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 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휘그당원인 디포우가 깊은 낙관주의자라면, 스위프트는 (월포울 시대의 토리당원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지독한 비관주의자이다. 따라서 디포우가 세상과 하느님을 믿는 부르즈와적, 퓨리턴적 생활철학을 선언한다면, 스위프트는 사람을 미워하고 세상을 멸시하는 냉소적인 우월감을 공공연히 과시한다. (중략) 오직 혼자 힘으로 거친 자연을 이기고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행복과 안전과 질서와 법과 관습을 창조해낸 로빈슨 크루쏘우는 중간계급의 고전적 대표자이다. 그의 모험담은 근면과 인내와 발명심과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건강한 인간 오성, 요컨대 실천적인 시민적 덕목을 기리는 하나의 영원한 찬가이다.또한 그것은 자기의 강한 힘을 자각하고 야심에 불타는 한 계급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진취적인 기상과 세계지배의 꿈에 부푼 한 젊은 민족의 선언문이다. (아래에 계속)-69-71쪽

(위에서 계속) 반면에 스위프트는 오직 이 모든 것의 뒷면만을 본다. 그것은 단지 그가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관찰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대포우의 소박한 신념을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환멸을 맨 먼저 체험한 사람들 증의 하나로서 자기의 체험을 형상화하여 깡디드를 능가하는 이 시대의 인물로 걸리버를 창조했다. 그는 증오가 천재로 만든 사람에 속하는데, 다른 사람이 미워하는 것보다 더 잘 미워하기 때문에, 그리고 포우프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듯이 세상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괴롭히기를 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사물을 본다. 이리하여 그는 인도주의와 정서를 중시했으면서도 잔인한 책들이 결코 적지 않았던 이 세기에도 가장 잔인한 책의 저자가 되었다. 영문학에서, <로빈슨 크루쏘우>에 버금가는 위대한 '소년소설'인 이 작품보다 박애주의적인 <로빈슨 크루쏘우>에 더 반대되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려울 것인데, 그 잔인함에서 <걸리버 여행기>를 능가하는 것은 아마 아동들에게 널리 알려진 또 하나의 고전인 <돈 끼호떼>뿐일 것이다. (아래에 계속)-69-71쪽

(위에서 계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버 여행기>와 <로빈슨 크루쏘우>에는 일종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두 작품은 문학사적으로 보아 르네쌍스 시대에 유행했고 씨라노 드 베르주라끄, 깜빠넬라, 토마스 모어 등을 대표적 작가로 하는 저 공상적 여행소설과 유토피아적 기적담에 연원을 둔다. 그리고 또한 이 두 작품은 동일한 세계관상의 문제, 즉 인간문화의 기원과 타당성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문명의 사회적 기반이 뒤흔들리게 된 시대엠만 이러한 문제들은 그처럼 심각한 의미를 가지는 법인데 디포우와 스위프트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또 문화의 주역이 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교체되는 바로 그 와중에서만 여러 상이한 문명들의 사회적 제약성이라는 사상을 그처럼 날카롭게 규정하는 것이 가능한 법인데 그들에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69-71쪽

루쏘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편에 서서 절대적 자유의 쟁취를 위해 진력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태어났던 그대로의 소시민으로, 생활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던 그대로의 '뿌리뽑인 존재'로 일관했다. (중략) 그러나 볼떼르가 루쏘의 평민적 감상성과 무비판적 열광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를 공격한 것은 다만 그의 부르즈와로서의 입장 내지 부유한 신사의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도한 냉저앟고 회의적이며 현실주의적 사고를 지닌 시민이자 학자로서 루쏘가 열어젖힌, 계몽주의라는 구조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는 비합리주의의 심연에 대해 저항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험이 실제로 얼마나 컸으며 볼떼르의 우려가 얼마나 정당했는가 하는 것은 독일에서의 계몽주의의 운명이 보여주는 바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볼떼르는 자기 자신의 영향력의 성과를 과소평가했다고 할 수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합리주의와 유물주의의 여러 업적들이 쉽게 말살될 수 없을 만큼 튼튼한 기반을 구축했던 것이다.-102-103쪽

지체 높은 귀족이나 직접적인 주문자를 위한 작곡과 누가 누군지 모르는 연주회 청중을 위한 창작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주문작품이 대체로 2회 연주를 위한 것임에 비하여 연주용 작품이란 되도록 여러 번 되풀이하여 연주될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연주용 작품이 대체로 더 조심스럽게 작곡되고 또 작곡가가 연주에 관해 더 까다로운 요구를 내놓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략) 주문에 의한 객관적인 작곡에서 개인적, 자기고백적인 음악으로의 최종적인 전환은 모짜르트와 베토벤 사이에서 일어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은 베토벤의 원숙기가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에로이카> 직전으로서, 공개연주회라고 하는 것이 이제 완전히 사회적으로 확립되고 되풀이 연주되어야 하 필요 때문에 기반을 굳히게 된 악보 매매가 작곡가의 주수입원을 이루게 된 시기이다. 베토벤의 경우 이때부터 크고 작은 모든 작품들은 단지 그의 새로운 이념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의 새로운 발전단계의 표현이다. -107-108쪽

괴테는 말년에 가서 문학에 대한 순개인적 입장에서 멀어지면서 차츰 일반적인 문명적 과제를 중시하는 초개인적이고 초국가적인 예술관에 가까워져 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계문학'이라는 명칭과 부분적으로는 그 개념까지도 그에게서 처음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세계문학적 상황은 사람들이 미처 의식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계몽주의의 문학, 볼떼르와 디드로, 로크와 엘베씨우스, 루쏘와 리처드슨의 작품들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이미 '세계문학'이었다. 18세기 전반 이래 일조으이 '유럽적 대화'가 진행중이었고 유럽의 모든 문화민족들이 비록 대부분 수동적이긴 했지만 이 대화에 참가하였다. (중략) 세계문학의 이론과 실제는 세계무역의 목적과 방법에 의해 조건지어진 문명의 산물이다. 여러 나라들 사이의 정신적 상품의 교환을 무역과 비교했던 괴테의 발언 자체가 이러한 상관관계를 암시하고 있고, 또 이러한 개념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168-169쪽

혁명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에겐 끝없는 환멸이 엄습하였고, 계몽주의의 낙관적 세계관은 그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8세기의 자유주의는 자유와 평등이 동일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 둘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18세기 낙관주의의 원천이었다면, 이 두 이념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믿음의 상실은 혁명 이후 시대의 비관주의의 근원이다. -208쪽

예술교욱의 민주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미술관의 설립과 확장이었다. 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이딸리아 여해을 할 형편이 못 되었던 미술가들에겐 유명한 거장들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 작품들은 대부분 왕실이나 대수집가의 진열실에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대중은 여기에 접근할 기회가 없었다. 혁명과 함께 이러한 사정은 일변하였다. 1792년 국민의회는 루브르에 미술관을 창설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때부터 젊은 예술가들은 자기 아뜰리에 바로 근처에 있는 이곳 루브르에서 매일처럼 걸작품을 연구하거나 모사할 수 있었고, 또 이곳의 진열실에서 스승에게 배운 바를 다시 확인하고 가장 잘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212-213쪽

프랑스 낭만주의가 정치적 혁명에 대한 보수층의 반동으로 생겨났다면, 영국 낭만주의는 근본적으로 산업혁명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반동으로 생겨났다.-266쪽

18세기의 사람들은 시가 사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시적 형상의 의미와 목적은 이념적 내용의 설명이요 해설이었다. 낭만주의 문학에서는 이와 반대로 시적 형상은 이념의 결과가 아니라 원천이다. (중략) 낭만주의자들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초감성적인 영혼을 시적 영감의 원천으로 믿고 그것을 언어의 자발적인 창조력과 동일시하였다. (중략) 여기에서는 영감의 신적 기원이라는 것이 내용적 특성이 아니라 하나의 순수한 형식적 특성이다. 본래부터 영혼 속에 존재하고 있지 않던 것이 영감을 통해서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두 원칙, 즉 신적 원칙과 시인적, 개인적 원칙은 손상 없이 유지되며 그리하여 시인은 자기 자신의 신이 된 것이었다.-268쪽

영국에서의 독자의 수효는 18세기 초기부터 계속 증가일로에 있었다. 그 첫째 단계는 1710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잡지가 생겨나서 1750년경 소설문학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시기이고, 두번째 단계는 1770년에서 1800년에 이르는 사이비 역사공포소설의 시기이고, 마지막 단계가 바로 월터 스콧에서 시작하는 현대 자연주의적 소설의 시기이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지금가지 전혀 책을 읽지 않거나 아니면 읽더라도 기껏해야 일반적인 종교서적을 읽던 시민계급의 일부분을 세속적 문학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독자층이 돈 많은 부르즈와지를 중심으로 하는(그것도 주로 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넓은 써클로 확대되었으며, 세번째 단계에서는 소설에서 오락뿐만 아니라 교훈을 찾았던 중류층 혹은 하류층 부르즈와지 사회계층이 독자층에 가세하였다.-276쪽

