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 돌베개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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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이 텃골로 들어오던 시기는 조선시대의 전성기로 양반과 상민의 계급 차별이 엄밀하였던 시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하여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고 일부러 상놈 노릇을 하였다. (중략) 그후 우리 조상은 지금까지 텃골 주위에서 살고 있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 등 토착양반들에게 천대와 압제를 대대로 받았다. (중략) 강, 이씨들은 양반의 권세로 우리 집안의 토지를 강점하고 금전을 강탈한 후 농노로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경제적 압박이다. 강,이씨들은 비록 머리 땋은 어린 아이라도 70-80세 되는 우리 집안 노인을 만나면 '이랬나' '저랬나' '이리 하게' '저리 하게'하며 낮춤말을 쓰는 반면, 우리 집안 노인들은 갓 성인이 된 아이에게도 반드시 높임말을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언어의 천대이다. -22쪽

다섯 살 때(1880년) 우리집은 종조부, 재종조부, 삼종조부 댁 등을 따라 강령군 삼가리로 이사하여 두 해 살았다. (중략) 하루는 그 집 사랑방에소 놀고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매질하였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을 하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사랑 앞문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알아채고 미리 대비할까 봐 칼로 울타리를 뜯어 후문으로 돌입할 계획을 세웠다. 울타리를 뜯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안마당에 있던 17,8세 되는 처녀가 나를 보고 놀라 제 오라비에게 일렀다. 나는 다시 그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칼까지 빼앗겼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칼을 잃어버린 죄로 부모님께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내내 시치미를 떼었다. -24-25쪽

아버님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이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였다. 음주는 한량이 없고 취하시면 양반 강,이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 1년에도 여러 번 해주 관아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키셨다. 그런데 사람을 구타하면 맞은 자를 때린 자의 집에 떠메어다가 눕혀두고 생사 여부를 기다리는 것이 그 시대 지방 관습이었다. 때문에 우리집에는 한 달에도 몇 번씩 '거의 죽게 된 사람', '전신이 피투성이 된 사람'이 사랑방에 누워 있을 때가 있었다. (중략) 해마다 세밑이 되면 우리집에서 닭,계란,연초 등을 다수 준비하여 어디론가 보냈고, 그러고 나면 감사의 표시로 달력과 해주 먹등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중략) 아버님은 영리청, 사령청에 계방이란 수속을 밟아 해마다 선물을 하였던 것이다. 미리 이렇게 계방을 해두면 영문이나 본아에 잡혀가 옥이나 영청에 몇달 몇날을 구속되더라도 실상은 사령, 영리들과 같이 먹고 잤으며, 설령 곤장, 태장을 맞더라도 시늉만 하는 헐장이었다. (중략) 이런 이유로 김순영이라면 양반의 아이와 부녀자들까지 손가락질하며 미워하였지만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27-28쪽

삼촌은 아버님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감히 덤비지 못하고 문중 친척에게만은 위아래 없이 욕하고 싸움 걸어, 할아버지와 아버님이 늘 때려주셨다. 내가 아홉 살 때(1884년) 할아버지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날 준영 삼촌이 큰 구경거리를 연출하였다. 삼촌이 술에 취해 장례일을 돌보는 호상인들을 모조리 두들겨 패고서, 급기야는 인근 양반들이 큰 생색을 낸답시고 노복을 한 명씩 보내 상여를 메고 가던 것까지 때려서 모두 쫓아버렸다. 결국 준영 삼촌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식구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중증조부 주최로 가족회의를 열어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준영 삼촌의 발뒤꿈치를 잘랐다. (중략)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추태는 상놈의 본색이요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29쪽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침산 강씨의 선조는 우리만 못하나 현재 진사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으냐. 별담 이진사 집도 그렇다." (중략)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가을에 모아주기로 하고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다. 그분은 양반이지만 글이 넉넉지 못하여 '양반의 선생'으로 고용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같은 '상놈의 선생'이 된 것이다. 선생이 오시는 날, 나는 너무 좋아서 머리 빗고 새옷 입고 마중나갔다. (중략) 이때 내 나이 열두 살(1887년)이었다.-30-31쪽

