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관련해 사건을 불문하고 근,현대사가들이 '만들어진 전통들'에 대해 갖는 한 가지 특정한 관심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그들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적 혁신물인 '민족'과 그것에 부수된 현상들, 예컨대 민족주의, 민족국가, 민족적 상징들, 민족사 등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역사적 새로움이 혁신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은 종종 의도적이고 항상 혁신적인 사회공학 (social engineering) 작업들에 의존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와 민족들은 유태인과 중동 이슬람 교도의 역사적 연속성이 무엇이건 상관 없이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그 지역에 존재하는 표준 유형의 영역국가라는 것 자체가 한 세기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1차 대전이 종결된 뒤에야 비로소 진지한 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수 엘리트보다는 좀 더 많은 주민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요 문자로도 쓰는 표준 국어 역시, 대개는 다양하지만 종종 짧은 역사를 갖는 구성물일 따름이다. (아래에 계속)-40-41쪽
(위에서 계속) 플랑드르 어를 연구한 어느 프랑스 역사가가 꽤 올바르게 관찰했듯이, 오늘날 벨기에에서 가르치는 플랑드르 어는 플랑드르 지역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말했던 그 언어가 아니다. 요컨대 그것은 문자 그대로 '모국어'가 아니라 단지 은유적으로만 '모국어'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미심쩍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역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근대 민족과 그것에 수반되는 일체의 부속물들은 일반적으로 새로움의 정반대, 즉 아주 먼 고대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구성된 것의 정반대, 즉 너무도 자명해서 더 이상 정의할 필요도 없는 '자연적인' 인간 공동체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 내적이든 역사 외적이든, '프랑스'와 '프랑스 인'이라는 근대적 개념에 묻혀 있는 연속성이 무엇이든 간에 - 누구도 이 개념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 바로 이 개념들 자체가 구성되거나 '발명된' 요소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아래에 계속) -41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근대 '민족'을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것 대부분이 그런 구성물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적합한 상징이나 혹은 알맞게 재단된 담론 ('민족사'와 같은)과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민족적 현상은 '전통의 발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 없이는 결코 적절하게 조사될 수 없는 것이-41쪽
잉글랜드화된 스코틀랜드 귀족, 오름세의 젠트리, 학식 있는 에딘버러의 법률가와 에버딘의 신중한 상인들, 즉 가난에 찌들지도 않고 돌과 늪을 넘어 다니거나 산에서 밤을 샐 일도 결코 없는 그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고지대 의복을 입고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과시한 것은 자기 계층의 전통적인 복장인 역사적인 홀태바지나 거추장스런 혁대 맨 어깨걸이가 아니라, 새로운 발명품인 짧은 치마 내지 짧은 킬트 중에서도 비싸고 장식이 많은 종류였다. (아래에 계속)-64쪽
(위에서 계속) 이러한 놀라운 변화는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일반적이고 전 유럽적인 것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낭만주의 운동, 즉 멸종 위기에 처한 고귀한 미개인에게 문명이 바치는 예찬이었다. 1745년 이전까지 고지대인들은 약탈을 일삼는 야만인들로 멸시받았다. 1745년에 그들은 위험한 반란군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746년 이후 그들의 특징적인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들에게는 원시인으로서의 낭만성과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로서의 매력이 결부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어시안은 쉽게 승리를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특수하고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것은 바로 영국 정부에 의한 고지대 연대 창설이었다. (아래에 계속)-64쪽