자연주의에 반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는 공통점은 이 두 양식이 현존재와 인간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설정하고 도 여기에 웅대한 비극적, 영웅적 면모와 정열적인 감상적 표현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들라크르와에게는 아직 남아 있지만 콘스터블과 19세기 자연주의에 오면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중략) 그러나 인간이 예술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물체적 세계가 인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자 회화는 새로운 내용을 획득하게 될 뿐 아니라 점점 더 기술적이고 순전히 형식적인 문제의 해결에 의존하게 된다. 묘사대상은 점차 모든 미적 가치와 예술적 관심을 잃게 되고 그리하여 예술은 일찍이 유례가 없었을 만큼 형식주의적으로 된다. 무엇을 그리는가 하는 것은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오직 어떻게 그려졌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 된다.-280쪽

고전적 쏘나따나 심포니가 소규모의 세계 즉 소우주였다면, 예컨대 슈만의 <사육제>나 리스트의 <순례의 해> 등과 같은 음악적 그림이 연속된 악곡은 마치 화가의 스케치북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곳들은 군데군데 뒤어난 서정적, 인상주의적 부분들을 포함ㅎ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총체성과 유기적 통일성의 인상을 주려는 노력은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다. 베를리오즈, 리스트, 림스끼-꼬르사꼬프, 스메타나 등의 음악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심포니를 밀어내게 한 교향시에 대한 그들의 편애는 무엇보다도 세계를 전체로서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혹은 그렇게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는 징표이다.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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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1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의 우선 공략 대상은 "담임 선생님"의 박사 논문에서부터 줄기차게 인용되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사회학자가 쓴 문학사, 예술사인가? 내용이 너무 많아서 전체적인 인상을 잡기가 쉽지 않아 그냥 흥미위주로 읽는다. 고척도서관에 1, 2권이 없어서 3권부터 시작. 과연 이 주 내로 모두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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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처음 쓰여졌을 당시, 파시즘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회 집단'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이상'을 조직하여 대표하는 '정당'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판단에 따르면, 파시스트당이 폭력을 ㅇ용하거나 '정치적 책략'을 통하여 파시즘을 도입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나는 많은 계층, 인종, 민족의 사람들과 다양한 종교의 추종자들을 치료한 의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파시즘'이 단지 특정 인종이나 국가 또는 특정 정당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평범한 인간의 성격구조가 조직화되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성격적 의미에서 보면 파시즘은 권위적인 기계문명과 이 문명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인생관의 억압을 받은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감정적 태도이다.
우리 시대 인간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파시스트당을 만든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잘못된 정치적 생각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파시즘은 독일인이나 일본인의 민족적 특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최초의 오류들로부터 다른 모든 잘못된 해석들이 나오게 된다.
(아래에 계속)-12-13쪽

(위에서 계속)
파시즘은 자유를 성취하려는 진정한 노력에 해를 끼치는 작은 반동적 당파의 독재로 인식되었고, 여전히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이런 오류에 끈질기게 집착하는 것은 실제 사태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파시즘은 사실 국제적인 현상이며, 인간 사회의 모든 신체와 국가에 퍼져 있는 현상이다. 이 결론은 지난 15년간의 국제적 현상들과 일치한다.
오히려 나는 자신의 성격구조 속에 파시스트적 감정과 생각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성격분석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적 운동으로서 파시즘은 그것이 인민대중에 의해 탄생되고 대변되었기 때문에 다른 반동적 정당과는 다르다.-12-13쪽

얼마나 많은 중산계층들이 좌파 정당에 투표를 했든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우파 정당에 투표를 했든지 간에 우리가 산출한 '이데올로기적 분포'가 1932년의 선거수치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은 눈길을 끈다. 즉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1천2백만에서 1천3백만표를 획득한 반면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은 약 1천9백만에서 2천만표를 획득했다. 이는 시렞 정치가 경제적 분포가 안라 이데올로기적 분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44-45쪽

대중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군국주의의 효과는 본질적으로 리비도적인 매커니즘에 의존한다. 제복의 성적 효과, 성적 흥분을 유발시키는 리드미컬한 군대식 걸음걸이의 효과, 군국주의적 의식의 전시효과적 특성 등은 학식 있는 정치가보다는 상점의 여성 종업원이나 평범한 회사원에 의해 더 실제적으로 이해되었다. 정치적 반동세력은 이런 성적 관점을 오히려 의식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남자들을 위하여 공작 깃털 같은 산뜻한 제복을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여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중략)
자유를 향한 의지를 억압하는 성적 도덕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이해에 순응하는 힘 역시 그 에너지를 억압된 성욕에서 얻는다. 이제 우리는 '경제적 토대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반작용'이라는 과정의 핵심부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의 억압은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을 자신의 구조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에 반(反)하여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변화시킨다.-68-69쪽

히틀러의 성격구조와 생애는 민족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상의 소시민적 기원이 자신들의 성격구조와 대체로 일치했기에 대중들이 그 사상을 열렬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흥미롭다. 모든 반동적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소시민 계층에 그 지지 기반을 두고 있었다. 민족사회주의는 소시민계층의 대중심리를 특징짓는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75쪽

경제적 상황과 구조적 상황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에서 권위적 가족은 모든 종류의 반동적 사유를 가장 우선적이고 근본적으로 재생산하는 장소이다. 가족은 반동적 이데올로기와 반동적 구조를 생산하는 공장인 것이다. 따라서 '가족의 보호', 즉 권위적이고 자녀가 많은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 모든 반동적 문화정책의 첫번째 계울이다. '국가, 문화, 문명의 보호'라는 구절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105쪽

대중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적인 지도자는 민족의 화신을 의미한다. 지도자가 대중들의 민족감정에 조응하여 실제로 민족의 화신이 될 때만 그에 대한 개인적 유대가 생성될 수 있다. 또한 그 지도자가 대중들 개개인에게 정서적인 가족적 유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이해했을 때만, 그는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상을 획득할 수 있다. 그 지도자는 엄격하지만 보호를 제공하는, (아이들이 보기에) 품위 있는 예전의 아버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정서적 태도를 끌어낸다. 매우 모순적인 나치당 강령의 이행불가능성에 대하여 열성적인 민족사회주의자와 토론하다보면, 히틀러는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보호를 바라는 아이의 태도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사회적 현실에서,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할' 권력을 주는 것은 바로 보호를 받으려는 국민 대중들의 이러한 태도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감이다. (아래에 계속)-107-109쪽

(위에서 계속)국민 대중들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자주관리, 즉 합리적인 독립성과 협동을 방해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러한 대중들의 태도에 그 토대를 둘 수 없으며, 두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대중들 개개인이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대중들 개개인이 무력해지도록 양육되면 지도자와의 동일시는 더 뚜렷이 나타나며, 보호에 대한 아이와도 같은 욕구는 지도자와 하나가 된다는 감정의 형태로 더욱 위장된다. 이런 동일시 경향이 민족적 나르시시즘, 즉 각 개인들이 '민족의 위대함'에서 빌려온 자존심의 심리적 토대이다. 반동적인 소시민계층은 지도자와 권위주의적 국가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동일시에 기반하여 그는 자신이 '민족성'과 '민족'의 방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느낌은 그가 '대중들'을 경멸하고 대중들과 개인적으로 맞서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데, 이 역시 지도자와의 동일시에 기반한 것이다. (아래에 계속)-107-109쪽

(위에서 계속)물질적, 성적으로 비참한 그의 상황은 자신이 지배인종에 속해 있으며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다는 고양된 사상으로 완전히 가려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무의미하고 맹목적인 충성 속으로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빠져버렸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의 전문성을 의식하고 있는 노동자, 즉 자신의 순종적인 성격구조가 작동하지 못하게 막아낸 노동자는 자신을 지도자와 동일시하는 대신에 자신의 일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자신을 민족적 고향과 동일시하는 대신에 전세계의 노동하는 대중들과 동일시한다. 지도자와의 동일시라는 토대가 아니라 사회적인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을 토대로 해서 그는 자신이 지도자라고 느끼는 것이다. -107-109쪽

만약 소시민계층이 산업노동자와 상류계층 중간의 경제적 지위를 상실하듯이 성도덕적인 태도마저 상실하게 된다면, 이것은 독재자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시민계층 속에도 '커다란 뱀'의 속성이 잠복해 있어서 속박을 분쇄하고 반동적 경향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독재 권력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도덕성'과 '결혼과 가족의 결속 강화'를 위한 선전을 보완하는 것이다. 소시민계층의 비참한 사회적 상황과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다리는 바로 권위주의적 가족이다.-151-152쪽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지 못한 채 당연하고 경건하게 굴종을 견뎌내는 인도나 중국의 쿨리는 견디기 힘든 만물의 질서를 알고 있는, 즉 노예제도에 의식적으로 반발하는 쿨리보다 내적으로 덜 고통을 겪는다. 인도적인 이유에서 쿨리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진실을 모르게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신비주의자, 쿨리의 파시스트적인 고용주 그리고 중국의 사회위생 교수 몇 사람만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인도주의'는 비인간성을 영속화하는 동시에 은폐하는 것이다.-275쪽

