모는 항의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만큼 교사 노예가 강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2. 숙련 기술자: 의사, 건축가, 조각가, 화가. 엔지니어는 동족 중에서 배출한 로마인이지만, 건축가나 예술가를 동족 중에서 배출한 아테네인과는 달리 건축이나 조각, 회화, 모자이크 같은 조형 예술은 노예에게 맡겼다. (계속)-3-211쪽

3. 상급 기술자: 교역에 종사하거나, 농장 경영을 담당하거나, 주인의 비서 노릇도 할 수 있을 만한 머리를 가진 노예를 가리킨다. (중략)
4. 일반 기술자: 가게 지배인, 장인, 예능인, 검투사
5. 춤이나 음악 연주 기능을 가진 여자 노예
6.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남녀 노예: 다만 요리사의 경우는 유명해지면 숙련 기술자로 간주되어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또한 같은 가사노동이라도 집사나 주인집 아이들의 양육을 맡는 유모나 하인은 지위도 높고 값도 비쌌다.
7. 비숙련 노동자: 농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
8. 아동 노예 (중략)

로마 사회에서 노예반란이 적었던 이유로는, 우선 노예라도 한식구처럼 대우받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노예들 사이의 계층화도 이유가 될 것이다. 정중한 대우를 받는 교사 노예나 숙련 기술자 노예가 양치기 노예와 공동전선을 펴는 것도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다. 세번째 이유로는 계급간의 유동성을 들 수 있다. 로마 사회에서 해방 노예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노예가 되기만 하면 약간의 재산과 아들이 있는 경우에는 투표권도 취득할 수 있고, 재산이 없는 자라도 자식 대가 되면 완전한 로마 시민이 될 수 있었다.

(폰토스 왕 미트라다테스가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살루스티우스의 '역사'에 수록)

268
"실제로 로마인들은 예로부터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외국과 전쟁을 해온 민족이었소. 부와 영토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바로 그것이오."

270
"그들도 옛날에는 난민이었소. 나라도 없고 가족도 없는, 낙오자 무리에 불과했었소.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희생 위에 국가를 세웠소. 어떤 법률도, 어떤 인간의 윤리도, 어떤 신도, 친구나 동맹자가 가진 것을 강탈하고 그들을 파멸시키는 행위를 용납할 리 없소. 악의에 찬 눈으로 다른 민족을 노려보고 그들을 노예화하는 것을 용납할 리 없소.
그렇기는 하지만, 자유를 바라는 자는 적고, 공정한 주인을 바라는 자는 많은 것이 바로 인간이오. 우리 오리엔트의 군주들은 이 점에서는 늘 신하들한테서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고 있소. 우리는 백성들의 이익을 배반하거나 복수하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오."
-3-268쪽

(BCE 62, 키케로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아시아는 우리 로마 덕분에 끝없는 전쟁과 내분에서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이 가진 부의 일부가 로마의 패권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바쳐진다 해도 그것을 불평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희생은 이 지방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기 때문이다."-3-272쪽

이 대답을 가지고 사절이 요새로 돌아간 뒤, 요새에서는 많은 무기가 밖으로 내던져졌다. 하지만 3분의 1은 요새 안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래도 카이사르는 약속을 지켰다. 아투아투키족과의 강화는 그날로 성립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제3보초시, 즉 자정이 지났을 무렵, 숨겨둔 무기를 휴대한 사내들이 요새에서 빠져나와 진영에서 잠자고 있던 로마군을 습격했다. 한밤중의 격투 끝에 4천명의 적병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요새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로마군은 이제 경비병도 없는 성문을 통해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농성하고 있던 전사와 주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다. 노예상인들이 카이사르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노예로 팔린 사람은 모두 5만3천 명에 이르렀다.
로마인은 약속을 매우 중요시한다. 로마인은 다신교를 믿으니까 그것은 신과의 계약이 아니라 인간끼리의 약속이다. 이민족도 대등한 인간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이민족과 맺은 약속을 믿는 것이다. 일신교적인 계약에 익숙한 서양인보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격언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동양인이 인간끼리의 약속을 중시한 로마인의 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카이사르가 보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맺은 약속을 어기고 기습을 자행한 행위는 명백한 죄였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에게 어울리는 운명은 노예라고 그는 생각했다.-4-263쪽

p303
이로부터 1세기 뒤인 제정시대가 되면 라인강을 로마의 방어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 카이사르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라, 라인강 서쪽 연안인 이 일대에 로마의 군사기지가 염주처럼 줄줄이 세워진다. '좋은'이라는 뜻의 라틴어 '보나'를 어원으로 하는 본, 코로니아를 독일식으로 발음한 쾰른이 대표적인 로마의 군사기지다.
이건 여담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서독이 본에 수도를 둔 것은 물론 베를린이 동독 안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이긴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히틀러와 결별하고 싶은 독일인의 마음속에 라인강 서쪽에 속하고 싶다는 소망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를 추종하는 독일인들을 규탄할 때, 마치 라인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고대 로마인이라도 된 것처럼 라인강 건너편의 비문명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p308
그리고 이튿날 오전 10시, 최초의 로마 선박이 브리타니아 해안에 도착했다. 윈스턴 처칠이 대영제국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말한 기원전 55년 8월 26일이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역사치고는 너무나 위엄이 없는 첫걸음이었다.-4-303쪽

카이사르는 지난해의 첫번째 브리타니아 원정에는 기병대 없이 2개 군단만 데려갔지만, 이번의 두번째 원정에는 5개 군단과 2천 명의 기병대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기병대는 대부분 갈리아 부족에서 참가한 병사들이었다. 이것은 기병이 꼭 필요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갈리아의 지배 계급으로 구성된 그들을 브리타니아로 데려감으로써 사실상의 인질을 잡아두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브리타니아에 가 있는 동안 갈리아가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을 너무 민감하게 알아차린 자들 가운데 하이두이 족장 둠노리스가 있었다. 그는 바다가 무섭고 종교도 그것을 금하고 있으니까 갈리아에 남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카이사르는 당연히 거절했다. (중략)
25일 동안 기다린 뒤, 바람은 순풍인 남서풍으로 바뀌었다. 카이사르는 승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모두 배에 올라타느라 소란해진 틈에 둠노릭스가 자기 부족의 기병만 데리고 탈주했다. 이를 보고받은 카이사르는 당장 승선을 중지시키고, 탈주자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추격하러 가는 로마 기병들한테는 둠노릭스가 돌아오기를 거절하면 죽여도 좋다고 일렀다. 마침내 따라잡힌 둠노릭스는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다."라고 외치면서 죽었다. 나머지 기병들은 모두 돌아왔다. 그리고 승선이 재개되었다.-4-325쪽