얼마 후 그와 같은 '돌림 선생'을 모셔와 공부를 하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아버님이 전신불수가 되셨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도 못하고 아버님 심부름만 하였다. (중략) 그때 아버님은 종종 나에게 이런 훈계를 하셨다.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에나 주력하여라."
그래서 나는 토지문권, 정소장, 제축문, 혼서문, 서한문 등을 틈틈이 연습하여 무식한 우리 집안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32-33쪽

(1892년 17세에 과거를 본 후)
"제가 어떻게든 공부로 입신양명하여 강가, 이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혜가 이와 같은즉,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또한 큰 선비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집안이 이같이 가난하니 앞으로 서당 공부를 그만두겠습니다."
아버님 역시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그러면 풍수공부나 관상공부를 해보아라. 풍수에 능해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복록을 누리게 되고, 관상을 잘 보면 선한 사람과 군자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이치에 맞는 말이라 생각되어
"그것을 공부하여 보겠습니다. 서적을 얻어주십시오."(중략)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 몸에 천격, 빈격, 흉격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느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38쪽

내 나이 열여덟이 되는 계사년(1893) 정초, 나는 고기도 먹지 않고 목욕하고 머리 땋고, 푸른 도포에 녹대를 매고 포동 오씨 댁으로 방문하였다. (중략) 나는 그가 양반임을 알고 있었는데, 과연 상투를 짜고 통천관을 쓰고 있었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하니 그 사람도 공손히 맞절을 하고서는
"도령은 어디서 오셨소?"
라고 묻는다. 나는 황공하여 본색을 말하였다.
"어른이 되어도 당신께 공대를 듣지 못하련만 하물며 저는 아직 아이인데 어찌 공대를 하나이까."
그이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동학 도인이기 때문에 선생의 교훈을 받들어 조금도 미안해 마시고 찾아오신 뜻이나 말씀하시오."
나는 이 말만 들어도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그와의 문답이 시작되었다. (중략) 설명을 듣고 나는 매우 마음이 흡족하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나는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중략)
당시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이야기가 인근에 두루 유포되었다. 사람들이 찾아와 "그대가 동학을 해보니 무슨 조화가 생기더냐?"고 물으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이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자기네들에게 아직 조화를 보여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김창수가 한 길 이상 공중에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다. 나의 도력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은 황해도는 물론이고 평안남북도에까지 퍼져 연비가 수천에 달하였다. 나는 황해도, 평안도의 동학당 중 나이 어린 자로 가장 많은 연비를 가졌기 때문에 별명이 '아기 접주'였다. -41-43쪽

치하포에 도착해서 여관을 겸하고 있는 나루터 주인의 집에 들어갔다. 풍랑으로 인해 유숙하는 손님들이 세 칸 여관방에 가득하였다. (중략) 조금 있다가 아랫방에서부터 아침식사가 시작되어 가운뎃방과 윗방까지 밥상이 들어왔다. 그때 가운뎃방에는 단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사람 한 명이 같이 낮은 나그네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성은 정씨라 하고 장연에 산다고 하는데, 말투는 장연 말이 아니고 경성말이었다. 촌 늙은이들은 그를 진짜 조선인으로 알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흰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였다. 가는 길을 물어보니 진남포로 간다 했다. 나는 그놈의 행색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곳은 진남포 맞은편 기슭이므로 매일매일 여러 명의 왜인이 자긷르의 본래 행색대로 통행하는 놈이다. 그러니 저놈이 보통 장사치나 기술자 같으면, 굳이 우리 조선사람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저 자가 우리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가 아닐까? 경성에서 일어난 분란 때문에 도망하여 당분간 숨으려는 것은 아닌가? 만일 미우라가 아니더라도 미우라의 공범일 것 같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다니는 왜인이 우리 국가와 민족의 독버섯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저놈 한 명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어 보리라.' (중략)-92-96쪽