노동하는 거대한 대중에 속하는 사람이 비정치적이 되면 될수록 정치적 반동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기는 더욱 쉬워진다. 비정치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수동적인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능동적인 태도로서 사회적 책임의식에 대한 방어를 말하는 것이다. (중략) 만약 이런 사람이 깊은 믿음과 신비주의적 수단을 가진, 즉 성적이고 리비도적인 수단을 가지고 일하는 파시스트를 만나게 되면, 그는 파시스트에게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파시스트의 계획이 자유주의의 계획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와 지도자 이데올로기에 헌신함으로써 순간적으로나마 영속적인 내적 긴장에서의 해방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93-295쪽

수천 년 동안 생동하는 삶이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남의 뜻대로 움직이고, 비판능력이 없고, 생물학적으로 병들고, 노예상태에 빠져버린 대중들을 위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억압을 즉시 감지하고 적시에,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그 억압을 떨쳐버리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 운동의 과업이다.-316쪽

대중들에게 자유의 공간은 부여될지 몰라도, 실제적인 사회적 과제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국민 대중들이 오늘날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나중의) 사회적 직무 역시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은 언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국가-정치 사상은 원래 대중에 반하는 위계적인 국가대의제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우리가 아무리 '민주주의'에 관해 외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와 로마 노예제 국가의 사유체계에 고착되어 있다. -357쪽

자연스러운 사랑, 삶에 필수적인 노동, 그리고 자연과학은 합리적인 삶 기능이다. 이것들은 그 속성상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모든 형태의 비합리주의에 가장 큰 적이 된다. 진정한 정신의학의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을 오염시키고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정치적 비합리주의는 사회적 삶을 규제하고 결정하는 데에 있어 자연스러운 삶의 기능을 인식하지 못하고 배제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삶의 도착인 것이다.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적-권위적 통치는 인민대중들의 습성이 되어버린 비합리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모든 독재적 정치의 관점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사랑, 노동, 그리고 지식의 기능을 그것을 누가 대표하든 상관없이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이것들은 공존할 수 없다. 독재는 자연스러운 삶의 기능을 단지 억압하거나 자신의 지배목적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독재는 결코 자연스러운 삶의 기능을 촉진, 보호하거나 스스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독재는 몰락하게 된다.-430쪽

파시스트 독재자는 인민대중들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고 권위를 갈망하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노예근성을 타고났다고 주장한다. 다라서 전체주의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정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세상을 고통 속으로 빠뜨리고 있는 모든 독재자들이 억압받는 인민대중 출신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인민대중들의 이런 질병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연적인 사건과 발전에 대한 통찰력, 긔고 진실과 연구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사실들을 변화시키려는 생각 역시 결코 떠오르지 않는다.
반면 형식적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인민대중들의 자유로워질 능력을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보다 환상적인 것으로 가정했으며, 따라서 권력을 장악한 동안 인민대중들의 내면에서 자유로워질 능력과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확립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 버렸다. 그들은 재앙에 빠져버렸고 결코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446쪽

정치가들의 영향을 받는 인민대주들은 각각의 권력자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즉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수산업가에게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죄가 있다고 알려진 정신질환에 걸린 장군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것은 책임 전가이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바로 전쟁을 저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손에 쥐고 있던 인민대중들에게 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무관심으로 부분적으로는 수동성으로 또 부분적으로는 능동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대재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인민대중들의 이러한 잘못을 강조하는 것은 또한 그들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그들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인민대중들에 대한 동정은 그들을 초라하고 무기력한 어린아이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진정한 자유투쟁가가 지니고 있는 태도이며 후자는 권력을 갈구하는 정치가들이 지니는 태도이다.-472쪽

인간이라는 동물이 아무리 가학적이고 신비적이고 수다스럽고 양심이 없고 무절제하고 허위적이고 피상적이고 쓸모없는 잡담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노동기능에서 합리적이 되 수 있는 성향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다. 비합리주의가 이데올로기적 과정과 신비주의를 가지고 자신을 발산하고 전파하듯이 인간의 합리성은 노동과정을 통해서 활동하고 전파된다.-5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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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0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자가 말하는 '성의 해방'을 너무 좁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자신의 욕구를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 인간성의 긍정... 그런 것들이 결국 책임 있는 자유와 진정한 해방을 불러오게 되고, 타인의 노예가 되는 운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하면 자신과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기쁨이야말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파시스트로의 추락을 막는 안전장치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의견 중에 노동을 통한 인간의 해방이라든지 민중의 각성을 유도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대안인지 의심스럽다. 아이들의 성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지나친 이상화가 아닌가 싶고. 십대 아이들과 드잡이질하며 보낸 요 몇년, 과연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 같다.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절판


1990년대 들어 민비는 뮤지컬 <명성황후>가 세계 무대에서 각광을 받더니 최근에는 사극 <명성황후>의 인기에 힘입어 화려하게 무덤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순교한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 아마 이런 것들이 지금 유포되고 있는 민비에 대한 표상들일 것이다. 그런데 한번 따져보자. 이런 식의 표상의 근저에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는지. 다시 말해, 민비가 최고 통치자로서 열강의 각축 속에서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무엇을 수행했는지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가장 냉철하게 증언하고 있는 황현의 <매천야록>이나 <오하기문> 등을 통해 볼 때, 민비는 한 번도 개혁의 주체가 된 적이 없다. 그가 대원군과의 권력 투쟁을 위해 대거 기용한 민씨 척족들은 탐관오리와 부패하고 무능한 매판관리의 전형들이었다. 근대 계몽기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매체 <대한매일신보>에는 민시들의 부패상이 하루가 멀다 하고 고발되고 있다. (민씨 중에 '영'자 돌림의 탐관오리 여덟 명을 풍자하는 <민씨팔영>이 별도로 부렸으 정도이다. (아래에 계속)-21-23쪽

(위에서 계속) 또 당시 각축하던 열강들과의 관계를 보더라도 조선의 개혁을 위해 그들을 적절히 활용한 예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릴 때마다 외세를 끌어들이기에 바빴을 따름이다.
물론 추종자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일본의 암살 목표가 되어사실 자체가 바로 민비가 조선을 지키기 위해 싸운 증거가 아니겠는냐고. 하지만 이건 정말 옹색하기 짝이 없는 의견이다. 우선 한 사람의 최고 권력자가 자신이 능동적으로 수행한 어떤 치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적에 의해서만 규정된다는 사실 자체가 일단 심각한 결락이 아닐 수 없을뿐더러, 그녀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한 맥락도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조선에서 청의 지배는 종결되었지만, 일본은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을 시도함으로써 승리의 대가를 가로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민비를 포함은 조선의 지배층들은 잽싸게 러시아 세력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하고자 했다. 잘 알다시피 러시아는 조선의 근대화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황혼의 제국'이었다.(계속)-21-23쪽

(위에서 계속)
어찌 보면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사이, 곧 1894년에서 1905년 까지 약 10년 동안은 열강들의 힘의 공백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 외세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이용했더라면 조선은 위로부터의 혁명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적대적 긴장을 활용하기보다 러시아에 완전 밀착함으로써 개혁의 기회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일본을 자극하는 결과만 낳고 만 셈이다. 민비는 이런 맥락에서 시해되었다. 일본과 맞서 조선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되었다는 통념과 이런 정치적 정세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지.
문제는 이 구체적인 힘의 배치를 읽으려 하지 않고, 오직 일본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건의 의미를 규정하려는 데 있다. 즉, 민비가 명성황후라는 새로운 기호로 부각되는 현상의 근저에는 반일=국수=지선(至善)이라는 관념이 있다. 일본에 반하는 것은 무조건 애국적인 것이라는 이 지독한 강박증!-21-23쪽

최근 출간된 <이완용 평전>은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주도층이었고, <독립신문.에 애국적인 관리로 집중 조명될 만큼 유능한 관리였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그 역시 날 때부터 매국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또한 다른 계몽기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애국적 열정 속에서 출발했으며, 다만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계속 정치적 변전을 거듭했을 뿐이다. 이완용은 물론 매국노다. 그런데 그가 매국노의 상징이 된 것은 1907년 정미칠조약으로 고종이 폐위되는 순간부터 총리대신이 되어 다른 라이벌들을 몰아내고 합방조인서에 도장을 찍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신문 매체를 살펴보노라면 정말 '매국노들의 경연대회'를 목도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제순, 송병준, 이준용, 이지용 등. 이들이 저지른 행위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이완용의 행적을 훨씬 능가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모두 면책되었는가? 나는 그것이야말로 우리 식민지 역사가 만들어낸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완용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내세워 모든 매국의 악덕을 몰아넣은 다음 스스로 면제부를 받는 식의.-25-26쪽

기독교는 국경이나 민족을 넘어 인류 전체를 포용하는 종교이고, 마르크스주의 또한 세계 혁명을 지상과제로 삼는 이념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담론들이 한국에서는 민족이라는 절대적 기호의 기반을 조금도 돌파하지 못한 것이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충격적인 테제를 정립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한 학자의 입을 빌려 "민족주의 이론은 맑스주의의 역사적 대실패를 대표한다"고 단언한 바 있다. 조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여준 그 지독한 민족지상주의(그 정점이 주체사상일 터이다)는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정파로 난립한 1980년대의 좌파들이 최후까지 견지하고 있었던 것 역시 민족이라는 주술이다.-26-27쪽