(위에서 계속) 고지대 연대의 창설은 1745년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실제로 최초의 고지대 연대인 블랙워치(Black Watch)는 제43연대 및 제42연대에 뒤이어 1745년 퐁트누아(Fontenoy)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1757년부터 1760년 사이에 노 피트(elder Pitt)는 고지대인들의 호전적 기질을 자코바이트의 위험으로부터 제국의 전쟁에로 체계적으로 돌리고자 했다. 그가 후에 주장했듯이 "나는 능력이 어디에 있든지 그것을 찾고자 했다. 감히 자랑하건데, 나는 최초로 북쪽의 산악지대에서 그것을 찾으려 했고 또한 찾았다. 나는 그것을 불러서 제국에 봉사할 강건하고 대담한 일족을 소환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64-65쪽
(위에서 계속) 이렇게 만들어진 고지대 연대들은 곧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들은 새로운 복장 전통도 세웠다. 1747년의 '무장해제법'에서 그들만이 유일하게 고지대 복장에 대한 금지령에서 예외였다. 따라서 켈트 농민들이 섹슨 족의 바지를 영구적으로 받아들이고 켈트 족의 호메로스조차 음유시인의 긴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던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지대 연대들만이 유일하게 격자무늬 천 직물업계를 살리고 모든 의복 가운데 가장 뒤늦게 만들어진 혁신물인 랭카셔 킬트를 영속시켰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65쪽
(위에서 계속) 본래 고지대 연대들의 군복은 혁대를 맨 어깨걸이였다. 그러나 킬트는 발명되자마자 그 편의성으로 말미암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결국 고지대 연대들도 킬트를 도입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들이 킬트를 군복으로 입기 시작하면서, 아마도 씨족별로 구분되는 격자무늬라는 개념이 탄생했을 것이다. 전쟁의 필요에 따라 고지대 연대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격자무늬 군복들도 구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민간인들도 다시 격자무늬를 입기 시작하고 낭만주의 운동이 씨족 숭배를 부추김으로써, 동일한 구분의 원칙이 연대에서 씨족으로 쉽게 전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장차 일어날 일이다. 일단은 잉글랜드의 퀘이커 산업가가 고안한 킬트가 잉글랜드의 제국주의 정치가(노 피트) 덕분에 소멸될 위기로부터 구제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65-66쪽
이 시기의 가장 흥미로운 특성 가운데 하나가 민족 영웅의 출현이다. (중략) 1770년 데인스 배링튼은 17세기 초 존 윈 경(Sir John Wynne)이 그웨더(Gwedir) 가문의 역사에 대해 기록한 문헌을 출판했다. 이 문헌은 그 몇 년 전 카트(Carte)가 자신의 잉글랜드 역사책을 낼 때 이미 인용한 바 있는데, 그는 그 문헌 가운데 1282년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음유시인들을 학살한 이야기를 인용했다. 토머스 그래이는 카트로부터 이 이야기를 차용하고 '눈 먼 패리'의 공연에서 영감을 받아 1757년 유명한 시 <음유시인(The Bard)>을 완성했다. 그래이는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여전히 웨일스 시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1282년의 음유시인들에게 후계자가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가? 어쨌든 카트의 이야기는 런던에서 모든 옛 웨일스 서적들이 불태워졌고 음유시인들이 유형을 당했다는 웨일스 전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것이었다. (아래에 계속)-166-168쪽
(위에서 계속) 1757년 이후에는 웨일스인 자신들이 그레이의 설명을 믿기 시작했고, 1760년대에는 에반 에반스와 같이 엄밀한 학자도 그레이를 상당히 인용했다. (중략) 1770년대와 1780년대에 이르면 그래이의 <음유시인>은 유명세를 얻어 이미 그 때부터 회화의 주제로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중략) 이 이야기 전체는 전설이거나 신화에 불과하다. 기껐해야 중세 잉글랜드 왕들이 예언을 통해 불화를 일으키는 웨일스 음유시인들을 때때로 제약하거나 통제했다는 사실을 심히 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래에 계속)-168-169쪽
(위에서 계속) 새로운 영웅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인물은 매덕(Madoc)이었다. 그는 주군 오웨인 과이니드의 아들로, 고향인 북부 웨일스의 반목에 낙담해 1170년경 자신의 배 '그웨난 곤' 호를 타고 미지의 서쪽 바다로 떠나 미국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웨일스로 돌아와서 동료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다시 항해에 나선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자손들은 인디언들과 결혼해 여전히 미 대륙의 서부 광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전설은 18세기에 기원한 것은 아니지만 튜터 왕조가 북아메리카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권을 공격할 때 처음 이용되었다. 웨일스에서는 200여년간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휴면 상태로 있다가, 1770년대에 미국 독립혁명으로 미국에 대한 웨일스 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었을 때 다시 생명력을 얻었다. 독립혁명 그 자체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신생 공화국 미국으로 이민 가 그 곳에서 웨일스 어가 통하는 식민지를 세우자는 강력한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래에 계속)-169-170쪽