그 왜놈은 별로 주의하는 빛도 없이 식사를 마치고 중문 밖에 서서 문기둥을 의지하고 방안을 들여다보며 총각아이가 밥값 계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크게 호령하며 그 왜놈을 발길로 차서 거의 한 길이나 되는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바로 쫓아 내려가서 놈의 목을 힘껏 밟았다. 세 칸 객방의 앞쪽 출입문이 아랫방에 한 짝, 가운뎃방의 분합문이 두 짝, 윗 방에 한 짝, 합해서 모두 네 짝인데, 이 방문 네 짝이 일제히 열리면서 문마다 사람머리가 다투어 나왔다. 나는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간단하게 한 마디로 선언하였다.
"누구든지 이 왜놈을 위해 내게 달려드는 자는 모두 죽이고 말리라."
선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 내 발에 채이고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칼빛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ㅡ러뜨리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주-신문에서 백범은 병기도 사용하였다고 진술했다. 즉 처음에는 돌로 치고 다음에는 나무로 때렸으며 도망가자 다시 나무로 때렸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선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 내 발에 채이고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칼빛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주-신문에서 백범은 병기도 사용하였다고 진술했다. 즉 처음에는 돌로 치고 다음에는 나무로 때렸으며 도망가자 다시 나무로 때렸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달려들려고 하던 놈이 누구냐?"
방안에 있던 자들 중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자들은 모두 엎드려서 빌기 바빴다.
"장군님, 살려주시오. 나는 그놈이 왜놈인 줄 모르고 보통 싸움으로만 알고 말리려고 나갔던 것입니다."
(주-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죽은 쓰치다(土田)는 나가사키현 대마도 이즈하라 항 상인으로 1895년 10월 진남포에 도착한 후 11월 4일 황해도 황주로 가서 활동하였고, 1896년 3월 7일 진남포로 귀환하던 길이었다.)

어머님께서는 나를 신문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경무청 문 밖에 서 계셨다. 그곳에서 간수의 등에 업혀 들어가는 나를 보시고 "병이 저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말을 잘못 대답해 당장에 죽지나 아니할까. 근심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신문 시작부터 관리 전부가 떠들어대기 시작하니 벌써 감리영 부근 인사들은 희귀한 사건이라고 구경하러 몰려들어 야단이었다. 법정 안은 발 디딜 곳이 없었고, 문 밖까지 사람들이 둘러서서 순검들에게 물어댔다.
"참말 별난 사람이다. 아직 아이인데, 도대체 무슨 사건이냐?"
간수와 순검들이 보고들은 대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해주 김창수라는 소년인데 민 중전 마마의 복수를 위해 왜놈을 때려죽였다나? 그리고 아까 감리사를 책망하는데 그도 아무 대답을 못하던걸."
이런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내가 간수의 등에 업혀 나가면서 어머님의 얼굴을 살펴보니 약간 희색을 띠고 계셨다. 여러 사람이 구경한 이야기를 들으신 까닭인 듯한데, 나를 업고 가는 간수도 어머님을 향하여 말하였다.
"당신, 안심하시오. 어쩌면 이렇게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소?"-109쪽

(19세 때 감옥에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생각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감리서 직원들이 종종 와서 내가 신서적에 열심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는 빛을 보였다.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안중근의 부친으로 동학 실패 후 도망하던 김구를 숨겨줌-인용자주)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체캑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청계동에서 오로지 고선생만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고 있던 때는, 나 역시 척?척양이 우리의 당연한 천직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고선생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한 가닥 밝은 맥이 남아 있고 세계 각국이 대부분 피발좌임한 오랑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태서신사> 한 책만 보아도 그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선 원숭이에서 멀지 않은 오랑캐들은 도리어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규가 사람답다는 느낌이 드렁ㅆ다. 그러나 높은 갓을 쓰고 넓은 요대를 두른 선풍도골의 우리 탐관오리들은 오히려 그와 같은 오랑캐의 칭호조차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15-116쪽