우리는 흔히 민족의식은 단군 시절 이래 면면히 계승되어온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 반만년 역사, 단군의 후예, 한민족의 은근과 끈기 등의 익숙한 언표가 대변하듯이. 그래서 통일신라가 당과 결탁하여 고규려를 멸망시킨 것을 아직도 굴욕적 사대주의로 수치스러워하고, 그에 대한 심리적 보상으로 거의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발해를 한국사의 지평에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통일신라 시대보다는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더 즐겨 사용한다.
이것은 일단 역사를 하나의 레일 위를 달려오는 '단수화된 서사'로 상정하는 태도의 산물이다. 즉, 20세기 이후 형성된 민족에 대한 관념을 저 아득한 시간대로 소급하여 태고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상상하고 싶은 것이다. 기원이 멀면 멀수록 그 정통성은 더 한층 확고해진다는 듯이.
(아래에 계속)-35-40쪽

(위에서 계속)
20세기 한국 인문학읙 ㅏ장 강력한 담론체계인 실학파 담론이야말로 그러한 내적 연속성론이 가장 두드러지게 작동하는 방법론적 거처이다. 그것은 조선 후기 지식인 그룹을 '실학파'라는 유형으로 절단함과 동시에 그들의 텍스트 속에서 민족의식의 맹아들을 다양하게 채취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쳐왔다. 실학파라는 명명이 가능한가도 회의적이지만, 조선 후기의 맥락에서 민족적, 민중적이라는 척도가 얼마나 텍스트의 잠재력을 드러낼 것인지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의 담론 체계에서 진정 의미 있는 것은 개별 낱말들의 조각들이 아니라 개념들이 움직이는 배치이다. 이 작동의 메카니즘을 간과한 채, 오직 낱말의 의미를 우선 규정해놓고 일의적 해석을 가하는 것은 일종의 동일성의 폭력이다. 역설적인 것은 병자호란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한 '소중화론'이 실학과는 대척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자주성의 진보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전도된 양상이야말로 민족이라는 동일성론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아래에 계속)-35-40쪽

(위에서 계속)
연속성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서 조선 후기 사상사를 재검토해보면, 거기에는 근대적 민족주의와는 아주 다른 진경이 펼쳐져 있다. 당시의 지배적 담론인 소중화론은 중화 문명의 초월성을 그대로 수락한 채, 대상만을 중국에서 조선으로 이동함으로써 중화(中華), 이적(夷狄)의 구별을 더더욱 완강하게 견지한 것이었다. 따라서 18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담론들은 바로 그 소중화론이 기대고 있는 초월적 전범성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소중화론의 입장에 서면 청나라는 금수와 같은 오랑캐들의 국가일 뿐이다. 얼마나 단순명료하고 도식적인가. 그러면 소중화론을 깨기 위해서 새로운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던가? 연암 박지원은 소중화론을 정면으로 부인하기모다 그와 유사한 지평에서 출발하되, 계속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균열을 일으키는 방식을 시도한다. (중략) 이옥이 주장하는 바의 요점은 어떤 하나의 심급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수한 개체들의 차이이다. 동이럿응로 포획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에의 강렬한 환기!(중략) 이것은 다방면에서 소수성 minority'을 긍정하는 논리로 얼마든지 원용될 수 있는 것이다. (계속) -35-40쪽

(위에서 계속)
더욱이 이덕무나 이용휴, 박제가 등 당시 새롭게 부상한 문제적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시도했던 것도 바로 하나의 최종심급에 포획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의 분자적 흐름에 대한 환기였다. 조선적인 것에 대한 옹호는 그러한 인식론적 배치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에 반해 근대 계몽기의 민족 담론은 그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일단 서구, 일본, 조선의 삼각관계를 기본으로 삼음으로써, 중화를 향했던 시선이 이제는 서구 문명을 향하게 된다. 중화와 서구 문명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듯하지만, 담론적 배치의 측면에서 볼 때 초월적 전범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위상을 차지한다. 앞서 등장한 <매일신문>이 잘 보여주듯 민족국가는 서구 문명의 위력에 의지해, 그들의 시선에 의거해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일성에 대한 열렬한 희구의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민족적 자각이 강렬할수록 사실 근대 문명화론의 궤도를 충실히 따라가야만 하는 역설이 생겨난다. (아래에 계속)-35-40쪽

(위에서 계속) 이것은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의 태내에서 제국주의를 그대로 모사함으로써 성취된다는 것, 나아가 주체를 강조할수록 그것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타자와 포개져야 하는 운명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단 이 길에 들어서면 '근대성의 외부'로 달아날 가능성이 전면 봉쇄되는 운명에 처한다.
그렇게 본다면, 조선 후기 실학판 담론과 근대 계몽기 민족 담론 사이에는 연속성보다는 차라리 불연속적 간극이 두드러진 셈이다. -35-40쪽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근대적 국민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봉건적 신분제라는 대지에서 탈영토화해야 한다.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인의 평등, 개체로서의 자유 등 새로운 근대적 주체가 되기 위한 몇 가지 통과제의를 거쳐 한다. 근대적 체제의 확립에 긴 시간이 걸린 유럽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압축적 형태로 근대를 겪은 일본도 짧기는 하지만 이른바 민권주의 시대를 통과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보다 더 압축적인 방식으로 근대적 궤도에 들어서는 바람에 민권이나 개인의 자유를 사고할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다. 유일한 민권주의 시대인 독립협회 활동에서도 개인, 개체의 문제는 계몽의 지평에 떠오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 계몽의 수면 위로 급부상한 민족 담론에는 민족을 구성하는 개별 구성원들의 자유나 해방의 문제는 일체 배제되어 있다. (중략( 1909년 11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 논설 '자기 일신을 위하여 살기를 구하지 말지어다'라는 글이다. 여기서 보듯, 개인주의는 오직 일신을 위해 민족을 망치는 근성으로만 규정되어 있다.-41-42쪽

이 시기에는(20세기초 애국계몽기-인용자 주) 민족과 인종이 그다지 큰 변별성을 지니지 않은 채 혼용되어 쓰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민족의 핵심적 지표가 인종적 순수함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뒷날 2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겪으면서, 인종, 인종주의가 파시즘적 악마성과 직접 포개어지기 전까지 이 두 용어는 자연스럽게 넘나들고 있었다. (증략)
위의 글(신채호의 '꿈하늘'-인용자주)의 경우, 매국노, 탐관오리 등과 '적국놈에게 시집가는 년'과 '적국의 년에게 장가가는 놈'들이 유사한 위상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등가화인 셈인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러한 동일서으이 논리에는 인종적 순수함에 대한 높은 가치부여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겠지만, 성 윤리에 대한 태도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다른 인종이 섞여서는 절대 안된다는 이런 식의 집착은 우리 민족은 순수한 단일 혈통을 면면히 이어왔다는 역사 관념과 함께 작동한다.-5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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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0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지만, 평소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쉽고도 간결하고 분명한 언어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대하니 기뻤다. 저자가 추천한 책들을 더 읽어봐야겠다.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랑 카라타니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부터.
 
만들어진 전통
에릭 홉스봄 외 지음, 박지향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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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사건을 불문하고 근,현대사가들이 '만들어진 전통들'에 대해 갖는 한 가지 특정한 관심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그들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적 혁신물인 '민족'과 그것에 부수된 현상들, 예컨대 민족주의, 민족국가, 민족적 상징들, 민족사 등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역사적 새로움이 혁신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은 종종 의도적이고 항상 혁신적인 사회공학 (social engineering) 작업들에 의존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와 민족들은 유태인과 중동 이슬람 교도의 역사적 연속성이 무엇이건 상관 없이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그 지역에 존재하는 표준 유형의 영역국가라는 것 자체가 한 세기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1차 대전이 종결된 뒤에야 비로소 진지한 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수 엘리트보다는 좀 더 많은 주민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요 문자로도 쓰는 표준 국어 역시, 대개는 다양하지만 종종 짧은 역사를 갖는 구성물일 따름이다. (아래에 계속)-40-41쪽

(위에서 계속)
플랑드르 어를 연구한 어느 프랑스 역사가가 꽤 올바르게 관찰했듯이, 오늘날 벨기에에서 가르치는 플랑드르 어는 플랑드르 지역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말했던 그 언어가 아니다. 요컨대 그것은 문자 그대로 '모국어'가 아니라 단지 은유적으로만 '모국어'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미심쩍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역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근대 민족과 그것에 수반되는 일체의 부속물들은 일반적으로 새로움의 정반대, 즉 아주 먼 고대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구성된 것의 정반대, 즉 너무도 자명해서 더 이상 정의할 필요도 없는 '자연적인' 인간 공동체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 내적이든 역사 외적이든, '프랑스'와 '프랑스 인'이라는 근대적 개념에 묻혀 있는 연속성이 무엇이든 간에 - 누구도 이 개념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 바로 이 개념들 자체가 구성되거나 '발명된' 요소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아래에 계속) -41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근대 '민족'을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것 대부분이 그런 구성물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적합한 상징이나 혹은 알맞게 재단된 담론 ('민족사'와 같은)과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민족적 현상은 '전통의 발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 없이는 결코 적절하게 조사될 수 없는 것이-41쪽