매덕 신화는 런던의 목사이자 역사가이며 윌리엄스 도서관의 사서인 존 윌리엄스 박사(Dr. John Williams)가 1790년대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출판한 이후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런던의 웨일스 인들은 모두 열광했다. 이올로 모건이 매덕의 후손들이 살아 있고 웨일스 어를 사용하며 미국 중서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온갖 문서를 위조했기에, 윌리엄스 박사는 두 번째 책을 내야만 했다. '퍼그' 윌리엄 오웬은 탐험대를 조직하기 위해 '매덕 찾기(Madogeion)' 협회를 조직했고, 이올로는 자신이 탐험대장이 되겠다고 했다. 그는 원 포어의 존 에반스(John Evans of Waun Fawr)라는 진지한 젊은이가 탐험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며 나서자 무안해졌다. 이올로는 온갖 핑계를 대고 본국에 남았지만, 존 에반스는 미국을 향해 떠나 끝내 서부 황야에 이르렀다. 그는 스페인 왕에게 고용된 탐험가가 되었다. 여러 차례의 아슬아슬한 모험 끝에 만다 인디언들 (Mandan Indians, 그는 만다 인디언들이 매덕의 후예들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의 땅에 도달했지만, 그들이 웨일스 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0-172쪽
웨일스에서 문화적 부활 및 신화 만들기 운동은 웨일스적인 생활의 위기, 그러니까 민족의 생명력 자체가 소진되어 가고 있다고 느껴지던 상황에서 싹튼 것이다. 웨일스의 과거는 폐막되고 종료되었으며, 웨일스 인들은 '길고의 서에서 지워졌으니' 분수에 만족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적이고 이상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니 웨일스 동포들이 자기들 유산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려면 소수 애국자들의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ㅡ들 애국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며 즐기도록 해 주고 교육할 수 있는 새로운 '웨일스다움'을 창조하는 것, 그러기 위해 과거를 파헤치고 그것을 상상력으로 가공하는 일만이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다. 웨일스 인들은 이렇게 창조된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웨일스를 통해 자기들 바로 이전의 과거를 상실하는 대신, 예술과 문학에서 그것의 변형된 모습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 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196쪽
(위에서 계속) 여기서 우리가 묘사했던 예술적 가공들은 웨일스가 그렇게 어려운 역사적 전환기에 직면했을 때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중요한 치유의 기능을 수행했다. 웨일스적인 생활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고, 그렇게 변화를 겪는 가운데 우리가 묘사했던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낙마하자마자 새로운 신화 제작자들과 전통의 창조자들, 즉 급진적이고 비국교도적인 웨일스 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사냥꾼은 바뀌었지만, 사냥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196-197쪽
1817년 섭정 왕세자의 딸인 샬럿 공주의 장례식 때에는 장례식 지휘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 10년 후 요크 공작이 서거했을 때에는 윈저에 있는 예배당이 너무나 축축해서 대부분의 조문객들이 감기에 걸렸고, 캐닝(George Canning)은 류머티즘에 걸렸으며, 런던 주교는 심지어 사망했다. 조지 4세의 대관식은 약간의 인기를 회복하려는 절박하면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은 시도를 통해 가능한 한 장엄하도록 계획되었으나, 너무나 과장이 심해서 장엄함이 도리어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이다. -231쪽
