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1년 5월
구판절판


의원이 삼대를 계속해 오지 않았으면 그가 주는 약을 먹지 않는 것같이 반드시 몇 대를 내려가면서 글을 하는 집안이라야 문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28쪽

네가 곡산에서 공부하다 집으로 돌아간 뒤 내가 과거 공부를 하라고 한 적이 있었지. 그 당시 주위에서 너를 아끼던 문인이나 시를 짓던 선비들은 본격적인 학문을 시킬 일이지 과거 따위나 시키고 있느냐고 모두 나를 욕심쟁이라고 나무랐고 나도 마음이 허전했었다. 그러나 이제 너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과거 공부로 인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내 생각에는 네가 이미 진사도 되고 과거에 급제할 실력은 족히 된다고 본다. 글을 알면서도 과거 때문에 오는 제약을 벗어나는 것과 진사가 되고 급제한 사람이 되는 것 중 어느 편이 나은 일인가는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알 것이다. 너야말로 참으로 독서할 때를 만났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가문이 망해 버린 것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처지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29쪽

너희들이 참으로 독서를 하고자 않는다면 내 저서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저서가 쓸모없다면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마음의 눈을 닫고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될 뿐 아니라 열흘이 못 가서 병이 날 거고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약도 없을 것인즉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내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런 이치를 생각해 보거라.-30-31쪽

너희들이 끝끝내 배우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포기해 버린다면 내가 해놓은 바 저술과 간추려 놓은 것들을 앞으로 누가 모아서 책을 엮고 교정을 하며 정리하겠느냐? 이 일을 못한다면 내 책들은 더 이상 전해질 수 없을 것이며,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司憲府)의 계문(啓文)과 옥안(獄案)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떤 사람 취급을 받겠느냐?-31쪽

요즘 한두 젊은이들이 원(元), 명(明) 때의 경조부박한 망령된 사람들이 가난과 괴로움을 극한적으로 표혆한 말을 모방해다가 절구(絶句)나 단율(短律)을 만들어 당대의 문장인 것처럼 자붛하며 거만하게 남의 글이나 욕하고 고전적인 글을 깎아내리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불쌍하기 짝이 없다.-32쪽

소동파의 시로 말하면 우리 삼부자의 재주로써 죽을 때까지 시에만 전념한다면 그 근처쯤 갈 수는 있겠지만 인생이 세상에서 할 일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그 따위 짓이나 하고 있겠느냐?-46쪽

무릇 스스로 할 일을 다 하고 하지 않아야 될 일은 않고 살아도 부형(父兄)들의 가슴엔 원망이나 불평들이 쌓일 수 있다. 평상시에는 이런 감정들을 내색 않다가 응당 간섭해야 될 일이 있을 때 대로 자기도 모르게 그것들이 폭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너희들은 그 일만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일이 왜 내가 잘못한 일인가. 왜 이같이 처리하시는가"라고 서운해하겠지만 실은 오래 전의 잘못 때문이지 단순히 이번 잘못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하거라.
독시랗게 행실을 닦아 부형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도록 해야 한다. 큰아버님 섬기는 일에는 특별히 따로 정해진 예절이 없고 오직 자기 아버지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면 되는 것이니 너희들이 느낀 바 있어 진실된 마음으로 행실을 한다면 한 달 못 가서 큰아버님의 마음이 풀릴 것이다.-52-53쪽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 공부에 대해서 수없이 글과 편지로 권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아직 경전이나 예악에 관해 하나도 질문을 해오지 않고 역사책에 관한 논의도 보여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된 셈이냐? 너희들은 내 이야기를 이다지도 무시한단 말이냐? (중략) 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는냐? 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 어째서 스스로 포깋를 하려 하느냐. 영원히 폐족(廢族)으로 지내버릴 것이냐?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다 하더라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통식달리(通識達理)의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꺼릴 것이 없는 것뿐 아니라 과거 공부하는 사람이 빠지는 잘못을 벗어날 수도 있고, 가난하고 곤궁하여 고생하다 보면 그 마음을 단련하고 지혜와 생각을 넓히게 되어 인정(人情)이나 사물의 진실과 거짓을 옳게 알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략) 폐족에서 재주 있는 걸출한 선비가 많이 나오는 것은,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폐족에서 태어나게 하여 그 집안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뒤에 계속)-57-59쪽

(앞에서 계속)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마음이 근본 정신을 가리지 않아 깨끗한 마음으로 독서하고 궁리하여 진면목과 바른 뼈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민으로 배우지 않으면 못난 사람이 되고 말지만 폐족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도리에 어긋지고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게 되고 아무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아 결국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되고 혼인할 길마저 막혀 천한 집안과 결혼을 할 것이며 물고기의 입술이나 강아지의 이마 몰골을 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집안은 영영 끝장나는 것이다.-57-59쪽

일가끼리 한 자리를 같이 한다거나 가끔 친한 손님이 찾아오면 기쁜 마음으로 맞아 대접하고 하룻밤이라도 더 주무시고 가게 하여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어야 한다. 만약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천천히 안부만 묻고 낳서는 말도 않고 웃지도 아니하고 무뚝뚝하게 대하여 손님을 어색하게 만들어 가지고, 손님이 일어나 가겠다고 하면 그냥 가도록 만류도 하지 않고, 보내면서도 마루도 내려서지 않는다면 여러 사람이 상대해 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필경 평생의 복을 망쳐 버리는 일이 될 것이니 부디 깊이 조심하도록 해라.-76쪽