잉글랜드화된 스코틀랜드 귀족, 오름세의 젠트리, 학식 있는 에딘버러의 법률가와 에버딘의 신중한 상인들, 즉 가난에 찌들지도 않고 돌과 늪을 넘어 다니거나 산에서 밤을 샐 일도 결코 없는 그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고지대 의복을 입고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과시한 것은 자기 계층의 전통적인 복장인 역사적인 홀태바지나 거추장스런 혁대 맨 어깨걸이가 아니라, 새로운 발명품인 짧은 치마 내지 짧은 킬트 중에서도 비싸고 장식이 많은 종류였다.
(아래에 계속)-64쪽

(위에서 계속)
이러한 놀라운 변화는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일반적이고 전 유럽적인 것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낭만주의 운동, 즉 멸종 위기에 처한 고귀한 미개인에게 문명이 바치는 예찬이었다. 1745년 이전까지 고지대인들은 약탈을 일삼는 야만인들로 멸시받았다. 1745년에 그들은 위험한 반란군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746년 이후 그들의 특징적인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들에게는 원시인으로서의 낭만성과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로서의 매력이 결부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어시안은 쉽게 승리를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특수하고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것은 바로 영국 정부에 의한 고지대 연대 창설이었다.
(아래에 계속)-64쪽

(위에서 계속)
고지대 연대의 창설은 1745년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실제로 최초의 고지대 연대인 블랙워치(Black Watch)는 제43연대 및 제42연대에 뒤이어 1745년 퐁트누아(Fontenoy)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1757년부터 1760년 사이에 노 피트(elder Pitt)는 고지대인들의 호전적 기질을 자코바이트의 위험으로부터 제국의 전쟁에로 체계적으로 돌리고자 했다. 그가 후에 주장했듯이
"나는 능력이 어디에 있든지 그것을 찾고자 했다. 감히 자랑하건데, 나는 최초로 북쪽의 산악지대에서 그것을 찾으려 했고 또한 찾았다. 나는 그것을 불러서 제국에 봉사할 강건하고 대담한 일족을 소환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64-65쪽

(위에서 계속)
이렇게 만들어진 고지대 연대들은 곧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들은 새로운 복장 전통도 세웠다. 1747년의 '무장해제법'에서 그들만이 유일하게 고지대 복장에 대한 금지령에서 예외였다. 따라서 켈트 농민들이 섹슨 족의 바지를 영구적으로 받아들이고 켈트 족의 호메로스조차 음유시인의 긴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던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지대 연대들만이 유일하게 격자무늬 천 직물업계를 살리고 모든 의복 가운데 가장 뒤늦게 만들어진 혁신물인 랭카셔 킬트를 영속시켰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65쪽

(위에서 계속)
본래 고지대 연대들의 군복은 혁대를 맨 어깨걸이였다. 그러나 킬트는 발명되자마자 그 편의성으로 말미암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결국 고지대 연대들도 킬트를 도입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들이 킬트를 군복으로 입기 시작하면서, 아마도 씨족별로 구분되는 격자무늬라는 개념이 탄생했을 것이다. 전쟁의 필요에 따라 고지대 연대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격자무늬 군복들도 구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민간인들도 다시 격자무늬를 입기 시작하고 낭만주의 운동이 씨족 숭배를 부추김으로써, 동일한 구분의 원칙이 연대에서 씨족으로 쉽게 전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장차 일어날 일이다. 일단은 잉글랜드의 퀘이커 산업가가 고안한 킬트가 잉글랜드의 제국주의 정치가(노 피트) 덕분에 소멸될 위기로부터 구제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65-66쪽

이 시기의 가장 흥미로운 특성 가운데 하나가 민족 영웅의 출현이다. (중략)
1770년 데인스 배링튼은 17세기 초 존 윈 경(Sir John Wynne)이 그웨더(Gwedir) 가문의 역사에 대해 기록한 문헌을 출판했다. 이 문헌은 그 몇 년 전 카트(Carte)가 자신의 잉글랜드 역사책을 낼 때 이미 인용한 바 있는데, 그는 그 문헌 가운데 1282년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음유시인들을 학살한 이야기를 인용했다. 토머스 그래이는 카트로부터 이 이야기를 차용하고 '눈 먼 패리'의 공연에서 영감을 받아 1757년 유명한 시 <음유시인(The Bard)>을 완성했다. 그래이는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여전히 웨일스 시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1282년의 음유시인들에게 후계자가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가? 어쨌든 카트의 이야기는 런던에서 모든 옛 웨일스 서적들이 불태워졌고 음유시인들이 유형을 당했다는 웨일스 전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것이었다. (아래에 계속)-166-168쪽

(위에서 계속) 1757년 이후에는 웨일스인 자신들이 그레이의 설명을 믿기 시작했고, 1760년대에는 에반 에반스와 같이 엄밀한 학자도 그레이를 상당히 인용했다. (중략) 1770년대와 1780년대에 이르면 그래이의 <음유시인>은 유명세를 얻어 이미 그 때부터 회화의 주제로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중략)
이 이야기 전체는 전설이거나 신화에 불과하다. 기껐해야 중세 잉글랜드 왕들이 예언을 통해 불화를 일으키는 웨일스 음유시인들을 때때로 제약하거나 통제했다는 사실을 심히 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래에 계속)-168-169쪽

(위에서 계속)
새로운 영웅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인물은 매덕(Madoc)이었다. 그는 주군 오웨인 과이니드의 아들로, 고향인 북부 웨일스의 반목에 낙담해 1170년경 자신의 배 '그웨난 곤' 호를 타고 미지의 서쪽 바다로 떠나 미국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웨일스로 돌아와서 동료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다시 항해에 나선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자손들은 인디언들과 결혼해 여전히 미 대륙의 서부 광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전설은 18세기에 기원한 것은 아니지만 튜터 왕조가 북아메리카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권을 공격할 때 처음 이용되었다. 웨일스에서는 200여년간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휴면 상태로 있다가, 1770년대에 미국 독립혁명으로 미국에 대한 웨일스 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었을 때 다시 생명력을 얻었다. 독립혁명 그 자체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신생 공화국 미국으로 이민 가 그 곳에서 웨일스 어가 통하는 식민지를 세우자는 강력한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래에 계속)-169-170쪽

매덕 신화는 런던의 목사이자 역사가이며 윌리엄스 도서관의 사서인 존 윌리엄스 박사(Dr. John Williams)가 1790년대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출판한 이후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런던의 웨일스 인들은 모두 열광했다. 이올로 모건이 매덕의 후손들이 살아 있고 웨일스 어를 사용하며 미국 중서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온갖 문서를 위조했기에, 윌리엄스 박사는 두 번째 책을 내야만 했다. '퍼그' 윌리엄 오웬은 탐험대를 조직하기 위해 '매덕 찾기(Madogeion)' 협회를 조직했고, 이올로는 자신이 탐험대장이 되겠다고 했다. 그는 원 포어의 존 에반스(John Evans of Waun Fawr)라는 진지한 젊은이가 탐험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며 나서자 무안해졌다. 이올로는 온갖 핑계를 대고 본국에 남았지만, 존 에반스는 미국을 향해 떠나 끝내 서부 황야에 이르렀다. 그는 스페인 왕에게 고용된 탐험가가 되었다. 여러 차례의 아슬아슬한 모험 끝에 만다 인디언들 (Mandan Indians, 그는 만다 인디언들이 매덕의 후예들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의 땅에 도달했지만, 그들이 웨일스 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0-172쪽

웨일스에서 문화적 부활 및 신화 만들기 운동은 웨일스적인 생활의 위기, 그러니까 민족의 생명력 자체가 소진되어 가고 있다고 느껴지던 상황에서 싹튼 것이다. 웨일스의 과거는 폐막되고 종료되었으며, 웨일스 인들은 '길고의 서에서 지워졌으니' 분수에 만족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적이고 이상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니 웨일스 동포들이 자기들 유산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려면 소수 애국자들의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ㅡ들 애국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며 즐기도록 해 주고 교육할 수 있는 새로운 '웨일스다움'을 창조하는 것, 그러기 위해 과거를 파헤치고 그것을 상상력으로 가공하는 일만이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다. 웨일스 인들은 이렇게 창조된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웨일스를 통해 자기들 바로 이전의 과거를 상실하는 대신, 예술과 문학에서 그것의 변형된 모습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 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196쪽

(위에서 계속) 여기서 우리가 묘사했던 예술적 가공들은 웨일스가 그렇게 어려운 역사적 전환기에 직면했을 때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중요한 치유의 기능을 수행했다. 웨일스적인 생활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고, 그렇게 변화를 겪는 가운데 우리가 묘사했던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낙마하자마자 새로운 신화 제작자들과 전통의 창조자들, 즉 급진적이고 비국교도적인 웨일스 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사냥꾼은 바뀌었지만, 사냥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196-197쪽