그러나 영국 왕실의 공적인 이미지는 1870년과 1914년 사이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서투르고 개인적이며 호소력 또한 제한적이었던 왕실 기념식이, 화려하고 공적이며 대중적인 행사로 변모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군주들이 현실 정치에서 점차 물러났기에 촉진된 것이었다. (중략) 군주정의 실질적인 권력이 약화되면서 군주정이 장엄한 기념식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오히려 더욱 증가했다. (중략) 빅토리아 재위 마지막 10년간 그녀의 왕권은, "영국인들에게 지구 전역으로 진출할 것을 격려하는, 영국 인종의 상징"이 되었다. -236-242쪽
1926년의 총파업과 뒤이은 대공황은 전례 없는 규모의 적대감과 고통을 야기했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다라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개인적으로 존경할 만한 군주가 '어수선한 시대에 안정의 구심점'으로 그것도 매우 성공적으로 출현했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측면은 바로 왕실의 절제되고 고풍스런 기념비적 장엄함이었다. -265-266쪽
앵글로-인도의 문화체제에서 1857년과 1858년의 대반란은 결정적인 분수령으로 보일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에는) 단순한 방문이건 의무 과정이건 어쨌거나 인도를 여행하는 잉글랜드 인들을 위해 그 거대한 사건과 연루된 장소들-델리 리지(Delhi Ridge), 칸푸르의 메모리얼 웰(Memorial Well) 및 부활의 천사라는 거대한 대리석상으로 꾸며진 대정원, 럭나우 총독 대리 관저(Residency in Lucknow) [인용자주: 폭동 당시 영국군 진지, 영국인들이 학살당한 곳, 격전지 등] -을 방문하는 정규적인 대폭동 역사탐방 (Mutiny pilgrimage)이 있었다. 무덤과 기념물들, 기념석들과 그 위에 새겨진 비문 그리고 유럽 풍 교회 벽면의 현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순교와 희생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적어도 빅토리아 조의 잉글랜드 인들에게는 그들의 인도 지배를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만든, 궁극적인 군사적-군사외적 승리를 떠올리게 했다. (아래에 계속)-344-345쪽
(위에서 계속) 요컨대 대폭동은 1859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잉글랜드 인들에게 그들의 인도 지배를 정당화하는 중심적 가치 - 희생, 의무, 불굴의 의지-를 구현하고 표현하는 영웅 신화로 보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적절하게 구축된 권위와 질서를 위협한 인도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궁극적 승리를 상징했다.-345쪽
인도인들이 특히 민족운동 초기에 그들 자신의 조직들을 통해 그들 자신의 공적인 정치적 용례를 발전시켰을 때, 그들은 어떤 용례를 사용했던가? 나는 그들이 실제 자신들의 전임, 곧 영국 지배자들이 체택했던 것과 똑같은 용례를 사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전 인도 회의 평의회들(All India Congress Committes)의 초창기 회합들은 그 행사나 주요 인물 및 그들의 연설을 보건대 알현식과 매우 흡사하다. 그들 역시 그런 수단을 통해 '진보적 통치'의 가치들을 달성하고 인도인들의 행복과 복지를 구하려고 한 것이다. 영국식 용례는 초기 국면의 민족주의 운동의 담론에 어휘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초기 민족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인도제국의 진정한 목표에 대해 영국 지배자들보다 훨씬 더 충실하다고 주장했다.-390-391쪽
유럽의 만들어진 전통들은 식민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인들에게 잘 규정된 일련의 준거점들을 제공했다. 비록 거의 모든 경우가 인간관계 및 주종관계에서 종속적인 역할로 진입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프리카 인들은 그 전통들을 통해 이러저러한 유럽의 신-전통주의적 행동 양식을 받아들여 사회화되기 시작했다. 확실히 역사문헌을 보면, 부대의 병사가 되는 일이나 19세기 국교회 의식을 행하는 법을 배우는 일을 자랑스레 여기는 아프리카 인들로 빼곡하다. 그런 과정들은 종종 식민권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귀결되기도 했는데, 이는 사회화의 도구로서 신-전통들 자체에 잠복해 있는 위험이었다.-428쪽
국가는 점차 '시민적 신분'이라는 존재를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것을 정의했다. 물론 국가가 그런 종류의 유일한 무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시민생활에서 차지하는 국가라는 존재, 그것이 시민생활에 부과하는 한계들과 그것이 시민생활에 대해 정례화시킨 규제적 개입은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선진국들에서는 '민족 경제'(국가 경제? - 인용자주), 곧 국가 영토나 그 하위 영토에 의해 규정된 국가 영역이 경제 발전의 기본 단위였다. 국가의 경계 안에서, 혹은 국가의 정책 속에서 일어난 변화는 시민들에게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물질적 결과물들을 가져다주었다.