내가 이 책(祭禮考定-인용자주)을 몇 년 전에만 완성했더라도 우리 선왕께 올려 전국적으로 고루 시행될 수 있게 했을 텐데 책을 이루고 나니 슬퍼 나도 모르게 흐느끼게 되는구나.-80쪽

내가 집에 함께 있으면서 너희들을 가르쳤는데도 듣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다른 집안에서도 혹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 나는 멀리 귀양살이 와서 남쪽 풍토병이 심한 변방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서 외롭고 불쌍하게 지내면서 밤낮으로 너희들에게 희망을 걸고 마음속에 담긴 뜨거운 마음을 쏟아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 너희들은 이것을 한 번 얼핏 읽어보고는 고리짝 속에 처넣어버리고는 다시 마음을 두지 않아서야 되겠느냐?-81-82쪽

너의 형이 왔을 때 시험삼아 술 한 잔을 마시게 했더니 취하지 않더구나. 그래서 동생인 너의 주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너의 형보다 배도 넘는다 하더구나. 어찌 글공부에는 그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훨씬 아비를 넘어서는 거냐? (중략) 너희는 지난날 내가 술 마실 때 반 잔 이상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느냐? 참으로 술 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에는 대지도 않고 곧장 목구멍에 탁 털어넣는데 그들이야 무슨 맛을 알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지 저들 얼굴빛이 홍당무처럼 붉고 구토를 해대고 잡에 곯아떨어져 버린다면 무슨 술 마시는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기만 하면 폭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술독이 오장육부에 배어들어가 하루 아침에 썩어 물크러지면 온몸이 무너지고 만다. 이거야말로 크게 두려워할 일이다.(중략) 너처럼 배우지 못하고 식견이 없는 폐족 집안의 사람으로서 못된 술주정뱅이라는 이름을 더 가진다면 앞으로 어떤 등급의 사람이 되겠느냐? 조심하여 절대로 입에 가까이 하지 말거라.-85-86쪽

일본에서는 요즈음 명유(名儒)가 배출되고 있다는데 物部雙柏(1666-1728.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역자주)이 바로 그 사람인데 호를 조래(徂徠)라 하고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으며 제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 지난 번 수신사(修信使)가 오는 편에 소본(篠本)과 염문(廉文) 세 편을 얻어왔는데 글이 모두 정예(精銳)하더라.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는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하였다. 그후 중국의 절강 지방과 직접 교역을 트면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 갔다. 책도 책이려니와 과거를 보아 관리를 뽑는 그런 잘못된 제도가 없어서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그 학문이 우리 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93쪽

임금을 섬기는 방법에는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치 않다. 또 임금의 신뢰를 받는 게 중요하지 임금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않다. 아침 저녁으로 가까이 접근하여 임금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는 사람이 아니며, 시나 글을 잘하고 기예를 가진 사람도 임금이 존경한다고 할 수 없다. (중략) 경연에서 온화하게 말을 주고받고, 일을 처리할 때 비밀히 부탁하고 임금이 마음속으로 믿고 의지하여 서신이 자주 오고가고 하사품이 자주 내려질지라도 그런 것을 총애나 영광으로 믿어서는 절대 안 된다. 뭇사람들이 노여워하고 시기하게 되니 결국은 재앙이 따르게 마련이다.(중략) 그런 신하는 임금이 첩같이 다루고 노예처럼 부려먹으므로 혼자 매우 고달프고 힘들기만 하지 등용되기는 쉽지 않다. 무릇 초야에서 진출한 선비가 가장 좋은 것이니 그때는 임금이 그 사람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올리는 글은 논(論)이나 책(策)만 올리는데 그 글이 충성스럽고 굳세거나 간절해도 괜찮다.-125-126쪽

나 죽은 후에 아무리 청결한 희생과 풍성한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 준다 하여도 내가 흠향하여 기뻐하기는 내 책 한 편을 읽어 주고 내 책 한 부분이라도 베껴 두는 일보다는 못하게 여길 것이니 너희들은 꼭 이 점을 새겨두기 바란다. 주역사전(周易四箋)은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어 지어낸 책이다. 절대로 사람의 힘으로 알아내지 못하고 지혜로운 생각만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니 이 책에 마음을 푹 기울여 오묘한 뜻을 다 통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손이나 친구들 중에서도 천 년에 한 번쯤 만날 정도로 어려울 거다 아끼고 중요하게 여기기를 여타의 책보다는 곱절을 더 생각해야 할 거다. 상례사전(喪禮四箋)은 내가 성인의 글을 독실하게 믿고서 만든 것으로, 내 입장에서는 엉터리 학문이 거센 물결처럼 흐르는 판국에 그걸 흐르지 못하도록 모든 냇물을 막아 수사(洙泗)의 참된 학문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뜻에서 저술한 책이다. (중략) 만약 내가 사면을 받게 되어 이 두 가지 책만이라도 후세에 전해진다면 나머지 책들은 비록 없애버린다 해도 괜찮겠다.-128-129쪽

무릇 사대부 집안의 법도는 벼슬길에 높이 올라 권세를 날릴 때에는 빨리 산비탈에 셋집을 내어 살면서 처사로서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벼슬길에 끊어져 버리면 빨리 서울에 붙어 살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였다만, 앞으로의 계획인즉 오직 서울의 십리 안만이 가히 살 수 있다.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중략) 천리는 돌고 도는 것이니 한 번 넘어진 사람이 반드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하루 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서둘러 먼 시골로 이사가 버린다면 무식하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치고 말 뿐이다.-138-139쪽