1817년 섭정 왕세자의 딸인 샬럿 공주의 장례식 때에는 장례식 지휘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 10년 후 요크 공작이 서거했을 때에는 윈저에 있는 예배당이 너무나 축축해서 대부분의 조문객들이 감기에 걸렸고, 캐닝(George Canning)은 류머티즘에 걸렸으며, 런던 주교는 심지어 사망했다. 조지 4세의 대관식은 약간의 인기를 회복하려는 절박하면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은 시도를 통해 가능한 한 장엄하도록 계획되었으나, 너무나 과장이 심해서 장엄함이 도리어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이다. -231쪽

그러나 영국 왕실의 공적인 이미지는 1870년과 1914년 사이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서투르고 개인적이며 호소력 또한 제한적이었던 왕실 기념식이, 화려하고 공적이며 대중적인 행사로 변모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군주들이 현실 정치에서 점차 물러났기에 촉진된 것이었다. (중략) 군주정의 실질적인 권력이 약화되면서 군주정이 장엄한 기념식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오히려 더욱 증가했다. (중략) 빅토리아 재위 마지막 10년간 그녀의 왕권은, "영국인들에게 지구 전역으로 진출할 것을 격려하는, 영국 인종의 상징"이 되었다. -236-242쪽

1926년의 총파업과 뒤이은 대공황은 전례 없는 규모의 적대감과 고통을 야기했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다라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개인적으로 존경할 만한 군주가 '어수선한 시대에 안정의 구심점'으로 그것도 매우 성공적으로 출현했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측면은 바로 왕실의 절제되고 고풍스런 기념비적 장엄함이었다. -265-266쪽

앵글로-인도의 문화체제에서 1857년과 1858년의 대반란은 결정적인 분수령으로 보일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에는) 단순한 방문이건 의무 과정이건 어쨌거나 인도를 여행하는 잉글랜드 인들을 위해 그 거대한 사건과 연루된 장소들-델리 리지(Delhi Ridge), 칸푸르의 메모리얼 웰(Memorial Well) 및 부활의 천사라는 거대한 대리석상으로 꾸며진 대정원, 럭나우 총독 대리 관저(Residency in Lucknow) [인용자주: 폭동 당시 영국군 진지, 영국인들이 학살당한 곳, 격전지 등] -을 방문하는 정규적인 대폭동 역사탐방 (Mutiny pilgrimage)이 있었다. 무덤과 기념물들, 기념석들과 그 위에 새겨진 비문 그리고 유럽 풍 교회 벽면의 현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순교와 희생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적어도 빅토리아 조의 잉글랜드 인들에게는 그들의 인도 지배를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만든, 궁극적인 군사적-군사외적 승리를 떠올리게 했다.
(아래에 계속)-344-345쪽

(위에서 계속)
요컨대 대폭동은 1859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잉글랜드 인들에게 그들의 인도 지배를 정당화하는 중심적 가치 - 희생, 의무, 불굴의 의지-를 구현하고 표현하는 영웅 신화로 보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적절하게 구축된 권위와 질서를 위협한 인도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궁극적 승리를 상징했다.-345쪽

인도인들이 특히 민족운동 초기에 그들 자신의 조직들을 통해 그들 자신의 공적인 정치적 용례를 발전시켰을 때, 그들은 어떤 용례를 사용했던가? 나는 그들이 실제 자신들의 전임, 곧 영국 지배자들이 체택했던 것과 똑같은 용례를 사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전 인도 회의 평의회들(All India Congress Committes)의 초창기 회합들은 그 행사나 주요 인물 및 그들의 연설을 보건대 알현식과 매우 흡사하다. 그들 역시 그런 수단을 통해 '진보적 통치'의 가치들을 달성하고 인도인들의 행복과 복지를 구하려고 한 것이다. 영국식 용례는 초기 국면의 민족주의 운동의 담론에 어휘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초기 민족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인도제국의 진정한 목표에 대해 영국 지배자들보다 훨씬 더 충실하다고 주장했다.-390-391쪽

유럽의 만들어진 전통들은 식민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인들에게 잘 규정된 일련의 준거점들을 제공했다. 비록 거의 모든 경우가 인간관계 및 주종관계에서 종속적인 역할로 진입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프리카 인들은 그 전통들을 통해 이러저러한 유럽의 신-전통주의적 행동 양식을 받아들여 사회화되기 시작했다. 확실히 역사문헌을 보면, 부대의 병사가 되는 일이나 19세기 국교회 의식을 행하는 법을 배우는 일을 자랑스레 여기는 아프리카 인들로 빼곡하다. 그런 과정들은 종종 식민권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귀결되기도 했는데, 이는 사회화의 도구로서 신-전통들 자체에 잠복해 있는 위험이었다.-428쪽

국가는 점차 '시민적 신분'이라는 존재를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것을 정의했다. 물론 국가가 그런 종류의 유일한 무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시민생활에서 차지하는 국가라는 존재, 그것이 시민생활에 부과하는 한계들과 그것이 시민생활에 대해 정례화시킨 규제적 개입은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선진국들에서는 '민족 경제'(국가 경제? - 인용자주), 곧 국가 영토나 그 하위 영토에 의해 규정된 국가 영역이 경제 발전의 기본 단위였다. 국가의 경계 안에서, 혹은 국가의 정책 속에서 일어난 변화는 시민들에게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물질적 결과물들을 가져다주었다.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행정과 법률의 표준화, 그 중에서도 특히 공교육은 사람들을 특정한 나라의 시민들로 변형시켰다. (중략)
이와 똑같은 이유로 공식적인 지배자들이나 지배집단들의 전망이라는 견지, 즉 위에서 봤을 때, 국가가 어떻게 신민들이 성원들의 복종과 충성과 협력을 확보하고 유치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야만 그들의 눈에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 없는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497-498쪽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혁신들을 비교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둘 다 새로운 체제가 건국되는 계기들로서, 가령 프랑스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명백한 일화(바스티유 함락)를 통해 프랑스 혁명을, 그 반면에 독일은 보불전쟁을 강조했다. 독일제국이 역사적 회고에 정도 이상으로 집착했다면, 프랑스 공화국은 혁명이라는 역사적 준거점을 제외하면 정도 이상으로 역사적 회고를 꺼렸다. 대혁명이 프랑스 국민과 그 애국주의의 존재와 성격과 한계들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화국은 마리안느, 삼색기, <라 마르세예즈> 등과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상징들을 통해, 또 이따금씩 자유, 평등, 우애라는 분명한 이론적 혜택을 (최하층 시민들에게까지도) 베푸는 가운데 정교화된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으로 그런 상징들을 보완하면서, 프랑스 국민과 그 애국주의를 시민들에게 주입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었다. (아래에 계속)-521-522쪽

(위에서 계속) 그 반면에 1871년 이전의 '독일인'은 어떤 정치적 규정이나 통일성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새로운 제국(독일인의 많은 부분을 배제해 버린)과 맺는 관계도 모호했다. 그러니 상징적이건 이데올로기적이건 일체화 과정은 더욱 복잡했을뿐더러-호엔촐러른 왕조와 군대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제외하면- 정교한 맛도 떨어졌다. 이로부터 신화와 민속(독일 오크, 황제 프리드리히 바라바롯사)으로 시작해서 뻔한 유형의 조야한 만화를 거쳐 민족의 주적을 규명함으로써 민족을 정의하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준거점도 가지가지였다. 다른 많은 해방된 '민족'의 경우에 그렇듯이, '독일'을 가장 쉽게 정의하는 방법은 무엇보다 그것이 무엇에 적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아래에 계속)
-522쪽

(위에서 계속)
바로 그 점이 독일 제국의 '만들어진 전통들'에 내재하는 명백한 틈새를 설명해줄 것이다. 가령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타협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극명한 사례다. 빌헬름 2세가 처음에 '사회 문제에 정통한 황제(social emperor)로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사민당을 금지하는 비스마르크 고유의 정책과도 분명한 거리를 두었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반민족 운동('조국 없는 무리')으로 간주하려는 충동은 뿌리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고,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예컨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그러했던 것보다 더 체계적으로 국가업무에서 배제되어 갔다. (중략)
독일 제국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그보다는 덜하지만 유태인들을 내부의 적들로 선택함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이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이점을 누리기도 했다. 즉,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유태인)와 프롤레타이아적 사회주의(사회민주당) 모두에 대항하는 데마고그적 호소력을 제공함으로써 그 두 가지 모두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느끼던 하층 중간계급과 수공업 장인들, 농민들 거대 다수를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522-523쪽

원래 축구는 사립학교 출신 중간계급들에 의해 동호인(아마추어) 스포츠 및 인성 계발 스포츠로서 발전했는데, 급속히 (1885년 경) 프롤레타이아화 되고 따라서 프로화되었다. 상징적인 분기점 -계급 적대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은, 1883년 올드 애토이언즈(Old Etonians)가 볼튼 올림픽(Bolton Olympic)에게 패했을 때였다. 프로화가 진행되면서, 전국적 차원의 엘리트 계층에서 충원된 박애주의자들이나 도덕론자들이 축구 클럽의 경영권을 지방 사업가나 기타 유지들의 수중에 넘기면서 철수했다. 새로운 주인공들은 더 높은 임금 수준과 퇴직하기 전에 횡재할 기회(수익 사업 시합들), 무엇보다 명성을 날릴 기회에 이끌려 축구산업으로 유인된 압도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노동력의 사용자들로서, 산업 자본주의에 고유한 계급관계를 기묘하게 희화화시켰다.-539-540쪽

