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김성칠 지음 / 창비 / 1993년 2월
구판절판


1950년 12월 15일
미 대통령 트루먼이 UN군은 여하한 사태에 당면하여도 절대로 한국에서 철퇴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하여 모두들 얼마쯤 안도의 빛을 보인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켜서 마침내 외세를 끌어들이고, 그 결과는 외국 군대가 언제까지나 있어주어야만 마음이 놓이지,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다는 이 나라의 몰골에 술이라도 억백으로 퍼마시고 얼음구멍에 목을 처박아 죽어버리고 싶은 심경이다. -300쪽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대랑 참전이 전해지고 UN군의 평양 철수가 소문만에 그치지 아니한 어제오늘 원자탄을 쓰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가 항간의 이야기거리로 되어 있다. 서울신문은 하루빨리 원자탄을 써야만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고 있다. (중략)
될 수만 있으면 원자탄 같은 건 다시는 살인의 무기로는 쓰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세계의 양식(良識)일 것이다. 그것을 하필 우리 땅에 던져서 동족상잔의 무기로 써줍소사 하는 마음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293쪽

1950년 10월 16일
인공국(人共國) 시절에 '계속 남진중'이란 말이 웃음거리로 유행하더니 지금은 '남하'란 말이 세도가 당당하게 씌어지고 있다.
지난 6월 27일 "우리는 중앙청에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 보고 있으며 우리 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하고 도처에서 적을 격파하여 적은 전면적으로 패주하고 있는 중이니 시민은 안심하고 직장을 사수하라"하고 목이 메도록 거듭 되풀이하여 방송하는 사이에 정부는 '남하'하고 (중략)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서울시민의 99%이상)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赤軍)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UN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 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 있은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하여 곤박(困迫)이 자심하니 고금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룻이 또 있을 것인가. (중략)
심지어는 자기의 벅찬 경쟁자를, 평소에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던 동료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일조차 있다는 낭설이 생기게끔 되었으니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251-252쪽

1950년 9월 2일
사구(四球)라도 서울 이외의 방송이 들린다기에 시험삼아 틀어 보았더니, 대한민국 방송도 들리고 일본 방송도 나온다. (중략) 인민공화국의 방송은 유열 씨의 말마따나 힘차기는 해도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날마다 되풀이하여 딱 질색이다. (중략) 날마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름은 바뀌지만 그 내용은 어찌나 그리 판에 박은 듯 같은 것인지 두번 듣고 나면 세번째는 이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좀더 머리를 쓰면 설사 한 사람이 만드는 원고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 다소 다른 흥취를 가미할 수 있으련만, 이는 인민공화국을 위하여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머리가 나빠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는 과연 옳은 것인지?-193쪽

1950년 8월 3일
지난 5월엔가 <라이프>지에서 스딸린의 생일날 밤에 부다페스트에서 불꽃을 올리는 사진을 보고 "이러할 수도 있는가. 이러해야만 하는가."하고 자못 의아한 생각을 품었었는데, 북조선에서 발간된 잡지를 보니 우리 인민공화국에서도 스딸린의 생일에 굉장한 선물을 보냈었음은 물론이요, 이날을 경축하기 위하여 평양을 비롯한 북조선 방방곡곡에서 솔문을 해 세우고 기행렬을 하고 만세를 부르고 꽃불을 올렸다 한다.
청나라 건륭제의 70세생일을 경축하기 위하여 주하사 박명원 일행이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열하로 돌아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연암의 <열하일기>에서 보았지만, 그때 서울에서 축하 행사를 하였단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일찍 월남해온 동포들의 입에서 평양에 스딸린가가 있고 신의주에 몰로또프 광장이 생겼단 말을 듣고 설마 그럴 리야 하고 기연가미연가했더니, 이즈음 소련과 스딸린을 떠메고 나서는 걸 보면 그도 있을 법한 일이다. 언제나 이 민족이 사대(事大)를 안 하여도 살 수 있을까.-148-149쪽

1950년 7월 17일
오늘 오랜만에 학교에 나갔더니 선생들이 모두 용산의 폭격지대 정리 작업에 복구대로 출동하였다 하고 마침 김일출(金一出)씨만 남아 있어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 그가 안호상 씨의 눈에 걸리어서 이명선,이본녕 양씨와 더불어 문리대 좌익교수로 문제가 되었고, 또 그의 처남 이영무사건에 관련하여 한때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본시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북에 매주인 청정 화백이 있고 또 그 아우 김태홍 씨가 이북 정권의 연락원으로 38선을 넘나다니었느니만큼 나는 항상 그를 통하여 이북 소식을 얻어들을 수 있었고 그도 또 믿고 나에게 말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이북에도 자유주의는 용납되지 않는 것 같으니 우리는 갈 곳이 없어요."하고 호젓이 웃곤 하였다. (중략)
그는 먼저 이명선 씨가 나를 지목하여 "김모는 많이 협조해주리라고 믿었었는데 기대에 어긋난다"고 하던 말을 전하고 될수록 주목을 받지 않도록 ㅎ하는 것이 좋을 성싶다고 일깨워주었다. 그러고 나서 노동당이 근민당에 대하여 너무 심하게 굶을 말하였다. (중략)
"그러나 사람이란 건 사회적으로 한번 어떠한 규정을 받으면 좀체 거기서 발을 씻고 나설 수 없음을 이번에 절실히 느끼었다. 이제 정치란 것에 멀미가 날 지경이어서 어떻게 하고 싶으나 이 하늘 아래서 호흡하고 있는 인상 김일출은 근민당 사람이란 레테르를 지워버릴 수는 없이 되었다."하고 또 호젓이 웃어보이었다. 역시 그는 인민공화국의 백성이 되었어도 자유주의의 허울을 벗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벗지 못하리라 생각되었다.-108-110쪽

1950년 7월 12일
신문에 보면 어느 대학에서 몇십 명, 어느 중학에서 몇백 명, 심지어 동덕(東德) 같은 덴 여자중학이면서도 5,6학년 전원 2백명이 미적(美敵)과 이승만 도당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서 자진 의용군에 지원하였다는 시세 좋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게재되어 있다. 지원하면 그날로 출진(出陣)하는 것이 이 나라의 특색이다. 마을에선 학교에 나간 자녀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서 부형들이 야단법석이다. (중략)
좌익 계열의 선생과 학생들이 선두에 나서서 덮어놓고 학교에 나오기를 선전한다. (중략) 나오지 않는 학생은 반동으로 처단한다. 정치보위부에 넘긴다 하여 학생을 모조리 모안호고는 교양 강좌란 이름 아래 해방일보나 조선인민보를 교재로 격렬한 선전을 하여 아이들의 정신을 얼떨떨하게 해놓고는 곧 궐기대회로 넘어간다. (중략) 이리하여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사회자가 "그럼 우리는 전원 의용군으로 지원합시다"하면 "찬성이요, 찬성" "찬성이오-97-100쪽

"하는 소리가 빗발치듯 한다. "그럼 반대 의견이 없는 모양이니 만장일치로 가결이오."하는 선언이 내린다. 다음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서명날인으로 예정한 절차를 밟고 그리고는 미리 마련해둔 "oo중학교 전원 의용군 지원"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고 그 길로 곧 심사장으로 향한다.
어떤 여학교에선 이러한 절차로 궐기대회가 끝난 뒤 학생들이 서루 붙안고 통곡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건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는 것이다.-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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