큰 흉년이 들어 백성 중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들 중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보는 관점으로는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가 게으른 사람이 많더구나. 하늘은 게으른 사람을 싫어하는 거여서 모두 몰살시키려는 거다.-148쪽

편지 한 장 쓸 때마다 두번 세번 읽어보면서 이 편지가 사통오달한 번화가에 떨어뜨렸을 때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보여지더라도 조롱을 받지 않을 편지인가를 생각해 본 뒤에 비로소 봉해야 하는데 이런 일이 바로 군자가 삼가는 바다. 내가 젊어서 글자를 너무 빨리 썼기 때문에 여러 번 이 계율을 어긴 적이 있었는데 중년에 화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런 원칙을 지켰더니 아주 큰 도움을 얻었다. 너희도 이 점을 명심하도록 하여라.-165-166쪽

또 의복과 음식의 근원이 되는 것은 오직 뽕나무와 삼을 심고 채소와 과일을 심는 일이며, 부녀자가 방적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꽤 할 만한 일이다. 그 나머지 돈놀이를 하거나 여러 물건을 매매하거나 약장사를 하는 일은 모두 매우 악찫흐러운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본전을 손해보고 본업을 망치게 된다. 아무쪼록 그런 일은 생각을 내지 말거라.-167-168쪽

네가 갑자기 의원이 되었다니 무슨 의도며 무슨 이익이 있어서 그러했느냐? (중략) 무릇 사람들 중에 높은 벼슬이나 깨끗한 직책에 있는 사람, 덕이 높고 학문이 깊은 사람도 의술에 대하여 터득하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 천하게 의원 노릇을 하지 않고, 병자가 있는 집안에서도 바로 찾아가 묻지 못하고, 세 차례 네 차례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위급하여 어쩔 수 없는 경우에야 겨우 한 가지 처방을 해주어 귀중한 처방으로 여기게 하는 정도라야 옳다.
요즘 너는 크게 소리를 내고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방에 가득 모이게 하여 사람 못된 별의별 사람들을 내력도 모르면서 사귀고서 재워 주고 먹여 준다니, 그게 무슨 변고냐? 이 뒤로도 내가 너 하는 일을 모두들을 것이나 네가 그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살아서는 연락도 않을 것이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다시 말도 하기 싫다. -169-170쪽

오랫동안 백성들 사이에서 살며 백성들의 물정을 보았습니다. 시골의 장터가 마을마다 설치되어 있는데 이거야말로 커다란 폐속입니다. 재산을 낭비하고 농사를 못 짓게 되며 술주정을 부리고 싸움판을 벌이는 일과 도적질하고 사람을 죽여 쓰러뜨리는 일 같은 변란이 모두 장터 때문입니다. 단호하게 엄금하는 것이 마땅하며 큰 고을에는 오직 2,3곳만 남겨두고 작은 고을에는 단 한 곳의 시장만 두게 한다면 풍속이 반드시 순박해지고 송사나 재판 사건도 반드시 줄어들게 될 것 같으니 시장을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186쪽

남자는 모름지기 사나운 새나 사나운 짐승처럼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이 있고 나서 그것을 부드럽게 교정하여 법도에 맞게 해야만 유용한 인재가 되는 것입니다. 선량한 사람은 그 한몸만을 선하게 하기에 족할 뿐입니다.-192쪽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의 고기는 전혀 먹지 못한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도(道)라고 하겠습니까. 섬 안에 산개(山犬)가 천 마리 백 마리뿐이 아닐 텐데, 제가 거기에 있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는 것을 결코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도중에 활이나 화살, 총이나 탄환이 없다고 해도 그물이나 덫을 설치할 수야 없겠습니까. (중략) 5일마다 한 마리를 삶으면 하루 이틀쯤이야 생선 요리를 먹는다 해도 어찌 기운을 잃는 데까지야 이르겠습니까. 1년 366일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충분히 고기를 계속 먹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이 흑산도를 선생의 탕목읍으로 만들어 주어 고기를 먹고 부귀를 누리게 하였는데도 오히려 고달픔과 괴로움을 스스로 택하다니 역시 사정에 어두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들깨 한 말을 이 편에 부쳐 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또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후략)-201-202쪽

요사이 <시경> 소서(小序)를 읽어 보았더니 정말 너무 잘못이 많더군요. 그것이 공자 학통의 옛글이 아니란 게 확실합니다. 한나라 학자들 가운데서 좀 나은 사람이라도 이 정도의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위굉이 지은 것이 분명합니다. 주자의 큰 안목으로써 정확히 꿰뚫어보고서 당나라나 송나라 때의 비루한 습속을 한 차례 씻어내긴 하였지만, 다만 국풍(國風)으로 말한다 해도 주남에서 정풍10까지의 95편 안에 부인들의 작품이라고 했던 시가 43편이나 될 정도로 많았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길 "부인들이 글자를 해득할 수 있으면 물의를 일으키는 수가 많다."했으니 주나라 때 부인들이 이렇게 시를 즐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229-230쪽