탑수스 회전이 끝난 지 엿새가 지난 4월 12일, 카토는 우티카의 유지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로마인이 손님을 초대하는 저녁식사는 플라톤의 <향연>에도 나오듯이 침대형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주제를 정하여 토론하는 자리다. (중략) 이 자리에서 대화 주제를 정하고 사회를 맡는 것은 초대자, 즉 주인의 역할이었다. 카토가 주최한 향연에서는 탑수스 회전은 화제에 오르지 않았고, 오로지 철학적인 명제만 논의되었다.그날 밤의 주제는 '자유란 무엇인가'였다고 한다. 카토는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면서,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은 설령 죽는다 해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계속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향연이 끝나고 카토는 침실로 물러갔다. 하지만 곧 잠자리에 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등불을 가까이 갖다놓고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었다. <파이돈>은 사형집행일을 내일로 앞둔 소크라테스가 감옥을 찾아온 제자들과 삶과 죽음에 관해 대화하는 광경을 서술한 철학서다. 잠시 이 책을 읽은 뒤, 카토는 단검을 꺼내 배를 찔렀다. (중략) 달려온 의사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카토의 상처를 꿰매려고 했다. 그러나 카토는 그 손을 뿌리치고, 자기 손으로 내장을 끄집어내어 겨우 죽을 수 있었다. 향년 49세였다.-5-262쪽

시민권이 문제가 되는 것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시민의 의무로 되어 있는 병역도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지원제가 되었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된다. 병역 의무가 없는 대신 속주세를 낼 의무가 있는 속주민과는 달리,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이런 종류의 직접세를 낼 의무도 없다. (중략) 외국인이 로마 시민을 죽이면 로마는 잠자코 있지 않았다. 또한 사유재산 보호와 개인의 인권 보호를 양대 지주로 삼고 있는 로마 법 체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한 마디 하소연도 못하고 재산을 강탈당할 염려나 재판도 받지 않고 처형당할 염려가 없다는 것은 커다란 이점이었다. 혈연관계가 없으면 시민권을 주지 않은 아테네와 달리, 로마는 시민권에 그런 제약을 두지 않았다. -5-300쪽

지금까지 카이사르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연구자들도 기독교라는 일신교 문명에서 자유로워지기가 어렵기 때문인지,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서술할 때는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합리적 정신의 소유자인 카이사르니까 신으로 격상된 것을 오히려 곤혹스러워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나는 800만이라는 신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기독교도 연구자들이 느끼는 당혹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당시 로마인도 800만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마구잡이로 신을 만드는 경향은 다신교 민족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왕성했다. (중략)
하지만 신이 된 덕에 유감스러운 일도 있었을 것이다. 비범한 인물이긴 했지만 유머 감각이 없었던 옥타비아누스가 신이 된 카이사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를 제외한 모든 저술을 폐기처분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덕에 카이사르가 청년 시절에 썼다는 시와 희곡, 그리고 수많은 편지를 포함한 카잇하르의 작품이 모조리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그 편지들 중에는 애인에게 보낸 연애편지도 많았다고 한다.
-5-441쪽

카이사르는 정복당한 민족이 반기를 드는 것은 민중이 자주적으로 봉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층이 민중을 선동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지배층이 불만을 품는 것은 타민족에게 정복당하여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중략)
이리하여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도층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부족장의 권력과 권위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유력한 부족장에게는 원로원 의석까지 주고, 율리우스라는 자신의 가문 이름도 하사하고, 자제들에게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주어 로마 유학까지 시켰다.-6-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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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7-06-0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이 대출중이었으므로, 2,3,4,5,6 대출. 과연 나흘 간 다섯 권을 다 읽을 수 있을까? 2권을 100여 페이지 읽은 현재의 인상은 무척 일본인스러운 작가라는 것. <로마진노 모노가타리>라니 라는 제목부터 <겐페이 모노가타리>를 연상시킨다. 시바 료타료의 역사 소설이 떠오르기도 하고.

mizuaki 2007-06-0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려온 2-6권을 다 읽었다. 마지막 6권은 중간에 던져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읽었다. 음험하고 집요하며 자유에 대한 증오를 경건함으로 포장하는 아우구스투스, 진짜 재수 없다. 파테르 파트리아이? 흥! 아버지 수령님이라고 하면 딱 맞겠다.
군사력에 의한 대제국에게 침략 전쟁은 숙명이었을 것, 카이사르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이 명백한 침략 전쟁의 잔혹함에 눈 감아 버리는 시오노 나나미도 재수 없다. 이런 사람은 오비디우스의 풍자와 유머가 가지는 의미같은 건 평생 가도 이해 못할 것이다. <메타모르포세스>에 나오는 제우스의 바람기와 난행은 카이사르에, 아폴로의 어줍잖음은 아우구스투스에 대응된다는 것이 이제는 너무 명백한 내게, 오비디우스 추방에 대한 시오노의 뒷 얘기는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구판절판


그 사이에 파에톤의 아버지는 상심하여 평소의 광채를 잃은 채 헝클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마치 일식으로 어두워졌을 때와도 같았다. 그는 빛도 자기 자신도 날도싫어져 슬픔에 마음을 맡긴 채 슬픔에도 노여움을 더하여 세상을 위해 봉사하기를 거절했다. "충분해."하고 그는 말했다. "태초 이래로 나는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었지. 그게 내게 주어진 몫이었어. 이젠 나도 끝없는 노고에, 아무 명예도 없는 노고에 싫증이 났어. 누구든 다른 이가 광명의 마차를 몰아보라지 아무도 나서지 않고 모든 신들이 자신은 몰 수 없다고 고백하면, 그<윱피테르> 자신이 한번 몰아보라지. 그러면 그는 내 고삐를 잡으려 하는 동안에도 아비들에게서 자식을 빼앗는 벼락을 놀리겠지. 그가 불 같은 발을 가진 말들의 힘을 몸소 겪어보게 되면, 그때에는 누가 말들을 잘 몰지 못했다고 해서 죽어 마땅한 것은 아님을 알게 되겠지." -2-381쪽