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행정과 법률의 표준화, 그 중에서도 특히 공교육은 사람들을 특정한 나라의 시민들로 변형시켰다. (중략) 이와 똑같은 이유로 공식적인 지배자들이나 지배집단들의 전망이라는 견지, 즉 위에서 봤을 때, 국가가 어떻게 신민들이 성원들의 복종과 충성과 협력을 확보하고 유치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야만 그들의 눈에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 없는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497-498쪽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혁신들을 비교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둘 다 새로운 체제가 건국되는 계기들로서, 가령 프랑스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명백한 일화(바스티유 함락)를 통해 프랑스 혁명을, 그 반면에 독일은 보불전쟁을 강조했다. 독일제국이 역사적 회고에 정도 이상으로 집착했다면, 프랑스 공화국은 혁명이라는 역사적 준거점을 제외하면 정도 이상으로 역사적 회고를 꺼렸다. 대혁명이 프랑스 국민과 그 애국주의의 존재와 성격과 한계들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화국은 마리안느, 삼색기, <라 마르세예즈> 등과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상징들을 통해, 또 이따금씩 자유, 평등, 우애라는 분명한 이론적 혜택을 (최하층 시민들에게까지도) 베푸는 가운데 정교화된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으로 그런 상징들을 보완하면서, 프랑스 국민과 그 애국주의를 시민들에게 주입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었다. (아래에 계속)-521-522쪽
(위에서 계속) 그 반면에 1871년 이전의 '독일인'은 어떤 정치적 규정이나 통일성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새로운 제국(독일인의 많은 부분을 배제해 버린)과 맺는 관계도 모호했다. 그러니 상징적이건 이데올로기적이건 일체화 과정은 더욱 복잡했을뿐더러-호엔촐러른 왕조와 군대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제외하면- 정교한 맛도 떨어졌다. 이로부터 신화와 민속(독일 오크, 황제 프리드리히 바라바롯사)으로 시작해서 뻔한 유형의 조야한 만화를 거쳐 민족의 주적을 규명함으로써 민족을 정의하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준거점도 가지가지였다. 다른 많은 해방된 '민족'의 경우에 그렇듯이, '독일'을 가장 쉽게 정의하는 방법은 무엇보다 그것이 무엇에 적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아래에 계속) -522쪽
(위에서 계속) 바로 그 점이 독일 제국의 '만들어진 전통들'에 내재하는 명백한 틈새를 설명해줄 것이다. 가령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타협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극명한 사례다. 빌헬름 2세가 처음에 '사회 문제에 정통한 황제(social emperor)로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사민당을 금지하는 비스마르크 고유의 정책과도 분명한 거리를 두었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반민족 운동('조국 없는 무리')으로 간주하려는 충동은 뿌리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고,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예컨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그러했던 것보다 더 체계적으로 국가업무에서 배제되어 갔다. (중략) 독일 제국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그보다는 덜하지만 유태인들을 내부의 적들로 선택함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이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이점을 누리기도 했다. 즉,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유태인)와 프롤레타이아적 사회주의(사회민주당) 모두에 대항하는 데마고그적 호소력을 제공함으로써 그 두 가지 모두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느끼던 하층 중간계급과 수공업 장인들, 농민들 거대 다수를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522-523쪽
원래 축구는 사립학교 출신 중간계급들에 의해 동호인(아마추어) 스포츠 및 인성 계발 스포츠로서 발전했는데, 급속히 (1885년 경) 프롤레타이아화 되고 따라서 프로화되었다. 상징적인 분기점 -계급 적대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은, 1883년 올드 애토이언즈(Old Etonians)가 볼튼 올림픽(Bolton Olympic)에게 패했을 때였다. 프로화가 진행되면서, 전국적 차원의 엘리트 계층에서 충원된 박애주의자들이나 도덕론자들이 축구 클럽의 경영권을 지방 사업가나 기타 유지들의 수중에 넘기면서 철수했다. 새로운 주인공들은 더 높은 임금 수준과 퇴직하기 전에 횡재할 기회(수익 사업 시합들), 무엇보다 명성을 날릴 기회에 이끌려 축구산업으로 유인된 압도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노동력의 사용자들로서, 산업 자본주의에 고유한 계급관계를 기묘하게 희화화시켰다.-539-540쪽