윤외심을 재작년 해남에서 만났을 때에 내가 "죽지 않고 서로 만났으니 이상도 하네."라고 했더니, 윤이 "사람이 죽기가 어찌 쉬운 일인가"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람이 죽기가 가장 쉬운 일이네."라고 했더니, 윤이 "죄악(罪惡)이 다한 연후에 사람이 죽는 거네."라고 하였고, 나는 "복록(福祿)이 다한 연후에 사람이 죽는 거네."라고 하다가 서로 웃고서 그만두었습니다. 그가 말한 "죄악이 다한 연후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대체로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만, 이것은 바로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는 말로 진정으로 도를 아는 사람의 말은 아닙니다.-232쪽

아내가 게으른 것은 가산을 탕진시킬 근본이다. 사경(새벽1~3시-인용자주)도 못 되어 촛불을 끄고 아침해가 창에 비치도록 이불을 개지 않는 것은 모두 게으른 사람이니, 경계해 주어도 개전의 정이 없다면 버려도 괜찮은 것이다.-252쪽

이제 풀려나 집에 돌아간다 해도 바람벽만 남은 집에 곡식이라곤 설 전에 다 떨어졌고 늙은 아내의 얼고 굶주린 모습이나 아이들의 처량한 모습일 뿐일 테지요. 두 분 형수께서는 "왔으면 왔으면 했는데 와도 그 모양이구나." 라고 할 겁니다. 태산이 등을 누르고 큰 파도가 앞을 가리고 있으니, 만약 풀려난다면 <주역>에 관한 공부가 까마득해질 것이고 음악에 대한 공부도 봄철의 개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이곳 다산을 내가 죽어서 묻힐 땅으로 작정해 주셨으며, 보암산 몇 뙈기 밭을 나의 식읍지로 주셨고, 한 해가 다 가도록 아이들의 울음소리, 아낙네의 탄식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니 복이 이처럼 후하고 지위도 이처럼 높은데도 이러한 세 가지의 깨끗한 신선세계를 버리고 네 겹으로 둘러싸인 아비규환의 세계에다 몸을 던지려 하니 천하에 이처럼 어리석은 사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뒤에 계속)-239-240쪽

(앞에서 계속)
이 이야기는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계획이 정말 이렇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돌아가고픈 심정도 없은 적이 없었으니 사람이 본성이 원래 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코 간음이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러는 남의 아내나 첩을 도적질하려 하고 분명코 생계가 파탄남을 알면서도 더러는 마작을 하는 수가 있듯이 내게 있어서의 돌아가고픈 마음도 이런 유의 심정이지 어찌 본심이겠습니까.-239-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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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3-06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현대인하고는 문화와 윤리의 감각이 다르다. 지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나 기본적으로 잔인한 면이 있다. 인권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달까, 거의 없는데, 현대의 북한 사람들에게 이런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인용의 쪽수는 1991년에 나온 책.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빌려왔는데 꽤 감동적인 구석이 있는 책이었다. 정약용이란 사람, 결벽하고 너무 진지하고 사람을 들들 볶는 타입이라 가족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짜증나겠지만, 어쨌든 진지하고 총명한 데다 나름 귀여운 면이 있다.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구판절판


5월의 어느 날, 중학교 선배인, 마이즈루 해군 사관 학교의 생도 하나가 휴가를 받아서 모교에 놀러 왔다. 그는 햇볕에 잘 탄 피부에, 깊게 눌러쓴 제모의 차양 밑으로 멋진 콧날을 드러낸 모습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야말로 젊은 영웅이었다. 그는 후배들 앞에서 고된 규율투성이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비참한 생활을 마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야기하는 듯한 어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일거수 일투족이 긍지에 넘쳤고, 젊었음에도 겸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중략)
"뭐야, 말더듬이야? 자네도 해기(해군기관학교)에 들어오지 않겠나? 말더듬이 따윈, 하루에 두들겨 고쳐 줄 테니."
나는 어쩐 일인지, 얼떨결에 명료한 대답을 했다. 말은 줄줄 흐르듯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나왔다.
"안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중이 될 겁니다."
모두들 조용해졌다. 젊은 영웅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 옆의 풀을 뜯어 입에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몇 년 후에는 나도 자네의 신세를 지게 되겠군."
그해에는 이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10-11쪽

아버지의 얼굴은 초여름의 꽃들에 묻혀 있었다.꽃들은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꽃들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왜냐 하면, 죽은 사람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지니고 있던 존재의 표면으로부터 무한히 함몰되어, 우리들을 향하고 있던 탈의 테두리 같은 것만을 남기고, 두 번 다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멀리 존재하며, 그 존재 방법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소원한가 하는 점을,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여실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었다. 정신이 죽음에 의하여 이토록 물질로 변모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그러한 국면에 접하게 되었으나, 지금 나에게 서서히, 5월의 꽃들이라든지, 태양, 책상, 학교 건물, 연필.... 그러한 물질들이 어째서 그토록 나에게 서먹서먹하고, 나로부터 먼 거리에 존재하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36쪽

그 해 여름의 금각은, 잇달아 비보가 날아드는 전쟁의 어두운 상황을 재물로, 한결 생생히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6월에는 이미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하였고, 연합군은 노르망디의 벌판을 질주하고 있었다. 관람객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어들어, 금각은 이 고독, 이 정적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전란과 불안, 수많은 시체와 엄청난 피가, 금각의 미를 풍족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금각은 불안이 세운 건축, 한 사람의 장군을 중심으로 수많은 어두운 마음의 소유자들에 세운 건축이었던 것이다. 미술사가가 양식의 절충밖에 발견하지 못한 3층의 부조화한 설계는, 불안을 결정화할 양식을 추구하여, 자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만약 금각이 하나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축이었더라면, 그 불안을 포섭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붕괴되어 버렸으리라.-40쪽