학교의 여교사 오인성이 이재명의 부인인데, 이군이 자기 부인에게 무슨 요구를 강경히 하였던지 단총으로 위협하니 오여사는 놀라고 겁이 나서 학교 수업을 감당치 못할 사정을 말하고 이웃집에 피해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미친 사람 모양으로 동네 어귀에서 총을 쏘아대며, 매국노를 일일이 총살하겠다고 소리를 치니 동네가 소동한다는 것이었다. 노백린과 상의하여 이군을 청해 불렀다. (중략) 계원과 내가 이의사에게 장래에 목적하는 일과 과거 경력, 학식 등을 일일이 물으니,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공부하다, 조국이 섬왜놈에게 강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으며, 지금 하려는 일은 매국노 이완용을 위시하여 몇 놈을 죽이고자 준비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도 한 자루, 단총 한 정과 이완용 등의 사진 몇 장을 품속에서 내놓았다. 계원과 나는 동일한 관찰로 그를,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으로 보았다. (중략) 그런지 한 달이 못 되어서 의사는 동지 몇 명과 함께 경성에 도착하였다. 이현에서 이의사는 군밤장수로 가장하고 길가에서 밤을 팔다가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212-214쪽

그때 서대문감옥은 '경성감옥'이라고 문패를 붙인 때인데, 수인의 총수 2000명 미만에 대부분이 의병이요, 그 나머지는 소위 잡범이었다. 옥중의 대다수가 의병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그이들은 일찍이 국사를 위하여 분투한 의기남아들이니, 기개로나 경험으로 배울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했다. 감방에 들어가서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혹은 '강원도 의병의 참모장'이나 혹은 '경기도 의병의 중대장'이니 하여, 대부분 의병 두령이고 졸병이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순전한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군대의 규율이나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 (중략) 나는 처음에 그 자들을 하등 잡범들로만 알았다가, 허위의 부하라는 말을 듣고서는 심히 통탄하였다. 저런 자가 참모장이었으니, 허위 선생이 실패하였을 것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닌가? (중략)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 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명색이야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에 순종하는 백성이 아니라고 인정하여 , 종신이니 10년이니 감금하여 두는 것으로도 족히 의병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 남아는 의로 죽을지언정 구구히 살지 않는다고 평일에 어린 학생을 가르치더니, 네가 금일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네가 개같은 생활을 견뎌 지내고서 17년후에 장차 공을 세워 죄를 갚을 자신이 있느냐?' 이 같은 생활을 하며 심신이 극도로 혼란할 때,(후략)-241-244쪽

10여년 동안 임시정부를 고수하였으나, 기미년 이후 독립운동이 점점 퇴조하여 정부라는 명칭마저 간수하기 어려웠다. 당시 떠돌던 말과 같이 몇몇 동지와 더불이 고성낙일에 슬픈 깃발을 날리며 스스로 헤아리기를, 독립운동도 부진하고 나이도 죽을 때가 가까워졌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지 못한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파괴) 운동을 계획하던 때 <백범일지>상권을 기술하였다. 그후 이봉창의 동경의거와 윤봉길의 홍구의거 등이 진행되어 천만다행으로 성공하였으므로 쓸모 없는 이 몸도 최후를 고할까 하여, 본국에 있는 자식들이 성장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반드시 전해 달라는 부탁으로, 상권을 등사하여 미국, 하와이에 있는 몇몇 동지에게 보냈다. -295-296쪽

남북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로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외에 남군정서, 북군정서 등 각 기관에 공산당이 침입하여 각 기관을 여지없이 파괴, 훼손하고 인명을 살해하였다. (중략) 그런데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만주 동북3성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장작림과 일본과의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붙잡히는 대로왜에 넘겨졌다. 중국 백성들은 한인 한 명의 머리를 베어 왜놈 영사관에 몇십 원에, 심지어 3,4원에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어찌 중국사람들뿐이랴. 그곳 우리 한인들은 비록 중국 경내에 거주하였지만 처음에는 가가호호에서 해마다 독립운동 기관인 정의부나 신민부에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세금을 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박한 우리 동포들도 우리 무장대오의 지나친 위력과 침탈을 당하게 되자 점차 반발심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이 자기 집이나 동네에 도착하면, 비밀리에 왜놈에게 고발하는 악풍까지 생겼다. 또한 독립운동자들까지 점차 왜에게 투항하는 풍습이 생기고 보니, 동북 3성의 운동 근거지는 자연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314-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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