태양신이 이렇게 말하자 모든 신들의 그의 주위에 둘러서서 세상을 암흑 속에 빠뜨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간청했다. 윱피테르도 벼락을 던진 것을 사과하며, 왕들이 그러하듯 간청에 위협을 덧붙였다. 그러자 포이부스는 정신이 얼떨떨하고 그때까지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말들을 한데 모으더니 속이 상해 미친 듯이 채찍과 막대기로 치며(그는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아들의 죽음은 말들 탓이라고 나무랐다.-0쪽

윱피테르는 그녀<칼리스토>가 지쳐 있고 무방비 상태임을 보자 말했다. "역기서 바람을 좀 피운다 해도 내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겠지. 설사 알게 되더라도 이만하면 그 대가로 잔소리를 들을 만하지 않은가" 그는 당장 디아나의 옷에 디아나의 얼굴 모습을 하고는 말했다. "오오, 나를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 한 명인 소녀여. 어느 산등서이에서 사냥했는가?" 소녀가 풀숲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보기에는 윱피테르보다 더 위대하신 여신이시여. 그분께서 들으신다 해도 상관없어요."-2-422쪽

윱피테르는 미소지으며 자신이 자신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 것을 기뻐하며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하나 그것은 처녀가 할 법한, 조심스레 건네는 그런 입맞춤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느 숲에서 사냥했는지 이야기하려는데 그분은 포옹으로 이를 방해했고, 점잖지 못한 본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여자가 할 수 있는 한 그분에게 반항했다. (사투르누스의 따님이여, 그대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더 관대했을 것이오.) 반항했지만 소녀가 누구를 이길 수 있으며, 누가 윱피테르를 이길 수 있겠는가? 윱피테르는 승리자로서 높은 하늘로 돌아갔고, 그녀는 수풀과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숲이 싫어졌다. -0쪽

오직 윱피테르의 아내만이 비난하는 말도 찬동하는 말도 않고 아게노르의 집안에 닥친 재앙을 고소해하고 있었으니, 그녀는 이제 자신의 증오심을 튀루스 출신의 시앗에게서 그녀의 친척에게로 돌렸던 것이다. 보라, 묵은 이유에 새 이유가 추가되었으니 그녀는 세멜레가 윱피테르의 씨를 밴 것을 알고는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험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했다. "내가 그토록 자주 험담을 해서 얻은 게 뭐지? 이번에는 아예 그녀를 혼내줘야겠어. 암, 그녀를 말이야. 내가 위대한 유노라고 불리는 것이 정당하다면, 내 오른손으로 보석이 박힌 홀을 휘두르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리고 내가 하늘의 여왕이자 윱피테르의 누이이자 아내라면 말이다. 누이라는 것은 확실치 않은가!-3-256쪽

하지만 그녀는 은밀한 사랑으로 만족하고 있고, 내 침상에 대한 모욕은 잠깐 동안일지도 모르지. 하나 그녀는 설상가상으로 임신을 하여 남산만 한 배로 명백한 유죄 증거를 드러내고 있고 같은 윱피테르에 의해 어머니가 되려고 하는데 그런 행운은 내게도 가까스로 주어지지 않았던가 제 미모에 대해 어찌 그리 자신만만할 수 있는지. 내 그 자신감에 배반당하도록 만들어주겠어. 윱피테르에 의해 그녀가 스튁스의 물속에 잠기지 않는다면 나는 사투르누스의 딸이 아니지."
이렇게 말한 그녀는 옥좌에서 일어나 황금빛 구름으로 몸을 가리고 세멜레의 문턱을 찾았다.-0쪽

운명의 섭리에 따라 지상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두 번 태어난 박쿠스의 요람이 안전한 가운데, 마침 윱피테르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주에 거나하게 취해 무거운 근심 걱정들을 내려놓고ㄴ는 역시 짬이 난 유노와 부담감 없이 농담을 주고 받았다. "물론 그대들 여인들의 느끼는 사랑의 쾌감이 우리들 남편들에게 주어지는 것보다 더 크겠지요." 유노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현명한 티레시아스의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는 양쪽의 사랑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3-316쪽

그래서 그는 이 우스꽝스런 논쟁의 중재판관으로 임명되자 윱피테르의 말이 옳다고 확인해 주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투르누스의 딸은 티레시아스의 판결에 과도하게 속상해하며 그의 눈이 영원한 어둠 속에 머물도록 저주했다고 한다. 하나 전능한 아버지는 (어떤 신도 다른 신이 행한 일을 취소할 수는 없기 때문에) 티레시아스에게 눈 대신 미래사를 알 수 있는 힘을 주어 명예로써 그의 벌을 가볍게 해 주었다. -0쪽

그<나르킷수스>는 친숙한 물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아아, 헛되이 사랑받은 소년이여 그러자 그 장소가 그의 말을 돌려보냈다. 그가 "잘 있어" 하고 말하자 에코도 "잘 있어!"하고 말했다. 그는 지친 머리를 푸른 풀 위로 숙였다. 그러자 죽음이 주인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던 그 두 눈을 감겨 주었다. -3-499쪽

그는 저승의 거처에 받아들여진 뒤에도 스튁스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누이들인 물의 요정들은 애도의 표시로 머리털을 잘라 오라비에게 바쳤다. 나무의 요정들도 애도했고, 에코 역시 애도하는 그들에게 대꾸하며 함께 애도했다. 그들은 벌써 화장용 장작더미와 휘둘리는 횃불들과 관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시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시신 대신 노란 중심부가 하얀 꽃잎들에 둘러싸여 있는 꽃 한 송이<수선화>를 발견했다.-0쪽

우라니에가 대답했다. "여신이여, 그대가 어떤 용건으로 우리들의 집을 찾아오셨든 우리는 그대를 진심으로 환영해요. 그 소문은 사실이에요. 그 샘은 페가수스의 작품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팔라스를 신성한 샘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여신은 말발굽에 채여서 생겨난 샘물을 보고 한동안 감탄하다가 오래된 숲의 임원들과 동굴들과 수많은 꽃들이 만발해 있는 풀밭들을 둘러보며 므네모쉬네의 딸들이야말로 하는 일로 보나 살고 있는 환경으로 보나 똑같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에게 자매들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오오, 그대의 용기가 그대를 더 위대한 일들로 인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동아리에 속했을 토리토니아여, 그대의 말은 사실이며 우리의 예술과 처소는 그대의 칭찬을 받을 만도 하지요. 우리는 행복한 몫을 받을 셈이지요."-5-260쪽