금각에 대한 나의 기묘한 집념을 털어놓은 상대는 오로지 쓰루카와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쓰루카와의 표정에는, 나의 더듬거리는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조감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러한 얼굴에 직면한다. 중요한 비밀을 고백핳ㄹ 때에도, 미에 대한 격렬한 감동을 호소할 때에도, 자신의 내장을 꺼내어 보여주는 듯한 경우에도, 내가 직면하는 것은 이러한 얼굴이다. 인간은 평소에 인간을 향하여 이러한 얼굴을 보이면 안 된다. 그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충실히, 나의 우스꽝스러운 초조감을 그대로 흉내내어, 마치 나의 무시무시한 거울처럼 변하여 있었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이라도, 그럴 때에는, 나와 똑같이 추한 얼굴로 변모한다. 그것을 본 순간, 내가 표현하려고 생각했던 중요한 것들은, 기왓장이나 다를 바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47쪽

나를 태워 죽일 불이 금각도 태워 없애 버리리라는 생각은, 나를 거의 도취시켰다. 똑같은 재앙, 똑같은 불의 불길한 운명 아래에서, 금각과 내가 사는 세계는 동일한 차원에 속하게 되었다. 나의 연약하고 보기 흉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금각은 단단하면서도 불타기 쉬운 탄소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중략)
쇼와 19년(1944) 11월, B29의 도쿄 폭격이 있던 당시는, 교토 역시 내일이라도 공습을 당할 듯이 여겨졌다. 교토 시 전체가 불에 휩싸이는 것이, 나의 은근한 꿈이 되었다. (중략)
내일이야말로 금각이 불타리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형태가 사라지리라...... 그 순간 꼭대기의 봉황은 불사조처럼 되살아 날아가리라. 그리고 형태에 속박되어 있던 금각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닻에서 벗어나 도처에 모습을 나타내어, 호수 위에도, 어두운 바다의 조수 위에도, 희미한 빛을 흩뿌리며 자유로이 떠돌아다니겠지......-50-52쪽

종전 선언을 듣고, 도쿄라면 황궁 앞으로 가겠지만, 교토에서는 아무도 없는 어소(御所) 앞에 눈물을 흘리러 간 사람들이 많았다. 교토에는 이러한 때에 눈물을 흘리러 갈 만한 신사나 불당이 많다. 어느 곳이나 그날은 붐볐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시 금각사에 오는 사람은 없었다.
뜨거운 돌맹이 위에는, 그리하여 내 그림자만이 있었다. 금각이 저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이날의 금각을 첫눈에 본 순간부터, 나는 '우리들'의 관계가 이미 변하였다고 느꼈다.
패전의 충격, 민족적 비애 따위에는 금각은 초연하였다. 혹은 초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금각은 이렇지 않았다. 결국 공습으로 불타지 않았다는 사실, 오늘 이후로는 이미 그러한 걱정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이 금각으로 하여금 다시금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는 표정을 되찾게 하였음에 틀림없다.-68쪽

나는 산노미야에 있는 선사(禪寺)의 자식으로, 날 때부터 안짱다리였어. (중략) 나는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했지. 그 조건과 화해해서, 사이좋게 지내는 건 패배라고 생각했어. 원망하자면 끝이 없지.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교정 수술을 해 주어야 했어. 이제는 이미 늦었지. 하지만 나는 부모님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더구나 원망한다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
나는 절대로 여자들한테서 사랑받지 못하리라고 믿었어. 이건 남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확신이라는 건, 아마 너도 알고 있는 바와 같아. 자신의 존재 조건과 화해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 확신과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아. 왜냐 하면, 만약 내가 이대로의 상태에서 여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만큼, 나는 자신의 존재 조건과 화해하는 게 되기 때문이지. 나는 현실을 정확히 판단하는 용기와, 그 판단과 싸울 수 있는 용기는, 쉽사리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 가만있으면서도 나는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야.
이러한 내가, 친구들처럼 몸파는 여자를 상대로 동정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지.
(아래 계속)-100-102쪽

(위에서 계속)
(중략) 사지가 멀쩡한 사내와 내가, 같은 자격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어. 그건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자기 모독으로 여겨졌거든. 내가 안짱다리라는 조건이 간과되고 무시된다면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는, 네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공포에 나도 사로잡혀 있었던 거야. (중략)
우리들과 세계를 대립 상태로 만드는 무서운 불안은, 세계이건 우리들이건 어느 쪽인가가 변하면 해소되겠지만, 변화를 꿈꾸는 몽상을 나는 증오해. 하지만, 세계가 변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변하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적으로 밝혀낸 확신은 오히려 일종의 화해, 일종의 융화와도 비슷하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세상과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불구자가 결국에 빠져드는 함정은, 대립 상태의 해소가 아니라, 대립 상태의 전적인 시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그러니까 불구는 불치가 되는 거야......-100-102쪽

너는 육체의 자각이라면, 일정한 질량을 지닌 불투명하고 확고한 '물체'에 관한 자각을 상상하겠지. 나는 그렇지 않았어. 내가 일개의 육체, 일개의 욕망으로서 완성된다는 사실, 그것은 내가 투명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즉 바람이 되는 일이었거든. 하지만 안짱다리가 곧바로 나를 저지하러 오지. 이것만은 절대로 투명해지는 일이 없다구. 그건 다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완고한 정신이었거든. 그건 육체보다도 훨씬 확고한 '물체'로서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지.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불안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지. 불안은 없어.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건 태양이나 지구나 아름다운 새나 보기 흉한 악어가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거지. 세계는 비석처럼 움직이지 않아.-105쪽