그럼에도 혈통이라는 귀족적 기준 그 자체는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새로운 상층 중간계급 엘리트들을 정의하는 데에도 응용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90년대 미국에서는 족보에 대한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여성적인 관심사였다. 가령, '미국혁명의 딸들(Daughters of America Revolution)이 결성되어 번창했던 반면에, 그보다 약간 먼저 결성된 '미국 혁명의 아들들'은 시들해졌다. 비록 DAR이 겉으로 내건 목표는 토박이 백인 프로테스탄트 미국인들을 새로운 이민자 대중과 구별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상의 목표는 백인 중간계급에서 배타적인 상층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DAR은 대부분 '뼈대 있는' 돈이 모여 있는 요지들-코네티컷, 뉴욕, 펜실베니아-에서, 그러나 역시 시카고의 졸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어 1900년이면 그 회원이 3만이 넘었다.-544-545쪽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예외로 하면 국제 스포츠에서는 아마추어리즘-다시 말해서 중간계급 스포츠-이 지배적이었다. (중략) 그런 만큼 외국과의 경기를 통해 이렇게 민족적 일체감을 확보하는 것은 적어도 윌가 살피는 시기[1870~1914. 인용자주]에서만큼은 일차적으로 중간계급적 현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은 그 자체 의미심장한 사실일 수 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이미 살폈듯이, 가장 넓은 의미로의 중간계급들은 주체적인 집단적 일체성을 느끼는 데 특별히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예컨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온 사람 대부분을 묶어주는 전국적 규모의 클럽에서 사실상의 회원 자격을 정할 정도로 충분히 작은 소수파도 아니었을 뿐더러, 노동자들처럼 공동의 운명과 잠재적 연대성으로 충분히 묶여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계급들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분리된 거주지에 살았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상한' 생활양식과 가치들, 또 스포츠의 아마추어리즘을 엄격하게 고수함으로써 스스로와 하위층을 분리시키는 것이 쉽다고 느꼈다. (아래에 계속)-558-559쪽
(위에서 계속)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중간계급들은 외부적 상징들을 통해 소속감을 확립하는 게 한층 쉽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상징들 중에서도 특히 민족주의적 상징들(애국주의나 제국주의)이 아마도 가장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새롭게 올라서고 있던 중간계급으로서는 자신들을 애국주의의 중핵 계급으로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가장 쉽게 느꼇을 법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559쪽
'만들어진 전통들'에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기능들이 있는데, 만일 그런 기능들이 없다면 아마도 '만들어진 전통들'은 나타나지도 않았거니와 확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얼마만큼 조작될 수 있었는가? 조작을 위해 그런 전통들을 사용하고 실제 발명해내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정치에서든 그보다 먼저 사업에서든,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그런 만큼 그와 같은 조작이 존재하며 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음모이론의 신봉자들은 그 나름대로 그럴듯한 증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런 조작들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때는 특정 집단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관행들을 이용했을 때라는 점 역시 분명해 보인다. (중략) 그것들은 이용되거나 창출되기 전에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돌이켜 재발견하는 일이 역사가의 몫이다. 물론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처한 변화하는 사회의 견지에서 왜 그런 필요들이 절실해졌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일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566-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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