"내가 보고 있는 그대의 상처가 나를 고발하고 있구나. 그대는 내게 슬픔과 자책의 원인이오. 그대의 죽음은 내 손 탓으로 돌려질 것이오. 내가 그대를 죽게 했으니까. 하지만 대체 내 죄는 무엇인가? 그대와 시합한 것을 죄라고 할 수 없고, 그대를 사랑한 것을 죄라고 할 수 없다면 말이오. 아아, 내가 그대를 위하여, 아니면 그대와 함께 목숨을 버릴 수 있었으면 하나 운명의 법칙이 그러지 못하게 하니 그대는 늘 나와 함께할 것이며, 나는 그대를 기억하고는 입에 올릴 것이오. 내 손으로 연주하는 뤼라도, 내 노래도 그대를 찬미할 것이오. 내 그대를 새 꽃으로 만들어 내 신음 소리를 그 꽃잎에 아로새길 것이오. 그리고 때가 되면 가장 용감한 영웅도 그 꽃으로 변신하여 똑같은 꽃잎에서 제 이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오."-10-197쪽

아폴로께서 거짓을 모르는 입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동안, 보라, 바닥에 쏟아져 풀에 흔적을 남기던 피는 더 이상 피가 아니었으니, 그 대신 그곳에 튀로스 산 자줏빛 염료보다 더 빛나는 꽃이 피어났던 것이오. 그것은 백합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백합이 은빛인 데 반해 그것의 색깔은 자줏빛이었다. 포이부스께서는 그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이런 명예를 수여하는 것은 그분이셨기 때문이오.) 당신의 신음 소리르 손수 꽃잎에 적어 넣으시니, 그 꽃에는 애도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인 '아이 아이'가 쓰여 있소. 스파르테는 휘아킨투스를 낳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그의 명예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니, 해마다 휘아킨투스제가 돌아오면 아직도 그들은 선조들의 관습에 따라 엄숙하게 축제를 거행하오.-0쪽

신은 무쇠로 트로이야인들의 몸을 땅에 누이고 있던 펠레우스의 아들을 가리키며 그를 향하여 활을 돌리더니 죽음을 가져다주는 손으로 화살을 확실하게 인도했다. 헥토르가 죽은 뒤 노왕 프리아무스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아킬레스여, 그토록 위대한 자들을 이겼던 그대가 그라이키아인 아내의 비겁한 납치자에게 지고 말았구려! 만일 그대가 한 여인의 손에 전사할 운명이었다면 그대는 차라리 테르모돈의 양날 도끼에 죽기를 바랐으리라!-12-604쪽

프뤼기아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고, 펠라스기 족의 자랑이자 보루였으며, 불패의 우두머리였던 아이아쿠스의 손자는 이제 불태워졌다. 똑같은 신이 그를 무장시켜주고 화장해주었다. 전에는 그토록 위대했던 아킬레스는 항아리 하나도 다 채울 수 없을 만큼의 재로 남았다. 하나 그의 명성은 온 세상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살아있다.-0쪽

그러자 그토록 자주 혼자서 헥토르에게 대항하고, 칼과 불과 윱피테르에 대항하던 자도 분노라는 단 한 가지에게만은 대항하지 못했으니, 아무도 이기지 못하던 영웅을 괴로움이 이겼던 것이다. 그는 칼을 빼들고 말했다. "여기 이것은 확실히 내 것이다.울릭세스는 이것도 내놓으라고 요구할까? 이것은 내가 나를 위해 써야겠다. 프뤼기아인들의 피에 자주 젖곤 하던 이 칼은 이제 제 임자의 피에 젖게 되리라. 아이약스 외에는 아무도 아이약스를 이길 수 없도록 말이다." -13-383쪽

그러더니 그는 그때까지 부상당한 적이 없는 가슴의, 칼이 들어갈 수 있는 곳에다 죽음의 칼을 찔러 넣었다. 어떤 손도 깊이 바힌 무기를 뽑아낼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하나 피가 그것을 밀어냈다. 그리하여 피로 빨갛게 물든 대지가 초록빛 잔디밭에서, 전에 오이발루스의 자손의 상처에서 태어났던 자줏빛 꽃 한 송이를 피어나게 했다. 그 꽃잎 한가운데에는 영웅과 소년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여기서는 이름을 나타내고, 저기서는 곡하는 소리를 나타낸다. -0쪽

곡식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참으로 배은망덕한 자요. 구부정한 쟁기의 무거운 짐을 벗기자마자 감히 제 농사꾼을 죽일 수 있는 자는, 단단한 땅을 그토록 자주 새로 갈아엎어 그토록 수확을 거둬들이게 해주었던, 자기를 위해 일하다 지친 그 목덜미를 도끼로 내리칠 수 있는자는!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은 신들까지 자신들의 범죄에 끌ㅇ들여 하늘의 신은 노고를 견디는 황소를 죽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믿고 있소.-15-122쪽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는 것들을 다 열거하려고 하다가는 그러기 전에 날이 저물 것이고 포이부스는 헐떡거리는 말들이 깊은 바닷물 속에 잠기게 할 것이오. 그와 같이 우리는 시대도 바뀌어 어떤 민족들은 힘이 강해지고 다른 민족들은 쇠퇴하는 것을 보게 되오. 그와 같이 트로이야는 재물도 많고 남자들도 많아 십 년 동안 그토록 많은 피를 내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낮추어져 오래된 폐허밖에 보여줄 것이 없고 부 대신 선조들의 무덤들만 보여주고 있소. 스파르테도 한때는 이름을 날렸고, 위대한 뮈케나이도 강성했으며, 케크롭스의 성채와 암피온의 성채도 그러했지요. 지금 스파르테는 보잘것없는 땅이고, 높다란 뮈케나이는 넘어졌으며, 오이디푸스의 테바이는 이름말고 무엇이며, 판디온의 아테나이에 이름말고 무엇이 남았단 말이오? 소문에 따르면 지금은 다르다누스의 로마가 일어나 압펜니누스에서 태어난 튀브리스의 물결 바로 옆에다 엄청난 노력을 들여 통치의 기틀을 닦고 있다고 하오. 따라서 로마는 자람으로써 모양을 바꾸고 있고, 언젠가는 광대한 대지의 수도가 될 것이오. 예언자들과 운명을 알려주는 신탁들이 그렇게 말한다고들 하오.-15-422쪽