그럼에도 혈통이라는 귀족적 기준 그 자체는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새로운 상층 중간계급 엘리트들을 정의하는 데에도 응용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90년대 미국에서는 족보에 대한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여성적인 관심사였다. 가령, '미국혁명의 딸들(Daughters of America Revolution)이 결성되어 번창했던 반면에, 그보다 약간 먼저 결성된 '미국 혁명의 아들들'은 시들해졌다. 비록 DAR이 겉으로 내건 목표는 토박이 백인 프로테스탄트 미국인들을 새로운 이민자 대중과 구별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상의 목표는 백인 중간계급에서 배타적인 상층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DAR은 대부분 '뼈대 있는' 돈이 모여 있는 요지들-코네티컷, 뉴욕, 펜실베니아-에서, 그러나 역시 시카고의 졸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어 1900년이면 그 회원이 3만이 넘었다.-544-545쪽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예외로 하면 국제 스포츠에서는 아마추어리즘-다시 말해서 중간계급 스포츠-이 지배적이었다. (중략) 그런 만큼 외국과의 경기를 통해 이렇게 민족적 일체감을 확보하는 것은 적어도 윌가 살피는 시기[1870~1914. 인용자주]에서만큼은 일차적으로 중간계급적 현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은 그 자체 의미심장한 사실일 수 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이미 살폈듯이, 가장 넓은 의미로의 중간계급들은 주체적인 집단적 일체성을 느끼는 데 특별히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예컨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온 사람 대부분을 묶어주는 전국적 규모의 클럽에서 사실상의 회원 자격을 정할 정도로 충분히 작은 소수파도 아니었을 뿐더러, 노동자들처럼 공동의 운명과 잠재적 연대성으로 충분히 묶여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계급들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분리된 거주지에 살았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상한' 생활양식과 가치들, 또 스포츠의 아마추어리즘을 엄격하게 고수함으로써 스스로와 하위층을 분리시키는 것이 쉽다고 느꼈다. (아래에 계속)-558-559쪽

(위에서 계속)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중간계급들은 외부적 상징들을 통해 소속감을 확립하는 게 한층 쉽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상징들 중에서도 특히 민족주의적 상징들(애국주의나 제국주의)이 아마도 가장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새롭게 올라서고 있던 중간계급으로서는 자신들을 애국주의의 중핵 계급으로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가장 쉽게 느꼇을 법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559쪽

'만들어진 전통들'에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기능들이 있는데, 만일 그런 기능들이 없다면 아마도 '만들어진 전통들'은 나타나지도 않았거니와 확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얼마만큼 조작될 수 있었는가? 조작을 위해 그런 전통들을 사용하고 실제 발명해내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정치에서든 그보다 먼저 사업에서든,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그런 만큼 그와 같은 조작이 존재하며 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음모이론의 신봉자들은 그 나름대로 그럴듯한 증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런 조작들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때는 특정 집단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관행들을 이용했을 때라는 점 역시 분명해 보인다. (중략) 그것들은 이용되거나 창출되기 전에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돌이켜 재발견하는 일이 역사가의 몫이다. 물론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처한 변화하는 사회의 견지에서 왜 그런 필요들이 절실해졌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일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566-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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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 일빛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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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society의 의미는 어떤가? 1933년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 사전 (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society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1) 동료인 사람들과의 결합, 특히 벗끼리의 친밀함이 담긴 결합, 동료끼리의 모임
2) 같은 종류의 것끼리의 결합, 모임, 교제에서의 생활 태도, 또는 생활 조건. 조화를 이룬 공존이나 상호 이익, 방위 등을 위해 개인의 집합체가 이용하는 생활 조직, 방식
지금까지 보아온 일본 사전의 번역어는 모두 다 1)의 뜻에 상당히 가깝고 2)의 뜻은 거의 취하고 있지 않다. 그에 대응하는 비슷한 현실 및 그것을 표현하는 말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후자처럼 넓은 범위의 인간 관계의 경우에는 그에 대응하는 현실 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 뜻을 표현할 말도 없었다.
당시 쿠니(國)라든가 한(藩)과 같은 말은 있었다. 그러나 society는 2)에서도 서술하고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개인(individual)을 단위로 하는 인간 관계이다. 좁은 의미로도 넓은 의미로도 그렇다. '쿠니'나 '한'에서는 사람들은 신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래에 계속)-17쪽

(위에서 계속) society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이 2)의 넓은 범위의 인간 관계를 일본어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있었을 것이다. -18쪽

그런데 society의 번역어로서 어째서 '사회'만이 남은 것일까? 일단은 예로부터 써온 일본어인 '교제'나 '세상' 등은 society와는 의미가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뜻이 공통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사회'는 거의 society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나 다름없다. '사회'라는 말은 오래된 한어이긴 한데, 일본에서의 용례는 지극히 드물었다. 번역어 '사회'는 '사'와 '회'에서 새삼스레 조합되어 나온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에는 원래의 '사'의 어감도 '회'의 어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는 society와 그 뜻이 어긋나는 부분도 거의 없지만, 그러나 공통 부분도 또한 거의 없다.
이 무렵 만들어진 번역어에는 한자 두 자로 이루어진 신조어가 많다. 특히 학문과 사상의 기본적인 용어에 많다.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의미의 말에 대해서 이 쪽의 전래돼오는 말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 뜻이 어긋나는 것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뜻이 결핍된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에 계속)-33-34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말은 일단 만들어지면 뜻이 결핍된 말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뜻은 당연히 거기 있을 것으로 취급된다. 사용하는 당사자는 잘 몰라도 말 자체가 심원한 뜻을 본래 갖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남용되어 다른 말과 구체적으로 맥락이 이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용되는 것이다. -34쪽

'네모난 문자(인용자주 -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하겠다는 것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번역의 대원칙인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할 때 완성되는 번역문은 어색하지 않은 진짜 일본어문이 된다. 그런데 이 때 번역되는 원서가 일본인에게 낯선 새로운 이질적인 사상을 얘기하고 있다면, 같은 일본어를 사용한다 해도 종래 사용되지 않았던 방식의 서술을 하게 된다. 즉 번역자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사용하면서도 말의 조립을 궁리하여 문맥상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 '자연스러운 일본어'의 의미도 변질된다. '사람'은 '하늘' 앞에 있는 독립된 혼자의 존재가 되고, '교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범위의 다수의 사람들과의 평등한 인간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후쿠자와 유키치 이외의 당시 다수의 지식인들은 어째서 이 방법을 취하지 않았던 걸까? 왜 네모난 문자만 사용했을까? (아래에 계속)-46쪽

(위에서 계속)
그것은 매우 뿌리 깊은 문제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기에는 상대(上代) 이래 천수백 년 동안 중국 등 선진 문화를 한자라는 언어를 통해 받아들여왔다고 하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일본은 일관되게 번역 도입국이었다. 번역되어야 할 선진 문명의 말에는 반드시 '자연스러운 일본어'만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중요한 말일수록 그러하다. '자연스러운 일본어' 속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한 완전히 '흠잡을 데 없는 역자(譯字)는 사실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어긋나는 의미를 '네모난 문자' 자체에 맡기는 것이다. '인민 각개'도 '일신의 몸가짐'도 결국 그러한 예이다. (아래에 계속)
-46-47쪽

(위에서 계속)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네모난 문자'의 의미가 원어의 individual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말을 아무리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individual의 의미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이러한 새로운 문자의 건너편에 individual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약속이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번역자가 멋대로 한 약속이므로, 다수의 독자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워 보이는 한자에는 잘은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독자 측에서도 또한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일본어에서 한자가 지니는 이러한 효과를 나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cassette)란 작은 보석함을 이르는 말로,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물건이다. '사회'와 '개인'은 예전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이 '카세트 효과'를 갖는 말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계속)-47쪽

(위에서 계속)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일본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이질적인 사상을 얘기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말의 뜻을 바꾸고, 또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의 현실 그 자체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방법이었다. 다루는 말이 하나하나 현실의 무게를 이끌고 있을 뿐 아니라, 네모난 말의 조립이 갖고 있는 '카세트 효과'를 빌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개인'이란 문자가 포함된 말을 아주 이른 시기부터 individual 또는 그것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했던 것은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society에 대해 초기에는 '교제'라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사용하다가 결국에는 '사회'라는 한자 조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들 '네모난 문자'와 함께 '카세트 효과'의 연역 논리도 등장했다. 그것은 이 시점에서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고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선각자가 일본어에 의한 독창적인 사고를 한계까지 추구하다가 결국은 현실과의 격투 끝에 좌절한 것이다.-47-51쪽