가시와기를 깊이 알게 되면서 느낀 사실이지만, 그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미를 싫어하였다. 곧바로 사라지는 음악이라든지, 수일 후에 시드는 꽃꽂이라든지, 그의 취향은 그러한 것들에 한정되어 건축이나 문학을 싫어하였다. 그가 금각에 온 것도 달이 비치는 동안의 금각을 찾아서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음악의 미는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인가! 취주자가 성취하는 그 일순간의 미는 일정한 시간을 순수한 지속으로 바꾸어 확실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살이와 같은 단명의 생물처럼 생명 그 자체의 완전한 추상이며 창조였다. 음악만큼 생명과 유사한 것은 없었고, 똑같은 미라 하더라도, 금각만큼 생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생을 모욕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미는 없었다. (중략)
(아래에 계속)-147-148쪽

(위에서 계속)
가시와기가 미로부터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위로는 아니었다! 은연중에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술로 퉁소의 취구에 불어넣은 숨결이 잠시 동안 공중에서 미를 성취시킨 뒤에, 자신의 안짱다리와 어두운 인식이 이전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남게 되는 것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미의 미익함, 미가 자신의 체내를 관통하여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절대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 가시와기가 사랑한 것은 그것이었다. 미가 나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홀가분하였을까?-147-148쪽

노사가 선택한 공안(公案)은 무문관 제14칙의 남천참묘(南泉斬猫)였다.(중략)
당나라 시절, 지주의 남천산에 보원선사라는 명승이 있었다. 산 이름을 따서 남천 스님이라 불렸다. 절간 승려들이 모두 나와서 풀베기를 하고 있을 때, 이 한적한 산 속 절간에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나타났다. 신기한 느낌에 모두가 달려들어 이것을 사로잡았으나, 그만 동서 양당의 다툼이 벌어졌다. 양당은 서로가 이 새끼 고양이를 자기네가 키우겠다고 다툰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남천 스님은 당장에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고 풀 베는 낫을 들이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면 살려 줄 것이고, 구하지 못하면 즉각 베어 버리겠다."
중들은 대답이 없었다. 남천 스님은 새끼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날이 저물어, 수제자인 조주가 돌아왔다. 남천 스님은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고는 조주의 의견을 물었다. 조주는 곧바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올린 채 나가 버렸다. 남천 스님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아, 오늘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도 목숨을 건졌을 텐데."-70-71쪽

"'남천참묘'라."하고 가시와기는, 속새풀의 길이를 재어, 수반에 대어 보며 대답하였다. "그 공안은 말이야, 그건 사람의 일생에, 갖가지 형태로 모양을 바꾸어 몇 번이고 나타나는 거지. 그건 기분 나쁜 공안이야. 인생의 전환점에서 마주칠 때마다, 똑같은 공안이 모습도 의미도 바뀌어 있거든. 남천 스님이 베어 버린 그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지. 그 고양이는 아름다웠단 말이야. 알아? 이를 데 없이 아름다웠지. 눈은 금빛에 털에는 윤기가 흘렀고 그 작고 부드러운 몸에 이 세상의 모든 향락과 미가 용수철처럼 구부려진 채 간직되어 있었지. 고양이가 미의 결정체였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간과하고 있지. 바로 나를 제외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 고양이는 느닷없이 숲 속에서 뛰쳐나와 마치 고의적인 듯이 상냥하고 교활한 눈빛을 반짝이다가 붙잡혔지. 왜냐 하면 미는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미라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충치와도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더 이상 아픔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치과 의사에게 뽑아 달라고 하지. (아래에 계속)-152-153쪽

(위에서 계속) 피투성이의 자그마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가? 고작 이런 거였나? 나에게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 또한 나의 내부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죽어 버린 물질에 불과하군. 하지만 그것과 이것이 정말로 같은 것일까? 만약 이것이 원래 나의 외부 존재였다면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나의 내부와 연결되어 내 통증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이놈이 존재하는 근거는 뭘까? 그 근거는 나의 내부에 있을까? 아니면 그 자체에 있었을까? 하여튼 나에게서 뽑혀 나와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이놈은, 이건 분명 별개의 것이지. 결코 그것이 아니야.' (아래에 계속)-152-153쪽

(위에서 계속)
알겠나? 미란 그런 거야. 그러니까 고양이를 벤 것은 마치 아픈 충치를 빼내서 미를 척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것이 최후의 해결책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미의 뿌리는 근절되지 않았고, 설령 고양이는 죽었어도 고양이의 아름다움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토록 해결이 안이했던 것을 풍자해서 조주는 그 머리에 신발을 올려 놓았지. 그는 말하자면 충치의 아픔을 참는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이것은 그야말로 가시와기 특유의 해석이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나에게 빗대어, 나의 내심을 꿰뚫어보고는 해결책이 없음을 풍자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나는 처음으로 가시와기에게서 진정한 두려움을 느꼈다. 잠자코 있기가 두려웠기에 다시 되물었다.
"너는 그러면 어느 쪽이냐? 남천 스님이냐, 아니면 조주냐?"
"글쎄, 어느 쪽일까. 지금으로서는 내가 남천이고 네가 조주지만, 언젠가는 네가 남천이 되고 내가 조주가 될지도 몰라. 이 공안은 그야말로 '고양이 눈처럼' 변하니까."-152-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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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2-2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대문 방화 사건을 계기로 96에서 9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읽은 금각사를 다시 읽기 시작. 미시마 대단하구나~ 천재구나~ 감탄하면서 즐겁게 읽었다. 우익을 자처하려면 미시마 정도는 돼야지. 2MB와 조중동과 기타 사이비들은 반성할지어다.
 