이제 내 작품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윱피테르의 노여움도, 불도, 칼도, 게걸스런 노년의 이빨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원한다면, 오직 내 육신에 대해서만 힘을 갖고 있는 그날이 와서 내 덧없는 한평생에 종지부를 찍게 하라. 하지만 나는, 나의 더 나은 부분은 영속하는 존재로서 저 높은 별들 위로 실려 갈 것이고, 내 이름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힘에 정복된 나라들이 펼쳐져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나는 백성들의 입으로 읽힐 것이며, 시인의 예언에 진실 같은 것이 있다면, 내 명성은 영원히 살아남게 될 것이다.-15-8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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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 돌베개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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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이 텃골로 들어오던 시기는 조선시대의 전성기로 양반과 상민의 계급 차별이 엄밀하였던 시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하여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고 일부러 상놈 노릇을 하였다. (중략) 그후 우리 조상은 지금까지 텃골 주위에서 살고 있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 등 토착양반들에게 천대와 압제를 대대로 받았다. (중략) 강, 이씨들은 양반의 권세로 우리 집안의 토지를 강점하고 금전을 강탈한 후 농노로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경제적 압박이다. 강,이씨들은 비록 머리 땋은 어린 아이라도 70-80세 되는 우리 집안 노인을 만나면 '이랬나' '저랬나' '이리 하게' '저리 하게'하며 낮춤말을 쓰는 반면, 우리 집안 노인들은 갓 성인이 된 아이에게도 반드시 높임말을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언어의 천대이다. -22쪽

다섯 살 때(1880년) 우리집은 종조부, 재종조부, 삼종조부 댁 등을 따라 강령군 삼가리로 이사하여 두 해 살았다. (중략) 하루는 그 집 사랑방에소 놀고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매질하였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을 하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사랑 앞문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알아채고 미리 대비할까 봐 칼로 울타리를 뜯어 후문으로 돌입할 계획을 세웠다. 울타리를 뜯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안마당에 있던 17,8세 되는 처녀가 나를 보고 놀라 제 오라비에게 일렀다. 나는 다시 그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칼까지 빼앗겼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칼을 잃어버린 죄로 부모님께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내내 시치미를 떼었다. -24-25쪽

아버님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이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였다. 음주는 한량이 없고 취하시면 양반 강,이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 1년에도 여러 번 해주 관아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키셨다. 그런데 사람을 구타하면 맞은 자를 때린 자의 집에 떠메어다가 눕혀두고 생사 여부를 기다리는 것이 그 시대 지방 관습이었다. 때문에 우리집에는 한 달에도 몇 번씩 '거의 죽게 된 사람', '전신이 피투성이 된 사람'이 사랑방에 누워 있을 때가 있었다. (중략) 해마다 세밑이 되면 우리집에서 닭,계란,연초 등을 다수 준비하여 어디론가 보냈고, 그러고 나면 감사의 표시로 달력과 해주 먹등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중략) 아버님은 영리청, 사령청에 계방이란 수속을 밟아 해마다 선물을 하였던 것이다. 미리 이렇게 계방을 해두면 영문이나 본아에 잡혀가 옥이나 영청에 몇달 몇날을 구속되더라도 실상은 사령, 영리들과 같이 먹고 잤으며, 설령 곤장, 태장을 맞더라도 시늉만 하는 헐장이었다. (중략) 이런 이유로 김순영이라면 양반의 아이와 부녀자들까지 손가락질하며 미워하였지만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27-28쪽

삼촌은 아버님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감히 덤비지 못하고 문중 친척에게만은 위아래 없이 욕하고 싸움 걸어, 할아버지와 아버님이 늘 때려주셨다. 내가 아홉 살 때(1884년) 할아버지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날 준영 삼촌이 큰 구경거리를 연출하였다. 삼촌이 술에 취해 장례일을 돌보는 호상인들을 모조리 두들겨 패고서, 급기야는 인근 양반들이 큰 생색을 낸답시고 노복을 한 명씩 보내 상여를 메고 가던 것까지 때려서 모두 쫓아버렸다. 결국 준영 삼촌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식구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중증조부 주최로 가족회의를 열어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준영 삼촌의 발뒤꿈치를 잘랐다. (중략)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추태는 상놈의 본색이요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29쪽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침산 강씨의 선조는 우리만 못하나 현재 진사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으냐. 별담 이진사 집도 그렇다." (중략)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가을에 모아주기로 하고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다. 그분은 양반이지만 글이 넉넉지 못하여 '양반의 선생'으로 고용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같은 '상놈의 선생'이 된 것이다. 선생이 오시는 날, 나는 너무 좋아서 머리 빗고 새옷 입고 마중나갔다. (중략) 이때 내 나이 열두 살(1887년)이었다.-30-31쪽

얼마 후 그와 같은 '돌림 선생'을 모셔와 공부를 하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아버님이 전신불수가 되셨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도 못하고 아버님 심부름만 하였다. (중략) 그때 아버님은 종종 나에게 이런 훈계를 하셨다.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에나 주력하여라."
그래서 나는 토지문권, 정소장, 제축문, 혼서문, 서한문 등을 틈틈이 연습하여 무식한 우리 집안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32-33쪽

(1892년 17세에 과거를 본 후)
"제가 어떻게든 공부로 입신양명하여 강가, 이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혜가 이와 같은즉,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또한 큰 선비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집안이 이같이 가난하니 앞으로 서당 공부를 그만두겠습니다."
아버님 역시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그러면 풍수공부나 관상공부를 해보아라. 풍수에 능해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복록을 누리게 되고, 관상을 잘 보면 선한 사람과 군자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이치에 맞는 말이라 생각되어
"그것을 공부하여 보겠습니다. 서적을 얻어주십시오."(중략)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 몸에 천격, 빈격, 흉격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느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38쪽

내 나이 열여덟이 되는 계사년(1893) 정초, 나는 고기도 먹지 않고 목욕하고 머리 땋고, 푸른 도포에 녹대를 매고 포동 오씨 댁으로 방문하였다. (중략) 나는 그가 양반임을 알고 있었는데, 과연 상투를 짜고 통천관을 쓰고 있었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하니 그 사람도 공손히 맞절을 하고서는
"도령은 어디서 오셨소?"
라고 묻는다. 나는 황공하여 본색을 말하였다.
"어른이 되어도 당신께 공대를 듣지 못하련만 하물며 저는 아직 아이인데 어찌 공대를 하나이까."
그이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동학 도인이기 때문에 선생의 교훈을 받들어 조금도 미안해 마시고 찾아오신 뜻이나 말씀하시오."
나는 이 말만 들어도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그와의 문답이 시작되었다. (중략) 설명을 듣고 나는 매우 마음이 흡족하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나는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중략)
당시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이야기가 인근에 두루 유포되었다. 사람들이 찾아와 "그대가 동학을 해보니 무슨 조화가 생기더냐?"고 물으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이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자기네들에게 아직 조화를 보여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김창수가 한 길 이상 공중에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다. 나의 도력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은 황해도는 물론이고 평안남북도에까지 퍼져 연비가 수천에 달하였다. 나는 황해도, 평안도의 동학당 중 나이 어린 자로 가장 많은 연비를 가졌기 때문에 별명이 '아기 접주'였다. -41-43쪽