'근대'라는 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몇 번인가 이상할 정도로 그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다. 그 최초의 유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1910년 전후 메이지가 끝나갈 무렵으로, 특히 문예 분야의 사람들 사이에서였다. 문학사를 보면 이 즈음 혹은 그에 이어지는 한 시기에 '근대'라는 이름을 내건 논문이 만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최초의 유행을 계기로 '근대'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보급되었고, 드디어 사전에도 기왕의 modern의 번역어였던 '근세'와 나란히 기술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음 번의 유행은 이 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근대의 초극' 좌담회 무렵이었다. 태평양 전쟁 ㅇ중인 1942년이다. 앞의 유행에서는 '근대'는 플러스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동경의 대상이었던 데 반해 이 시기의 '근대'는 '초극'되어야만 할, 부정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다. 앞서 게재한 나카무라 미츠오의 발언에는 그러한 시류에 대항하여 고의로 반대의 가치를 강조할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아래에 계속)-70쪽

(위에서 계속)
나아가 다음 유행은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앞 시대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 시대의 '근대'는 일종의 긍정적 가치의 상징 자체였다. '근대 문학', '근대 시민 사회의 통과'론 등등의 무렵이다. 그 다음에는 결국 그 반동으로서 '근대주의' 비판이 온다. <중략>
말의 의미가 이 정도로 다의적인 것은 본래 그 말에는 의미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의미가 결핍돼 있기에 유행하고 남용되고, 그리고 유행하고 남용되기 때문에 다의적인 말이 된다.
이 '근대' 유행의 시대를 거쳐서, 드디어 역사학자들이 좋다 싫다라는 가치 부여 없이 이 말을 사용하면서 시대 구분 용어로서의 겉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결국 '근대'라는 말은 처음에는 현실의 의미 없이 단지 형태만으로 존재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하나하나 의미를 획득해갔던 것이다. 이것은 번역어의 의미 형성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70-72쪽

미시마 유키오가 '미'를 말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미'에 대해서 말할 때와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할 때이다. 그는 보통 평론풍의 짧은 글에서는 '미'에 대해서 말하며, 소설 작품 속에서는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이 중 우선 전자부터 보자.
미시마 유키오가 '미'에 대해서 말할 때는 거의 늘 경멸조의 부정적인 어투를 사용한다. (중략)그런데, 이 <킨카쿠지> 안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중략) '미'가 킨카쿠지와도 별개인 양 '나'에 대립하여 존재하면서 '나'의 앞에 나타나 '나'의 위에 군림하며 '나'를 이끌려고 한다. '미'는 여기서는 늘 저 멀리 있고, '나'는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보기만 하는 입장이다. 그 정체 그 자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것은 평론 등에서 '미'에 대해 말할 때 마치 별볼일 없는 것처럼 경멸조로 언급하던 '미'와는 딴판이다. (아래에 계속)
-86-88쪽

(위에서 계속)
이렇게 '미'를 말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은 분명히 의식적인 조작이다. 독자는 소설의 무대 위에 나타나는 '미'를 매우 중요한 무서운 그 어떤 존재라고 느끼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평론 등에서 경멸조로 '미'를 언급할 때는 마치 소설의 무대 뒤로 돌아가서 미의 딴 모습을 보여주는 척한다. 독자는 어느 쪽에서 보아도 '미'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뭔가 뜻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이 '미'라는 말의 트릭이 가능했던 것은 '미'라는 번역어가 일본어 속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작자 편한 대로 그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조작할 수 있었던 데 있다. -88-89쪽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보면 아서 예로 든 문장 조금 뒷부분에서는 이 je suis라는 것을 mon être라고 바꿔 말하고, 거기서부터 또 Être parfait (완전한 être, 즉 신)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suis의 명사형 être 쪽이 사고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또 이 être는 명사이면서 1인칭 단수형인 suis의 원형동사이기도 하다. 명사 중심으로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때로 동사 표현으로 말을 바꾸고 있다. 즉 명사 표현과 동사 표현 사이를 쉽게 왕복할 수 있다. (중략)
번역용 일본어인 '존재한다'는 동사이네, '존재'는 명사이다. 양자는 언뜻 보아 근원이 같은 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명사 '존재' 쪽이 먼저 있고 동사형은 여기에 하다(する)를 붙인 '하다' 동사이다. 명사 중심의 구성이란 점에서는 서구어보다도 철저하다. 서구 학술 용어의 번역에 딱 좋은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은 일본어 원래의 구조라기보다는 오랜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져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 계속)-122-123쪽

(위에서 계속)
그럼, 전래되어온 일본어 ある나 いる는 어떤가? 이미 서술한 ある뿐 아니라いる도 명사화하기 어렵다. (중략)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구 철학의 번역을 '존재'와 같은 한자 두 자의 표현을 중심으로 해온 데에는 실로 지당한 까닭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 번역용 일본어는 확실히 편리했다. 그러나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이 이점의 다른 면을 놓ㅊ서는 안 된다. 즉 한자 중심의 표현은 번역에는 이로웠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상 등의 분야에서 일본 고유의 야마토 말, 즉 전래의 일상어 표현을 잘라 버려왔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령 일본의 철학은 우리들의 일상에 살아 있는 의미를 포섭하지 못했다. 이것은 지금부터 350년쯤 전에 라틴어가 아니라 굳이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쓴 데카르트의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며,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래의 서구 철학의 기본적 태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123쪽

역사학자 츠다 소키치(1873~1961)는 (중략) '자유'라는 말이 사용된 오래된 예를 들고 있다. <후한서>에 붉은 눈썹의 도적들이 자신들이 옹립한 천자를 어린애 취급하여 "百事自由'로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일본의 예로는 <도연초>에 죠신소즈라는 중에 대해서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버릇이 있으며, 만사 자유로이 하고 다른 사람을 따른 ㄴ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유'라는 말에는 '제멋대로'라는 식의 용례가 많다. '자유'라는 말을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용례도 있는데 특히 선승(禪僧)의 경우에는 '자유 해탈' 등 얽매이지 않는 경지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170-171쪽

그렇다면 여러 가지 번역어 중 '자유'가 승리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쿠후 말기~메이지 초기에 '자유'와 경쟁하던 '자주', '자체', '불기', '관홍' 등은 적어도 나쁜 뜻의 어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자유'보다도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그 점은 한자, 한문 서적에 통달한 당시의 지식인들이라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번역어가 선택되고 남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자의 뜻으로 보아 가장 적절한 말이 남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번역어다운 말이 정착한다. 번역어는 모국어의 문맥 속에 들어온 이질적인 태생의, 이질적인 뜻의 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이질성이 그냥 남아 있는 것, 즉 어딘가 잘 모르는 구석이 있다든가, 어감이 어딘가 어긋난다든가 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 낫다. (중략)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고르는 것이 아니라, 소위 일본어라는 하나의 언어 구조가 저절로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어란 전래의 모국어로부터 보자면 구별된 말이다.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별의 표시를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말인 것이다.-177-178쪽

he나 she 등이 서구 문장에서 하는 역할은, 첫째 행위의 주체인 주어를 명확하게 해주는 구문상의 기능이다. 가로 문자의 글에서는 he나 she 등은 얼마든지 반복된다. 표시하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 필요 이전의 형식상의 요청이다. 즉 ㅈ서구인들은 3인칭대명사 등 인칭대명사가 많은 글에 친근감을 느낀다. 그 배후에는 늘 행위의 주체를 밝히고 책임자를 개체로서 포착하여 분명하게 해두고자 하는 사고 구조가 있다.
일본어로 쓴 글에 주어가 적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주어가 '생략'된다고 하는 견해는 본래 주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서구 문장을 모델로 삼은 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주어는 문맥상 알 수 있으면 특별히 필요할 때 이외에는 표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일본어에 더 잘 맞는 생각이다. (아래에 계속)-192쪽

(위에서 계속)
또 하나, 일본어에는 주어를 표시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한 예로, 일본어 고유의 '자발(自發)의 조동사'가 사용될 경우가 그렇다. 내가 이 책과 같은 글을 쓰면서, "...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쓰면 말한 것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하지만, "...라고 생각된다"라고 쓰면 왠지 책임이 경감되는 듯하여 약간 자신이 없을 때는 그만 이 표현을 쓰고 싶어진다. '생각된다'라는 표현을 쓰면 생각하는 주체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 일본인들은 '하다'가 아니라 '되다'라는 동사를 즐겨 쓴다. 회의석상에서 보고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하면 저항이 있지만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말하면 무난히 통과된다고 한다. 채소 가게 아저씨가 "싸졌습니다"라고 말할 때, "싸졌다"는 행위에는 당사자인 채소 가게 아저씨뿐 아니라 동업자도 손님도 얼마간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라고 생각된다"라고 쓰면, 그 내용은 필자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ㅏ 다른 논자도 독자도 얼마간 그 생각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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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1-09-2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어를 잘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이 있었다. 책을 읽으며 그의 의견에 크게 공감했다. 별 생각 없이 쓰던 단어들에 담겨 있는 고민의 깊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것이 무척 유감이다.
아울러, 요전에 <형이상학>을 읽으며, 역자의 고유어에 대한 집착이 크게 불편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자 번역어가 가진 고민의 무게를 반일 민족주의 구호 따위로 그리 쉽게 내버리는 데는 역시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데카르트가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썼다는 지적, 고유어로 철학할 때에 철학이 일상의 의미를 포섭할 수 있다는 말이 <형이상학>의 역자의 의도를 짐작하게 해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