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15권 양장본 세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7년 2월
품절


로마인조차도 고대 최고의 전술가로 인정하게 된 한니발인데, 사군토 공략에 8개월이나 걸렸다. 현대 전사가들은 쌍방의 군대가 어울려서 싸우는 대규모 회전의 전술에서는 한니발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지만, 성을 공격하는 전술을 서툴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사군토를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런 도시쯤은 203고지를 공략할 때 악전고투한 노기 마레스케(러일전쟁 때 여순을 함락한 일본 육군대장-역자주?) 같은 사람도 쉽게 ㅅ함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내 생각에, 한니발은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끈 것 같다. 사군토 공략전을 오래 끌어, 로마의 선전포고를 유발하려 한 게 아닐까. 곤경에 빠진 동맹국을 내버려두고 못 본 체하는 것만큼 당시 로마인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2-116쪽

한니발이 알렉산드로스를 배운 것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같은 인간이 아니다. 한니발과는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적의 허를 찌르거나 책략을 꾸민 적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이라는 민족성의 차이가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와 한니발이라는 개인의 성격 차이로 돌릴 수밖에 없다.
호메로스의 영웅들 가운데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사랑한 것은 고귀하고 용감하지만 책략과는 인연이 없는 아킬레우스였다. 한니바리 좋아한 영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교묘한 계략으로 트로이를 함락시킨 오디세우사가 좋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교묘하게 고안된 전략 전술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의 성격에 맞지 않으면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기질에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법이다. 기원전 4세기의 '아킬레우스'는 야습조차도 하려들지 않았지만, 한니발은 기원전 3세기의 '오디세우스'였다. -2-194쪽

특히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정의와 비정의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 범죄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전쟁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라도 열렸다면, 한니발이 전범 제1호가 되었을 것이다.
강화 내용은 분명히 엄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략) 카르타고에 대한 요구만이 유독 가혹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로마인들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렀듯이,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카르타고 쪽이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한니발이 교묘하게 로마의 선전포고를 유도했다 해도 전쟁을 시작한 것은 카르타고다. 로마가 치른 16년 동안의 노고, 10만 명의 넘는 전사자, 10명이 넘는 집정관급 사령관의 죽음을 생각하면, 패전국이 되긴 했지만 카르타고가 치른 희생은 놀랄 만큼 약소하다. 이것을 보아도, 로마인은 패자와 강화를 맺을 때 증오에 눈이 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강화 교섭에 직접 관여한 스키피오의 인품이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강화를 민회에서 군말없이 승인한 로마인의 성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맺은 강화는 엄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보복이 아니었고, 하물며 정의가 비정의에 내리는 징벌은 전혀 아니었다. 인류가 결코 초탈하지 못하는 전쟁이라는 악업을 승자와 패자가 아니라 정의와 비정의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렇게 구분했다고 해서 전쟁이 소멸한 것도 아닌데.-2-343쪽

나는 제1권에서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로마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이 관계는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의 관계다. (중략) 기원전 201년부터 기원전 187년 무렵까지 원로원에서 스키피오의 영향력은 막강했는데, 이 시기에 스키피오가 생각하고 실천한 대와관계는 바로 이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였던 것 같다. '파트로네스'는 패권국이 된 로마다. '클리엔테스'는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그 휘하에서 독립과 자치를 누리는 동맹국이다. 로마의 책무는 '클리엔테스'를 보호하는 것이다. 로마인 사회에서 이 관계를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요소가 '신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와 동맹국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도 착취나 이용이 아니라 신의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의 연구자들, 특히 통치 방식에 민감한 영국 학자들은 이 시기 로마의 대외정책을 '온건한 제국주의'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온건한 제국주의 노선에도 약점은 있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가 양쪽 다 같은 관점에 서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약점이다. 즉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이 노선은 성립하지 않는다. '파트로네스'가 주장한다.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자유는 제한하겠지만, 질서와 안전은 보장하겠다. '클리엔테스'가 반박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스키피오 시대부터 2천 3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인류는 이 양자 가운데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 아직껏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2-376쪽