치하포에 도착해서 여관을 겸하고 있는 나루터 주인의 집에 들어갔다. 풍랑으로 인해 유숙하는 손님들이 세 칸 여관방에 가득하였다. (중략) 조금 있다가 아랫방에서부터 아침식사가 시작되어 가운뎃방과 윗방까지 밥상이 들어왔다. 그때 가운뎃방에는 단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사람 한 명이 같이 낮은 나그네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성은 정씨라 하고 장연에 산다고 하는데, 말투는 장연 말이 아니고 경성말이었다. 촌 늙은이들은 그를 진짜 조선인으로 알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흰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였다. 가는 길을 물어보니 진남포로 간다 했다. 나는 그놈의 행색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곳은 진남포 맞은편 기슭이므로 매일매일 여러 명의 왜인이 자긷르의 본래 행색대로 통행하는 놈이다. 그러니 저놈이 보통 장사치나 기술자 같으면, 굳이 우리 조선사람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저 자가 우리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가 아닐까? 경성에서 일어난 분란 때문에 도망하여 당분간 숨으려는 것은 아닌가? 만일 미우라가 아니더라도 미우라의 공범일 것 같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다니는 왜인이 우리 국가와 민족의 독버섯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저놈 한 명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어 보리라.' (중략)-92-96쪽

그 왜놈은 별로 주의하는 빛도 없이 식사를 마치고 중문 밖에 서서 문기둥을 의지하고 방안을 들여다보며 총각아이가 밥값 계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크게 호령하며 그 왜놈을 발길로 차서 거의 한 길이나 되는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바로 쫓아 내려가서 놈의 목을 힘껏 밟았다. 세 칸 객방의 앞쪽 출입문이 아랫방에 한 짝, 가운뎃방의 분합문이 두 짝, 윗 방에 한 짝, 합해서 모두 네 짝인데, 이 방문 네 짝이 일제히 열리면서 문마다 사람머리가 다투어 나왔다. 나는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간단하게 한 마디로 선언하였다.
"누구든지 이 왜놈을 위해 내게 달려드는 자는 모두 죽이고 말리라."
선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 내 발에 채이고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칼빛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ㅡ러뜨리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주-신문에서 백범은 병기도 사용하였다고 진술했다. 즉 처음에는 돌로 치고 다음에는 나무로 때렸으며 도망가자 다시 나무로 때렸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선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 내 발에 채이고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칼빛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주-신문에서 백범은 병기도 사용하였다고 진술했다. 즉 처음에는 돌로 치고 다음에는 나무로 때렸으며 도망가자 다시 나무로 때렸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달려들려고 하던 놈이 누구냐?"
방안에 있던 자들 중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자들은 모두 엎드려서 빌기 바빴다.
"장군님, 살려주시오. 나는 그놈이 왜놈인 줄 모르고 보통 싸움으로만 알고 말리려고 나갔던 것입니다."
(주-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죽은 쓰치다(土田)는 나가사키현 대마도 이즈하라 항 상인으로 1895년 10월 진남포에 도착한 후 11월 4일 황해도 황주로 가서 활동하였고, 1896년 3월 7일 진남포로 귀환하던 길이었다.)

어머님께서는 나를 신문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경무청 문 밖에 서 계셨다. 그곳에서 간수의 등에 업혀 들어가는 나를 보시고 "병이 저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말을 잘못 대답해 당장에 죽지나 아니할까. 근심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신문 시작부터 관리 전부가 떠들어대기 시작하니 벌써 감리영 부근 인사들은 희귀한 사건이라고 구경하러 몰려들어 야단이었다. 법정 안은 발 디딜 곳이 없었고, 문 밖까지 사람들이 둘러서서 순검들에게 물어댔다.
"참말 별난 사람이다. 아직 아이인데, 도대체 무슨 사건이냐?"
간수와 순검들이 보고들은 대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해주 김창수라는 소년인데 민 중전 마마의 복수를 위해 왜놈을 때려죽였다나? 그리고 아까 감리사를 책망하는데 그도 아무 대답을 못하던걸."
이런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내가 간수의 등에 업혀 나가면서 어머님의 얼굴을 살펴보니 약간 희색을 띠고 계셨다. 여러 사람이 구경한 이야기를 들으신 까닭인 듯한데, 나를 업고 가는 간수도 어머님을 향하여 말하였다.
"당신, 안심하시오. 어쩌면 이렇게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소?"-109쪽

(19세 때 감옥에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생각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감리서 직원들이 종종 와서 내가 신서적에 열심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는 빛을 보였다.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안중근의 부친으로 동학 실패 후 도망하던 김구를 숨겨줌-인용자주)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체캑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청계동에서 오로지 고선생만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고 있던 때는, 나 역시 척?척양이 우리의 당연한 천직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고선생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한 가닥 밝은 맥이 남아 있고 세계 각국이 대부분 피발좌임한 오랑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태서신사> 한 책만 보아도 그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선 원숭이에서 멀지 않은 오랑캐들은 도리어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규가 사람답다는 느낌이 드렁ㅆ다. 그러나 높은 갓을 쓰고 넓은 요대를 두른 선풍도골의 우리 탐관오리들은 오히려 그와 같은 오랑캐의 칭호조차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15-116쪽

학교의 여교사 오인성이 이재명의 부인인데, 이군이 자기 부인에게 무슨 요구를 강경히 하였던지 단총으로 위협하니 오여사는 놀라고 겁이 나서 학교 수업을 감당치 못할 사정을 말하고 이웃집에 피해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미친 사람 모양으로 동네 어귀에서 총을 쏘아대며, 매국노를 일일이 총살하겠다고 소리를 치니 동네가 소동한다는 것이었다. 노백린과 상의하여 이군을 청해 불렀다. (중략) 계원과 내가 이의사에게 장래에 목적하는 일과 과거 경력, 학식 등을 일일이 물으니,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공부하다, 조국이 섬왜놈에게 강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으며, 지금 하려는 일은 매국노 이완용을 위시하여 몇 놈을 죽이고자 준비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도 한 자루, 단총 한 정과 이완용 등의 사진 몇 장을 품속에서 내놓았다. 계원과 나는 동일한 관찰로 그를,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으로 보았다. (중략) 그런지 한 달이 못 되어서 의사는 동지 몇 명과 함께 경성에 도착하였다. 이현에서 이의사는 군밤장수로 가장하고 길가에서 밤을 팔다가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212-214쪽