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품절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재국민화를 불러내는 주술적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제국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의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에 대한 비판은 마땅하지만, 식민주의 혹은 패권주의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국사가 그들의 국사보다 정당하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역사학을 잇는 국사의 연쇄 구도에서 이들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가 아니라 인식론적 공범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국사를 해체한다고 해서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국사를 향한 방아쇠는 그것이 어디에서 당겨지든,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국사의 연쇄 고리를 끊음으로써 어떤 동아시아 국가든 역사의 기억을 전유하려는 시도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일 수 있다. 한국의 국사 해체가 후쇼사판 교과서나 고구려의 역사적 주권을 강변하는 중국의 국사에 대한 가장 고도화된 비판이라고 믿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사, 민족 국가의 마지막 변명> 中-324-325쪽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전범들 개개인에게 추궁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책임 있는 기억을 재구성하여 보존하는 일이다. 법정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구성하는 적합한 도구라는 생각에는 아무래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대한 다양한 재판에서 드러났듯이, 사회적 기억을 사법적 판단에 맡기는 행위는 곧 사법적 실증주의에 기억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것은 문서로 입증할 수 없는 개개인의 기억을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취하함으로써 역사적 기억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크다.
<역사는 심판할 수 있는가> 中-46쪽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해방 직후 식민주의의 청산 논리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 식민주의와 결탁한 소수의 친일파를 가해자로 규정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신생 '국민'은 식민주의의 피해자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친일과 반일을 가르는 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그들 각각의 내부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탈식민'의 전제는 그들 친일파의 청산이 아니라, 식민지의 보통 사람들에게 제국 '일본'으로 표상되고 내재화된 가치 체계를 전복하는 데 있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 청산의 목소리가 높을수록 '우리'안에 내면화된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더 멀어지는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략)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축으로 형성된 집단적 기억은 강력한 민족 국가에 대한 갈망을 낳고, 결국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를 강화시켜주는 기제였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저항조차 자연스럽게 포섭하는 국가주의 헤게모니의 비밀도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근거한 한반도의 전후 역사학은 국가 권력의 공범자였다. 최선의 경우에도 수동적 공범자에 불과했다.
<세습적 희생자 의식> 中-56-57쪽

"솔직히 제 자신도 그런 상황(홀로코스트-인용자주)에 처했을 때, 인간적 존엄성이나 도덕성을 생존의 합리성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될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살아남은 자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살아남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살아남은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아니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부끄러움이 갖는 해방적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성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성은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자기 성찰과 자기 비판의 기회를 박탈합니다. 자, 나는 이렇게 도덕성을 확보했고 이렇게 정의로운 이야기를 했으니 내 영혼을 지켰다는 식의 작은 정의가 지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이 갖는 해방적 역할을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악의 평범성에서 악의 합리성으로>中 Zygmund Bauman의 말
-101쪽

그 결과 역사적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민중사의 요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구려사의 주인인 고구려인이 설 땅은 사라진다. 역사적 고구려인은 이제 한민족의 역사로 통합된 예맥 계통과 현대 중국의 영토로 흡수 통합된 거란, 말갈, 여진 계통으로 해체되고, 한국사냐 중국사냐에 따라 어느 일방의 계통만이 강조되고 다른 하나는 배제될 따름이다. 과학성과 실증성을 자랑하는 이 근대 역사학의 성과들은, 고구려가 서 있던 그 대륙의 일부를 '간도間島'라 불렀던 평범한 전근대인들의 소박한 역사 인식에 비하면, 그야말로 유치하고 무지몽매하기만 하다. (아래에 계속)-338-339쪽

(위에서 계속)
그것은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국사 패러다임에 포박된 근대 역사학이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포섭되어 국민화된 한국과 중국의 현대인들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자리잡았던 그 땅을 청과 조선 사이에 끼인 섬이라는 의미에서의 간도라 부를 수 있었던 인식은 생생한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변경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각별히 주목된다.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국사라는 폭력에서 구출해,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고구려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구려사 구하기> 中-338-339쪽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구별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완강한 국민적 상식은 닫힌 민족주의 대 열린 민족주의, 또는 나쁜 민족주의 대 좋은 민족주의라는 규범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중략)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가 현실이었고 통일된 국민 국가가 이상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이 현실이었고 통일된 국민 국가가 이상이었다. 20세기 한반도의 이런 역사적 구도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손쉬운 이분법'이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규범적 이해를 유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분단을 고착화하는 남한의 분단 정권이 국가주의=나쁜 민족주의라면,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저항 민족주의와 분단을 거부하는 민중 민족주의는 좋은 민족주의라는 식이었다.
(아래에 계속)-259-261쪽