(기원전 1세기에) 적어도 200만 명을 헤아렸던 노예들의 분야별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노예 가격은 알려져 있다. 그것을 비싼 쪽부터 차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교사: 그리스어나 웅변술을 로마의 양갓집 자제에게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그리스인의 독점시장이기도 했다. 비싼 경우에는 로마 시내의 단독주택이나 나폴리 근교 해변의 별장을 사는 것과 맞먹는 값이었다. 이만한 투자를 했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노예라고 해도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대단히 정중하게 대우했다. 그리스어 문장을 잘못 썼다는 이유로 교사가 학생에게 체벌을 가해도 부모는 항의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만큼 교사 노예가 강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2. 숙련 기술자: 의사, 건축가, 조각가, 화가. 엔지니어는 동족 중에서 배출한 로마인이지만, 건축가나 예술가를 동족 중에서 배출한 아테네인과는 달리 건축이나 조각, 회화, 모자이크 같은 조형 예술은 노예에게 맡겼다. (계속)-3-211쪽

3. 상급 기술자: 교역에 종사하거나, 농장 경영을 담당하거나, 주인의 비서 노릇도 할 수 있을 만한 머리를 가진 노예를 가리킨다. (중략)
4. 일반 기술자: 가게 지배인, 장인, 예능인, 검투사
5. 춤이나 음악 연주 기능을 가진 여자 노예
6.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남녀 노예: 다만 요리사의 경우는 유명해지면 숙련 기술자로 간주되어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또한 같은 가사노동이라도 집사나 주인집 아이들의 양육을 맡는 유모나 하인은 지위도 높고 값도 비쌌다.
7. 비숙련 노동자: 농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
8. 아동 노예 (중략)

로마 사회에서 노예반란이 적었던 이유로는, 우선 노예라도 한식구처럼 대우받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노예들 사이의 계층화도 이유가 될 것이다. 정중한 대우를 받는 교사 노예나 숙련 기술자 노예가 양치기 노예와 공동전선을 펴는 것도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다. 세번째 이유로는 계급간의 유동성을 들 수 있다. 로마 사회에서 해방 노예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노예가 되기만 하면 약간의 재산과 아들이 있는 경우에는 투표권도 취득할 수 있고, 재산이 없는 자라도 자식 대가 되면 완전한 로마 시민이 될 수 있었다.

(폰토스 왕 미트라다테스가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살루스티우스의 '역사'에 수록)

268
"실제로 로마인들은 예로부터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외국과 전쟁을 해온 민족이었소. 부와 영토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바로 그것이오."

270
"그들도 옛날에는 난민이었소. 나라도 없고 가족도 없는, 낙오자 무리에 불과했었소.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희생 위에 국가를 세웠소. 어떤 법률도, 어떤 인간의 윤리도, 어떤 신도, 친구나 동맹자가 가진 것을 강탈하고 그들을 파멸시키는 행위를 용납할 리 없소. 악의에 찬 눈으로 다른 민족을 노려보고 그들을 노예화하는 것을 용납할 리 없소.
그렇기는 하지만, 자유를 바라는 자는 적고, 공정한 주인을 바라는 자는 많은 것이 바로 인간이오. 우리 오리엔트의 군주들은 이 점에서는 늘 신하들한테서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고 있소. 우리는 백성들의 이익을 배반하거나 복수하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오."
-3-268쪽

(BCE 62, 키케로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아시아는 우리 로마 덕분에 끝없는 전쟁과 내분에서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이 가진 부의 일부가 로마의 패권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바쳐진다 해도 그것을 불평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희생은 이 지방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기 때문이다."-3-272쪽