그때 서대문감옥은 '경성감옥'이라고 문패를 붙인 때인데, 수인의 총수 2000명 미만에 대부분이 의병이요, 그 나머지는 소위 잡범이었다. 옥중의 대다수가 의병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그이들은 일찍이 국사를 위하여 분투한 의기남아들이니, 기개로나 경험으로 배울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했다. 감방에 들어가서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혹은 '강원도 의병의 참모장'이나 혹은 '경기도 의병의 중대장'이니 하여, 대부분 의병 두령이고 졸병이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순전한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군대의 규율이나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 (중략) 나는 처음에 그 자들을 하등 잡범들로만 알았다가, 허위의 부하라는 말을 듣고서는 심히 통탄하였다. 저런 자가 참모장이었으니, 허위 선생이 실패하였을 것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닌가? (중략)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 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명색이야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에 순종하는 백성이 아니라고 인정하여 , 종신이니 10년이니 감금하여 두는 것으로도 족히 의병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 남아는 의로 죽을지언정 구구히 살지 않는다고 평일에 어린 학생을 가르치더니, 네가 금일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네가 개같은 생활을 견뎌 지내고서 17년후에 장차 공을 세워 죄를 갚을 자신이 있느냐?' 이 같은 생활을 하며 심신이 극도로 혼란할 때,(후략)-241-244쪽

10여년 동안 임시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이 고성낙일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를,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때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파괴) 운동을 계획하던 때 <백범일지>상권을 기술하였다. 그후 이봉창의 동경의거와 윤봉길의 홍구의거 등이 진행되어 천만다행으로 성공하였으므로 쓸모 없는 이 몸도 최후를 고할까 하여, 본국에 있는 자식들이 성장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반드시 전해 달라는 부탁으로, 상권을 등사하여 미국, 하와이에 있는 몇몇 동지에게 보냈다. -295-296쪽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로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외에 남군정서, 북군정서 등 각 기관에 공산당이 침입하여 각 기관을 여지없이 파괴, 훼손하고 인명을 살해하였다. (중략) 그런데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만주 동북3성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장작림과 일본과의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붙잡히는 대로왜에 넘겨졌다. 중국 백성들은 한인 한 명의 머리를 베어 왜놈 영사관에 몇십 원에, 심지어 3,4원에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어찌 중국사람들뿐이랴. 그곳 우리 한인들은 비록 중국 경내에 거주하였지만 처음에는 가가호호에서 해마다 독립운동 기관인 정의부나 신민부에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세금을 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박한 우리 동포들도 우리 무장대오의 지나친 위력과 침탈을 당하게 되자 점차 반발심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이 자기 집이나 동네에 도착하면, 비밀리에 왜놈에게 고발하는 악풍까지 생겼다. 또한 독립운동자들까지 점차 왜에게 투항하는 풍습이 생기고 보니, 동북 3성의 운동 근거지는 자연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314-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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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김성칠 지음 / 창비 / 199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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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5일
미 대통령 트루먼이 UN군은 여하한 사태에 당면하여도 절대로 한국에서 철퇴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하여 모두들 얼마쯤 안도의 빛을 보인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켜서 마침내 외세를 끌어들이고, 그 결과는 외국 군대가 언제까지나 있어주어야만 마음이 놓이지,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다는 이 나라의 몰골에 술이라도 억백으로 퍼마시고 얼음구멍에 목을 처박아 죽어버리고 싶은 심경이다. -300쪽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대랑 참전이 전해지고 UN군의 평양 철수가 소문만에 그치지 아니한 어제오늘 원자탄을 쓰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가 항간의 이야기거리로 되어 있다. 서울신문은 하루빨리 원자탄을 써야만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고 있다. (중략)
될 수만 있으면 원자탄 같은 건 다시는 살인의 무기로는 쓰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세계의 양식(良識)일 것이다. 그것을 하필 우리 땅에 던져서 동족상잔의 무기로 써줍소사 하는 마음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293쪽

1950년 10월 16일
인공국(人共國) 시절에 '계속 남진중'이란 말이 웃음거리로 유행하더니 지금은 '남하'란 말이 세도가 당당하게 씌어지고 있다.
지난 6월 27일 "우리는 중앙청에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 보고 있으며 우리 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하고 도처에서 적을 격파하여 적은 전면적으로 패주하고 있는 중이니 시민은 안심하고 직장을 사수하라"하고 목이 메도록 거듭 되풀이하여 방송하는 사이에 정부는 '남하'하고 (중략)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서울시민의 99%이상)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赤軍)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UN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 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 있은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하여 곤박(困迫)이 자심하니 고금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룻이 또 있을 것인가. (중략)
심지어는 자기의 벅찬 경쟁자를, 평소에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던 동료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일조차 있다는 낭설이 생기게끔 되었으니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251-252쪽

1950년 9월 2일
사구(四球)라도 서울 이외의 방송이 들린다기에 시험삼아 틀어 보았더니, 대한민국 방송도 들리고 일본 방송도 나온다. (중략) 인민공화국의 방송은 유열 씨의 말마따나 힘차기는 해도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날마다 되풀이하여 딱 질색이다. (중략) 날마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름은 바뀌지만 그 내용은 어찌나 그리 판에 박은 듯 같은 것인지 두번 듣고 나면 세번째는 이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좀더 머리를 쓰면 설사 한 사람이 만드는 원고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 다소 다른 흥취를 가미할 수 있으련만, 이는 인민공화국을 위하여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머리가 나빠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는 과연 옳은 것인지?-193쪽

1950년 8월 3일
지난 5월엔가 <라이프>지에서 스딸린의 생일날 밤에 부다페스트에서 불꽃을 올리는 사진을 보고 "이러할 수도 있는가. 이러해야만 하는가."하고 자못 의아한 생각을 품었었는데, 북조선에서 발간된 잡지를 보니 우리 인민공화국에서도 스딸린의 생일에 굉장한 선물을 보냈었음은 물론이요, 이날을 경축하기 위하여 평양을 비롯한 북조선 방방곡곡에서 솔문을 해 세우고 기행렬을 하고 만세를 부르고 꽃불을 올렸다 한다.
청나라 건륭제의 70세생일을 경축하기 위하여 주하사 박명원 일행이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열하로 돌아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연암의 <열하일기>에서 보았지만, 그때 서울에서 축하 행사를 하였단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일찍 월남해온 동포들의 입에서 평양에 스딸린가가 있고 신의주에 몰로또프 광장이 생겼단 말을 듣고 설마 그럴 리야 하고 기연가미연가했더니, 이즈음 소련과 스딸린을 떠메고 나서는 걸 보면 그도 있을 법한 일이다. 언제나 이 민족이 사대(事大)를 안 하여도 살 수 있을까.-148-149쪽