(위에서 계속)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런 규범적 이해는 민족주의 또는 국민국가가 갖는 '모듈module적' 성격을 간과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국민 국가의 형성에서 한 발 앞섰기 때문에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던 중심부이 국민 국가적 지배 장치들이 주변부 민족주의의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중략) 개개 국민 국가가 중심-반주변-주변이라는 국가간 체제의 위계 질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집권한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국가의 구조적 집중화 이외의 대안을 찾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내 식대로 표현한다면, 민족이 민중을 전유하고 다시 국가가 민족을 전유하는 연쇄 고리가 민족주의와 국자주의를 연계시키기 때문이다. 북한의 강성 대국론에서 잘 나타나듯이 중심의 힘을 선망하는 주변부 민족 해방 운동의 저항은 이미 '지배가 내장된 저항'인 것이다.
<다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中-259-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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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바이러스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4년 6월
절판


사이버 공간은 ID 뒤로 주체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개성과 인격과 책임의식 없이 오로지 공격적 본능만 가득한 인간 하이에나를 양산할 수가 있다.
<디지털 복제 시대의 글쓰기>-276쪽

실제로 나는 사이버 공간을 가끔 현실로 느낀다. 때로는 그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현실의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며칠 동안 컴퓨터를 떠나 있으면 허망하다는 느낌과 함께 뭔가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는 컴퓨터 속이 아니라 밖에 있다. 그런데도 컴퓨터 앞에 앉으면 나는 사이버 공간을 너무나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세계로 착각하게 된다. 일종의 '매트릭스' 현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디지털 복제 시대의 글쓰기>-277쪽

오늘날 지식인들은 과거에 누렸던 '권위'를 잃어버렸다. 이것은 진보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논리'의 권위도 사라졌다. 이것은 반동적이다. 오늘날 대중은 과거에 누리지 못한 '힘'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 힘은 '논리'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쪽수의 물리량과 익명의 보호막 위에 서 있다. 이것은 반동적이다. 하여튼 재미있는 현상이다.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초현대적 미디어를 통해 흐르는 것은 논리의 빈곤, 열정의 과잉과 같은 전근대적 에너지이다. 발달한 기술과 미발달한 인성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의 크기만큼 사회는 우익적이다. 보수 정치는 양팔을 벌려 그 간극을 넓히려 한다.
<지식인과 네티즌>-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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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War> 의 전투는 새로운 국면으로 : 네티즌이여 진중권의 무덤에 침을 뱉어라
    from miseryrunsfast 2007-08-12 09:56 
    에 대한 글을 하나 썼는데, 그에 대한 질문이 날아온데다, 어제는 무려 100분토론(정확히는 오늘이지만)에서 진중권씨가 한 발언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다. 그간 있었던 수많은 잡음들과 이야기들 앞에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났으니, 그게 바로 진중권이다. 자, 이기자. 대충 분위기가 이렇다고 보이는데, 좀 더 길게 써보자. 에 스토리가 있는가? 저번 내 포스트에서도 나는 의 스토리없음과 그에 비해 심형래씨에게는 왜..
 
 
miseryrunsfast 2007-08-12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아. 그래요. 빨간 바이러스였군요.
이 녀석을 좀 인용하고 싶었는데, 어디서 나온 글인지 몰라서 몇시간을 끙끙거렸는데.
감사합니다. -ㅂ-

mizuaki 2007-08-12 09:45   좋아요 0 | URL
감사는요. 잘 오셨어요. ^^
블로그 글은 즐겨찾기 해 뒀습니다. 좋은 글 쓰시길 기대합니다.

miseryrunsfast 2007-08-1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뭐 어짜피 잡문이라 ^^ 글 쓸 때마다 요즘은 뭐랄까, 욕망에 충실한 짓이구나.
할 때가 많거든요. 점점 길어지고 오래 걸리게 되어 그런걸까 생각중입니다만.
어쩌다보니 mizuaki님 글을 다 읽어버렸습니다. 즐겁게 부유중.
 
시칠리아의 암소 - ...한줌의 부도덕
진중권 지음 / 다우출판사 / 2000년 11월
절판


프랑스 속담에 따르면 "스타일, 그것은 인간"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양한만큼 글쓰기의 스타일도 다양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가끔 내 원고도 삭제를 당한다. 대개 스타일의 문제 때문이다. 그 어떤 독재보다도 더 끈질기고 강한 것이 바로 스타일의 독재이다. 가령 나의 글에 대한 반론 대부분은 내 스타일을 문제 삼는다. 어떤 이에게 내 글의 스타일은 "점잖지 못"하고, 어떤 이에게는 "애정이 결여"되어 있으며, 어떤 이에게는 "예의가 없고", 어떤 이들에겐 "왠지 불편하게" 만드는 글이다. 물론 내게 그들의 글쓰기는 하품이 나지만, 나는 이 주관적 취향을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논거로 삼지는 않는다.(중략)
지극히 주관적인 스타일이 포착한 내용도 보편적이며 사회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말하자면 세계를 바라보는 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이 동시에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주관성과 보편성의 이 모순적 결합이 바로 미적 판단의 고유한 특징이다. 거기에 또한 미적 판단의 인식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스타일은 곧 사람이다. 스타일의 독재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린다. 보편에 대한 이 개별의 기여를 막아버린다.
<어떤 글쓰기>-9-10쪽

그 시절 얌전히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걷던 일본에서 '국가주의'란 몇몇 정신나간 우익의 머릿속에 든 이데올로기적 허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 한국에서는 아기들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고 있었고, 학생들은 날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있었으며, 부모들은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걸머진 "산업전사"로서 "일하면서 싸우는 보람"에 살고 있었다.
<너희 안의 파시즘>-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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