이 대답을 가지고 사절이 요새로 돌아간 뒤, 요새에서는 많은 무기가 밖으로 내던져졌다. 하지만 3분의 1은 요새 안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래도 카이사르는 약속을 지켰다. 아투아투키족과의 강화는 그날로 성립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제3보초시, 즉 자정이 지났을 무렵, 숨겨둔 무기를 휴대한 사내들이 요새에서 빠져나와 진영에서 잠자고 있던 로마군을 습격했다. 한밤중의 격투 끝에 4천명의 적병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요새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로마군은 이제 경비병도 없는 성문을 통해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농성하고 있던 전사와 주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다. 노예상인들이 카이사르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노예로 팔린 사람은 모두 5만3천 명에 이르렀다.
로마인은 약속을 매우 중요시한다. 로마인은 다신교를 믿으니까 그것은 신과의 계약이 아니라 인간끼리의 약속이다. 이민족도 대등한 인간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이민족과 맺은 약속을 믿는 것이다. 일신교적인 계약에 익숙한 서양인보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격언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동양인이 인간끼리의 약속을 중시한 로마인의 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카이사르가 보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맺은 약속을 어기고 기습을 자행한 행위는 명백한 죄였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에게 어울리는 운명은 노예라고 그는 생각했다.-4-263쪽

p303
이로부터 1세기 뒤인 제정시대가 되면 라인강을 로마의 방어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 카이사르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라, 라인강 서쪽 연안인 이 일대에 로마의 군사기지가 염주처럼 줄줄이 세워진다. '좋은'이라는 뜻의 라틴어 '보나'를 어원으로 하는 본, 코로니아를 독일식으로 발음한 쾰른이 대표적인 로마의 군사기지다.
이건 여담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서독이 본에 수도를 둔 것은 물론 베를린이 동독 안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이긴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히틀러와 결별하고 싶은 독일인의 마음속에 라인강 서쪽에 속하고 싶다는 소망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를 추종하는 독일인들을 규탄할 때, 마치 라인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고대 로마인이라도 된 것처럼 라인강 건너편의 비문명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p308
그리고 이튿날 오전 10시, 최초의 로마 선박이 브리타니아 해안에 도착했다. 윈스턴 처칠이 대영제국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말한 기원전 55년 8월 26일이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역사치고는 너무나 위엄이 없는 첫걸음이었다.-4-303쪽

카이사르는 지난해의 첫번째 브리타니아 원정에는 기병대 없이 2개 군단만 데려갔지만, 이번의 두번째 원정에는 5개 군단과 2천 명의 기병대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기병대는 대부분 갈리아 부족에서 참가한 병사들이었다. 이것은 기병이 꼭 필요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갈리아의 지배 계급으로 구성된 그들을 브리타니아로 데려감으로써 사실상의 인질을 잡아두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브리타니아에 가 있는 동안 갈리아가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을 너무 민감하게 알아차린 자들 가운데 하이두이 족장 둠노리스가 있었다. 그는 바다가 무섭고 종교도 그것을 금하고 있으니까 갈리아에 남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카이사르는 당연히 거절했다. (중략)
25일 동안 기다린 뒤, 바람은 순풍인 남서풍으로 바뀌었다. 카이사르는 승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모두 배에 올라타느라 소란해진 틈에 둠노릭스가 자기 부족의 기병만 데리고 탈주했다. 이를 보고받은 카이사르는 당장 승선을 중지시키고, 탈주자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추격하러 가는 로마 기병들한테는 둠노릭스가 돌아오기를 거절하면 죽여도 좋다고 일렀다. 마침내 따라잡힌 둠노릭스는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다."라고 외치면서 죽었다. 나머지 기병들은 모두 돌아왔다. 그리고 승선이 재개되었다.-4-325쪽

탑수스 회전이 끝난 지 엿새가 지난 4월 12일, 카토는 우티카의 유지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로마인이 손님을 초대하는 저녁식사는 플라톤의 <향연>에도 나오듯이 침대형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주제를 정하여 토론하는 자리다. (중략) 이 자리에서 대화 주제를 정하고 사회를 맡는 것은 초대자, 즉 주인의 역할이었다. 카토가 주최한 향연에서는 탑수스 회전은 화제에 오르지 않았고, 오로지 철학적인 명제만 논의되었다.그날 밤의 주제는 '자유란 무엇인가'였다고 한다. 카토는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면서,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은 설령 죽는다 해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계속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향연이 끝나고 카토는 침실로 물러갔다. 하지만 곧 잠자리에 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등불을 가까이 갖다놓고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었다. <파이돈>은 사형집행일을 내일로 앞둔 소크라테스가 감옥을 찾아온 제자들과 삶과 죽음에 관해 대화하는 광경을 서술한 철학서다. 잠시 이 책을 읽은 뒤, 카토는 단검을 꺼내 배를 찔렀다. (중략) 달려온 의사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카토의 상처를 꿰매려고 했다. 그러나 카토는 그 손을 뿌리치고, 자기 손으로 내장을 끄집어내어 겨우 죽을 수 있었다. 향년 49세였다.-5-262쪽