1950년 7월 17일
오늘 오랜만에 학교에 나갔더니 선생들이 모두 용산의 폭격지대 정리 작업에 복구대로 출동하였다 하고 마침 김일출(金一出)씨만 남아 있어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 그가 안호상 씨의 눈에 걸리어서 이명선,이본녕 양씨와 더불어 문리대 좌익교수로 문제가 되었고, 또 그의 처남 이영무사건에 관련하여 한때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본시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북에 매주인 청정 화백이 있고 또 그 아우 김태홍 씨가 이북 정권의 연락원으로 38선을 넘나다니었느니만큼 나는 항상 그를 통하여 이북 소식을 얻어들을 수 있었고 그도 또 믿고 나에게 말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이북에도 자유주의는 용납되지 않는 것 같으니 우리는 갈 곳이 없어요."하고 호젓이 웃곤 하였다. (중략)
그는 먼저 이명선 씨가 나를 지목하여 "김모는 많이 협조해주리라고 믿었었는데 기대에 어긋난다"고 하던 말을 전하고 될수록 주목을 받지 않도록 ㅎ하는 것이 좋을 성싶다고 일깨워주었다. 그러고 나서 노동당이 근민당에 대하여 너무 심하게 굶을 말하였다. (중략)
"그러나 사람이란 건 사회적으로 한번 어떠한 규정을 받으면 좀체 거기서 발을 씻고 나설 수 없음을 이번에 절실히 느끼었다. 이제 정치란 것에 멀미가 날 지경이어서 어떻게 하고 싶으나 이 하늘 아래서 호흡하고 있는 인상 김일출은 근민당 사람이란 레테르를 지워버릴 수는 없이 되었다."하고 또 호젓이 웃어보이었다. 역시 그는 인민공화국의 백성이 되었어도 자유주의의 허울을 벗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벗지 못하리라 생각되었다.-108-110쪽

1950년 7월 12일
신문에 보면 어느 대학에서 몇십 명, 어느 중학에서 몇백 명, 심지어 동덕(東德) 같은 덴 여자중학이면서도 5,6학년 전원 2백명이 미적(美敵)과 이승만 도당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서 자진 의용군에 지원하였다는 시세 좋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게재되어 있다. 지원하면 그날로 출진(出陣)하는 것이 이 나라의 특색이다. 마을에선 학교에 나간 자녀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서 부형들이 야단법석이다. (중략)
좌익 계열의 선생과 학생들이 선두에 나서서 덮어놓고 학교에 나오기를 선전한다. (중략) 나오지 않는 학생은 반동으로 처단한다. 정치보위부에 넘긴다 하여 학생을 모조리 모안호고는 교양 강좌란 이름 아래 해방일보나 조선인민보를 교재로 격렬한 선전을 하여 아이들의 정신을 얼떨떨하게 해놓고는 곧 궐기대회로 넘어간다. (중략) 이리하여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사회자가 "그럼 우리는 전원 의용군으로 지원합시다"하면 "찬성이요, 찬성" "찬성이오-97-100쪽

"하는 소리가 빗발치듯 한다. "그럼 반대 의견이 없는 모양이니 만장일치로 가결이오."하는 선언이 내린다. 다음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서명날인으로 예정한 절차를 밟고 그리고는 미리 마련해둔 "oo중학교 전원 의용군 지원"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고 그 길로 곧 심사장으로 향한다.
어떤 여학교에선 이러한 절차로 궐기대회가 끝난 뒤 학생들이 서루 붙안고 통곡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건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는 것이다.-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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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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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이 사회의 짐이야. 요즘 노인은 너무 오래 살거든. 여든, 아흔까지 살고 있잖아.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 스타워즈의 요다처럼 9백년을 살아도 상관없지만, 대부분의 노인네들은 그저 곡식만 축내고 있잖아. 국가의 재정은 어려워지고 있는데, 3천만명의 노인네들이 국가에서 연금이라는 명목으로 용돈을 챙기고 있어. 3천만 명 어이, 총인구의 4분의 1이 공짜로 밥을 먹고 있는 거야. 정말 대단한 나라야. 그 짐은 고스란히 젊은 사람들이 떠맡고 있지. 재정의 위기라며 제멋대로 인상한 연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잖아. (중략) 게다가 의학이 발달하고 식생활이 향상되니까 노인들은 점점 더 오래 살고. 연금 수령자가 많아질수록 젊은이들은 더 많은 돈을 내야 하고. 정말 웃긴 일이지. 연금뿐만이 아냐. 치료비도 우대 받고, 대중교통비도 무료거나 대폭 할인받고 있지. 그런 식의 보조금이 결국은 이 나라를 말아먹는 거야. 노인네들 의식에도 문제가 있어. 우대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니까. (중략) 온갖 혜택을 다 누리고 있으면서 감사를 표하지 않는 인간은 쓰레기야. 조금은 사회에 공헌할 생각도 해야지. 그럼 노인네들이 사회에 공헌하는 길은 뭘까. 그건 얼른 저 세상으로 가주는 거야. 흔히 퇴직한 노인들이 '여생'이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그런 남은 인생은 없어도 되는 거야. 그렇다면 구차하게 굴지 말고 깨끗이 떠나야지. 안 그래? -434-435쪽

국내에 있는 천4백조 엔의 개인 자산 중 절반은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보유하고 있어. 그리고 그 절반 이상이 현금과 예금이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노인들은 돈을 꽉 움켜쥐고 쓰지 않는다는 거야. 다시 말하면, 노인네들의 지갑이 조금만 느슨해지면 이런 불경기에서도 금방 벗어날 수 있다는 거지. -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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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6-10-03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은 노인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의 대사. 그렇지만 내게는 주인공의 대사 이상으로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내게도 '쓰레기'취급 받을 날이 올 것이다. 외로운 독거 노인이 되어 명절엔 무료급식으로 송편을 먹게 될까. 아니면 무료병원 한 구석에서 짐짝처럼 끙끙거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