시민권이 문제가 되는 것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시민의 의무로 되어 있는 병역도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지원제가 되었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된다. 병역 의무가 없는 대신 속주세를 낼 의무가 있는 속주민과는 달리,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이런 종류의 직접세를 낼 의무도 없다. (중략) 외국인이 로마 시민을 죽이면 로마는 잠자코 있지 않았다. 또한 사유재산 보호와 개인의 인권 보호를 양대 지주로 삼고 있는 로마 법 체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한 마디 하소연도 못하고 재산을 강탈당할 염려나 재판도 받지 않고 처형당할 염려가 없다는 것은 커다란 이점이었다. 혈연관계가 없으면 시민권을 주지 않은 아테네와 달리, 로마는 시민권에 그런 제약을 두지 않았다. -5-300쪽

지금까지 카이사르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연구자들도 기독교라는 일신교 문명에서 자유로워지기가 어렵기 때문인지,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서술할 때는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합리적 정신의 소유자인 카이사르니까 신으로 격상된 것을 오히려 곤혹스러워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나는 800만이라는 신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기독교도 연구자들이 느끼는 당혹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당시 로마인도 800만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마구잡이로 신을 만드는 경향은 다신교 민족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왕성했다. (중략)
하지만 신이 된 덕에 유감스러운 일도 있었을 것이다. 비범한 인물이긴 했지만 유머 감각이 없었던 옥타비아누스가 신이 된 카이사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를 제외한 모든 저술을 폐기처분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덕에 카이사르가 청년 시절에 썼다는 시와 희곡, 그리고 수많은 편지를 포함한 카잇하르의 작품이 모조리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그 편지들 중에는 애인에게 보낸 연애편지도 많았다고 한다.
-5-441쪽

카이사르는 정복당한 민족이 반기를 드는 것은 민중이 자주적으로 봉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층이 민중을 선동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지배층이 불만을 품는 것은 타민족에게 정복당하여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중략)
이리하여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도층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부족장의 권력과 권위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유력한 부족장에게는 원로원 의석까지 주고, 율리우스라는 자신의 가문 이름도 하사하고, 자제들에게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주어 로마 유학까지 시켰다.-6-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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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7-06-0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이 대출중이었으므로, 2,3,4,5,6 대출. 과연 나흘 간 다섯 권을 다 읽을 수 있을까? 2권을 100여 페이지 읽은 현재의 인상은 무척 일본인스러운 작가라는 것. <로마진노 모노가타리>라니 라는 제목부터 <겐페이 모노가타리>를 연상시킨다. 시바 료타료의 역사 소설이 떠오르기도 하고.

mizuaki 2007-06-0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려온 2-6권을 다 읽었다. 마지막 6권은 중간에 던져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읽었다. 음험하고 집요하며 자유에 대한 증오를 경건함으로 포장하는 아우구스투스, 진짜 재수 없다. 파테르 파트리아이? 흥! 아버지 수령님이라고 하면 딱 맞겠다.
군사력에 의한 대제국에게 침략 전쟁은 숙명이었을 것, 카이사르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이 명백한 침략 전쟁의 잔혹함에 눈 감아 버리는 시오노 나나미도 재수 없다. 이런 사람은 오비디우스의 풍자와 유머가 가지는 의미같은 건 평생 가도 이해 못할 것이다. <메타모르포세스>에 나오는 제우스의 바람기와 난행은 카이사르에, 아폴로의 어줍잖음은 아우구스투스에 대응된다는 것이 이제는 너무 명백한 내게, 오비디우스 추방에 대한 시오노의 뒷 얘기는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